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꾼들
제임스 설터 지음, 오현아 옮김 / 마음산책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설터의 소설 <스포츠와 여가>, <올댓이즈>, <가벼운 나날>을 읽었으나, 아직 리뷰를 쓰지 못했다. <스포츠와 여가>가 설터의 첫 소설인 줄 알았는데, <사냥꾼들>이 설터의 첫 소설이었다. <사냥꾼들><스포츠와 여가>보다 무려 10년 전에 씌여졌다. 생텍쥐페리도 조종사였지만 설터는 전투기 조종사였다. 특히나 설터는 한국전에서 100번 이상 출격해, 미그기 한 대를 격추시켰다고 한다. 즉 이 소설의 주된 배경은 한국이다. 외국 작가의 소설에서 한국 지명을 접할 때면, 왠지 초현실적인 느낌이 든다.

 

비행기 공중전을 소재로 한다는 점, 또한 설터의 첫 소설이란 점이 우려스러워, 여차하면 미련 없이 발 뺄 준비를 하고 조심스레 발을 담궜다.

 

어라, 재밌네.



 

비행기 공중전 영화를 딱히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진주만> 예외),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본 듯하다. 이 소설 이후로 설터는 소설보다는 시나리오를 주로 썼다. imdb를 찾아보니, 설터는 7편의 영화에 시나리오 작가로 크레딧을 올렸다. 가장 주목할 만한 영화는 시드니 루멧 감독, 오마 샤리프, 아누크 에메 주연의 <the appointment>가 아닐까. 당대 최고의 배우들과 작업한 셈. 소설과 내용은 다르지만, 설터가 시나리오를 쓴 동명의 제목인 <the hunters>는 로버트 미첨이 주연을 맡았다. 설터는 영화 <three>를 연출하기도 했으나, 쫄딱 망한 듯.



 

주인공 클리브는 타고난 조종사다.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적군이 있고, 아군 내에서도 갈등이 벌어지지만, 설터는 자기 극복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어떤 전쟁이든 자기 자신과의 전쟁이므로.

 

그는 죽음 가까이까지 이르고 싶다는, 그리고 그 후에 찾아오는 순결함을 느끼고 싶다는 충동을 마치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일인 양 이따금 떠올리곤 했다. 그는 인간의 자기 극복과, 자기 극복이 이루어지는 숭고한 금욕의 세계를 언제나 존중했다.

 

- P 20.

 

비행기 조종사의 존재 가치는 무엇인가? 미그기가 그들의 전부다. 몇 대의 미그기를 잡았느냐만이 가치를 결정한다. 미그기 다섯 대를 잡은 조종사는 에이스로 불리며, 모든 조종사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 대대장을 맡은 클리브는 부하인 들레오와 함께 일본으로 여행을 떠난다. 이 책을 읽으니, 설터 사유의 원형을 엿본 듯하다. <스포츠와 여가>를 읽을 땐 딱히 제목에 대해 고민해 보질 않았다. <스포츠와 여가>는 알려진대로 <쿠란 57장 무쇠의 장>에서 연유한다.

 

현세의 삶이란 한낱 스포츠와 여가일 뿐임을 기억하라.”

 

클리브는 돌레로와 함께 일본의 요정에서 아가씨들의 접대를 받으며 전쟁 따위는 잊고 한가로운 나날을 보낸다. 클리브는 돌레오에게 말한다. “여기 또 오면 안 돼”. 들레오가 이유를 믿자 클리브는 대답한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삶이야

 

아주 깨끗한 공간에서 중세의 삶을 누리고 있는 우리는 지금 어린아이의 꿈속에 들어와 있는 거야. 어른의 천국이기도 하지. 유일무이한 그 무엇, 실은 그게 뭔지 나도 잘 모르지만, 여하튼 그 소중한 것의 마지막 남은 몇 조각을 우리가 지금 몰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 ....부족한 건 아무것도 없네. 하지만 그것의 의미를 전혀 모르는 자가 영웅이야.”

 

설터에게 여가란 순수 한 것이고, ‘어린아이같은 것이며, ‘섹스혹은 사랑’, ‘자유같은 것이다. 반면 여가의 반대편엔 스포츠가 있다. ‘스포츠란 한마디로 삶의 목표고 일이다. 경쟁을 통해 승리해야 하는 것.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의무, 책임을 뜻한다. 설터는 삶이란 것은 스포츠와 여가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잡는 것이라 말하고 싶은 게 아닐까. 스포츠와 여가 사이의 변증법 ?

