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8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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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 아니면 죽음을 위해 65일하는 해로 지정되었다. (66년은 또 일하는 해로 지정되었다.) 서민들은 보리밥 먹고 피똥 싸는 해라 불렀다. 65년까지 소득은 급격히 감소했다. 이 당시 수출 품목 중 가장 효자 품목은 가발이었다. 미국에서 가발하면 코리안을 연상할 정도였다고.

 

이 당시 모든 재벌의 좌우명은 차관을 잡아라!”였다. 은행 금리는 25~30%, 차관 이자율은 3~4%. 차관만 받으면 앉아서 떼돈을 벌 수 있었다. 재벌들은 어떻게 하면 차관을 잡을 수 있었을까? 상투적인 답. 군사정권과 줄이 닿아 있으면. 박정권은 정부 발주 사업에서 무조건 10%를 정치자금으로 뜯어갔다. 그럼에도 재벌들은 워낙에 남는 장사였기에 너도나도 박정희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3월에 이른바 송아지 사건이 터진다. 대전방송국에서 방송된 <송아지>가 빈부격차를 다뤘다고 해서 편집부장 김정욱은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된다. 빈부격차의 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북괴의 활동을 찬양, 고무한 것이었다.

 

개발독재 최고의 이론가인 로스토우는 52일 한국을 방문해 박정희를 만난다. 강연에서 로스토우는 한국 경제의 도약을 위해서 일본 자본의 도입이 불가피하다고 역설한다. 한국에서의 환호와 달리 로스토우가 행정부에서 물러날 때, 미국 대학들은 로스토우의 교수직 복귀를 거부한다.

 

118, 한일 본회담이 속개된다. 회담 전 17일 일본 측 수석대표 다카스키 신이치는 이렇게 말했다.

 

일본의 조선 통치는 좋은 것이었다. 우리가 그들의 언어를 금지하고 일본식 이름을 강요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오로지 선의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진짜 일본인의 지위를 부여하려 한 것이다. 불행하게도 전쟁으로 우리의 노력은 좌절되었지만, 일본이 20년만 더 통치했더라면 오늘날 한국은 훨씬 더 발전된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이에 대해 뭐라고 했을까? 침묵했다. 박정희, 아니 다카기 마사오, 아니, 오카모토 미노루와 달리 국민들은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4, 5, 6월 내내 대학가에서 시위는 끊이질 않았다. 고등학생들까지 합세했다.




 

장장 15개월에 걸친 시민들의 반대 시위에도 불구하고 622일 오후 5시 동경의 일본 수상 관저에서 이동원과 시이나가 서명함으로 한일협정은 정식으로 조인된다. 일본은 식민지 지배는 합법적이었으나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무효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게 했다고 말했다.

 

평화선 철폐, 49해리 전관수역 주장은 철회되고 일본 즉 주장대로 12해리 전관수역이 설정되었다. 일제가 35년간 불법으로 강탈해간 모든 한국 문화재는 일본 소유물로 인정해버렸다. 정신대, 사할린 교포, 원폭 피해 문제는 거론조차 하지 못했다. 이후 50년 후.  



어떻게 된 게 그 아버지에 그 딸이다. 나라 팔아먹은 부녀라니. 저런 걸 대통령이라고. 

에휴, 접시물에 코 박고 죽고 싶다.  

  

714일 밤, 공화당은 한일협정 비준동의안을 전격 발의한다. 731일 예비역 장성, 대학교수단, 종교인, 문인 등 3백여 명이 참가한 조국수호국민협의회가 결성된다. 한일협정 비준 반대를 외친 여러 단체들이 있었지만, 박정희가 가장 골치 아프게 생각한 건 조국수호국민협의회였다. 핵심 멤버들이 5.16 쿠데타 시 동지들이었기 때문이다.

 

811일 여러 단체들이 연합전선을 펴기로 합의하지만 공화당은 한일 협정 비준안을 날치기로 통과시킨다. 814일 여야 간 심한 몸싸움 끝에 야당의원이 불참한 가운데 비준안은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다.

 

8월 중순 이후, 반대시위는 다시 격화되었다. 23일부터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26일 박정권은 서울시 일원에 위수령을 발통 전방 6사단 병력을 서울 각 대학에 진주시킨다. 94일고려대, 연세대에 무기휴업령이 내려진다. 박정권은 예비역 장성, 학원가, 언론인 들에 대한 무자비한 테러를 감행한다.

