먼지를 털어주며


친구끼리 애인끼리
혹은 부모자식 간에 헤어지기 전
잠시 멈칫대며 옷깃이나 등의 먼지를 털어주는 척하는
일이 중요한 것은, 먼지가 정말 털려서가 아니라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손길에 온기나 부드러움,
사랑하는 이의 뒷모습까지 아름답기를 바라는
착한 마음을 실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런지요.


- 박완서의《호미》중에서 -  (오늘아침 고도원의 편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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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교복을 입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서면 엄마는 꼭 골목 어귀까지 나와서 옷주름을 잡아주고 치맛단을 털어주고 깃을 바로 잡아주곤 하셨다. 집에서 거울을 보고 충분히 매만지고 바로 입고 나와서 더이상 손 댈 곳이 없는데도 뭐가 그리 까탈스러우신지, 나는 귀찮아하고 짜증스럽게 반응하기도 했다. 돌아서 걸어가도 엄마는 한참 뒤에 서 계시다 저만치 가고 있는 나를 부르며 달려오신다. 치마가 비뚤하다느니, 엉덩이에 뭐가 묻었다느니, 다시 한번 매무새를 고쳐주시곤 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뒤에서 말로 계속 매무새를 다듬고 계셨다.

대학생이 되어서 교복은 벗었고 퍼머도 하고 화장도 살짝 하게 되었다. 엄마는 내가 미장원에 갔다 온 날이면 한번도 예쁘게 나왔다고 기분 좋게 말해 주신 적이 없다. 앞머리가 이상하게 잘렸다느니 뒷머리가 안 예쁘다느니 트집을 잡아서 그러지 않아도 마음에 흡족하지 못해 속상해 있는 내 속에 불을 지르곤 하셨다. 아침마다 내가 입고 나서는 옷을 매만지고 털고 불고 하시는 엄마의 행동은 계속되었다. 옷이 비뚤어졌다느니 그건 안 어울린다느니 색깔이 아래위로 안 맞다느니 하시며 여전히 즐기듯 그러셨다.

졸업 후 취업을 하고 울소재의 투피스를 하나 샀는데 감색의 허리가 잘록한 상하의에 칼라는 흰색 레이스가 달려 탈부착이 가능한 옷이었다. 내 몸에 잘 맞고 편해서 좋아했던 옷인데 그게 어느날 얼룩도 생겨있고 바짝 줄어있는 거다. 어떻게 된 일인가 했더니 엄마는 그걸 손세탁 하셨단다. 드라이클리닝 해야하는 걸 몰라서는 아니었던 것 같고 알뜰살뜰한 엄마는 그저 드라이클리닝 하는 돈을 아껴 볼 심산으로 집에서 빨았던 게다. 아,  엄마는 투덜거리는 내 볼멘소리를 뒤로 하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그리 될 줄 알았나 이러시며 못 들은 척 다른 일만 하셨던 기억이 난다. 웅크린 등과 어깨만 잔상이 되었다.

이제 엄마는 내 머리가 이상하다는 말씀도 하지 않고 옷매무새를 털고 불고 해 주시지도 않는다. 엄마의 손길이 필요없어진 나는 엄마가 입은 옷을 간섭하고 코치하고, 숱이 없어 머리 모양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고 불만스러워하시는 엄마의 머리카락을 안쓰러워한다.

털어주고 불어주고 매만져주시던 그 손길의 정체를 이제야 알겠다. 나는 똑같이 내 아이들에게 그 손길을 놀리고 있다. 아침마다 교복을 단정히 입고 나가는 큰딸의 뒷모습에서 난 눈을 떼지 못하고 치맛단을 털어주고 싶은 게다. 어깨에 맨 가방끈도 상의가 구겨지지 않게 바로 펴주고 싶은 게다. 편한 반바지에 헐렁한 티셔츠를 좋아하는 작은딸의 머리를 묶어주고 옷을 다 입고 나면 꼭 이곳저곳 살펴보고 손으로 쓸어주곤 한다. 양복을 입고 어울리는 넥타이를 골라 매고 나가는 옆지기의 뒷모습, 헐렁한 양복 뒷자락을 한 번 털고 만져서 펴주고 싶은 게다. 먼지가 있어서, 머리카락이 묻어서는 다 핑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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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6-13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의 글을 아침에 읽으며 마음이 서늘해집니다.
제가 한부 제 서재로 옮겨갑니다.
좋은 글. 추천!!!


