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태어나는 곳

 

아사부키 마리코 : 존 케이지가 딱 맞는 말을 했기 때문에 그 말을 빌리겠습니다. 그는 음악을 만들 때 소리라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고 있고, 작곡할 때는 소리를 채집하러 가는 느낌이 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말로 바꿔서 설명하면 말은 소리와 달리 처음부터는 존재하지 않잖아요. 이게 소리와 말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인간이 바깥 세계로부터 느끼는 것은 말과는 동떨어진, 무질서한 감정 같은 게 아닐까 해요. 그리고 말이라는 것은 다른 것과 쉽게 동기되지 않고, 끊임없이 엇나갑니다. 간혹 절묘하게 딱 맞는 표현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것은 한순간일 뿐이죠. 지금 여기서 계속 쓰는 것, 이것이 말에 있어 최초의 기점이자 최후의 기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사키 : 무함마드가 목소리를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로 골치 아픈 말을 합니다. “앞으로 너에게 신의 말을 할테니 읽어라라는 말을 한 거죠. 하지만 무함마드는 움미ummi’입니다. 움미라는 말에는 어머니같은글을 못 읽는, 문맹의라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무함마드는 글을 읽지 못하는’ ‘어머니인 거죠. 그래서 지브릴이 읽어라라고 말했던 경전 꾸란의 원본책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게다가 무함마드는 고아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어요. ‘근원이 되는 고아와 절대적인 어머니 같은 책의 관계 속에서 탄생하는 겁니다.

 

저는 자크 데리다라는 철학자에게 좀 따질 게 있습니다. 그는 언어와 언어 바깥이라는 기존의 도식을 최종적으로 극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거든요. 헤겔을 비판하고 있지만, 언어와 언어 바깥을 설정한 후에 이 두 항이 변증법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사고방식에서 결국엔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언어 바깥이야말로 언어를 언어이게 하고, 언어가 생성되는 곳은 언어 바깥이다. 언어 바깥은 아마도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형태가 아니라 어쩌면 언어의 내부라고 생각해온 쪽에 존재하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액체에 비유해서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어요. “언어란 언어 바깥이라는 물로 얼룩진 몸을 가지고 있다,” 어쨌든 언어와 언어 바깥을 구분하고 이 둘을 분리시키거나 연결짓는 사고 방식은 좋은 결론에 이르지 못합니다.

 

언어와 언어 바깥을 설정한 후에 언어 외부가 언어 내부에 회수되어 갑니다. 언어가 되지 않는 그 무엇이 점점 사라져갑니다. 모든 것이 언어로 이해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 변해갑니다. 이것이 변증법의 과정이고 이것이 진행되면 헤겔에 따르면 이 과정 자체가 신의 나라로 향하는 역사 자체가 되는데요 언젠가는 역사가 끝나게 됩니다. 마지막에는 모든 것이 언어로, 의미로 회수되고 절대지라는 것이 우뚝 솟아 종교나 예술은 폐기된다. 모든 것이 이성이 된다. 헤겔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역사가 끝나고, 예술이 끝난다. 종교도 끝난다. 그야말로 종말의 철학자고 예술의 종언을 선언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매일 여러분도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그리스도교 유럽이라는 하나의 운동이 얼마나 특수한 것인지, 그것이 왜 그리고 어떻게 보편화되고 지구화되어갔는지 이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고자 한다면 지금도 헤겔을 읽는 것이 지름길입니다.


아사부키 씨가 말씀하신 더듬기도 중요합니다. 들뢰즈도 문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문체란 모어 속에서 더듬는 것이다.” 물론 필연성 있는 더듬기여야 한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프루스트의 아름다운 책은 일종의 외국어로 쓰여 있다라는 문구를 인용하고 있죠. 작가는 모어 속에서 더듬고 끝내는 외국어처럼 된 언어를 쓰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아사부키 : 점균이 가장 빛날 때는 빈사상태에 있을 때입니다만 말도 그렇습니다. 말은 항상 최후에 존재합니다. 그리고 말이라는 것은 안녕?”이라는 인사말 하나만 봐도 의미가 난반사하죠. 여러 곳에서 그물망 형태로 접속해 의미가 수없이 증가합니다.

