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 손택의 말 - 파리와 뉴욕, 마흔 중반의 인터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수전 손택 & 조너선 콧 지음, 김선형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4월
평점 :
일시품절


구제 불능의 탐미주의자이자 강박적인 도덕주의자

수전 손택은 이렇게 말했다.

 

지성적이라는 건, 내게는 어떤 일을 더 잘하는것 같은 게 아니다.

그건 내가 존재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저자는 손택이 윌리엄 워즈우스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서정담시> 서문에서 워즈워스는 시인의 역할을 인간에게 즉각적인 쾌감을 주는 것이며 이러한 과업은 우주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며 인간의 천성적이고 벌거벗은 품위에 바치는 경의라고 정의하고, 그 원칙을 현실로 바꾸는 건 사랑의 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에게 가볍고 쉬운 일이라고 주장했다.

 

작가의 말처럼 손택에게선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매력이 느껴진다. 심지어 섹시하기까지.

만일 손택이 섹시하다면 어쩌면 그녀가 존경한 앤 카슨의 글이 단초가 될 수 있을까.

 

에로스가 연인의 마음속에서 작용하는 방식과 앎이 사상가의 정신 속에서 작용하는 방식 사이에는 상당한 유사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손택은 롤랑바르트에 대한 에세이에서 이렇게 말했다.

 

글쓰기는 포옹이며, 포옹을 받는 것이다. 모든 사유는 손을 뻗어 내미는 사유다.”

 

 

그녀의 제자인 조너선 쿳은 그리움의 아카이브라는 손택의 서재에서의 인터뷰를 책으로 펴냈다.

 

손택을 한마디로 뭐라 불러야 할까. 에세이스트이자, 소설가, 평론가, 연극 연출가, 영화감독 기타등등. 그녀는 지금 여기의 삶에 정주하려하지 않았다. 삶이란 자기 확장의 모색이며

지금과 다른, 더 나은, 더 고귀하고 더 윤리적인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기획이다. 삶이란 도약이고 위험이고 위협이어야만 한다. 따라서 그녀는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글을 쓴다.

 

그녀가 원하는 삶이란 세계 속에 현존하는 삶이다. 세계 속에 현존한다는 것은 자신을 포함한 세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며, 결국은 세계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부과하는 것이다. 온갖 종류의 허위에 맞서 공격적이고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 그것이 작가의 소명이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으로 위안 받고자 할 때 손택은 타인의 고통의 곁을 지켰다. 그녀는 포탄이 떨어지는 사라예보의 전쟁터 한 복판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출했었다.

 

수전 손택의 말을 읽는 다는 건

우리가 온전히 인간이 되는 길이다.


밀줄 그은 문장 

 

 

당신은 지금의 우리가 존재하는 양상의 전부와 과거의 우리 모습 모두가 문학 덕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책들이 사라진다면 역사도 사라질 것이고, 인간 역시 사라질 것이라고요. 나는 당신의 말이 옳다고 확신합니다. 책들은 또한 우리에게 자기 초월의 모델을 제공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독서를 일종의 도피로 생각할 뿐입니다. ‘현실의 일상적 세계에서 탈피해 상상의 세계, 책들의 세계로 도망가는 출구라고요. 책들은 단연 그 이상입니다. 온전히 인간이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

 

 

. 내가 원하는 건 내 삶 속에 온전히 현존하는 것이에요. 지금 있는 곳에, 자기 삶 에 자기 자신과 동시에 존재하면서 자신을 포함한세계에 온전한 주의를 집중하는 것 말입니다. 사람은 세계가 아니고 세계는 사람과 동일하지 않지만, 사람은 그 안에 존재하고 그 세계에 주의를 기울이지요. 그게 바로 작가의 일입니다. 작가는 세계에 주의를 기울여요.

 

저는 머릿속에 모든 게 다 있다는 유아론적인 관념에 반대합니다. 그렇지 않아요. 사람이 그 속에 있든 없든 항상 거기 그 자리에 엄연히 존재하는 세계가 정말로 있어요.

