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8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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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일 한미행정협정이 조인된다. 정확히 말하면 주둔군 지위에 관한 협정또는 소파(SOFA : Status of Forces Agreement) . 한홍구는 소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지금 입장에서 볼 때 소파는 엄청난 불평등 조약이지만, 베트남 파병이라는 피의 대가로 한국은 미군의 무법천지를 적어도 외형상으로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미군 범죄는 1967년 이후 해마다 적을 때는 1100여건, 많을 때는 2300여 건이 일어났는데, 1967년 이전에는 통계조차 없다. 다만 관련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소파 채택 이후 미군 범죄가 현격하게 줄어들었다고 하니 미군 범죄가 그동안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미국은 한국지식계 역시 장악했다. 가장 대표적인 친미 연구소는 57년에 창립된 고려대의 아시아문제연구소였다. 62년엔 아세아문제연구소는 고려대 총장 유진오, 한국학술원 회장 이병도, 미 대사 버거 등이 참석한 가운데 포드재단 원조자금에 의한 특수연구 시무식을 개최하기도 한다.

 

황용주 필화사건 이후 통일 논의는 완전 금기가 되었다. 금기를 깬 건 민주사회당 발기를 선언하고 나선 서민호였다. 서민호는 한일협정 폐기, 주월 한국국 철수, 김일성과의 면담을 주장하다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다.

 

524, 부산 세관은 한국비료에서 사카린 2259포대(55)을 건설자재로 꾸며 들어와 판매하려던 것을 적발한다.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의 시발이었다.



 

동양텔레비젼, 동양라디오, <중앙일보>등 삼성 비호에 전 중앙 매스컴이 총동원된다. 국회에선 이만섭, 김대중 등이 이병철의 구속을 주장한다. 김두한은 국무위원석으로 다가가 똥이나 쳐먹어, 이 새끼들아, 고루고루 맛을 봐야 알지라고 국무위원들에게 똥을 뿌린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이병철은 한국비료 국가헌납과 자신의 경제계 은퇴를 발표한다. 헌납각서까지 썼던 이병철은 도중에 각서 내용을 부인하는 한편 사카린 밀수사건은 언론이 만든 조작극이라고 오리발을 내밀어 물의를 빚는다. 이병철은 뭘 믿고 이토록 오만방자했던 것일까.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는 회고록에서 사카린 밀수 사건은 박정희와 이병철의 공모 아래 정부기관들이 공모한 엄청난 규모의 조직적 밀수라고 폭로한다.

 

“65년말 시작된 한국비료 건설 과정에서 일본 미쓰이는 공장 건설에 필요한 차관 4200만 달러를 기계류로 대신 공급하며 삼성에 리베이트로 100만 달러를 줬다. 아버지는 이 사실을 박 대통령에게 알렸고, 박 대통령은 여러 가지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그 돈을 쓰자고 했다.

 

..삼성은 공장 건설용 장비를, 청와대는 정치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돈을 부풀리기 위해 밀수를 하자는 쪽으로 합의했다. 밀수 현장은 내가 지휘했으며, 박 정권은 은밀히 도와주기로 했다. 밀수를 하기로 결정하자 정부도 모르게 몇 가지 욕심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이 참에 평소 들여오기 힘든 공장기계나 건설용 기계를 갖고 오자는 것이다. 당시 밀수 총액은 요즘으로 치면 2천억 원에 해당했다. 밀수한 주요 품목은 변기, 냉장고, 에어컨, 전화기, 스테인리스판과 사카린 원료 등이었다.”

 

양변기의 경우 한국 암시장에서는 15만 원에 팔렸다고 한다. 삼성이 양변기 100개를 남대문 암시장에 풀자 가격이 10만원으로 떨어졌다. 김형욱은 이렇게 증언한다.

 

그 품목들이 사카린은 물론 표백제, 전화기 제품, 수세식 변기, 심지어 목욕하는 욕조에 이르기까지 1만여 가지에 달하고 있었다. 울산 현장에서 나의 요원들이 조사를 시작하자 이병철은 당황하여 물건들을 모래 사장에 묻기도 하고, 바다에다 버리기도 하면서 난리를 치고 있는 것을 나는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환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맹희의 증언에 따르면, 한국비료는 박정희 이병철 합작사업이었다. 종국에 박정희는 이병철을 배신한다. 박정희는 공식석상에서 재벌 밀수는 반국가 행위라고 말했다. 조갑제는 만약 이맹희가 이런 고백을 1966년 당시에 했더라면 아무리 강력한 박정희 정권이라 하더라도 무너졌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의 충격적인 내용이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밀수 규탄 성명서를 발표한다.