 

말은 결국 부싯돌과 같아서 불이 진짜 말 혹은 이미지 자체라고 생각해요. 혹은 음성 자체라고 해도 되고요. 말로서의 부싯돌이 탁 하고 울릴 때, 그 부싯돌이 내포하고 있던 이미지가 불이 되어 여기에 도래하죠. 소설을 읽을 때도 말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말에 담긴 이미지를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말은 공간도 시간도 갖고 있어 매우 재미있기 때문에 이를 이용해서 만듭니다. 말을 전하고 싶은 게 아니라 말에 담긴 이미지를 당신이라는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거죠. 눈으로 읽는 순간, 당신만의 것으로 생성되기를 기도하고 있다고나 할까, 말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랄까요?

 

안도 : 무스비는 낳다라고 씁니다. 모토오리 노리나가가 <고자키> 첫 머리에서 추출한 신들의 근원, 세계의 근원에 위치하는 힘이죠. 하지만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노리나가는 무스비무스는 이끼가 생기는 것처럼 태어나, 거기에서 곰팡이가 피듯 성장하는 이라고 말합니다. ‘근원적인발생 장소에 이끼처럼 생겨나 곰팡이처럼 피어나는 신들, 구마구스의 점균과 오리쿠치의 무스비가 포개지는 장소가 제겐 말이 태어나는 곳입니다.

 

철학은 정말 중요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작품을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은 사유가 아니라 입니다. 이념이 아니라 사물입니다. 작품은 사물과 조우해 홀로 맨손으로 사물과 맞서지 않는 한 성립하지 않습니다. 말은 넓은 의미에서 작품 자체를 뜻합니다. 사사키 씨도 자주 말씀하시듯 지식은 저절로 축적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천적으로 사물과 맞서서 사물을 형태로 변용시킬 때 비로소 획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식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고, 누구든 처음에는 쉽게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없습니다.

 

안도 : 블랑쇼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에 직면한다. 죽음에 직면하면서 삶도 죽음도 아닌 장소를 방황할 뿐이다. 블랑쇼는 하이데거의 철학과 카프카의 소설을 대치시켜 <문학 공간>이라는 거대한 책을 완성합니다.

 

아사부키 : ‘점균의 삶을 실감하는 것인간의 질서에 기초한 이념이나 윤리처럼 답답하고 딱딱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계기가 된다고 할까요? 점균을 보고 있으면 해방을 느낍니다. 이런 자유로움을 말에서도 느낍니다. 즉 말은 정의하는 것이지만, 실은 답답한 것이 아닐 겁니다.

 

사사키 : 하지만 모든 것에 응답하고 은혜를 갚으려면 한 글자도 쓸 수 없게 돼요. 그래서 일단 모두 잊은 채 뛰어들려고 합니다. 찰나마다의, 지금 이 언어의 준동, 동요 혹은 침묵에 집중하려 합니다.

 

몰라도 괜찮아

 

사사키 : 미셸 푸코가 이론을 구성하는 것, 사유하는 것, 어떤 시점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실천이라고 말했죠, 괴테도 같은 말을 했고요. 그건 창조 행위잖아요? 이론과 실천을 분리하다 보니 이론은 점점 야위어가고, 실천도 갈수록 헛도는 상황에 내몰리는 것 같아요.

