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이야기, 이청준








알려진대로 <벌레 이야기>는 영화 <밀양>의 원작이다. 정희진은 이 작품을 가해자와 피해자의 권력관계로 해석한다.

 

분노, 고통, 복수에 비해 용서, 화해, 평화는 우월한 가치로 간주된다. 종교는 말할 것도 없고 진보 진영이나 여성운동, 평화운동 세력도 후자를 좋아한다. 분노와 복수는 극복해야 할 비정상 상태라는 것이다. 나는 탐욕이 아이를 죽였다면 용서와 화해라는 인간의 고상한욕망이 아이 엄마를 죽였다고 생각한다.

 

고통의 감정은 물질이다. 달리 해석될지라도, 크기가 작아질지라도,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몸에 있다. 가해자의 몸은 고통 경험이 없으므로 온갖 절대자의 이름으로 자기 마음대로 구원, 용서, 평화라는 관념의 향연을 주관할 수 있다...나는 용서가 저주보다 바람직한 가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나는 용서와 평화를 당연시하는 사회에 두려움을 느낀다.

 

동감이다. 미국식 낙관주의의 영향 탓일까. 언제부터인가 암에 걸려도 축복받았음을 강요하는 사회가 되었다. (바바라 애런라이크, <긍정의 배신>) 피해자들은 현실을 부정 없이 받아들이길 강제 당하고 침묵을 강요당한다. 긍정강박증의 사회다.

 

그날, 이성복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이성복의 시, <그날>의 마지막 구절이다..실제로 나를 좌절시킨 것은 몇몇 후보의 당선이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의 표현대로, “우리의 삶이 아무리 비천해도 그 고통까지 마비시키지는 못한다.” 고통이 아픈 것이 아니라 마비된 고통이 불러올 고통이 끔찍한 것이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아프기는커녕 더욱 열심히 뛰겠다고 한다. 썩지 않는 시체에 항생제를 붓는다. 인간이 인격체가 아니라 방부제인 사회. 절망할 기력조차 없다.

 

조울병, 나는 이렇게 극복했다. 케이 레드필드 재미슨

 



저자는 평생 조울증을 앓아 온 생존자이며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 정신과에 재직 중인 임상심리학자다. 그녀의 다른 책인 <자살의 이해><천재들의 광기>도 명저다. 역시 우울증 환자이면서 베스트셀러 저자인 앤드루 솔로몬의 <한낮의 우울>에 보면 저는 케이 재미슨 같은 사람이 아니잖아요?”라고 하소연하는 내담자(환자)가 나온다. 그만큼 저자 재미슨은 투병 공개와 연구로 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한 성공한 환자로 알려져 있다.

 

정신 질환자의 자살률이 가장 높은 시기는 병세가 호전되어 병원에서 퇴원할 때다

병은 나았지만 이미 인간관계와 경제적 능력....모든 것을 잃은 상태이기 때문에 생활고로 죽는 것이다.

 

수신확인, 차별이 내게로 왔다. 인권운동사랑방 엮음.


 

2007년 차별금지법을 만들겠다던 정부는 입법 예고안에서 7가지 항목을 삭제했다. 출신 국가, 언어, 가족 형태 또는 가족 상황, 범죄 및 보호처분 경력, 성적 지향, 학력, 병력. 이 문제에 대해서는 차별해도 된다? 항의하는 전문가들에게 언론은 차별 피해 사례를 알려 달라고 했는데, 그 제안이 이 책이 탄생한 계기가 되었다.

 


나는 증언 형태의 책을 읽을 때 말하는 사람의 갈등을 가장 주의깊게 살핀다. 이 갈등을 최소화하려는 실천이 민주주의다. 이 책, “이야기를 기다리는 이야기는 정치적, 문학적, 윤리적으로 말하기와 듣기의 모범이다. 말하는 사람은 차별 경험을 본질적 자아로 환원하지 않으며, 듣고 쓰는 12명 저자들의 지성과 성찰은 안쓰러울 정도로 치열하다. 내용은 슬프지만방식은 독자를 위로한다. 앎과 삶을 위해 필독을 권한다.

 

개인적으로 ‘HIV 포지티브(양성)’라고 불리는 이들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평생이 대기 상태인 인생이다. 내 처지도 그러하다. (내 처지도) <추천사>에서 문학평론가 김영옥이 옮긴, 카프가의 산문 <이웃 마을>에 대한 브레히트와 벤야민의 해석도 매혹적이다.

 

현대 철학의 키워드가 차이라면 현대 사회학의 키워드는 차별이다. 부르디에의 아비투스에서 보듯 차별은 계급을 아우른다.

 

상실 수업,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외


 

이거 베스트셀런데하고 말하려고 했더니 지인의 강권으로 읽었다고.

 

내가 지지하는 평화는 이런 진술들과 통한다. “폭력, 나는 그것을 지성이라 부른다.”(마틴 루터 킹), “평화는 여성이 주로 해 왔던 돌봄 노동이 공적 영역의 가치로 전환될 때 가능하다.” (사라 러딕), “열려 있다는 것은 항쟁을 배제하지 않는 것이며 폭력은 인간의 뛰어난 공존 양식이다.” (사카이 나오키), “평화학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기존 학문 틀의 문화적인 폭력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요한 갈퉁)

 

평화는 고통의 정중앙에 놓여 있다라는 목소리는 보편적 인간 조건을 극복하지 말고 항복할 것을 권한다. 슬픔에 저항하지 말고 느끼고 통과하라는 것이다. ‘슬픔에 잠긴다는 우리말은 정확하다. 몸이 슬픔에 잠겨 눈을 뜰 수도 없고 숨을 쉴 수도 없는, 살아 있는 죽음의 시간을 겪는 것이다. 고통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슬픔의 가치를 수용하는 것. 이것인 국가간 평화든 마음의 평화든, 평화를 논의하는 전주(前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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