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1999년 8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는 것 만으로도 마음이 여유로워지고 넉넉해 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그림도 그림이려니와 옛 선인들의 문장은 어쩜 이리 단아하고 담백할 수 있단 말인가?

 

해질 녘 서편 하늘을 물들이는 장엄한 노을 앞에 섰거나, 한밤중 아득한 천공에서 무수히 쏟아져 내리는 별무리의 합창을 들을 때, 혹은 동틀 녘 세상 끝까지 퍼져나가는 황금빛 햇살의 광휘를 온몸에 맞으면서, 어느 누가 감히 예술을 논하겠는가. 봄날 작은 꽃망울을 터뜨리는 햇가지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길고 짧고 굵고 가는, 물기 오른 여린 가지들이 이루는 조화와 오만 가지 빛깔, 그것은 기적이다. 가을 새벽 거미줄에 붙들린 조그만 이슬 알갱이에 다가서 보자. 그 깜찍한 비례며 앙증맞은 짜임새도 경이롭지만 알알이 비치는 방울 속마다 제각기 살뜰한 우주가 숨어있다.

머리말 중에서

 

김홍도의 송하맹호도

 

소나무 아래 호랑이가 문득 무언가를 의식한 듯 갑자기 정면을 향해 머리를 돌렸다. 순간 정지한 자세에서 긴장으로 휘어져 올라간 허리의 정점은 정확히 화폭의 중앙을 눌렀다. 가마솥 같은 머리를 위압적으로 내리깔고 앞발은 천근 같은 무게로 엇걸었는데 허리와 뒷다리 쪽에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서 금방이라도 보는 이 머리 위로 펄쩍 뛰어 달려들 것 같다. 그러나 당당하고 의젓한 몸집에서 우러나는 위엄과 침착성이 굵고 긴 꼬리로 여유롭게 이어지면서 부드럽게 하늘을 향해 굽이친다

 

작가의 말대로 금방이라도 호랑이가 화폭을 찢고 뛰어나올 태세다. 그러나, 소나무와 소나무 잔가지 사이의 여백이 힘을 완화시켜 적절한 균형과 조화를 이룬다. 정중동이라기 보단 동중정의 묘미라고나 할까?

 

속의 질박함이 바깥 꾸밈을 압도하면 촌스러워지고, 바깥 꾸밈이 속 바탕을 압도하면 얄팍해진다. 속과 바깥, 바탕과 꾸밈이 서로 잘 어우러진 다음에야 군자다

-       논어 옹야편

군자를 예술로 바꾸어도 무리 없지 않을까? 바탕과 꾸밈이 적절히 균형과 조화를 이룬 작품, 그것을 우린 예술이라 부른다

표구를 포함한 <송하맹호도>의 호랑이는 작가의 말마따라 철창 속에 갇힌듯한 느낌을 준다. 일제시대에 우리 그림의 7,8할이 이런 일본식 표구로 바뀌었다고 한다. 식민지 시기, 일본인들이 일본 정부의 지원아래 한국의 호랑이를 잡았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 먹어서? 아니다. 호랑이가 한민족의 기상을 상징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 속의 호랑이마저 가둘 지경인데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랴!

 

김홍도의 <마상청앵도>

 

고요한 봄날의 정적속에 ! 삐요꼬 삐요!’ 환하게 퍼지는 소리가 지척간 버드나무 위에서 들려온다. 온몸에 선명한 황금빛을 두른 노란 꾀꼬리 한 쌍이다. 선비는 말 위에서 가만히 숨을 죽인 채, 어여쁜 꾀꼬리가 노래하는 갖은 소리 굴림을 듣는다. 참 맑고 반가운 음성이요 생각 밖의 곱고 앙증맞은 자태가 아닌가. 선비의 입에서 절로 제시 한 수가 터져 나온다

 

어여쁜 여인이 꽃 아래에서 천 가지 가락으로 생황을 부나

운치 있는 선비가 술상 위에다 밀감 한 쌍을 올려 놓았다

어지럽다 황금빛 베틀 북이여, 수양버들 물가를 오고 가더니

비안개 자욱하게 이끌어다가 봄 강에 고운 깁을 짜고 있구나.

 

내리막길이라 그런지 밑으로 하강하는 중력이 느껴진다. 그러나 꾀꼬리의  ‘! 삐요꼬 삐요!’ 소리가 선비의 시선을 잡아 끈다. 선비의 올려다보는(상승하는) 시선, 버드나무 위의 꾀꼬리, 그리고 화폭 윗 부분의 여백이 하강하는 힘을 상쇄시켜 이 작품에서도 균형과 조화의 맛을 느낄 수 있다.    

 

날로 각박해지는 세상. 잠시만 짬을 내어 옛 그림을 바라보자. 봄날 꾀꼬리 소리에 가던 길을 멈추고 사색에 빠질 수 있는 옛 선비들 마음자리의 드넓은 여유를 닮아보자.

 

중년에 이르러 자못 도를 좋아해서

늘그막 집 자리를 남산에 터 잡았네

흥이 오르면 매양 혼자 그대로 떠나가니

뛰어난 경개를 그저 나만이 알 뿐이라

걸음이 다다르니 물이 끊긴 그곳이요

앉아서 바라보니 구름 이는 끄때로다

우연히 숲에서 나무하는 늙은이 만나

웃고 이야기하느라 돌아갈 줄 모르네

-       왕 유 , 당나라의 시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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