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이론의 모든 것 - 신비평부터 퀴어비평까지
로이스 타이슨 지음, 윤동구 옮김 / 앨피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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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표현은 이젠 너무 물린다. 이 책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결국 이 식상한 표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분야를 배우면 이걸 알 수 있고 저 분야를 배우면 저걸 알 수 있다는 하나 마나 한 이야기를 하고자 저자는 무려 900쪽이 넘는 지면에 그것을 부려 놓은 것일까? 결국, 이 책도 한때 내가 탐미하고자 했으나 이제는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꽂힌 책들의 한켠을 차지하게 될까?

    

물론 아니다. 저자는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이 상투적인 표현을 조금 비틀어 생각해보라고 권한다. 그러니까, 당신은 여기서 거기까지 어떻게 가는 지를 모를 뿐”(p.42)이라고. 해서 나는 복기해본다. 그동안 나는 아는 만큼 보기 위해 등교를 하고 책을 읽고 기술을 배워 지식을 쌓아왔다. 그런데 이상하다. 세상은 도무지 배운 만큼의 해석본을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용을 지불했으면 편익이 따라야 하는거 아닌가? 그런데 이놈의 세상은 '그게 아니야'라고 내게 말하는 듯했다. 그동안 머리에 꾸역꾸역 '욱여넣은' 지식은 다 어디로 간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때쯤, 저자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그런데 이 한 발짝이 내게는 의미심장하다. 마치 몰이해의 불구덩이 입구에서 이해의 정원으로 나아가는 회심의 한 발짝처럼 느껴진다.

    

이 책은 존재 자체로 그 해답을 제시한 셈이었다. 그것은 바로 지식의 '이론화'다. 여태껏 나는 지식과 이론을 동일하다 생각해왔지만 착각에 불과했다. 둘은 엄연히 다른 '성질'을 가졌다. 이 책에 따르면 지식은 말 그대로 지식일 뿐이고 이론은 그것을 체계화한 '도구'인 것. 예컨대 지식이 금속 덩어리와 유리 조각이라면 이론은 그 금속 덩어리와 유리 조각으로 세공해낸 '안경'이다. 자본론으로 배운 마르크스의 통찰이 지식 그 자체라면 그것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한 게 마르크스주의 비평이론인 것이다. 자, 이제 자명해진다. 머릿속에 꾸역꾸역 욱여넣었던 그것들은 내가 그저 안다고 착각한 지식의 덩어리였을 뿐이라는 것을. 그렇다면 안경은 무엇에 쓰는 도구인가?

    

안경은 세상을 좀 더 명확하게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또 다른 눈이다. 저자는 책을 통해 이 점을 딱히 설명하진 않았으나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듯 이 책 자체가 그 산물이다. 이론(도구)을 내 것으로 만들었을 때 비로소 삼라만상을 해석하고(이는 물론 수준 여하에 따라 다르겠지만) 거기서 무언가를 이끌어낼 수 있게 된다는 사실 말이다. 이 책은 이론화의 유용성을 존재 자체로 증명한 저작이다. 이쯤에서 드는 의문. 이론을 정해두고 세상을 해석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그 의문, 나는 접어두리라. 주지하다시피 인간은 이미 어떤 이론을 가지고 세상을 감각한다. 다만 그 이론이 뭉뚱그려져 도구로서 쓸만하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이론'화'가 중요할 터. 여기서 자신을 천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론화는 그야말로 쓸모없는 방식이겠지만 어쩔 거나. 나는 천재가 아닌데. 나는 무지몽매 덩어리다. 그래서 이 책이 알려준 이론화의 유용함이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저자가 숨겨둔 세심한 배려 하나를 더 찾았다.

    

책은 비단 수록된 비평이론뿐만 아니라 그동안 쌓은(혹은 쌓을) 지식을 이론화했을 때 어떤 도구로서 탄생하게 될지 일말의 기대감을 심어준다. 하지만 거기까지. 저자는 더 나아가지 않는다. 이것이 위에서 말했던 저자가 숨겨둔 배려다. ‘세상에는 이러한 이론들이 존재하고 수많은 문학작품이 그 이론들로 의미를 찾았다, 이상 알려주지 않는 것’ 말이다. 요컨대 맺지 않고 가능성을 넌지시 내비친 것이다. 이것은 좋은 입문서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이 마음에 든다. 다른 세상의 존재를 알려주고 그것을 더 깊이 알게끔 창문을 활짝 열어두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몫은 내 일이 아니다, 라고 저자는 긴긴 페이지에 걸쳐 나를 설득하고 물러난다. 그 배려에 나는 설득당했다. 뭔가를 더 배우고 싶어졌다. 신경숙(이 아니라 미시마 유키오)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해석의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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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1-24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 마지막 문장 좋네요.. 그나마 신경숙이 있었기에 저 문장이 친숙한 거 아니겠습니까. 경숙 씨 고생하셨셔셔여..

