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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광이, 루저, 찌질이 그러나 철학자 - 은둔형 외톨이 칸트에서 악의 꽃 미셸 푸코까지 26인의 철학자와 철학 이야기
저부제 지음, 허유영 옮김 / 시대의창 / 201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토록 사랑스런 철학책이라니. <조선왕조실톡>을 읽을 때 마냥 키득키득 거리며 읽었다. 철학이라고 해서 굳이 고리타분하게 설명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철학자들의 철학만으로도 충분히 고리타분한데? ‘재미있고 통속적인 철학사 책’을 쓰겠노라는 장밍밍의 농담은 현실이 되었다. 저자인 장밍밍이 85년 생이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라 그런지 중국의 고대문화 뿐만 아니라 대중 문화들을 딱딱한 철학자들 위로 잘 덧칠해놓았다. 예를 들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관중과 포숙에 빗댄다던지. 중국의 시를 각색해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대해 헌사를 바치기도 한다.
높은 산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노라.
그들의 깊은 우정 천년만년 이어지리.
자본가로 세상에 나섰으나 저술에도 능하였구나.
후대 사람들이 수없이 비방하여도
그 마음은 떳떳하게 진리를 널리 떨쳤노라.
일생 포부를 깊숙이 감추었지만
그대에게 모든 걸 바쳤으니
아쉬움도 미련도 없구나.
호방하고 거칠 것 없는 그대의 말도
이제 옛일이 되어버렸으니
표주박 술 한 잔에
천 갈래 눈물이 흐르는도다.
하이데거에 대한 아렌트의 마음을 대변한 시는 <시경> 패풍편 <녹의>를 인용한다.
“녹색 실이여, 그대가 다스리길 바라오. 나는 옛사람을 생각하여 허울이나 없게 하려네.
고운 갈포, 거친 갈포, 쓸쓸한 바람이로구나. 나는 옛사람을 생각하니 진실로 나의 마음을 찾았다네.”
이외에도 홍루몽 구절, 최근 유행하는 중국 가수의 유행가 가사, 웹소설을 인용하기도 한다.
장밍밍은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를 ‘강호의 대협객 커플’이라 묘사하기도 한다. 소개된 여러 일화들도 재미있다. 쇼펜하우어와 하이데거의 비난 배틀도 흥미롭다. 플라톤은 한 때 ‘인간은 깃털이 없는 두 발 달린 짐승이다’라고 말했다. 다음 날 디오게네스가 플라톤에게 닭 한 마리를 던진다. 디오게네스는 그 전날 닭다리의 털을 다 뽑았다. 디오게네스가 닭을 던지며 플라톤에게 뭐라 했을까?
“옛다, 인간.”
털 뽑힌 그 닭은 무슨 죄냐?
볼테르는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읽고 이렇게 말했다. “그 책을 읽으면 네 발로 기어다니고 싶어진다.” 오늘날로 보자면 볼테르보단 루소의 승리다. 히틀러와 비트겐슈타인이 실업학교 동창이었다니! 방향은 다르지만 두 사람 다 세상을 바꾸었구나.
그녀가 뽑은 1부 12인의 철학자에 한나 아렌트와 사르트르의 등장은 흥미롭다. 현대 철학에서 한나 아렌트의 영향력이 그만큼 커졌다는 반증일까. 아니면 장밍밍이 여자이기에? 사르트르는 우리에겐 한물 간 철학자인데. 사르트르의 부활? 아니면 보부아르 때문에 사르트르가 덕을 입은 걸까.
(사르트르만 생각하면 불쌍하다. 보부아르가 카뮈를 짝사랑했다고 어찌나 카뮈를 싫어했던지. 내가 보부아르였어도 물고기 눈 마냥 껌뻑껌뻑대는 사르트르보단 바바리코트가 피부인듯한 카뮈에게 폴짝 뛰어갔을테다. 카뮈처럼 생긴 자에 대한 사르트르의 질투를 백만 번 이해한다. 그래도 그 외모로 보부아르를 만났으니 사르트르는 철학하길 천만 번 잘 한 거다. 철학 안 했으면 평생 독신으로 살다 죽지 않았을까.)
2부 14인의 철학자에서 저자가 선택한 철학자들도 이례적이다.
루소, 러셀, 마키아벨리, 에리히 프롬, 베이컨 등등.
루소, 마키아벨리, 프롬은 철학자로 인정해주지 않았었는데.
요즘 읽는 책마다 루소가 등장해 짜증스러울 정도다. (예일대 지성사의 첫 타자도 루소다.) 루소만큼 자신이 쓴 책과 거꾸로 살았던 사람은 달리 떠올리기 힘들다. <에밀>을 쓴 사람이 자기가 낳은 - 물론 루소가 생물학적으로 낳은 건 아니다 - 다섯 아이를 고아원에 보내버리다니!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볼 수 있듯 우리 시대의 불평등이 얼마나 극에 달했으면 루소를 다시 호출하는 시대가 되었을까. 프롬 역시 마찬가지 이유일까. ‘소유’의 시대에 ‘존재’에 대한 갈증 때문에.
재밌다고 해서 마냥 가볍지만은 않다. 이 책을 읽으니 학부 때 공부를 게을리 한 게 후회된다. 후회하면 무슨 소용이랴! 지금이라도 다시 공부하는 수밖에. 철학이 어렵게 느껴지는 분이 있다면 이 책으로 철학이라는 문간에 발을 들이밀어도 좋으리라.
밍밍치 아니하고,
호방하고 거칠 것 없는 그대의 책 한 권에
표주박 술 한 잔 바치노라.
아흐, 동동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