 

사사키 : 두 번, 세 번, 네 번 읽기 위해 첫 번째 독서가 있다고 할까요? ....뭔가 마음에 걸리는 책을 반복해 읽음으로써 몸에 배게 한다고나 할까.....아마 제게 특정 커뮤니케이션을 신뢰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인지도 모르겠어요. ......이런 식으로 모든 집필 행위는 오랫동안 인생의 지하수처럼 숨어 흐르던 그 무엇이 불현 듯 솟아나는 경험을 동반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이 10여 년간 쌓아온 것을 한 번 읽음으로써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이해가 안 되면 무슨 이유에선지 화를 냅니다. “더 알기 쉽게 말해!”라고, 게다가 소설이나 만화의 경우 어려운 건 재미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모르는 것은 곧 시시한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거죠. .....모르니까 재미없다는 생각은 독서에 권력욕을 투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은 아~ 하고 입을 벌리고 있으면 초콜릿을 넣어주는 할머니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어요. 물론 아주 가끔이지만 할머니의 초콜릿도 맛있어요. 다만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과 마주하며 반복해서 보거나 느끼는 동안 지각이 넓어져 뜻은 모르지만 왠지 모르게 재미있는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베르그송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술가에게는 보인. 사람에겐 원래 보이고’ ‘들리지만 모든 기능을 그런 인식에 돌리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평소에는 그 지각을 닫아놓고 있다. 물론 닫은 채로 있어도 되지만, 예술가의 역할은 인간이 유용성을 이유로 닫아놓은 인식을 열어 지각을 확대하는 데 있다.”

 

철학도 사유의 예술이라 할 수 있고, 이것이 모든 예술의 공통점이라고 생각해요. 이때 중요한 것은 역시 반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복이 있어야 좀 전에 말한 타르콥스키처럼 지각이 단련되어 재미있어지는 것이죠.

 

 

연애의 시작

 

 

‘love’ , ‘amour’란 무엇인가? 많은 논의가 있습니다만 한마디로 잘라 말하면 신이 왜 이 세계를 만들었는지 모르겠다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의 전통에서 신이란 물질 세계를 초월한 순수 정신입니다. 13세기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은 무얼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신은 자신을 만끽하고 있다고 답하고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신은 전지전능의 무한 존재기 때문에 굳이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마들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런데 굳이 세계를 만들고 우리 인류를 창조하셨죠. 도대체 왜? ‘사랑이라고밖에 답할 길이 없습니다.

 

그 육욕이 변하기 시작한 게 처음에 연애가 발명되었다고 얘기한 12세기 경입니다. 발명에 크게 관여한 사람들이 11세기경부터 유럽에 나타난 트루바두르라 불리는 음유 시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12세기 들어 기사도 연애 혹은 궁정 연애amour courtois’가 성립합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하나의 전환기였습니다. 궁정이 타도되면서 궁정 연애가 종지부를 찍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이로써 자유연애가 시작되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계급 내부 살롱을 무대로 궁정 연애를 모방한 연애 게임을 해갔습니다. 20세기 초 프루스트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그때의 향기를 살짝 맡을 수 있습니다.

 

연애의 다음 전환기는 제 1차 세계대전입니다. 이때 이혼율이 비약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이때 비로소 자유연애에 바탕을 둔 연애결혼이 급증합니다.

 

니체가 이런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환상의 파괴가 즉시 진리의 창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거기에 나타나는 것은 무지, 진공, 황야다.”

 

연애는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결국은 환상이고, 영원한 연애 따위는 거짓 중의 거짓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지 말라고는 말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것을 하지 않는다면 삶 자체가 사라지는 종류의 것이니까. 이는 사람은 죽는다. 어차피 죽는다면 빨리 죽어라라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 것과 같다.

 

-사카구치 안고 전집 5. <연애론>

 

본디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사사키 : 니체는 여름의 더운 오후에 샘물을 남김없이 마시듯 내 책을 읽어달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러려면 우선 목이 말라야 하죠.

 

소설을 쓰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누군가가 되는 모험이다

 

이치카와 : 제게 사사키 씨의 백미는 첫째로 <야전과 영원>,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 잘 나타나 있는 사람을 발정케 하는 문체의 힘입니다.