 

나는 항상 상대의 잘못을 탓하기보다는 책임을 지는 쪽을 선호합니다. 나 자신을 희생자로 보는 게 정말 싫어요. 차라리 뭐랄까, 내가 이 사랑과 사랑에 빠지기를 선택했는데 알고보니 개새끼였어, 이렇게 말하는 게 나아요. 그건 내가 한선택이었으니까요. 더욱이 다른 사람을 탓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남을 바꾸기보다는 나 자신을 바꾸는 게 훨씬 쉽거든요.

 

젊었을 때 할 수 있는 것과 늙어서 할 수 있는 것 역시 자의적이고 그다지 근거가 없습니다. 여자가 할 수 있는 일과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을 나누는 거나 마찬가지죠. 사람들은 늘 이런 말을 해요. “, 그런 건 난 못해. 난 예순이거든, 너무 늙었어.” 아니면 그런 건 못해. 난 스무 살이야. 너무 젊단 말이야.” 어째서죠? 누가 그렇대요?

 

저는 라이히의 사상 중에 딱 하나가 심리학과 심리 치료에 기가 막힌 공헌을 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건 바로 성격 무장이라는 개념과, 감정이 체내에서 성충동에 대한 반감과 경직으로 축적된다는 생각이에요. 그 점에 있어서는 라이히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습니다. 그러나 사실 저는 인간 본성의 악마적 힘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섹슈얼리티를 그저 막연히 멋진 것으로만 상정했다고 봐요.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성은 언제나 매우 어두운 곳이고 악마성이 공연을 하는 극장입니다.

 

....그래서 인간 역사를 통틀어 성이 그토록 많은 규제를 받아왔던 거겠죠. 제 생각에는 어째서 이런 억압의 문제가 있어왔는지 사람들이 잘 이해를 못하는 것 같아요. 저는 관점을 거꾸로 돌려서, 대부분의 사회가 상당 수준 성을 억압했던 이유는, 사람들이 실제로 성이 얼마나 통제 불능으로 치달아 완전히 파괴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봐요.

 

제 말은 산다는 건 일종의 공격이에요. 세계 안에서 움직이다 보면 온갖 차원에서 공격과 연루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타인이 점유할 수 없는 공간을 점유하고 걸을 때마다 식물군, 동물군, 작은 생물들을 짓밟게 되죠. 그러니까 삶의 리듬의 일환으로서 정상적인 공격이라는 게 있다는 거죠. 제 생각에는 현대에 고유한 형태의 공격성이 특히 고조되는 측면이 카메라의 활용으로 상징되는 것 같아요.

 

난 사진들을 사랑해요. 사진을 찍지는 않지만 보고, 사랑하고, 수집하고, 도 사진에 매료됩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뜨거운 애정을 품고 향유했던 관심사지요. 사진에 대해 글을 쓰는 작업에 흥미를 갖게 된 건 사진이 이 사회의 모든 복잡성과 모순과 모호성들을 투영하는 중심적 활동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호성이나 모순이나 복잡성은 사진의 본질이며 또한 우리가 사유하는 방식이기도 하죠. 그러니까 사진을 찍고 보는 활동이 그 모든 모순을 아우르고 있다는 겁니다. 그 모든 모순과 모호성들이 그렇게 깊숙이 박혀 있는 다른 활동은 생각조차 나지 않아요. 그래서 <사진에 관하여>20쎄기에 선진 산업 소비사회에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한 가지 사례연구인 셈이죠.

 

모더니즘이나 아방가르드 또는 실험주의에서 제 흥미를 끌었던 상당수가, 또는 그냥 제가 보기에 좋은 글쓰기라는 건 은유의 정화예요. 쓸데없는 걸 다 벗어던진 적나라한 특질 때문에 저는 베케트와 카프카에게 매력을 느껴요. 그리고 지금보다는 옛날에 훨씬 더 사모했던 로브그리예 같은 프랑스 소설가들의 경우에됴, 제 마음을 끌었던 건 그들의 기획, 즉 은유를 담지 않겠다는 그 발상이었어요,

 

.....은유는 사유에 핵심적이지만 쓸 때는 은유를 믿으면 안 돼요. 어쩔 수 없이 필요한 허구라는 걸 알아야 하죠. 아니, 필수적인 허구가 아닐 수도 있어요. 은유를 품지 않은 사유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죠. 그러나 바로 그런 사실이 그 사유의 한계를 드러내주는 거예요. 내 마음을 끄는 건 항상 그런 회의주의를 표현하면서 은유를 넘어 깨끗하고 투명한 무언가로 나아가는 담론이에요. 바르트의 표현을 빌리면 0도의 글쓰기죠.

