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존 버거 지음, 김우룡 옮김 / 열화당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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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도 글이지만 삶이 더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다. 미술평론으로 시작해 소설가이기도 하지만 내게 존 버거는 혁명가로 다가온다.

 

이 글은 1984년에 씌여진 버거의 에세이다. 영국 출생이지만 버거는 중년 이후 알프스 시골 마을에서 글쓰기와 농사일을 병행하고 있다고 한다.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들이 시간과 공간으로 엮였다. 시간과 공간을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한 문학, 예술, 정치, 기타등등 - 버거의 사유들을 음미해볼 수 있다. 마치 갤러리에서 그림을 둘러보는 관람객이 된 듯한 기분이다. 이곳은 버거의 방.

 

그림과 시에 대한 감상을 담은 글이 단연 눈에 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는 고호와 카라바조다.

버거 역시. 그의 책은 평생 읽어야 한다. 마치 집처럼 돌아가야 할 곳.

 

p 19.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옛 유럽의 모든 세력들이 이 유령을 몰아내기 위해 성스러운 동맹 관계에 들어갔다. 교황과 차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의 과격파와 독일 경찰의 첩자들 모두가.”라고 마르크스가 1872년 썼을 때, 그는 이중의 선언을 한 셈이 된다. 오늘도 그렇듯이 부자들이 혁명을 두려워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 그 하나이다. 다음으로 그는 새로운 경향성에 대해 말한다. 모든 현대적 사회는 스스로의 덧없음을 자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p25. 19809월 쿠데타 이후, 이들 다섯이 속해 있는 좌파 노동조합연합인 DISK는 다른 여러 정당과 함께 불법 단체로 규정되었다. 적어도 오만 명이 체포되었다. 검찰은 수백 명에게 사형을 구형했는데, 특히 전투적인 노동조합원들에 대해 그랬다. 더 많은 이름들을 불게 하고 관련자들을 색출하기 위한 고문과 인간 사냥이 조직적으로 자행되고 있다....... 수 천의 사람들이 소식도 없이 사라지고 있다. 지금까지 최소 팔십 명이 고문으로 죽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이 다섯 사람 가운데 적어도 한 사람은 아마 이 시간 고문당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P29. 시의 한때.

 

시는, 비록 해설적인 경우에라도 소설과는 다르다. 소설은 승리와 패배로 끝나는 모든 종류의 싸움에 대한 것이다. 소설 속에서는 모든 것이 결과가 분명히 드러나게 되는 끝을 향해 진행해간다. 시는 그런 승리와 패배에는 관심이 없다. 시는 부상당한 이를 돌보면서, 또 승자의 환희와 두려움에 떠는 패자의 낮은 독백에 귀를 기울이면서, 싸움터를 가로질러 간다. 시는 일종의 평화를 가져다준다. 값싼 안심이나 마취에 의해서가 아닌, 일단 한번 경험된 것은 어떤 것이라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라질 수 없다는 약속과 인식에 따른 평화이다.

 

시는 소설보다는 기도 쪽에 더 가깝다. 하지만 시에는 그 언어 이면에, 기구의 대상이 되는 어떤 존재도 없다. 언어 그 자체가 듣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종교적 시인에게 말은 신의 첫째 속성이었다. 모든 시에서, 낱말들은 소통의 수단이기 이전에 하나의 현존이다.

 

P31. 암스테르담에서의 한 때.

 

렘브란트만큼 나이가 들어가는 과정을 그려내는 데 달인이었던 화가가 없었고, 렘브란트만큼 자신이 사랑하던 여인을 친근하게 그려 우리에게 남겨 준 사람도 없다. 여러 가지 추측을 담고 있는 기록들이 있지만, 헨드리키에와의 사랑은, 화가가 죽기 육년 전 헨드리키에가 죽을 때까지, 이십 년 간 이어졌다는 것이 그림들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루브르 박물관의 <밧세바>와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목욕하는 여인> 앞에서 나는 말을 잃는다. 그림들이 보여주는 천재성 때문이 아니다. 그 그림들이 연유되는 그리고 그림들이 표현하고자 한 삶의 경험들 세상의 역사만큼 끈질기게 스스로 드러나는 욕망, 세상의 끝 같은 미묘함, 낯익은 몸에 대한 사랑을 마치 처음처럼 끝없이 재발견해 가는 눈 이 모든 것들은 말 이전에 다가와 말의 영역 너머로 옮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그림들도 그토록 능숙하게 또 강력하게 침묵을 이끌어내지는 못한다.