 

사사키 : ‘행복했을 적에 그랬던 것처럼말인가요? 실은 다카하스 야스나리 씨 등이 번역한 제임스 놀슨의 방대한 <베케트 평전>에 나오는 문구입니다.


전에 있었던 행복옛날의 행복했던 기억이라는 주제는 베케트의 여러 작품 저변에 흐르고 있는 지하수와 같은 모티프잖아요? 그가 젊었을 때 쓴 프루스트론에도 나옵니다. <고도를 기다리며>에도 라틴어로 등장하죠. <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는 전편이 다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행복했는데라는 의식은 베케트가 계속 반복하는, 매우 통절한 시간 의식입니다.

 

낭만주의라는 호칭 자체가 장편 소설에서 유래한 겁니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장편 소설이 문학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현상은 낭만주의적인 사태라고 할 수 있어요. 아마 들뢰즈=가타리는 이 문학 체제를 흔들려 했는지 누벨을 중시합니다. 문자 그대로 소설의 길이로 나누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 들은 <천개의 고원> 8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콩트앞으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까하는 긴박감을 얘기하는 것이고 누벨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기술한 것이다. ‘로망’이란 이 콩트누벨을 절충하면서 현시점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이들은 시간을 기준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로망[ 대한 이런 설명은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세히 말씀드릴 시간은 없습니다만 오히려 과거를 미래로 만드는, ‘지금 여기를 변화시키고 절박하게 만드는 것이 소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장 끝부분에서 들뢰즈 = 가타리는 피츠제럴드를 논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게 됐다 우리는 자멸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를 망쳤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라는 아름다움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되고 말았는데,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라는 누벨을 둘러싼 물음과 옛날엔 행복했는데라는 베케트의 근저에 흐르는 주제가 서로 공명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치카와 : 예를 들어 작품 마지막 부분에 있는 지금 세상에 너무도 달이 예쁘네요하는 식이 아닌가라는 구절이 그렇죠? 이는 물론 나쓰메 소세키가 “i love you”를 그렇게 번역했다는 얘기가 깔려 있습니다만 .....

 

특히 <행복했을 적에 그랬던 것처럼>은 일과되게 허위와 현실을 왕복하고 있으므로, ‘자기가 갖고 있는 현실의 기억현재의 자신’, ‘픽션으로서의 텍스트이를 쓰고 있는 나’, 이 모두가 각각 신뢰하기 어려우나 항상 거기에 있는 것이라는 스타일을 지니고 있기에 상호 침투하는 것은 구조적인 필연이 아닐까요? 조금 전에 베케트 얘기가 나왔습니다만 그야말로 행복했던 과거가 있기 때문에 지금 괴롭고, 행복했던 과거가 있기 때문에 지금 행복한, 이렇게 서로가 반전하면서도 참조하는 구조를 사사키 씨가 좋아한다는 사실과 이 작품은 잘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사키 아타루에게 소설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행복의 회상을 스스로 금하는 듯한, 그 자체가 모순된 마초적이자 마조히스틱한 행위가 아닐까요?

 

 

사사키 : 소설 내용이 딱 그렇습니다만, 남고 마는 잔혹함도 있고, 남김없이 사라지고 마는 잔혹함도 있고, 옛날엔 행복했다는 잔혹함도 있고, 지금 상실해야 할 행복을 살고 있다는 잔혹함도 있고, 이들 모두가 한낱 꿈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는 잔혹함도 있습니다. 실은 꿈이 아니었다는 잔혹함도......하지만 말입니다, 이 잔혹함 자체가 행복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아르튀르 랭보의 나는 터무니없는 오페라가 되었다. 나는 모든 존재가 행복의 숙명을 짊어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라는 구절과, 뒤이어 행복은 나의 숙명, 나의 회한, 나의 구더기였다라는 구절이 있지 않습니까? 이는 모든 행복의 잔혹함을 경험하면서 존재해야 하는 현실을 읊은 절창입니다. 제가 그런 위대한 문구를 쓸 수 있을 거라고는 꿈도 못꿉니다만 글을 쓸 때 이런 잔혹함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것만큼은 의식하고자 합니다.