5DOKU 2016-01-24 17:21   좋아요 1 | URL
신경숙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5DOKU 2016-01-24 17:38   좋아요 0 | URL
아 갑자기 생각난 건데 혹시 이 책과 비슷한, 그러니까 비평이론을 다루는 괜찮은 책이 있으면 추천해주실 수 있을까요? 곰곰님께서는 이쪽 분야에 해박하신 듯해서

곰곰생각하는발 2016-01-24 21:36   좋아요 0 | URL
비평 개론서 말씀하시는 겁니까 ? ㅎㅎ 사실 제가 문예 이론.. 이쪽에 약합니다.
이 질문에 문득 든 책은 밀란 쿤데라의 << 소설의 기술 >> 이라는 책입니다.
개인적으로 쿤데라 책 가운데 제가 항상 3손가락 안에 드는 책입니다. 함 읽어보시지요..

가자아 유명한 것은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프랑코 모레티의 << 공포의 변증법 >> 도 읽을 만한 책이비다..

5DOKU 2016-01-24 21:51   좋아요 0 | URL
담아놓겠습니다. 추천 감사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1-25 15:33   좋아요 0 | URL
프랭크 모레티의 공포의 변증법은 워낙 유명한, 전설처럼 떠돌던 논문이었습니다. 제가 봐도 기똥차게 잘쓴 비평이죠. 저도 이걸 보고 놀랐습니다. 그가 말하길
드라큘라는 자본가를 의미하고 프랑켄슈타인은 노동자를 대변한다고 하죠. 함 읽어보십시오. 무릎 탁 치게 됩니다..

5DOKU 2016-01-25 15:36   좋아요 0 | URL
자본가와 노동자라... 뭔가 월척의 기운이 느껴지네요.
 
재능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제프 콜빈 지음, 김정희 옮김 / 부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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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미로를 통과하기 위한 가장 간단한 방법은 바로 '한쪽 벽만 따라 걷기'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시시한 방법론을 들먹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뭔가 거창하고 멋진 방법이 아니면 해결을 위한 가장 기본적이며 간단한 진리는 무시당하기 일쑤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손이 많이 가기 때문일 터. '그걸 누가 모르나', '그걸 누가 못 해?'라고 말하며 새롭고 간단하며 특별한 방법을 찾으려 시간을 허비하다 그렇게 미로 속에 갇혀 버리는 삶의 연속.


이 책의 저자 제프 콜빈이 말하고자 하는 건 간단하다. ‘지름길 따위는 없다’는 것. 그는 다양한 자료를 통해 우리가 아는, 이른바 천재라고 불리우는 많은 이가 실상 ‘타고난 재능’이라는 말의 피해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분명 그들은 타고난 재능의 덕을 본 게 확실하나 그 재능을 이끌어내기 위한 피나는 연습이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정답은 ‘노오력’이라는 건가? 물론 그딴 진부한 잔소리나 듣자고 이 책을 펼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대신 저자는 이 노력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다. 요컨대 노력에도 일종의 기술이 있다는 얘기다. 나는 이것을 자칭 ‘설계된 노오력’이라 부르기로 했다. 저자는 1만 시간의 법칙 따위나 믿고 주구장창, 허구한 날 연습만 한다고 해서 실력이 느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천재들을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다 멍청한 연습법 때문이며 천재들이 실상 ‘설계된 연습’을 거쳤기에 탄생했다고 주장한다.




위대한 성과의 수수께끼를 가장 시원하게 해결해 주는 듯한 열쇠는 학자들이 '신중하게 계획된 연습(deliberate practice)'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신중하게 계획된 연습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밝히는 문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중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일을 하면서 신중하게 계획된 연습을 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것이 일터에서의 커다란 수수께끼, 즉 수십 년 동안 같은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결코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에 대한 의문을 해소시켜 준다. 또한 사람들은 대개 골프나 악기 연주 같은 취미 활동을 할 때도 신중하게 계획된 연습을 하지 않는다. 신중하게 계획된 연습은 어렵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통한다. 이런 연습을 많이 할수록 위대한 성과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엄청난 양의 계획된 연습이 곧 위대한 성과로 통하는 길이다.