 

베개에서 일어나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그녀는 손등으로 커튼을 들어올리고 있다. 손바닥과 얼굴은 이제 사랑할 준비가 다 되어 있다는 제스처를 보이면서 사랑의 행위를 환영하고 있다. 그녀는 아직 잠들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다가오는 남자를 따라 움직이고 있다. 그녀의 얼굴에서 둘은 하나로 합쳐져 있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침대 속 그녀의 이미지와, 그녀 얼굴 속에 나타나 있는 침대로 다가오는 그의 이미지. 이제 이 두 이미지를 분리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밤인 것이다.

 

P35. 그림의 한때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는 때는 언제인가? 그것은 그림이 이미 있는 어떤 사물에 꼭 들어맞을 때가 아니다. 화가가 그리 되어야 한다고 느끼고 의도한 대로 그림이 보이는, 예측했던 이상적 순간이 이루어지는 때를 말한다. 하나의 그림을 그리는 길고 짧은 과정은 그런 순간을 구성해가는 과정이다. 물론 그림이 보이는 순간에 대한 완벽한 예측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그 순간을 회화로 완벽히 성취하는 것 역시 가능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회화는 본질상 그 순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음악을 작곡할 경우, 시간을 사용하기 때문에 시작과 끝을 가질 수밖에 없다. 회화는 물리적 대상으로 볼 경우에 한해 그 시작과 끝이 있다. 이미지의 차원에서는 시작과 끝도 없다.

 

회화이미지의 부동성이 영원성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과거, 현재, 미래는 영원성이라는 공통의 토대 위에 존재한다. 이 사실이 중요하다.

 

회화가 정적이기 때문에, 회화 예술의 언어는 이런 영원성의 언어이다. 그러나, 그 언어는 기하학과 달라서 심미적이고 개별적이며 덧없는 것에 대해 얘기한다.

 

p40. 렌즈를 통해 본 한때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하나의 렌즈를 통해 보듯, 모든 것을 본다. 이 렌즈야말로 소설 작법의 비밀이다. 렌즈는 덧없음과 영원 사이에서 매소설마다 새롭게 연마된다.

우리 작가들이 죽음의 서기들인 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짧은 삶 속에서 이 렌즈들을 연마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P47 지나간 어느 한때

 

전후의 이어짐과 상관없이 어느 한 시기에 일어난 역사적 내용만을 담아내는 것이 시간이라고, 단테는 생각했다. 역사의 목적은, 이와는 반대로 모든 이가 시간의 의미를 탐구하고 정복하는 데 있어 형제요 동료가 되도록, 시간을 한데 아우르는 것이다. ” -오시프 만델슈탐.

 

P51. 엔트로피의 개념은 죽음의 신의 모습을 과학적 원리로 풀어낸 것이다. 그러나 죽음이 삶의 한 상태로 생각되어 왔던 것과는 달리, 엔트로피는 지금 살아 있는 것들뿐 아니라 생명 그 자체를 소진시키고 절멸시킨다고 주장되고 있다. 에딩턴이 말한대로 엔트로피는 시간의 화살이다.

시간을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힘으로 인식하는 근대적 변환은 헤겔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헤겔은 역사의 힘에 대해 낙관적이었다......그 뒤, 마르크스는 이 역사의 힘이 인간의 행동과 선택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P72. 원래 집이란 말은 세상의 중심을 의미했다. 지리적이 아닌 존재론적 의미에서 그랬다. 미르체아 엘리아데는 집이 어떻게 세상의 기초가 되는가를 보여주었다. 그는 집이 실재의 중심에 세워져 있다고 말했다. 전통 사회에서는 세상의 의미있는 모든 것들은 다 실재였고, 그 세상의 밖에는 위협적인 혼돈이 존재했다. 그것들이 위협적이었던 이유는 비실재적이기 때문이다.

 

집이 세상의 중심인 까닭은 그곳에서 수직과 수평의 선이 교차하기 때문이다. 수지교선은 위로는 하늘로 아래로는 땅으로 향하는 하나의 길이다. 수평선은 다른 곳을 향해 가로질러 가는 땅 위의 모든 길을 말한다. 따라서 집은 하늘의 신과 또 땅 속의 죽은 이들과 가장 가까운 장소이다......또한 집은 지상에서의 모든 여행이 시작되는 곳임과 동시에 희망을 가지고 되돌아오는 곳이기도 하다.

 

두 선의 교차, 그리고 그 교차가 약속하는 확신은 유목민의 생각과 믿음 속에 아마도 이미 자리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천막 기둥을 가지고 다닌 것처럼, 수직선을 지니고 다녔다.