 

블랑쇼, 푸코, 베케트, 들뢰즈를 비롯해 다들 말하고 있습니다만.....이는 곧 누가 말했든 상관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만 쓴다는 것은 이름을 잃고, 얼굴을 잃고, 내력을 잃고, 그 누구도 아닌 누군가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키르케고르는 “‘신앙의 기사는 어디에나 있으므로 소시민과 별다를 게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누군가가 되려고 시도하는 것, 그것이 쓴다는 행위입니다.

 

헨리 제임스는 소설가란 그에게 있어 쓸모없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사람을 말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뷔토르가 이를 인용하고 있죠? 소설에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그 누구도 아닌 누군가가 되려 하고, 그 누구도 아닌 누군가가 되는 사람. 나아가 그 누구도 아닌 누군가도, 그 무엇도 아닌 무언가도, 이 모든 것을 결코 쓸모없게 만들지 않는 자, 그런 이를 소설가라고 부를 수 있다면, 저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 누구도 아닌 누군가가 된다. 지각되지 않는 자가 된다. 이는 하나의 모험입니다. 들뢰즈는 이를 도주선이라 불렀죠. 생성변화라고도 불렀습니다.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완벽하게 사라져간, 푸코가 말하는 오욕투성이인 사람들되는것이죠.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원래 소설이란 그 누구도 되지 않기 위한 행위입니다. 제가 이를 얼마나 잘 실천할 수 있을지는 저도 모릅니다. 저는 제 선을 그으며 찰나에 불과하더라도 저 자신의 방법으로 적어도 저는 아닌- 아마 저 자신도 모르는 누군가가 되기 위해 시도하고, 또 시도할 뿐입니다.

 

 

변혁을 향해, 이 치열한 무력을

 

그는 <정신현상학>에서 진리는 전체다. 그리고 전체란 자신을 전개함으로써 스스로 완성해가는 실재에 다름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법철학>에서는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에야 날개를 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여기서 인식하는 이성을 상징합니다.

 

헤겔은 이들 여러 사람이 주장을 논하고, 비판하고, 반비판하는 과정 자체가 역사, 역사 전체야말로 진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헤겔 철학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역사 철학이며 종언의 철학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역사가 끝나지 않으면, 더 이상 인간이 진보하지 않는 종언이 도래하지 않으면 역사가 닫혀 원환, ‘전체를 이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헤겔의 승리는 확실합니다. 틀림없이 진리를 골라냅니다. 왜냐하면 나중에고르기 때문입니다.

 

세슘 137은 반감기가 약 30년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플루토늄 239의 반감기는 아시는 것처럼 24천 년입니다. 열화 우라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우라늄 23845억 년이라고 합니다.

 

끝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헤겔이 말하는 전체로서의 진리를 만드는 역사의 종말은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골라야 하는데 그 나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는 도박입니다. 헤겔 이후의 철학자들이 목숨을 건 도약이나 행운그리고 도박을 강조한 것은 겉멋이나 허세, 말장난이 아닙니다.

 

원전 사고의 방사선 피해는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핵무기와 원전은 전 세계에서 신속하게, 완전히 폐기돼야 합니다. 인류는 모든 지혜를 모아 이를 향해 진화해야 합니다. 이는 후퇴도 철수도 아닙니다. 이는 변혁이자 새로운 세계의 시작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즉 이쪽에 걸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께서도 이쪽에 거셨으면 합니다.

 

하이데거가 말했죠. 인간은 언제 어디서든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잊은 채 살고 있다. 죽는 것은 항상 다른 사람이다. 이 죽음의 절박하지 않음, 망각 속에서 일상을 일종의 기분으로 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러나 모든 사람이 져야 할 책임은 책임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는 말은 책임 회피의 수단일 뿐입니다. .....누군가가 일으킨 일입니다.

