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마중 - 유년동화
김동성 그림, 이태준 글 / 한길사 / 200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조바위(여자가 쓰는 것이긴 하지만) 쓰고 검정 고무신에 저고리 고름 질끈 한쪽으로 묶은 아가. 둥글넙적한 얼굴에 펑퍼짐한 콧잔등, 옴팍 패인 검정콩 만한 두 눈 그리고 앙다문 조그마한 입. 그림책의 주인공이다. 네살 정도나 되었을까. 아가의 양볼과 콧끝이 새빨개져선 얼어있다. 날씨가 무척 차가운가 보다. 그래도 솜바지가 넉넉해 보인다.

이태준은 30년대에 동화와 유년동화를 많이 썼고 경성 보육 학교에서 동화쓰는 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 그림책에 담긴 글은 1938년 간행된 '조선아동문학전집'을 원전으로 하였다고 한다. 이태준 문장의 간결함과 섬세함, 진한 인간애가 이 짧은 글 속에서도 잘 나타난다. 게다가 김동성 화가의 그림이 넘치지 않는 조화를 이루어낸다.

아마도 장사 나간 엄마를 혼자서 기다리던 아가는 엄마가 돌아올 시각 쯤에 집을 나선다. 엄마는 분명 꼼짝 말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신신당부를 했을 텐데. 속지를 넘기면 기와지붕집들이 나즈막하고도 빽빽히 들어선 마을의 하늘 위로 전봇대의 전선이 이리저리 금을 긋고 있다. 어느집 장독대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크고 작은 장독들도 보이고 좁은 골목길엔 가로등이 기우뚱 매달려 있다. 전선에 닿을 듯 말 듯 마른나뭇가지들이 하늘로 뻗어있고 뛰놀던 아이들도 모두 집에 들어가 저녁밥을 먹는지, 마을은 온통 고요함게 젖어있다. 한 장을 넘기면 우리의 '아가'가 아장아장 걸어간다. '엄마마중' 가는 길이다.

보는이의 시선이 아가의 종종걸음을 따라 횡으로 간다. 누르스름한 바탕에 간결하면서도 힘있는 선으로 그려놓은 그림이 마치 박수근의 그림을 연상하게 한다. 세심한 동양화풍의 그림으로 유명한 김동성님의 그림이 작가의 소박한 글과 잘 어울린다. 전차를 기다리는 곳으로 '낑'하고 올라서는 아가의 엉덩이에 잔뜩 힘이 들어가 높은 곳으로 오르려는 작은 몸통의 움직임이 살아있다. 아가의 짧은 다리로는 좀 높은 안전지대인가 보다. 낑낑대는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이 그림책의 미덕은 간결하게 절제되어있는 글 속에 다 드러나지 않은 아가의 심리와 안타까운 마음을, 그림이 자세하게 읽어내어 표현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전차정류소에서 엄마가 타고 내릴 전차를 기다리며 땅에 금을 긋고 있는 아가, 전차가 올 때마다 갸웃하고 차장더러 "우리 엄마 안 와요?" 하고 묻는 조바심 난 아가, 전차정류소 팻말 기둥에 매달려 지루해죽겠다는 듯 몸을 당기고 있는 아가, '땡땡' 하면서 지나가버리는 전차의 꽁무니를 빤히 쳐다보며 섭섭해하는 아가의 모습 같은 데서, 조림국물이 졸아들듯 바짝바짝 타는 아가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거리에 어둠이 희뿌옇게 내리기 시작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발걸음을 재촉하는 시간, 아가는 세상에 뎅그러니 홀로 남은 기분이다. '코만 새빨개서 가만히 서 있' 다. 오동통하니 홍시처럼 붉은 볼, 터질듯한 옆모습이 불쌍하다기보다 어쩜 그리 예쁜지.

눈오는 해거름의 하늘, 무슨 색일까, 얼른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그림책에서 화가는 의외의, 노란연두빛으로 세상을 채색했다. 어쩌면 이 해 겨울 아가가 맞는 첫눈인지도 모른다. 눈송이가 퍼져있는 노란연두 하늘의 색감이 너무 고와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그 하늘을 올려다보는 아가의 눈에 눈송이보다 몇배는 더 기다려지는 엄마의 얼굴이 고이는 것 같다. 온세상이 금세 눈천지가 되었다. 마을 기와지붕 위에도 소복히 눈이 쌓이고 아가의 두볼과 코는 더 새빨개졌지만 세번째 전차차장 아저씨가 시킨 대로 자리를 뜨지 않고 그대로 서서 엄마를 기다린다. 마지막 장면(뒤속지)의 그 아름답고 포근한 풍경이란!  김동성의 풍경은 언제나 엄마품처럼 넓고 온기가 있다. 아가는 엄마의 손에 매달려 좁은 골목길 낮은 돌계단을 올라가고 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도시의 산동네 쯤에 사는 아가와 엄마는 뽀드득 눈을 밟으며 따뜻한 아랫목이 기다리는 집으로 가고 있다.

아가의 오른손에 무언가가 쥐어져있다. 짧은 막대에 빨간 물체가 달려있는데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무엇일까. 오래도록 추운 데서 엄마를 기다린 착한 아가의 손에 엄마가 쥐어 준 선물이 궁금하다. 아가를 내려다보는 젊은 엄마의 뒷태와 옆모습이 곱디곱다. 엄마를 만난 아가가 더 행복할까? 마중 나온 아가의 고사리손을 잡고 걷는 엄마가 더 행복할까?  아가의 손을 잡고 걸어본 사람이라면 알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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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1-04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춤****님 고마워요. 마음이 참 맑아지는 그림책이에요^^
아가의 얼굴이 어찌 사랑스러운지요.

