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지론
폴 에드워즈 : 질문의 무의성
미국의 도덕 철학자. 20세기 철학의 기념비적 업적으로 불리는 <맥밀런 철학백과사전>의 책임 편집자다.
‘어떻게’ 질문과 ‘왜’ 질문은 때때로 유사하지만, 다른 질문일 때도 있다. 신학적 왜 질문들은 유의미하다. 그러나 그 질문들에 대한 신학적 대답들이 참이라는 뜻은 아니다. 더 나아가 신학적 대답들은 초궁극의 왜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는다. 초궁극의 왜 질문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만물 바깥에서 만물을 설명해주는 무언가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에이어 : 무의미한 질문과 주관적인 가치
20세기 가장 중요한 철학자들 중 하나.
삶 전체의 의미나 목적이 있을까? 에이어에 따르면 그런 건 없다. 모든 삶에 적용되는 목적이나 최종 목표가 존재한다고 생각할 근거는 없다. 또 설령 그런 목적이나 목표가 존재하더라도, 이를테면 신이 품은 목적을 완수하는 것이 모든 삶의 목적이라 하더라도, 신의 목적은 우리의 목적이 아닐 터이므로, 이것은 우리의 탐구와 무관한 이야기다. 신의 계획과 관련해서 우리는 그 계획에 참여할 수밖에 없든지 아니면 참여 여부를 선택해야 한다. 후자는 삶의 의미가 우리 자신의 선택과 가치관에 달려있음을 뜻한다. 게다가 전자와 후자 모두 신의 계획의 목적 혹은 의미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불러온다. 또 이 질문의 대답은 또 다른 왜 질문들을 무한정 불러오기 마련이다. 요컨대 궁극의 왜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으로 환원된다.
카이 닐슨 : 무의미한 질문과 가치 있는 삶
왜 어떤 것이 객관적으로 가치 있느냐라는 질문에 우리는 대답할 수 없다.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무엇이 가치 있느냐는 물음 그 이상이다. 이 질문은 가치 있는 것, 또는 중요한 것이 과연 존재할까라고 묻는다. 닐슨에 따르면 객관적 대답은 불가능하다. 변화를 일으키려는 우리의 노력은 효과가 미미하므로,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대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미미한 일에서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 요컨대 삶의 의미는 우리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주관적 목표들로 환원된다.
존 위즈덤 : 유의미하지만 거의 대답 불가능한 질문
만물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유의미하다. 정의상 만물의 바깥에서 만물에 의미를 주는 무언가는 있을 수 없다. 만물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만물은 무슨 의미일까?”라고 유의미하게 물을 수 있다. 이 질문은 대답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많이 배움으로써 대답에 접근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대답이 존재한다면 그 대답은 삶의 내부에서 나올 것이다.
헵번 : 대답 불가능한 질문과 가치 있는 기획들
헵번은 우리가 스스로 가치가 있으며 만족스럽고 흥미로운 기획들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마 우리는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에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능한한 잘 살려고 노력할 수 있다.
중간 점검
에드워즈, 에이어, 닐슨은 모두 궁극의 왜 질문이 대답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에드워즈가 거기서 멈췄다면, 에이어와 닐슨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것인지를 물었다. 에이어는 오직 주관적으로만 대답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닐슨은 도덕적 사안들에 대해 객관적으로 추론하는 우리의 능력을 더 낙관적으로 펴가했다. 위즈덤은 궁극의 왜 질문이 유의미하고 이해 가능하지만 대답 불가능할 것이라 주장했다. 헵번은 그 질문이 유의미하고 대답 불가능하다는 것에 동의한다. 헵번 역시 의미는 우리의 주관적 목적에서 가장 잘 발견된다고 덧붙인다.
로버트 노직 : 어떻게 무언가가 의미를 발산할 수 있을까?
신의 목적은 삶의 의미를 보장하지 않는다. 무의미성을 받아들이거나 의미를 발견하려 애쓰는 대신에 의미를 창조하라고 노직은 조언한다. 그러나 과연 무언가가 의미를 발산 할 수 있을까? 노직의 대답은 회의적이다.
윌리엄 조스케 : 유의미한 질문과 무의미한 삶
조스케는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다의적이라고 주장한다. 의미란 1) 모든 삶의 의미 2) 인간의 삶의 의미 3) 개인의 삶의 의미일 수 있다. 조스케는 2)만을 다룬다.