 

 

치욕honte은 굴욕humiliation과 다릅니다. 치욕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치욕입니다. 자신에 기인한 그 무엇이 치욕입니다. 굴욕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항상 그 누구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굴욕을 느끼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자기를, 자기 세계를 변혁하고자 하는 동기가 되는 것은 항상 치욕입니다. 굴욕은 그 무엇도 바꾸지 않습니다. 그것이 낳은 것은 약자에 대한 폭력과 차별 뿐입니다.

 

이 치욕의 이름 아래 이 재해는 우리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과 이 재해를 불러온, 거기에 가담한 사람들의 책임을 묻는 것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책임은 추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무능과 무책임을 허용해온 우리를 바꾸는 것이야말로 우리 손으로 책임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 속하는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이름으로, 치욕의 이름으로 책임을 지게 해야 합니다. 도망치게 내버려둬서는 안 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복구가 우선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 누군가를 돕고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 복구라는 작업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책임 소재가 갈수록 애매해질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니시타니 오사무씨가 번역한 <존재에서 존재자로>를 추천합니다. (레비나스)

 

폴란드의 브루노 슐츠라는 사람을 추천합니다.

 

지금 말한 첼란, 레비나스, 슐츠 등의 위대함은 .....괴테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바흐의 맛을 모르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 사람에게는 이생에서 최대의 지복 중 하나가 기다리고 있으니까이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첼란, 레비나스, 슐츠를 모른다면 여러분의 미래는 장밋빛입니다.

 

 

그런데 <부정변증법>의 주어캄프 전집판 359. 잊히지도 않습니다. 아도르노는 그럼에도 아우슈비치 이후의 문화는 모두 Müll이다라고 썼습니다. “그에 대한 통렬한 비판도 포함해서 Müll이다. Müll은 먼지, 쓰레기, 폐기물 등을 뜻합니다.

 

Müll에 아톰을 붙여 Atommüll이라고 하면 핵폐기물이 됩니다. 그렇다면 후쿠시마 이후, 우리의 문화는 모두 핵폐기물일까요? 이에 대한 비판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아도르노 식으로 말하면 그렇습니다. 우리의 문화는 핵폐기물이 됐나요? 답은 하나입니다.

두고 봐이것이 유일한 답입니다.

 

 

우리의 제 정신을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가르쳐달라

 

특권적인 미나 예술만 대지진 이후 무력한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무력했다. 이 치열한 무력만이 성취할 수 있는 게 있다.

 

3. 먼저 사뮈엘 베케트의 다음 말을 기억하자. “제게 극장은 실러가 말하는 의미에서 도덕적인 시설이 아닙니다. 저는 사람들을 교육하고 싶지도 않고 향상시키고 싶지도 않으며, 또한 따분하게 만들 생각도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연극에 시를 도입하는 것입니다. 허공을 뚫고 나가 새로운 여백에 새로운 시작을 새기는 듯한 시를. 새롭게 펼쳐지는 세계에서 저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이해받고 있는지 여부를 신경 쓰지 않습니다.

 

4. 예술art, Kunst은 라틴어로 아르스ars라고 하며, 원래 그리스어인 테크네의 번역이다. 자연 내부에서 때로는 이를 거스르며 살아남는 것을 가능케 하는 기예혹은 더 나아가 궁리라고 번역해야 할 말이다. 이는 오락이나 장식의 형태를 띤다. 그러나 결코 오락이나 장식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변혁 가능한 삶의 양식을 의미한다.

 

5. (1)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트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아트란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다이 모방설은 17세기까지 계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2) 베이컨과 데카르트. 이 두 사람은 아트와 자연의 관계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이들에게 둘은 같은 것이다. 기계론이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던 17세기 철학에서는 원칙적으로 인간도 물리 법칙에 따르는 기계며, 따라서 기예 또한 기계적인 것으로 여겼다. 이는 지금도 그러하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는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히포크라테스의 말로, 이때의 예술은 단적으로 의술을 뜻한다.

