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 수필
최민자 지음 / 연암서가 / 201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이 좀 지긋하신 분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아이고 말도 마라. 내 인생 책으로 엮으면 열 권도 넘게 나올 거다.”


근데, 경험도 백날 해봐야, 정리하고 엮어서 결과물로 만들려는 '욕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글은 나오지 않는다. 사소한 상황에 스쳐 갔던 작은 감정 하나를 포착해 기어이 글 한 편을 완성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생을 보고 듣고 먹고 만나고 '사유해도' 그걸 쓰고자 하는 의욕과 욕망이 없었기에 백지에 단 한 글자를 쓰기가 어려운 사람이 있다. 


기록은 여러모로 중요하다. 살면서 뭔가를 자꾸 사유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물론 의미는 있겠지만, 그보다 한 차원 높은 게 바로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기록은 그 과정만으로도 내 사유를 형상화할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다. 생각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기록해두지 않으면 잊히지 마련이다. 망각의 동물인 인간에게는 특히 중요하다. 당장 쓸모없는 끼적임일지라도 훗날 그런 사유의 과정 자체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뭔가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최민자는 그런 방면에서는 이미 경지에 오른 수필가이다. 아마 이분의 일상은 기록으로 시작해 기록으로 끝나지 않을까? 기록하고자 하는 욕망을 기본적으로 품고 생활하는 사람에게 세상은 좀 더 다양한 모습을 열어 보일 테니까.


'똑같은 것을 다르게 보여주기'. 제일 어렵다. 이건 기술이다. 능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 '다른 것', '보이지 않는 것'을 찾는 거겠지. 왜냐, 그게 더 쉬우니까. 다른 것은 일단 품을 좀 팔아야겠지만 찾으면 결국 나온다. 그런데 빤한 걸 다르게 보여주는 건 한 차원 높은 '기술'의 영역이다. 찾는 게 아니라 만들어야 하니까. 같은 휴대 전화라도 뒤에 사과 로고가 박혀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해야 할지.... 최민자 작가는 아무렇지 않게 쓰는 듯하지만 나름 엄청난 공을 들였을 게 틀림없다. 그녀를 거쳐 간 종이 수만 해도 내 컴퓨터 하드는 가득 채우지 않을까?


해서 나도 좀 쓰고 싶다. 경험을 매개로 글을 완성하자는 생각보다는 일단 한 줄 갈겨놓고 경험을 이끌어내는 방향으로 말이다.




기계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문명이 인간을 소외시킨다 하지만 소외당한 사람과 불평 없이 놀아주는 것도 기계다. 인종이 다르다고, 나이가 많다고, 부자가 아니라고 원칙 없이 내치는 법이 없고, 백 번 천 번 같은 일을 시켜도 불평을 하거나 짜증을 부리지 않는다. 감정도 융통성도 없는 기계라지만 기계야말로 인간보다 인간적일지 모른다. 아니 기계적이라는 말이 인간적이라는 말보다 한 수 위의 덕목일지도 모른다.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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