 

장면 정부 민의원 의원으로 내무부 정무차관을 지냈던 김영구의 말에 따르면 장면 정부가 일본에 요구한 배상액은 100억 달러였다. 일본 정부는 50억 달러를 제시했고, 70억에서 80억 달러에서 협상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박정희가 일본에 받은 돈은 얼마였던가?



3억 달러였다


 

하와이로 추방당한 이승만이 719일 사망한다. 유해는 국민장을 거쳐 국립묘지에 안장된다. 국장으로 하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조선일보> 724일자 사설 <지금이 자유당 천하인가>는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아무리 격정적이고 감상적이고 건망증이 심한 것이 한국의 국민성이라 할지라도 노 정치가의 죽음을 애도하고 한 줄기 눈물을 흘려주는 따뜻한 국민들의 아량을 짓밟아, 그것을 미끼로 역사를 바꾸는 국가적 과오를 범해서야 말이 되겠는가....”

 

그러나 조선일보는 30년 후 이승만 우상화에 앞장선다. 500만의 국민을 살육한 이승만을 국립 묘지에 묻어야 할까. 4. 19 혁명이 누구 때문에 일어났는데? 지금이라도 무덤을 파헤쳐 뼈를 부셔, 갈아야 하지 않을까.

 

6529일 서울운동장에서 월남 파병 환송 국민대회가 열린다. 박정희는 비둘기 부대원을 자유의 십자군으로 찬양한다.

 

미국은 5월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를 극진히 환대한다. 1012일엔 맹호부대와 청룡부대 환송 대회가 열린다.

 

1222일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12세 이하 어린이 22, 여성 22, 임산부 3, 70세 이상 노인 6명 등 민간인 50명을 사살한 사건이 일어나지만 언론은 입을 다문다.

 

56<신아일보>, 922일엔 <중앙일보>가 창간된다. 60년대 중반은 라디오 전성시대였다. KBS, CBS, MBC, DBS, TBC 5개 라디오 방송상들이 경쟁 체제에 접어든다. DBS에서 구봉서, 김희갑, 송해 등이 인기를 끌자 MBC는 구봉서, 송해를 스카웃 해 배삼룡 등과 함께 팀을 형성한다. 동양방송은 서영춘을 키운다.

 

박정희는 코미디언을 박 정권 홍보의 수단으로 삼는다. 전 국민 우민화 작전의 총사령관은 배삼룡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김희갑이었다.

 

이만희 감독의 <7인의 여포로>가 반공법에 걸려 이만희가 구속된다. 반공영화였음에도 북한군을 너무 멋있게그렸다는 게 문제가 됐다.

 

유현목의 <춘몽>은 외설죄로 고발당한다. 이만희를 옹호한 유현목 감독은 검찰에 동조자로 찍힌 것. 65년 최대 화제작은 김수용 감독의 <저 하늘에도 슬픔이>였다. 서울의 국제극장 한 곳에서만 3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대기록을 세운다. (이 영화 보면서 어릴 적 어찌나 울었던지. )  




 

프로레슬러 박치기김일이 86일 귀국한다. 1127일 장충체육관, 이 날의 메인 이벤트는 김일과 칼 칼슨의 대결이었다. 이에 앞서 세미파이널로 장영철과 일본의 오쿠마가 대결하였다. 이날 경기는 장영철이 이기는 것으로 각본이 짜여졌는데, 오쿠마 측은 말을 듣지 않았다. 장영철은 오쿠마 측이 약속을 어겼다. 프로레슬링은 쇼다라고 폭탄선언을 한다. 이날 이후로 프로레슬링 인기는 시들해졌으나, 10월 유신 이후 박정희는 김일을 후원해 다시 레슬링 붐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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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8-10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윽- 저도 이 책을 읽어봐야겠어요.

시이소오 2016-08-10 10:06   좋아요 0 | URL
우와, 다락방님이시다. 여행 잘 다녀오셨겠지요? 시차 적응도 끝나셨나요? ㅋ

오랜만에 뵈니 반가워용 ^^


2016-08-10 1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10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