 

(3) 라이프니츠와 새프츠베리. 이 두사람에게 아트는 유한하지만 자연은 무한하다.”

(4) 칸트, 실러, 그리고 셸링. “아트는 유한하고, 자연은 무한하다. 하지만 예술가나 예술 작품은 유한한데도 그 안에 무한을 내재하고 있다.” 유한하고 개별적인데도 무한을, 즉 보편성을 배태하고 있다. 혹은 질료적인데도 형상을 내재하고 있다. 우연적, 필연적 등도 마찬가지다. 여기에서 근대 예술 개념이 탄생한다.

 

6. 실러는 순환의 사상가이자 칸트에게 큰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그에게서 탈출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사고의 명석함도 잃지 않았던 철학자다. 그런데도 그의 텍스트는 자신의 순환이 그리는 곡선에 이끌려 기묘하게 굽이치기 시작해 돌연 이해 불능을 강요하는 면이 있다.

 

7. 프랑스 혁명이 한창 진행되던 때 쓰인 그의 예술 철학은 프랑스 혁명에 찬동하면서도 왜 이 혁명이 허무한 바람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를 논하고 있다. 아래로부터의혁명이 나중에는 위로부터의혁명으로 변질되면서 어떻게 해서 실패하게 되는가, 라는 문제를 논하고 있다.

 

거의 예언적이라 할 수 있는 이 사상을 전개하면서 순환의 사상가인 실러는 여기에서도 특이한 순환을 발견한다. 실러는 이 순환 속에서 개인과 국가가 어떻게 하면 합치할 수 있는지, 그 조건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그에 따르면 국가가 개인과 일치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1) “경험적인 인간을 억압하고, 국가가 개개인을 폐기 =지양하는방식과 (2) “개인이 국가가 되는, “시간 안에 있는 경험 혹은 질료 안에 있는 구체적인 인간이 이념 속에 있는 인간으로 스스로를 고취하는 방식이다. 즉 도덕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법에 완전히 따를 수 있도록 인간을 고귀하게 하는길이다. 쉽게 말해 (1)위로부터의” -말하자면 톱다운식 - “강제, (2)아래로부터의법과 국가의 보텀업식 - ”형성이라는 것이다.

 

8. 그렇다면 실러는 어떤 변혁을 기획하는가? 진정한 보텀업에 의한 정치 변혁은 인간을 고귀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만 실현된다. 하지만 이는 현존하는, 최종적으로는 톱다운에 의한 개개인의 억압, 폐기라는 수단을 취할 수 밖에 없는 야만적인 국가 기구에서는 실현할 수 없다. “국가가 부여한 것이 아닌”, “어떤 정치적 부패가 있어도가능한 수단, 실러에 따르면 그것은 예술이다”.

 

9. 예술가 또는 기술자(아티스트Künstler)를 그는 셋으로 분류한다. (1) “기계 아티스트번역하면 직공을 말한다. 기계 아티스트는 소재에 형식을 부여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다.” 톱다운이다. 그가 힘을 행사하는 자연은 전혀 존경할 가치가 없다”. 석공은 돌의 인격같은 것은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2) 미적 아티스트. 이들 또한 소재를 존경하지 않으며 주저하지 않고 폭력을 가하지만, “소재에 대한 외견상의 양보를 통해 현혹한다. 즉 존경하고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척한다. “보텀업인 척하는 톱다운이다.