 

소설에 나오는 여러 캐릭터들은 대부분 전쟁(스포츠)에 매몰되어 있다. 미그기를 잡기위해 동료를 죽음으로 내몬 펠이 대표적 캐릭터다. 장교들은 펠이 동료를 죽인 과정에 대해 묻지 않고, 오로지 미그기를 잡은 결과만을 중시한다. 클리브는 미그기가 대량 출몰한 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짝사랑하는 일본 여자를 떠나, 황급히 전쟁터로 돌아간다.

 

승리의 순간을 위해 이곳에 왔지만 어떤 의미에선 지금 그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 이상을 원하고 있었다. 승리를 갈구하는 것에 초연하기를, 승리를 거머쥐어야 하는 필요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랐다. 하지만 자신이 그곳에 다다르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는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는 이미 전쟁의 포로였다. 미그기를 잡지 못하면 제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는 실패자가 되는 것이었다.”

 

클리브는 자신의 부하를 죽인 소련의 전설 같은 조종사 케이시를 결국 잡는다. 그러나, 윙을 맡은 부하 헌터는 착륙 중 전사한다. 그는 자신의 공을 헌터에게 돌린다. 클리브는 승리했으나, 만족감은 어디에도 없고 오로지 무감각만이 남는다.

 

클리브는 쓸쓸한 평온을 느꼈다. 유년 시절을 지나 비로소 성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것이 한때 자신을 온통 사로잡았던 찬란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치러야 했던 대가였음을 그는 뼈아프게 깨달았다. 대가는 값비쌌다. 그러나 자신에게 아무리 큰 희생을 강요했을지라도 그는 이상을 굳건히 지켰다.

 

p 219.

 

클리브는 시스템이 강요하는 승부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존재의 고원으로 비상한다. 사냥꾼들은 그의 몸에 무수한 총알을 박아 넣는다. 전쟁터에서 자기 극복의 의지는 추락하고 만다. 그러나, 승부욕을 버리고 부하 동료인 헌터에게 공을 돌린 클리브는 전쟁에서 실패했으나, 인간으로서 승리한 것이 아닐까.



 

20. 실로 현세는 유희와 오락에 불과하며 허식과 권세도 풍성한 재산과 자손도 그러하거늘 그것을 비유하사 식물을 성장케 하여 농부를 기쁘게 한 후 벼가 내려 시들어 누렇게 되고 메말라 부스러지고 지푸라기가 된 것과 같더라. 그러나 내세에서는 사악한 자들에게 가혹한 응벌이 있으되 하나님께 헌신한 자 하나님의 관용과 기쁨을 받노라. 실로 현세의 삶은 현혹된 향락에 불과하다.

 

- < 성 쿠란> 57장 하디드 p 1053.

 

혹시나 해서 <코란>을 찾아봤더니, 나는 완전히 오해했구나. ‘스포츠와 여가유희와 오락이었던 것. 현혹된 향락. 스포츠는 여가와 대립된 의미가 아니었던 것이다.

 

..... 몇 일 지나, 과연 오해인 걸까란 의문이 고개를 쳐든다. 설터는 스포츠와 여가의 덧없음을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아니면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현대 사회(스포츠)에서 여가를 구원하려 했던 것일까. 이 의문은 <스포츠와 여가>의 독후감에서 해명할 수 있기를.

 


다음 생이 있다면, 가수가 되거나 댄서가 되거나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다.

그러니까, 날아오르고 싶다

 

비행대대는 삶의 요약판이다. 당신은 어려서 그곳에 처음 당도한다. 그때는 기회도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모든 것이 새롭다. 그러다 자기도 모르는 새에 고통스런 배움의 나날과 환희의 날들이 지나가고 어느덧 성인기에 접어든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느 날 문득 당신은 이미 늙어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주위는 온통 생소한 얼굴과 관계 뿐, 당신은 그 속에서 반갑지 않은 존재가 된다.

p69.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부수적인 것과 핵심을 구분하는 거야. 자네 경우엔 코치가 부수적인 부분이지. 역사는 자네를 수학 교사로 기억할 뿐 그 밖에 부수적인 건 모두 잊을 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