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힘 있는 글쓰기 : 옥스퍼드 대학 33년 스테디셀러, 가장 실용적인 글쓰기 매뉴얼 - 옥스퍼드 대학이 출간한 글쓰기 바이블
피터 엘보 지음, 김우열 옮김 / 토트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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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탈리 골드버그의 명저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를 읽고 있다. 시간상 이 책, 『힘 있는 글쓰기』가 5년 정도 앞서 나왔고 두 책은 형식과 분위기 또한 꽤 다르다. 그러나 나는 두 저자가 결국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이 강조하는 작법의 종착역. “잘 쓰고 싶다면 일단 많이 써 역입니다. 한 마디로 특별한 비법 따윈 없다는 얘깁니다.” 그렇다. 가수는 목이 수없이 쉬어 본 사람이고 요리사는 식탁 다리를 수없이 부러뜨려 본 사람이며 배우(俳優)는 자기감정을 수없이 조절해 본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 왜, 어째서 문장만큼은 몇 가지 꼼수만 익히면 능숙히 다룰 거라고 생각하느냔 말이다. 가만있어보자, 그동안 나는 의미 없는 자맥질을 하고 있었구나.




엄청나게 많이 쓰지 않고서 탁월한 글을 써낼 가망은 거의 없다. 상당수는 나쁜 글이 될 것이다. 방대한 연습과 경험을 원한다면 지성이 잘 작동할 때만 글을 쓸 수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글쓰기에서 어떤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많이 쓸 수 없고, 나쁜 표현이 나올 때마다 움찔해서 쓰기를 멈추고 고치려고 해서야 즐거움을 맛볼 수 없다. 충분히 써야 그래도 탁월한 글을 써낼 가망이 있다.


p.26



프로 사진작가들이 수백, 수천 장을 찍고 골라낸 단 하나의 풍경 사진이 갤러리 한 켠을 빛내는 것처럼 쓰는 사람이라면 진득하게 앉아 수백, 수천 장을 써야만 200자 원고지를 오롯이 내가 원하는 문장으로 채워 넣을 수 있다는 진리. 대개는 쓰레기 아닐까 싶다. 그러나 그 쓰레기 또한 내 글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평생 그 쓰레기장에 파묻혀 지낼 각오를 다지는 순간 비로소 백지 한 장 펼쳐놓고 처음부터 멋진 글 한 편 쓰겠다고 매달리는 짓을 멈추게 된다. 그렇다고 그 노력이 나를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들어주진 못할 것이다. 핵심은 이거다. 좋은 작가들은 예외 없이 많이 썼다는 사실. 그러니까 잘 쓰고 싶으면 어쨌든 ‘많이’ 써야만 한다. 이것은 비단 글쓰기뿐만 아니라 어떤 분야든 예외 없는 만고불변의 법칙. ‘많이’ 그리고 ‘꾸준히’.


평소 나를 괴롭히던 ‘쓰고 싶어도 쓸 게 없는데 어떡하지?’라는 의문은 3부 ‘글쓰기’ 12장 「글쓰기를 위한 마중물 붓기」로 어느 정도 해결했다. 일종의 글감을 위한 질문 리스트 모음집인데 용도별로 최적화된 질문을 잘 골라낸 느낌을 받았다. 여러 질문에 답하는 도중에 ‘쓰려는 주제를 다양한 형태에 끼워 맞춰보면서 뒤틀고 잡아당겨, 그 안에 있는 다채로운 가능성’(p.262)을 이끌어내도록 유도한다. ‘퇴고’의 기술 부분도 눈에 띈다. 사실 퇴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책이 드물다. 이런 종류의 책들이 아무래도 초고를 쓰기도 버거운 사람들이 소비 대상이라 그런지 대개는 ‘쓰기’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데 반해 이 책은 퇴고의 기술에만 무려 여섯 챕터를 할애한다는 점에서 맘에 들었다.