 

(3) 교육, 정치 아티스트 혹은 국가 아티스트이때 소재는 단적으로 인간이며 인격이 있고, ”존경의 마음을 갖고 다가가야 한다.“ 돌이나 흙처럼 소재를 절단하고 부수고 변형하고 탈색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이 예술은 객관적인 현실성을 소재로 한다. 이느 또한 자기 자신을 소재로 한다. 이 아티스트들도 똑같은 인간이며, 아트의 소재였을 것이고 그 효과기도 할 것이다. 여기에는 순환이 있다. 이는 보텀업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톱다운이 보텀업이 된다.“, ”톱다운과 보텀업이 순환하고 있다.“

 

 

10. 세 번째 아티스트만이 소재를 수단으로만이 아니라 목적으로도다루려 한다. 혁명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아티스트에 의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혁명이 개개인의 보텀업으로 일어나 그 보텀업이 관철돼야 하는 것이라면, 즉 우리 하나하나가 스스로 바뀌어야 한다면 이런 수단은 예술, 세 번째 예술 밖에 없다. 그리고 이를 굳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하는 이유는 예술에 있어서만 감성, 우연성과 이성, 필연성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실러 자신의 술어를 사용하지 않고 쉽게 말하자면, 예술 작품은 물질이고 감성에 호소하는 그 무엇인데도 뛰어난 예술 작품을 제작하거나 감상하면서 일종의 이성’, ‘논리’, ‘법칙’, ‘필연성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예술이야말로 감성을 이성과 잇는 길인 것이다.

 

 

Corps그리스도교 공동체라고 할 때의 공동체라는 뜻을 갖는다는 사실 그리고 욕망을 의미하는 désir라는 말을 강하게 번역하면 신을 고대한다는 뜻으로 근세까지 쓰였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들뢰즈 =가타리는 분명 정치 철학적인 함의를 넣어 이 개념을 고안했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아, 왜냐면 열받았거든

 

진리는 그리스어로 알레테이아라고 합니다. 덮여 있지 않다’, ‘가려져 있지 않다는 뜻이죠. 베일이 벗겨진 노골적인 상태, 하지만 덮여 있지 않은상태란 실은 베일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걷어낼 수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거죠. 베일은 진리를 인식하는 데 있어 장애물이지만 베일이 없다면 덮여 있지 않은것 또한 사라져버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는 그것을 가리는 베일을 전제로 하고, 이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이 사태를 간략하게 진리란 드러내면서 덮여 있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보이지만 보이지 않기 때문에, 노출돼 있지만 감춰져 있기 때문에 진리라는 얘깁니다.

 

 

이토 세이코

 

희망없는 희망으로서의 소설을 위해

 

기원전 2300년경에 살았던 수메르 제3왕조의 공주 엔헤두안나. 즉 최초의 문학가는 여성이죠. 그리고 그 내용은 시에요, 역시. 신에게 바치는 시.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냐면 신관이었습니다. 왕의 딸이자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녀는 아카드어와 수메르어를 쓰는 바이링걸이었죠. 그야말로 번역입니다.

 

뭐냐면 축적’. 흄의 말을 빌리면 ‘stock of ideas’. 쉽게 말해 흄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아이디어의 축적 자체는 뛰어넘을 수 없지만, 그 축적된 샘플이나 구절 등을 조합하면 상상력을 이용해 제작할 수 있다. 이 상상력을 더 근대적인 창조성으로 끌어온 것이 버크입니다.

 

프루스트가 아름다운 소설은 일종의 외국어로 쓰여 있다고 말했는데, 바로 이를 의미한 것입니다. 모어가 돌연 타자의 언어가 되고 마는.

 

아날렉타라는 이름이 보여주듯 어떤 의미에서는 거리낌 없이 재미를 추구하며, 가벼운 기분으로 채워온 글들을 묶어 편찬한 책들이어서 시리즈라 해도 딱히 1권부터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고, 어느 쪽부터 읽어도, 어느 쪽에서 내던져도 상관없다. 그런 책이 있어도 된다.

 

 

다카하시 겐이치로,

오에겐자부로, <핀치러너 조서>

후루이 요시키치

맬컴 라우리, <화산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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