 

이주는 무언가를 뒤에 두고 떠나는 것, 바다를 건너는 것, 낯선 사람들 가운데 사는 것만이 아니라, 세상의 의미 자체를 해체하고, 최악의 경우 어리석은 허구에 자신을 방기하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이주는 총구에 의해 강제되지 않은 경우엔, 절망뿐 아니라 희망에 의해서도 촉발된다.

 

그러나 이주는 항상 세상의 중심을 뒤엎는다. 또한 인간들을 방향 잃고 상실된 파편들로 바꾸어 놓는다.

 

 

P92. 동물에게 자연환경과 서식지는 그저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경험주의자들의 믿음과 달리, 인간에게는 그에게 필요한 실재가 그저 주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추구되어야만 한다. 나느 그런 인간의 실재에 대해 구원받는다라는 말을 쓰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실재는 늘 저 너머에 놓여있다. 이런 사실은 유심론자들에게처럼 유물론자들에게도 맞는 말이다. 플라톤과 마르크스 둘 다에게 말이다. 실재는 어떻게 해석하든 간에 진부한 상투성의 장막 저편에 가려져 있다. 모든 문화는 스스로의 수행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그리고 스스로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그런 장막을 만든다. 실재는 권력을 지닌 자들에게 적대적이다.

 

P93. 그러나 많은 예술가들은 정작 장막 너머 그들이 발견한 것들을 스스로의 재능과 예술가로서의 사회적 지위에 유리하도록 왜곡시켜왔다. 그들은 예술은 위한 예술의 갖은 이론들을 동원하여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그들은 말한다. 예술이 실재라고. 그들은 실재로부터 예술적 소득을 짜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다. 반 고흐야말로 이런 부류들에게서 가장 멀리 있었던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편지를 통해 그가 상투성의 장막을 얼마나 명확히 의식하고 있었던지를 알 수 있다. 그의 전 생애는 실재에 대한 끝없는 갈망이었다. 색깔, 지중해의 기후, 태양 들은 그에게 실재에 이르게 하는 도구들이었다. 그것들은 그것 자체로서 동경의 대상이 되어 본 적이 없었다. 이런 갈망은, 그가 어떤 실재도 전혀 찾지 못했다고 느꼈을 때 겪게 되는 위기감에 의해 더욱 깊어지기도 한다.

 

 

의자, 침대, 구두 한 쌍. 그것들을 그린 그의 행위는 목수나 구두공이 그 물건들을 만드는 행위에 다른 어떤 화가들보다 더 가까이 가 있다. 그는 제품의 부품들 다리, 가로목, 등받이, 앉음판 또는 구두창, 앞가죽, 구두혀, -을 모아, 마치 실제로 물건을 만들 듯이 그것들을 결합시켰는데, 결합이야말로 그 물건들의 실재를 드러내는 듯 했다.

 

그는 미친 듯이 강박적으로 그렸다. 다른 어느 화가도 그와 비견될 만큼 강박적이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의 강박증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작품에서의 두 동작 캔버스에 나타난 그리는 동작과 그 동작이 그려내고 있는 실재-을 보다 가깝게 근접시키는 것이었다. 이 강박증은 예술에 대한 생각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라 어떤 강렬하고 압도적인 공감으로부터 연유된 것이다.

나는 황소, 독수리, 이런 것들을 존경한다. 그리고 내 야망을 무색케 할 만큼 강렬한 열망을 가진 사람을 존경한다.”

더욱 강박적으로 가까이 다가가고 또 다가갔다. 극단적인 경우, 그는 너무 가까이 다가가서 밤하늘의 별은 빛의 소용돌이가 되었고, 사이프러스 나무는 바람과 햇빛의 에너지에 반응하는 살아 있는 신경덩어리가 되었다.

 

P99. 이별은 작은 죽음이다. (Partir est mourir un peu).....그것은 내가 이미 깨닫고 있던 진실을 표현하고 있었다. 생각하건대, 이 세상이 마치 내가 결코 얼굴을 맞대고 당신을 만날 수 없는, 하나의 형체 없는 마을처럼 여겨지는 경험, 그런 당신 안에서 살아가는 경험- 이 경험은 죽은 자의 기억과 함께 살아가는 경험과 약간 비슷한데 때문에 나는 지금 이 문구를 기억한다. 아주 어렸을 때 내가 몰랐던 것은, 그 어떤 과거를 완전히 앗아가지는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p100. 언젠가 침대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가 누구냐고 당신은 물었다. 나는 정직한 답을 하기 위해 내가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화가들을 떠올리며 길게 머뭇거린 후, 카라바조라고 대답했다. 내 스스로 내 대답에 놀랐다. 더 고상한 화가들도 많았고 더 폭넓은 안목의 화가도 많았다. 내가 더 존경하는 화가도, 더 존경받을 만한 화가도 많았다.....내가 더 가깝게 느낀 화가는 그 말고는 없었다.

