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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평전
안도현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6월
평점 :
도대체 무슨 심정으로 이 책을 읽게 된 것일까? 시에 문외한인데다 백석의 시는 단 한편도 읽어 본 적도 없으면서. 지은이가 안도현이어서? 안도현 시래 봐야 ‘연탄 한 장’말고 아는 것도 없으면서.
당연한 이야기지만 백석 관련 도서가 공전의 히트를 쳤다는 것도 몰랐고,
백석 시 여러 편이 요즘 교과서에 실렸다는 것도 몰랐다.
그 시대 최고의 ‘모던뽀이’였던 백석이 삼수갑산에서 ‘양치기’로 생을 마감하게 될 줄 그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1943년 4월 조선문인보국회가 창립되었다. 이광수가 회장을 맡았고, 김동환, 정인섭, 주요한, 이기영, 박영희, 김문집, 임화, 한설야 등이 참여했다. 이 단체는 명망 있는 문인들을 동원해 조선 청년들에게 중일전쟁에 지원할 것을 독려하고 촉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내는 벌써 지원하였는가
-특별지원병을-
내일 지원하려는가
-특별 지원병을 -
공부는 언제나 못하리
다른 일이야 이따가도 하지마는
전쟁은 당장이로세
만사는 승리를 얻은 다음 날 일
-이광수의 시, <조선의 학도여> 중에서
나라의 부름 받고 가실 때에는
빨간 댕기를 드리겠어요
몸에 지니고 싸우시면
총알이 날아와도 맞지 않지요
-주요한의 시, <댕기>중에서
반도의 아우야, 아들아 나오라!
님께서 부르신다, 동아 백만의 천 배의
용감한 전위의 한 부대로 너를 부르신다.
이마에 별 붙이고, 빛나는 별 불이고 나가라
-김기진의 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중에서
고운 피 고운 뼈에
한번 새겨진 나라의 언약
아름다운 이김에 빗나리니
적의 숨을 끊을 때까지
사막이나 열대나
솟아솟아 날아가라
-모윤숙의 시, <어린 날개> 중에서
남아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 위해 전장에 나감이 소원이리니
이 영광의 날
나도 사나이였다면 나도 사나이였다면
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 -
-노천명의 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중에서
물론 백석시인이 이육사처럼 항일운동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위의 시인들처럼 욕된 짓거리를 하지 않기 위해 붓을 꺽었다. 그 당시 백석은 만주로 도피 중 이었고 어느 날 해방을 맞았으나 굳이 경성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백석이 왜 38선 이남으로 월남하지 않았는지를 따지는 일은 부질없어 보인다. 백석은 굳이 서울로 갈 이유가 없었다. 그 당시 이북에서 소유하고 있던 재산을 정리해서 월남을 감행하는 사람들은 김일성과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지주나 자본가들, 정치적으로는 민족주의 우익 노선을 견지했던 사람들, 그리고 일제 말에 친일을 한 전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서울에서는 친일을 용인해준다는 소문이 그들로 하여금 짐을 싸게 만든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북한에 남게 된 백석은 소련 문학 번역에 몰두하고, 아동 시를 지었으나 정치적 사상성이 부족하단 이유로 삼수갑산으로 쫓겨난다. “불귀(不歸)로다 내 몸이야 아하 삼수갑산 못 벗어난다 아하하”라고 일찍이 김소월이 노래했던. 북한에서도 최고의 오지인 삼수갑산에서 그는 양치기로 생을 마감한다.
이제는 차분히 앉아 그의 시를 읽어야 할 시간이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내가 너를 사랑해 눈이 오다니!
내가 연애에 서툴렀던 것은 오로지 백석 시를 몰랐기 때문이다.
처마 끝에 명태를 말린다
명태는 꽁꽁 얼었다
명태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볕은 서러웁게 차갑다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明太)다
문(門)턱에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백석, <멧새소리>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
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두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 간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2014. 10.21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