 

누가 질병은 저주다라고 말한다면, 전 그걸 일종의 사유의 붕괴라고 봐요.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멈추게 만들고 소정의 태도에 가둬버리는 수단이란 말이에요. 제게 있어 지적인 기획이라면 기실 비평이에요. 심오한 의미로서의 비평이요. 사유를 하려면 은유가 필요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불가피하게 새로운 은유 구축에 연루되잖아요. 그렇지만 적어도 물려받은 은유에 대해서는 비판적이고 회의적이라야 합니다. 그래야 사유를 막는 더께들을 깨끗하게 씻고 공기를 들이고 닫힌 문들을 활짝 열어젖힐 수 있죠.

 

전 진실을 허위의 부정으로밖에 이해할 수가 없어요. 언제나 저는 뭔가 다른 게 거짓임을 알게 되면서 제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걸 발견하죠. 세계는 기본적으로 허위로 가득 차 있고, 진실은 언제나 허위를 거부할 때 빚어지는 것이죠. 진실은 어떤 면에서 몹시 공허하지만, 이미 허위를 모두 떨쳐낸 환상적인 해방이에요.

 

제가 받는 느낌은, 사유가 감정의 한 양식이며 감정이 사유의 한 양식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하는 일은 책이나 영화라는 결과물을 낳지요. 이러한 대상들은 저 자신이 아니지만 무언가를 받아쓴 사본입니다......사람들은 보통 그런 작업이 순전히 지적인 과정일 거라 상상합니다. 하지만 제 작업의 대다수는 이성만큼이나 육감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어요. 사랑이 이해를 전제로 깔고 들어가지는 않아도,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온갖 생각과 판단에 연루되는 일이죠. 바로 그런 겁니다. 육체의 욕망, 욕정의 지적인 구조가 있단 말이에요.

 

누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봐요. “길은 반듯하다”. , 그렇다 쳐요. 그런데 그러고 나서 길은 노끈처럼 똑바르다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보기엔 이 두 발언 사이에는 어질어질할 정도로 큰 차이가 있어요. 저의 심오한 일부는 길은 똑바르다라는 말 이상은 필요하지도 않고 그 이상의 말은 해서도 안 된다고, 그 외에는 모두 혼란을 초래할 뿐이라고 느껴요. 그렇지만 갈수록 길은 노끈처럼 똑바르다라고 말하는 글쓰기에서 더 큰 쾌감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정말이지 그 둘 사이에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거죠? 이 문제가 날 괴롭히네요.

 

짎병에 대한 제 저서에서도 어떤 면에서 예술과 삶이 하나로 어우러진다고 봅니다. 아주 강렬한 경험의 소산이니까요. 그 두 가지가 하나로 어우러졌으면 하고 바라 마지않는 곳은 제 소설인데, ‘나 그리고 그 밖의 것들에 실린 단편들을 교정보다가 그 글들이 제게 작가가 아니라 독자로서 볼 때 공통의 테마를 가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어요. 자기 초월을 향한 모색, 지금과 다른, 더 나은, 더 고귀하고 더 윤리적인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기획이라는 주제였죠. 사람이 욕망하고 영예롭게 여기는 것은 무엇이든 예술이나 명언이나 목표 또는 이상의 자질을 갖게 되고, 그리하여 윤리적인 성격을 띤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얘기죠.