비로그인 2007-06-13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2.0에서는 '퍼가기'기능이 없어지고 '찜하기'기능으로 대체될 거라하는데 그리되면
배혜경님의 상기 글이 알라딘 이웃서재의 마지막 '퍼가기'글이 될 듯 싶습니다.하하


무스탕 2007-06-13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그런 시절이 있었어요.. 엄마가 계속 매만져 주던 시절..
이젠 제 그러네요. 아침에 애들 학교 갈때 가방끈 잡아주고 티셔츠 잘 펴주고..
엄마가 돼서야 알아챈 엄마맘이에요..

프레이야 2007-06-13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 상쾌한 아침에 참 반가운 방문입니다. 새 서재에선 그리 되나요?
컴맹인 저는 적응하려면 한동안 걸리겠습니다.^^
마지막 퍼가기 라시니 더욱 감사합니다.

무스탕님, 참 피곤하게 사신다 싶었던 엄마의 습관들이 제가 그 나이가 되어보니
모두 이해된답니다. 참 늦게 깨닫는 것 같아요. 그죠?
오늘도 화창한 하루 보내시기 바래요.^^

비로그인 2007-06-13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사이에 글 일부를 다듬으셨군요.. 다시 스크랩해 갑니다.
"털어주고 불어주고 매만져주시던 그 손길의 정체를 이제야"
공감합니다. 배혜경님..


fallin 2007-06-13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누군가가 저의.. 또 제가 누군가의 어깨를 괜시리 툭툭 털어내는 때가 있죠. 의식하진 않았지만..이런 맘이였나 봅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이에요^^

비로그인 2007-06-13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뜻한 옥수수 스프를 마신 느낌입니다.

달팽이 2007-06-13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마치 오래된 시골집의 아랫목 같이 여겨집니다.
황폐한 마음의 겨울날, 조용히 손을 녹이고 갑니다.
혜경님. 글이 참 좋습니다.

2007-06-13 0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6-13 1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홍수맘 2007-06-13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너무 좋아요. 생각해보면 어깨의 먼지를 툭툭 터는 행위는 바로 사랑이었네요. ^ ^.

프레이야 2007-06-13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 조금 고치고 나서 다시 가져가십사 말씀드리려다 번거로우실 것 같아
그냥 있었는데... 잘 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fallin님, 저도 누군가에게 손길을 보내고 싶은 경우가 있죠. 유독 정을 주고
싶은 사람에게는 손이 먼저 나가는 것 같아요.

엘신님, 옥수수 스프도 다음에 포도맛 아이스크림에 추가 해두세요 ^^

달팽이님, 왜 그러세요. 늘 평정심을 잃지 않아 보이는데, 황폐하시다니
마음 쓰입니다.

속삭인ㅅ님, 에공 부끄.. 그래도 이쁘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동안
여러번 했는데 이제 보셨군요. 신비주의 할 것도 없다싶으니까요..

속삭인 ㅎ님, 엄마는 영원히 엄마에요. 어머니라고 굳이 부르고 싶지 않지요.
그죠.. 님도 엄마생각 나셨군요. 전 살아계시니 님보다 행복하다 싶네요.
엄마, 보고 싶다는 말씀에 짠해져요..

홍수맘님, 네 그런 거였어요. 애정의 표현이요^^

혜덕화 2007-06-13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나면 행복해 지는 글입니다. 마음이 얼굴에 나타나는 것, 정말 맞는 것 같앋요.

마노아 2007-06-13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추억이, 사랑이 묻어있는 글입니다. 고스란히 제 가슴에도 옮겨 놓을게요. ^^

프레이야 2007-06-13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덕화님, 오늘 하루 평안하셨는지요. 지금 밖엔 빗방울이 가늘게 내리네요.

마노아님, 엄마와 어머닌 좀 다른 것 같아요. 제가 할머니가 되어도
엄마라고 부를거에요. 아버지에게도 아빠라고 부르구요.
사랑스런 댓글, 제 가슴에 남습니다.^^

비로그인 2007-06-14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새 서재 너무 이쁩니다. ^^ 따뜻한 깨끗함. 혜경님답습니다. (웃음)

프레이야 2007-06-14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엘신님, 헤헤 고맙습니다.^^
알아서 단장도 해주고 완벽한 포장이사도 해주고 알라딘도 고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