p.17



어떤 만화였는지, 어떤 캐릭터가 했던 말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렇게 인간은 재미있는 존재인 것이다. 만고불변의 진리는 가까이 있는데 애써 외면하다 무너질 자충수를 다들 DNA에 아로새기고 태어나기라도 하는 것일까? 나조차도 지름길이 이끄는 욕망을 버리기가 쉽지 않다. 어쩌면 '열심히' 하기 싫은 마음을 부정하는 무의식의 발현인지도 모르겠다. 꾸준과 성실은 특별한 기술이 아니라 빤히 보이는 길을 연민이 걷을 줄 아는 자의 뚝심에서 비롯되는 것인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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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서유기 1 대산세계문학총서 21
오승은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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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오래된 구전 설화에 무슨 할 말이 더 있을까? 많은 이가 돌 원숭이 미후왕 손오공과 저팔계 그리고 사오정의 모험 이야기를 잘 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이 이야기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부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진정 ‘잘’ 아는가? 결론부터 말하겠다. 나는 이제야 총 10권으로 구성된 완역본 시리즈의 단 1권만을 읽었을 뿐이지만, 내가 지금껏 알던 이야기는 극히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은 총 10권 중 1권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삼장이 아직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으니 말이다.


1권은 전체 이야기의 아주 극 초반, 일부분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야기가 등장한다. 손오공의 탄생기부터 이 원숭이 요괴가 온갖 술법을 익혀 옥황상제의 역린을 건드렸다가 석가여래에게 찍혀 오행산에 갇히는 과정, 여기에 관음보살이 석가여래의 법지를 받고 서천 여정에 오를 이를 위한 채비를 하는 과정, 더불어 진현장의 출생과 관련된 가문의 슬픈 이야기 그리고 용왕으로부터 시작된 당태종의 기이한 저승 왕래기까지. 


이렇게 크게 세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손오공, 진현장, 당태종)되는데, 당태종이 어째서 진현장을 선택했는지, 진현장은 무엇 때문에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불경을 찾으러 가는지 등 축약본만 읽었다면 몰랐을 법한 맥락이 여러 군데 드러난다. 동시에 역자인 임홍빈의 친절한 주석과 더불어 원전에 실린 한시(漢詩)가 중간마다 삽입되어 있어 읽는 맛을 한층 돋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완역본이라는 사실에 지레 겁부터 먹고 펼쳐 들었다가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는 즐거움을 맛봤다.


췌언이지만, 전체 이야기의 10%에 해당하는 이번 편으로 곧 등장할 주요 인물들의 특징과 사연을 짤막하게라도 모두 소개한다는 점에서 저자 오승은이 참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건 오늘날 할리우드 스토리 공학에서도 쓰이는 기법(궁금하다면 블레이크 스나이더의 『Save the Cat!』 시리즈를 읽어보시라)인데 말이다. 재능있는 이야기꾼들만의 본능인 걸까? 신기한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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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 수필
최민자 지음 / 연암서가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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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좀 지긋하신 분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아이고 말도 마라. 내 인생 책으로 엮으면 열 권도 넘게 나올 거다.”


근데, 경험도 백날 해봐야, 정리하고 엮어서 결과물로 만들려는 '욕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글은 나오지 않는다. 사소한 상황에 스쳐 갔던 작은 감정 하나를 포착해 기어이 글 한 편을 완성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생을 보고 듣고 먹고 만나고 '사유해도' 그걸 쓰고자 하는 의욕과 욕망이 없었기에 백지에 단 한 글자를 쓰기가 어려운 사람이 있다. 


기록은 여러모로 중요하다. 살면서 뭔가를 자꾸 사유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물론 의미는 있겠지만, 그보다 한 차원 높은 게 바로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기록은 그 과정만으로도 내 사유를 형상화할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다. 생각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기록해두지 않으면 잊히지 마련이다. 망각의 동물인 인간에게는 특히 중요하다. 당장 쓸모없는 끼적임일지라도 훗날 그런 사유의 과정 자체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뭔가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최민자는 그런 방면에서는 이미 경지에 오른 수필가이다. 아마 이분의 일상은 기록으로 시작해 기록으로 끝나지 않을까? 기록하고자 하는 욕망을 기본적으로 품고 생활하는 사람에게 세상은 좀 더 다양한 모습을 열어 보일 테니까.