밥헬퍼 2007-01-04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람되지만, 예전에 제가 이 글 원문을 하나 올려놓은 것이 있는데요. 여기에 덧붙여도 되겠지요? 제가 아주 감명깊게 읽었던 동화거든요. 다시한번 읽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

어린이창비 2003.가을 통권3호 188쪽/"권희선,이태준 동화에 나타난 아이와 엄마의 관계"

엄마 마중
이 태 준
추워서 코가 새빨간 아가가 아장아장 전차 정류장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낑 하고 안전지대에 올라섰습니다.
이내 전차가 왔습니다. 아가는 갸웃하고 차장더러 물었습니다.
"우리 엄마 안 오?"
"너희 엄마를 내가 아니?"
하고 차장은 '땡땡'하면서 지나갔습니다.
또 전차가 왔습니다. 아가는 또 갸웃하고 차장더러 물었습니다.
"우리 엄마 안 오?"
"너희 엄마를 내가 아니?"
하고 이 차장도 '땡땡'하면서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 전차가 또 왔습니다. 아가는 또 갸웃하고 차장더러 물었습니다.
"우리 엄마 안 오?"
"오! 엄마를 기다리는 아가구나."
하고 이번 차장은 내려와서
"다칠라. 너희 엄마 오시도록 한 군데만 가만히 섰거라. 응?"
하고 갔습니다.
아가는 바람이 불어도 꼼짝 안 하고, 전차가 와도 다시는 묻지도 않고, 코만 새빨개서 가만히 서 있습니다.
출전:조선아동문학전집(조선일보사, 1938)

씩씩하니 2007-01-04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참 감동적으로 가슴 찡하니 읽었드랬어요...요 책 얘기하다가 친구랑,,아주 심오한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새삼 떠오르네요~

프레이야 2007-01-04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밥헬퍼님/ 원문 감사합니다. 세번째 차장의 따스한 마음도 찡해요^^
새해에도 좋은 글 많이 올려주세요^^

씩씩하니님/ 아가와 엄마, 심오한 대화가 궁금해지네요^^

춤추는인생. 2007-01-04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 이런 멋진 리뷰 써주실것만 같았어요... 차마 실력없는 제가 글로 쓰지 못한말들을 님께서 다 해주시다니... 감사해요.님.^^

프레이야 2007-01-06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 흘끗 보고 넘기기엔 뭔가 아까운 그림책, 맞아요.
이런 그림책을 안겨주신 *****님이 고맙지 뭐랍니까.^^

춤추는인생님/ 고마워요^^

향기로운 2007-01-09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고는 너무 좋아서 리뷰를 꼭 쓰고 싶었는데.. 책 자체가 워낙 글도 적은데다 그림이 주는 감동이 더해서 그냥 멍해 있었는데..^^ 배혜경님의 리뷰를 보니 그 감동이 다시 새록새록 느껴지네요^^ 근데, 엄마 마음과 달리 우리 애기들은 한 번 읽고는 무심하네요. 자주자주 보면 좋겠는데.. 요즘 만화삼매경에 빠진 것 같아요... 에휴~^^;;

프레이야 2007-01-09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향기로운님/ 아가들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네요. 아이들은 눈을 확 사로잡는 그림이나 솔깃해지는 글귀가 아니면 좀 심드렁한 것 같아요. 그래서 전 이 수수하고 소박한그림책, 아가보다는 엄마가 보면 더 좋아할 것 같더군요. ^-^

2007-01-15 14: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마천 2007-01-18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책의 감성이 잘 전달되는 좋은 리뷰입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남겨주시기를

뽀송이 2007-01-18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리뷰를 따라 놀러 왔어요~^^
혜경님의...
"이 그림책의 미덕은 간결하게 절제되어있는 글 속에 다 드러나지 않은 아가의 심리와 안타까운 마음을, 그림이 자세하게 읽어내어 표현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라는 감상평이 마음에 와 닿네요~^^*
좋은 리뷰 계속~ 기대할께요~^.~

프레이야 2007-01-18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마천님/ 늘 감사합니다.^^
뽀송이님/ 추천리뷰였던가요? ^^ 고맙습니다...

네꼬 2007-01-25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 또 보아도 좋은 그림책이 있지요. 오랫동안 제 책상 위에 두고 보고 또 보았던 책이네요. ((댓글을 따라 슬쩍 넘어와 봤더니, 아니, 이렇게 재미난 책들이!!))

프레이야 2007-01-25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주고양이님/ 이미 여러번 보셨군요. 전 이번에 첨 봤어요. 좋은 분의 선물로요.
이런 그림책 보면 단순하고 간결한 글과 깨끗한 그림이 마음을 순화해 주어요.^^

최상철 2007-02-15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책이 때로는 말로 표현되지 않은 감동을 선사해주는데요.
이 책 역시 저도 그런 감동을 많이 맛보았답니다. ^^

프레이야 2007-02-15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철님, 반갑습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동 맞아요. 기쁘고 맑은 기운..

readersu 2007-02-26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2년전인가 출판단지에서 하는 책잔치에 한길사 갔다가 조카 사주고 읽으면서 어찌나 좋았던지...지난 주에 다시 읽고선 리뷰를 써 볼까 했는데..배혜경님의 리뷰를 보니..와우~ 전 포기하렵니다.하하..멋진 리뷰 잘 읽었습니다.^^

프레이야 2007-02-26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readersu님/ 2년전에 보셨군요. 참 좋은 책이에요.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