 

누군가 피카소에게 왜 여행을 하지 않느냐고 물은 적이 있어요. 피카소는 절대 여행을 하거나 해외로 나가지 않았거든요. 스페인에서 파리로 갔다가 다시 남프랑스로 갔지만 절대 어디를 가는 법이 없었어요. 피카소의 답은 난 머릿속에서 여행을 다닌다라는 것이었어요.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봐요......단순히 좋거나 유망한 정도에서 벗어나 작가로서 방대한 작품 세계를 갖추고 진짜 성과를 얻고 위험을 감수하는 지점으로 넘어갈 때가 되면, 그때는 수년간의 작업을 해온 작가나 화가에게 그런 선택이 진짜 가능성으로 다가오게 되고, 그때는 집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거예요.

 

 

상상으로 나를 매혹시키는 건 인간적으로 내 마음을 끄는 것과 전혀 다를 수 있어요. 멍청한 소리처럼 들리기 때문에 그런 구별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말이에요. 난 내 글에 책임이 있다고 전제하거든요. 글이 내게서 나왔고 내가 그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요. 그렇지만 내 삶이 글쓰기와 같은 방식으로, 같은 것들을 중심으로 해서 조직되어 있다고 보지는 않아요. 나는 자전적으로 글을 쓰지 않고 내 판타지들을 따라가는데, 내 판타지들은 세계에 대한 판타지이지 그런 일들을 하는 나에 대한 판타지가 아니거든요.

 

<, 그리고 그 밖의 것들>에는 여덟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건 제게 여덟 가지 서로 다른 작업 방식입니다. 전 오늘날 모든 일은 도약이고 위험이고 위협이며, 그게 바로 훙분이고 짜릿함이라고 생각해요. 자기 자신을 최대한 확장하고 초월하려고 노력하는 것 말입니다. 이에 필요한 집중력을 갖기 위해서는 순진한 상태로 일해서는 안 돼요. 다른 사람들이 자기한테 바라는 행위나 모습에 자아를 너무 많이 빌려주면 희석되거나 흩어져버릴 수도 있는 어떤 강렬한 내면성의 상태로 작업을 해야 하죠.

 

: 선생님이 연출하신 영화 <내 동생 칼>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 주인공은 기적적으로 벙어리 소녀의 말문이 트이게 만들죠. 그 영화 각본의 서문에서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쓰셨어요. “삶에서 유일하게 흥미로운 활동은 기적이 아니면 기적을 행하려다 실패하는 것이다. 기적은 아직까지 예술에 남아 있는 유일하게 심오한 소재다.” 선생님께서는 정말로 기적을 믿으십니까?

 

손택 : 세상에는 범상치 않은 일들이 일어나고, 그런 일들이 모든 걸 바꿀 수 있으며, 행위가 의식의 현현과 등가물이 될 수 있으며, 불가사의해 보이는 일들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다고 해명할 수 없다는 얘기는 아니죠. 사실이 있다면 해명하지 못할 일은 없으니까요. 그냥 우연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해도 말이죠. , 시계가 멈춰도 하루에 두 번은 맞잖아요.

 

: 파리에서 이 인터뷰를 시작한 후 4개월 뒤 뉴욕 시로 돌아오신 선생님께서 제가 전화를 드려 대화를 끌마칠 수 있을까 부탁을 드렸더니 이렇게 대답하셨어요. “제가 너무 많이 달라질지도 모르니까 빨리 해야 해요.” 그래서 놀랐습니다.

 

손택 : 왜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 같은데요. 전 항상 변한다는 느낌이 들고, 그건 사실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아요. 작가는 일반적으로 자기표현을 하거나 그게 아니면 자기 견해에 근거해 타인을 설득하고 변화시키는 일에 매진한다고들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저한테는 그 두 가지 모델이 다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제 말은, 전 부분적으로는 나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글을 쓰거든요.

 

아까 작가의 사명은 세계에 주의를 기울이는 거라고 말했지만, 저 자신에게 스스로 부과한바 작가의 소명은 온갖 종류의 허위에 맞서 공격적이고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에요.....역시 마찬가지로, 이것이 끝없는 작업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하는 일이죠. 아무리 해도 허위나 허위의식이나 해석의 체계를 끝장낼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언제나 어떤 세대에든 그런 것들을 공격하는 사람들은 있어야 하고, 그래서 전 사회비판이 오로지 정부에서만 나오는 세계 대부분의 장소들을 생각하면 심히 심란해져요.

 

-2015. 8.19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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