'똑같은 것을 다르게 보여주기'. 제일 어렵다. 이건 기술이다. 능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 '다른 것', '보이지 않는 것'을 찾는 거겠지. 왜냐, 그게 더 쉬우니까. 다른 것은 일단 품을 좀 팔아야겠지만 찾으면 결국 나온다. 그런데 빤한 걸 다르게 보여주는 건 한 차원 높은 '기술'의 영역이다. 찾는 게 아니라 만들어야 하니까. 같은 휴대 전화라도 뒤에 사과 로고가 박혀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해야 할지.... 최민자 작가는 아무렇지 않게 쓰는 듯하지만 나름 엄청난 공을 들였을 게 틀림없다. 그녀를 거쳐 간 종이 수만 해도 내 컴퓨터 하드는 가득 채우지 않을까?


해서 나도 좀 쓰고 싶다. 경험을 매개로 글을 완성하자는 생각보다는 일단 한 줄 갈겨놓고 경험을 이끌어내는 방향으로 말이다.




기계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문명이 인간을 소외시킨다 하지만 소외당한 사람과 불평 없이 놀아주는 것도 기계다. 인종이 다르다고, 나이가 많다고, 부자가 아니라고 원칙 없이 내치는 법이 없고, 백 번 천 번 같은 일을 시켜도 불평을 하거나 짜증을 부리지 않는다. 감정도 융통성도 없는 기계라지만 기계야말로 인간보다 인간적일지 모른다. 아니 기계적이라는 말이 인간적이라는 말보다 한 수 위의 덕목일지도 모른다.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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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관한 생각 -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생각의 반란!
대니얼 카너먼 지음, 이진원 옮김 / 김영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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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자 적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이 책의 번역이다. 나는 이 책에 별점 4.5개를 줬지만 어디까지나 번역에 관련된 문제는 제외한 점수다. 굳이 번역까지 평가하자면 나는 이 책에 별점 자체를 주고 싶지 않다. 번역의 질만 따지자면 정말 최악의 책이다. 읽던 당시 너무 황당해서 출판사 웹 사이트를 찾아갔는데 나와 비슷한 불만을 느낀 독자들이 꽤 많이 보였다. 역시나 개정판 출간 예정은 없다는 소리만 듣고 나왔는데, 행동 경제학 창시자의 기념비적인 저서를 쓰레기로 만든 출판사는 반성을 좀 했으면 싶다.


그럼에도 내가 이 책에 높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대니얼 카너먼 교수의 흥미로운 연구 기록들이 이 책에 총망라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좋은 책을 정의할 때 흔히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 내가 모르던 사실을 알려주는 책. 둘째, 다 아는 사실을 새롭게 보여주는 책. 이 책은 전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 분야에 무지한 나로서는 그의 연구 모든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여기다 적기에는 이미 출판사 서평이나 언론사 서평으로도 읽을 수 있으니 필요 없을 듯하고(시스템 1과 시스템 2로 명명된 연구는 『넛지』라는 책에 쉽게 소개되어 있다.) 그보다 내가 가장 흥미로웠던 논의를 한 가지 언급하고자 한다. 이른바 ‘경험하는 자아 vs 기억하는 자아’.


요컨대 경험하는 자아는 ‘지금 기분 어때?’에 대답하는 자아이고 기억하는 자아는 ‘아까 어땠어’에 대답하는 자아이다. 카너먼 교수는 사람들이 행복에 대해 말할 때 후자, 즉 기억하는 자아에만 의지하는 성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어떤 영화를 정말 즐겁게 감상했지만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때 사람들은 러닝타임 내내 즐거웠던 경험을 모두 잊고 결말에 대한 불쾌한 감정만으로 영화를 평가한다는 것이다. 카너먼 교수는 이것이 우리 인간들이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고 말한다.


듣고 보니 그렇다. 문득 현재를 즐기지 못하고 살아가는 나, 여행을 가서도 그 순간을 즐기지 못하고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 한 장에 목숨을 거는 내 모습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 책이 좋은 이유는 이렇듯 단순히 ‘경제’에만 한정된 딱딱한 연구 자료를 제시하고 끝내지 않고 인간 행동 일반을 쉽게 풀어쓴 저작이기 때문이다. 다만, 국내에 번역된 그의 저작이 현재까지는 너무 적은 듯해서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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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가 2016-01-22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5DOKU 2016-01-22 13:07   좋아요 0 | URL
작년에 ‘생각의 해부’라는 책이 나왔더라고요. 기회가 되면 꼭 읽어볼 생각입니다.

징가 2016-01-22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의 해부 꼭 읽어 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