결국 나탈리 골드버그가 ‘뼛속까지 내려가서 쓰기’를 강조했다면 피터 엘보는 뼛속까지 내려가서 쓰되 ’피도 눈물도 없이 퇴고하라’고 말하는 셈이 되는 건가? 그러고 보니 두 책을 상보적으로 활용하면 좋겠다. 어떤 면에서 이 책은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의 심화 버전처럼도 보인다. 그녀의 이론이 스스로를 수련하는 치유적 글쓰기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피터 엘보의 이론은 실용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잘 어울린다. 많이 쓰기의 진리를 일깨운다는 점에서 비슷하면서도 각각 읽는 맛이 다르다는 점에서. 무엇을 먼저 읽든 둘 다 읽어보면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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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선화 [할인] 은행나무 노벨라 3
김이설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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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는 얼굴에 화염상모반을 지니고 태어났다. 화염상모반이란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형태의 질환으로 몸의 특정 부위에 혈관이 지나치게 몰려서 생겨나는 증상이다. 하나의 질병일 뿐 무슨 천륜을 어기거나 패륜을 저질러서 새겨진 ‘낙인’이 아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은 ‘어떤 사람의 인격 전체를 뒤덮어서 그가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자신을 타인들 앞에 제시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돌출적이고 부정적인 속성’(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p.121)을 스티그마 즉, 낙인이라 정의했다. 선화에게 화염상모반은 이 낙인이다. 가족에게 선화는 저주였고 선화에게는 세상이 곧 저주다.


평화학자 정희진이 지적했듯 훼손, 돌출, 함몰, 나약함 등 주류 사회가 권장하는 정상 기준이 아닌 ‘매끄럽지 못한 몸’은 곧 무질서와 비정상을 상징한다. 연민은 괜찮고 혐오는 안 된다 누가 그랬던가? 혐오든 연민이든 타인에게 비치는 자신이 그런 감정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 자체가 폭력이다. 화염상모반은 선화가 동등한 성원으로서 타인에게 현상하지 못하는 일종의 장벽처럼 작용한다. 고작 오른쪽 얼굴을 덮은 그것이 자신의 인격과 앞으로의 삶 전체를 덮어버린 것이다. 소설 속 화염상모반은 단순히 하나의 질환이 아니라 사회가 아니, 우리가 수없이 보고도 고개를 돌렸던 그들의 고통을 은유한다.




학교의 선생들이나 동급생들에게 받았던 왜곡된 시선이나, 멸시, 조롱 따위는 차라리 나았다. 세상은 나 같은 존재 자체를 아예 인식하지 못했다. 대꾸할 가치조차 없는 존재, 쳐다볼 이유조차 없는 존재, 신경쓸 겨를도 없는데다, 필요도 없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한낱 먼지와 같은 것이었다. 그걸 처음 깨달은 게 그 나이 무렵이었다. 아무리 내가 당당하게 고개를 들어도, 아무리 내가 성적이 좋아도, 아무리 내가 멀쩡한 정신을 가지고, 올바른 성격을 소유했다 해도, 그건 아무런 필요가 없는 항목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애초에, 처음부터, 이 따위의 얼굴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존재해서는 안 될 괴물이었다.


p.86



김이설은 이렇게 우리가 애써 덮어두고 무시했던 문제들과 서슴없이 대면하는 작가다. 장편 소설 『환영』이 그랬고 『선화』 역시 마찬가지. 끊임없이 쓰면서 그것들을 응시한다. 화염상모반을 꽃으로 환원한 부분이 특히 좋았다. 낙인이 아니라 꽃. ‘예쁜 꽃다발은 원래 꽃이 예뻐서이거나, 예쁘게 보이기 위해 규칙을 잘 지켜 묶었기 때문’(p.16)이지 거창하게 무언가를 상징하거나 대체하는 존재가 아니다. 김이설에게, 그리고 선화에게 화염상모반과 꽃은 다르지 않다. 선화가 꽃을 그저 있는 그대로 대하는 듯 세상이 그녀의 상처를 모두가 하나쯤 지닌 생채기로서 대할 수 있는 날이 오길 잠시나마 꿈꿔 보았다.