조스케는 또한 무의미성의 네 가지 요소를 열거한다. 가치없음, 요점없음, 하찮음, 부질없음이 그것이다. 1)가치가 없다는 것은 보람이 없다는 뜻이며 2) 요점이 없다는 것은 목표가 없다는 뜻이고 3) 하찮다는 것은 목표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며 4) 부질없다는 것은 목표를 성취할 수 없다는 뜻이다.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유의미하며 또한 위험하다. 생물학, 도덕적 주관주의, 우연적 비합리적 무신론적 형이상학과 결부된 견해들 때문에, 삶이 무의미할 수도 있다는 견해를 떨쳐내기는 어렵다. 우리는 삶을 소중히 여기고 노력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부질없고 무의미할지도 모르는 삶에 우리가 불만을 품는 것은 정당하다.
오스왈드 핸플링 : 해롭지 않은 자기기만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무의미하고 보편적인 대답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를 해롭지 않게 속이면서 삶에 의미가 있는 것처럼 역할 놀이를 한다면, 우리의 삶은 더 나아질 것이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 무의미한 질문, 또는 말할 수 없는 대답?
삶의 문제의 해답은 그 문제의 사라짐에서 보인다. (오랜 의심 끝에 삶의 의미를 명확히 깨달은 사람들이 그 의미가 무엇인지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 표현 불가능한 것이 정말로 존재한다. 그것은 스스로 자신을 드러낸다. 그것은 신비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불가지론은 허무주의를 암시한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답이 없다는 게 아니라 답은 있고 그 답이 ‘삶은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닐까.
허무주의 : 삶은 무의미하다.
쇼펜하우어 : <세상의 고통에 대하여>
“사는 동안 당신을 이끌 신뢰할 만한 나침반을 원한다면, 삶을 바라보는 옳은 방법에 관한 모든 의심을 없애고 싶다면, 이 세계를 감옥으로, 일종의 유배지로 보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세계가 우리 모두가 고통을 겪는 고난의 장소라는 생각은 “이웃에 대한 관용, 인내, 존중, 사랑을” 일깨운다. “모든 사람이 관용, 인내, 존중, 사랑을 필요로 하므로, 우리는 이것들을 동료 인간들에게 베풀 의무가 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삶은 무의미하다. 삶은 고해다. 아무것도 없는 편이 더 나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함께 고통 받는 동료 인간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쇼펜하우어, <존재의 허무에 대하여>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무언가를 추구할 때와, 순수하게 지적인 활동에 빠져 있을 때만 빼면 존재하는 것에서 쾌락을 느끼지 않는다. 심지어 감각적 쾌락도 끊임없는 추구가 그 정체다. 목표에 도달하자마자 감각적 쾌락은 끝난다. 언급한 두 상황에서 벗어나 존재 자체를 되돌아볼 때, 우리는 언제나 존재의 무가치성과 허무성에 압도된다. 이 감각을 일컬어 지루함이라고 한다. ”
존재의 유한성, 현재의 덧없음, 삶의 우연성, 과거의 비존재, 욕구의 지속성, 지루함의 경험,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죽음의 불가피성 – 이 모든 것들에서 삶미 무의미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알베르 카뮈 : 허무주의에 맞선 반항
운명은 우리의 삶에 목적이 없다고 비난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반응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운명이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도록 말이다.
“그때부터 주인이 없는 이 우주는 그에게 황량하지도 않고 허무하지도 않게 느껴진다. 그 바위의 원자 각각, 어둠이 충만한 그 산의 광물 각각이 그 자체로 세계를 이룬다. 높이를 향한 몸부림 그 자체만 해도 사람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시시포스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
삶은 본질적으로 무의미하고 부조리하지만, 우리는 그런 삶에 반항할 수 있고 우리 나름의 행복을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다. 사실상 카뮈가 던지는 질문은, 삶의 부조리를 받아들이는 것과 (희망을 주는 형이상학적 명제들을 받아들임으로써) 부인하는 것 사이에 세 번째 대안이 있는 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삶이 유의미 하다는 희망 없이, 그러나 자살을 부르는 절망도 없이 살 수 있을까? 대안이 있는 듯하다. 우리는 반항하면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신앙없이, 희망 없이, 의지할 곳 없이 살 수 있다. 그러면서 행복할 수 있다.
토머스 네이글 : 허무주의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아이러니
네이글에 따르면, 우리의 삶을 반성해보면, 삶이 정말로 중요한 다른 것들과 비교할 때 하찮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삶은 정말로 중요한 다른 것들과 관련해서만 중요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네이글은 카뮈처럼 부조리에 반항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부조리를 알아채는 것은 “우리의 가장 고등하고 흥미로운 특징의 발현”이다. 부조리의 인식은 오직 사유가 자기 자신을 초월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삶은 객관적 의미가 없고, 우리가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할 근거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 살면서 반항이나 절망이 아니라 아이러니한 미소로 대응해야 한다. 삶은 사람들이 한때 짐작했던 만큼 중요하고 유의미하지 않지만, 이것은 슬퍼할 일이 아니다. 왜 사냐건 웃지요. 낄낄거리면서.