 

그의 어둠에서는 초와 농익은 멜론의 냄새, 다음날 내어 널리기를 기다리는 축축한 빨랫감들의 냄새가 난다. 그것은 층계참과 구석진 노름판의 어둠, 싸구려 여인숙의 어둠과 황급한 마주침이 있는 어둠 등이었다. 그리고 희망은 그 어둠을 사르는 불꽃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어둠 자체에 있다. 명함 대조법이라는 기법 자체가 폭력과 수난, 동경과 죽음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그림에 제시되어 있는 피난처가 상대적이긴 하다.

 

 

<마태의 부름>에서는 일상적인 테이블에 둘러앉아 수군거리면서 장차 해야 할 일에 대해 자랑하고 돈을 헤아려 보고 있는 다섯 남자가 그려져 있다. 방은 희미한 불빛으로 밝혀져 있다. 갑자기 문이 활짝 열린다. 문으로 들어온 두 사람과 함께 거친 소음과 밝은 빛이 화면 속으로 침입하고 있다. 마태의 동료 두 사람은 침입자들을 쳐다보기를 거부하고, 다른 두 젊은 사람은 낯선 그들을 호기심과 겸양을 섞어 대한다. 왜 그토록 무모한 제의를 하는 것일까. 저 깡마른 두 사람은 누구를 믿고 모든 얘기를 혼자 다 하고 있는 것일까. 떳떳지 못한 양심 때문에 함께 있는 동료들보다 더욱 이성을 잃는 마태는 스스로를 가리키며 묻는다. 정말 내가 가야 한단 말인가 하고. 진정으로 당신을 따라가야 할 사람이 나인가 하고. 얼마나 많은 떠남에의 선택이 여기서의 그리스도의 손과 닮아 있는가! 그 손은 결단해야만 하는 사람을 향해 함께 떠나기를 제안하지만 너무 부드럽고 불확실한 손이라 붙잡기가 힘들다. 가야 할 방향을 명령하지만 직접적으로 도와주지 않는다. 마태는 일어난다. 그는 낯설고 야윈 이를 따라 방을 나오고 좁은 길을 내려와 그 지역을 벗어날 것이다. 그는 그의 복음서를 쓸 것이고 에티오피아와 카스피 바다 남쪽과 페르시아를 돌아다닐 것이다. 그리하여 아마도 살해될 것이다.

 

맨 위층 다락방에서 있었던 이 결단의 드라마에는 바깥 세상으로 이어지는 창문이 하나 보인다. 전통적으로로 회화에서 창문은 빛의 공급원으로, 또 자연이나 바깥일들을 본보기로 보여주는 하나의 틀로 취급되어 왔다. 그러나 이 창문은 그렇지 않다. 창문은 불투명하여 들어오는 빛도 없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밖을 보지 못한다. 바깥은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최악의 소식들만이 창을 통해 전해진다.

 

p106 그의 인물들은 주어진 제재 속에서 모호한 성적 몸짓을 드러낸다. 여섯 살 먹은 아이가 마돈나의 몸을 만진다. 마돈나의 그의 셔츠 아래로 손을 넣어 보이지 않게 허벅지를 어루만진다. 한 천사는 마치 창녀가 늙은 손님을 대하듯이 성 마태의 손등을 두드리고 있다. 어린 세례 요한은 양의 앞발을 자신의 다리 사이에서 마치 성기처럼 쥐고 있다. 카라바조 그림의 거의 모든 붓질에는 성적인 부하가 걸려 있다. 아주 다른 두 물질 (모피와 피부, 옷과 머리칼, 금속과 피)이 서로 접촉하더라도 그 접촉은 만지는 행위로 변해 버린다. ......나는 그리스의 빼어난 시인 카파비를 떠올린다.

 

한 달여간 우린 서로 사랑했네.

그런 후 그는 떠났다네. 아마도 스미르나로,

일자리를 찾아. 우리는 다신 만날 수 없었네.

 

살아 있다 해도, 이제 그 회색 눈동자에는 아름다움 지워지고,

그 빛나던 얼굴 또한 많이 상해 있겠지.

 

, 기억이여, 그것들이 있던 그대로 보존해 주렴.

기억이여, 그대가 나의 이 사랑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지나간 것들을 오늘 밤 내게 되돌려 주는 것이라네. 그것들이 그 어떤 것이든.