 

1015일 민중당은 대구 수성천변에서 특정재벌 밀수진상폭로 및 규탄국민대회를 개회했다. 이 대회에서 장준하는 박정희야말로 우리 나라 밀수 왕초다라고 말했다.

 

대구 발언 때문에 장준하는 구속된다. 강준만은 이렇게 적었다.

 

무엇보다도 박정희야말로 우리나라 밀수 왕초다라는 말이 박정희를 분노케 했을 것이다

그건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미군은 10월 말부터 한국군 2만 명 추가 파병을 요청한다. 한국으로선 4차 파병이었다. 박정희는 동의한다. 미국 대통령 존슨 방한은 1031일로 예정돼 있었다. 박정희는 존슨 환영을 위해 15천만 원을 투입한다. 국기 100만개, 국화 5만 송이. 존슨을 위해 홍콩에서 특제 침대형 침대까지 긴급 공수된다. 한양대에서 워커힐 뒤편 빌라 까지 이틀 밤을 새워 자갈길을 포장도로로 바꾼다. 존슨의 환영식에 동원된 인원은 학생 100만명 시민 155만명, 공무원 20만 명등 모두 275만명이었다. (당시 서울 인구는 350만명)

 

박정희는 존슨을 위한 기생파티까지 준비했으나, 존슨의 아내 버드 때문에 무위에 그쳤다. 박 정권은 존슨을 수행한 백악관 기자들에게도 기생 서비스를 베풀었다. UPI 통신 기자인 매리엄 스미스가 자기 방에 들어온 여자를 보고 기겁을 해 문명자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문명자의 증언이다.

 

“ ‘홍 장관, 왜 이리 나라 망신을 시켜요? 백악관 기자단에 여자를 붙여요?’ 홍종철은 김형욱 부장이 한 일이라며 쩔쩔맸다. ....기자에게 여자를 붙여주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 그것이 바로 나의 조국이라니.”

 

65년 초, 박정희, 김종필, 김형욱이 모인 자리에서 박정희는 김형욱에게 <경향신문>을 정부 소유로 만들라는 지시를 내린다. 66<경향신문>이 경매 처분되어 기아산업 대표이던 김철호에게 넘어간다. 중정이 개입한 음모극이었다. 박정희는 이후 <경향신문>을 신진자동차 김창원에게 넘긴다. 이후 <경향신문>은 문화방송과 함께 박정희 친위언론으로 전락한다.

 

<조선일보>45일자 신문에서 <부정부패를 추방하자>라는 캠페이성 기사를 연재한다. 이 기사가 나가자 중앙정보부는 정권 타도의 의미가 있다며 세무사찰, 은행 융자금 회수, 신문용지 배당 중단 등의 조치를 취한다. 박정희를 비판한 <동아일보> 최영철 기자, 민주당 의원 박한상, <동아일보> 정치부 권오기 등은 괴한으로부터 테러를 당한다.

 

625일 한국사상 첫 세계 권투 타이틀 매치인 김기수의 챔피언 도전전이 장충체육관에서 열린다. MBC의 시청률은 거의 100%에 육박했다.



 

60년 중반의 가요계는 이미자와 최희준의 시대였다.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최희준의 <하숙생>이 인기를 끌었다. 3월에 귀국한 패티킴 리사이틀이후 리사이틀 붐이 일었다. 어떤 공연이건 무조건 리사이틀이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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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12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8-12 11:15   좋아요 0 | URL
엄청나게 뿌렸죠. 당시 2층 양옥집을 살 정도 돈을 쥤다고하네요. 그러니 그냥 박정희라 하면 꺼벅 죽는거죠

겨울호랑이 2016-08-12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시아문제연구소에는 식민사관의 거두 이병도 이 분도 있네요.. 정말 아시아에서 문제있는 연구소입니다.. 지금 보니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옛날도 그렇게 좋지 않은 것 같아요.. 라고 생각했는데 속보를 보니 이재현 CJ 회장님께서 특사를 받으셨군요..

시이소오 2016-08-12 14:03   좋아요 1 | URL
재벌과 권력의 유착, 계속 이렇게 놔둬야하는지.
갑갑하네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