웨스트팔과 체리 : 네이글에 대한 비판
눈앞의 일에 몰두할 때, 우리는 영원한 관점이 우리와 무관하여 그 관점을 무시할 수 있다.
월터 스테이스 : 허무주의에 만족으로 대응하기
“진정으로 문명화한다는 것은 이제껏 우리를 지탱해온 이런저런 유치한 꿈들에 의지하지 않아도 똑바로 걷고 명예롭게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어쩔 수 없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불가능한 것을 기대하지 않으며, 작은 행운에 감사하며 사는 그 삶은 꽤 만족스러울 수 있다.”
객관적 의미는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는 만족하면서 고귀하게 살 수 있다.
조엘 파인버그 : 허무주의를 거의 끌어안기
테일러에 따르면, 삶은 무의미하다(부조리).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든지, 아니면 성취한 뒤에 지루함을 느끼든지 둘 중 하나다. 모든 삶은 부조리하다.
부조리에 대한 카뮈의 대응은 반란, 반항, 그리고 최선을 다해 살기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성이 원하는 바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미한 것 사이에는 항상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카뮈는 자기 충족을 “자신의 부조리를 끊임없이 절실하게 의식하기”로 이해할지도 모른다.
네이글이 보기에 부조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는 진지한 관점과 우리를 사소하게 보는 보편적 관점 사이의 불일치에서 유래한다. 생쥐의 삶도 생쥐 자신에게는 부조라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부조리하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내면에서 보면 중요한 듯하지만 외부에서 보면 부조리할 수 있다.
자기충족의 모형은 최소 네 개가 있다.
1.자신의 희망이나 욕망을 충족시키기
2.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3. 일을 마무리하기
4. 본성에 따라 행동하기, 또는 잠재력을 실현하기.
시시포스는 바위굴리기를 통해 자신의 본성을 충족시킬 수 있을까.
시시포스는
바위 굴리기에 취미가 있었을 수 있다.
특별한 재능이 있었을 수 있다.
바위를 굴리려는 본능이 있었을 수 있따.
바위를 굴리려는 욕구가 있었을 수 있다.
바위를 굴리려는 강박적 충동이 있었을 수 있다.
파인버그에 따르면 시시포스의 본성을 어떻게 설정하든 간에, 시시포스는 자신의 삶을 충족시킬수 없다. 왜냐하면 신들은 시시포스의 삶을 확정하고 그에게 재량권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객관적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본성에 맞게 행동함으로써 주관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은 자기충족적인 동시에 부조리할 수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허무주의적 사태를 아이러니한 미소를 띠고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뿐이다. 파인버그는 네이글보다 조금 더 나아가서 허무주의를 거의 끌어안는다.
사이먼 크리츨리 : 허무주의를 긍정하기
우리는 무의미성을 겅취로, 과업이나 추구할 목표로....어떤 구원 이야기의 장밋빛 안경도 끼지 않은 평범함이나 일상의 성취로 단언해야 한다. 베케트의 작품은 “이 구원 이야기들의 근본적 파괴창조, 평범함의 성취로서의 무의미성을 향한 접근, 구원으로부터의 구원을 제공한다. 평범함은 가장 비범한 것이다.
밀란 쿤데라 : 참을 수 없는 허무주의
크니츨리가 옹호하는 것은 삶을 가볍게 대하는 태도다. 쿤데라가 보기에 단 한 번 사는 삶은 일종의 가벼움, 하찮음, 또는 중요하지 않음을 속성으로 가진다. 반대로 만일 모든 것이 무한정 반복된다면, 우리의 삶과 선택에 엄청난 무게가 부여될 것이다.
“가장 무거운 짐은 우리를 짓누른다. 우리는 아래로 가라앉고, 짐은 우리를 바닥에 고정한다. 그러나...짐이 무거울수록, 우리의 삶은 땅에 더 접근한다. 더 실재적이고 진실하게 된다. 거꾸로 짐의 절대적 부재는 사람을 공기보다 더 가볍게 만든다. 사람이 높은 곳으로 치솟고, 땅과 자신의 현세적 존재를 떠나고, 반만 실재하게 되는 결과, 사람의 행동이 자유로운 만큼 하찮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
무거운 삶은 가식적이며 우리를 짓누른다. 가벼운 삶은 참을 수 없다. 허무주의외에 다른 대안이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