 

 

 

 

p107. 오직 카라바조의 그림에만 있는 특이한 얼굴 표정이 있다.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에서의 유디트의 얼굴, <도마뱀에 물린 소년>에서의 소년의 얼굴, 물 속을 바라보고 있는 나르시스의 얼굴, 골리앗의 머리채를 쥐고 있는 다윗의 얼굴 등에서 나타나는 표정이다. 그것은 전심을 기울이는 데 따르는 폐쇄성과 개방성, 취약성과 힘, 동정과 결단력의 표정이다. 그러나 이 단어들에는 너무 윤리적인 냄새가 난다. 나는 짝짓기 전과 죽음을 당하기 직전의 동물의 얼굴에서 이와 유사한 표정을 보아왔다.

 

욕망의 대상 안에서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것. 카라바조는 사람의 몸을 그리면서 어떻게 그것을 표현할 수 있었을까......욕망의 대상이 되는 육체는 낮의 어둠이진 밤의 어둠인지가 중요치 않은, 이 행성에서의 삶 그것 자체가 어둠 속에 드러나 있다. 마치 유령처럼 타오르는 이 욕망의 대상은 어떤 도발적인 몸짓에서가 아니라, 숨김없는 직관 그 자체에 의해 표피 저편에 숨어 있는 우주를 약속하면서 그곳을 향해 떠날 것을 유혹한다. 그 얼굴에서는 단순한 제안보다 훨씬 더 나아간 표정이 드러나 있다. 그것은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세상의 잔혹성을 받아들이며, 하나의 선물로서의 함께하는 잠자리를 받아들인다. 여기서. 지금.

 

p120 모든 제대로 된 시는 시의 노동에 공헌한다. 그리고 간단없는 이 노동의 임무는 삶이 나누어 놓은 것, 폭력이 찢어 놓은 것을 다시 이어주는 것이다......시는 상실을 회복시킬 수는 없지만 인간을 분리하는 공간에 대해 반항한다. 시는 흩어진 것을 다시 모으는 지속적인 노동을 통해 이런 일을 행한다. 삼천오백년 전 한 이집트 시인은 이렇게 썼다.

 

, 내 사랑,

당신의 눈앞에서

연못으로 내려가

멱을 감는 것은

얼마나 달콤한지요.

물에 젖은 나의 무명옷이

내 아름다운 몸에 감긴 것을

당신에게 보여주는 것은

얼마나 달콤한지요.

오세요, 나를 보세요.

 

p121. 시는 이러한 은유의 방법 외에도 시가 이를 수 있는 넓고 높은 경지를 통해 나뉜 것들을 다시 모은다. 시는 감정이 미치는 범위와 우주의 범위를 동등하게 다룬다. 일정한 극한의 경지에 이르면, 그것이 어떤 종류인가는 문제가 되지 않고, 다만 그 경지의 정도만이 중요하다. 그런 경지에 의해서 여러 다른 극점들은 서로 하나가 된다. 안나 아흐마토마는 이렇게 쓴다.

 

당신과 꼭 마찬가지로 나는

영원한 검은 이별을 견딥니다.

왜 울고 있나요? 차라리 당신 손을 주세요.

꿈속에 다시 오마고 약속하세요.

당신과 나는 슬픔의 산맥이어요.

이승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어요.

밤의 한가운데,

별들을 통해 내게 인사를 보내 주세요.

 

p122, 시는 언어로 하여금 배려하게 한다. 모든 것을 친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시가 행하는 노동의 결과로 이 친밀함은 태어난다. 모든 행위와 단어와 사건을, 그리고 시가 나타내는 관점을 가깝게 한데 모은 결과인 것이다. 이런 배려보다 더 본질적으로 세계의 잔혹함과 무관심에 맞서는 것은 없다.

 

어디로부터 고통은 우리에게 왔는가?

어디로부터 그것은 왔는가?

고통은, 까마득한 먼 옛날로부터

통찰의 형제였고,

시의 길잡이였다.

 

시인 나지크 알 말라이카는 이렇게 쓰고 있다.

사건들 속에 침묵을 깬다는 것, 아무리 가혹한 경험이라 해도 그것을 말로 옮기고 단어들로 바꾼다는 것은, 그 단어들이 이윽고 들릴 때 그 원래의 사건들이 심판받을 것이라는 희망을 발견하는 행위다. 이 희망은 기도의 근원이 되고, 기도는 노동과 함께 말 그 자체의 근원에 자리한다. 언어의 모든 쓰임새 중에서 이 근원에 대한 기억을 가장 순수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이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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