이렇게 주변부의 삶을 무시하지 않고 응시하는 것, 응시함으로써 개선을 도모하는 것. 그것만이 그녀가 작가로서 할 수 있는 문학적 도리인 듯 보인다. 다만, 그녀의 의도와는 달리 완성도가 조금은 아쉽다. 중편이라는 형식이 주는 제한적 어려움 때문일까? 후반부로 갈수록 애초 소설이 가진 문제의식이 어떤 ‘적당한 선’을 갈구하는 느낌이 들었다. 예상 건대 선화는 이런 결말을 바라진 않았을 듯싶다. 깔끔한 마무리를 원한 건 아니지마는 작가가 조금 더 힘을 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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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교실
손창섭 지음 / 예옥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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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평하기란 나에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동시대 다른 소설들을 두루 접한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이 책은 그 가운데서도 유독 또렷한 당파성을 지닌 작품(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연재되던 당시 한국 사회가 6.25의 상흔을 여전히 씻어내지 못한 상황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그때를 오늘의 기준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자리 잡기 이전). 무너진 산업 재건의 필요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을 다시 찾는 것이 당시 사회의 긴요한 문제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내게 충격을 준 것은 그런 상황에서 손창섭은 저 혼자 외떨어져 ‘가족 해체’라는, 당시로써 상상도 할 수 없는 작업을 감행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의 눈에 비친 당시 한국 사회의 모습은 기존 통념과는 전혀 달랐다는 것인가? 이 소설은 분명 내가 아는 사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출판사의 홍보 문구에서도 볼 수 있듯 도촬과 훔쳐보기는 물론이고 동성애 그리고 일종의 계약 가족의 형태까지 등장하니 말이다. 내가 아는 갓 60년대에 접어든 한국의 모습은 이렇지 않다.


이 간극과 괴리감에서 오는 생경함이 책을 계속 붙들게 만든 듯하다. 여기서 손창섭은 몇 가지 형태의 가족을 구성하고 해체하길 반복하는데 이것이 단순히 실험적 요소에서 그치지 않고 소설이 갖춰야 할 서사적 재미를 잃지 않는 점이 신통하게 다가온다. 내 기준에서 보건대 분명 미문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교실』은 소설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그런 미문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전개에는 막힘이 없고 아슬아슬하게 갈마드는 수위의 강약 조절 또한 훌륭하다. 아닌 게 아니라 책을 덮고 나니 문장의 치장에만 중점을 두고 결국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별 게 없는 오늘 한국 문학의 분위기에 일종의 배신감마저 느꼈으니 말 다했다.




남자의 방탕을 긍정한다면 여자의 방탕도 긍정해야 된다 그거요. 여자의 방탕을 긍정할 수 없다면 남자의 방탕도 절대로 긍정해선 안 된단 말요. 물론 이상을 말하자면, 남자고 여자고 방탕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이상이겠지만, 역사가 있은 이래 남성 본위의 인간사회에서는 남자의 방탕만은 공공연히 활갯짓하며 성행해 오지 않았느냐 말요. 그러니 남녀동등권이요 인권이요를 걸핏하면 내세우는 요즘 세상에선 정숙이니 부도(婦道)니 하고 남자 쪽에만 편리한 보통명사를 만들어가지고 여잘 묶어놓는다는 건 당치않은 일이란 말요.


p.182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역시 주인갑 씨의 ‘방탕론’이다. 나는 여기서 주인갑이 곧 손창섭 그 자신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소설에서 손창섭은 주인갑 씨의 입을 빌려 자신의 자유로운 성관점과 페미니즘적 주장을 솔직하고 담대하게 펼쳐 보인다. 그리고 이것이 당시 한국 문단이 손창섭이라는 진보적 사상가를 급진적이라는 이유로 홀대한 원인이 아니었나 싶다.


이 소설이 나오고 약 40년 뒤 소설가 김훈은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딸은 페미니즘 같은 못된 사조에는 물들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무려 40년이다. 40년이면 강산이 네 번 바뀌고도 남을 세월 아닌가. 한국 문단에서 김훈이 가지는 상징성을 본다면 손창섭이 일본으로 떠난 이후 이 바닥이 이뤄낸 평등적 발전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훗날 대중적으로 알려진 손창섭의 작품들도 대개 사상적 성격이 덜한 초기작이라는 점 또한 고려한다면 어쩌면 손창섭 그는 한국 문단이 품기에는 너무나도 과분한 작가였는지도 모르겠다.


서사적 재미와 사상적 통찰을 동시에 줄 수 있는 작가는 지금도 찾기 어렵다. 그리고 이 소설은 단순 통속소설 범주에 묶이기에는 이야기가 지닌 날카로움이 예사롭지 않다. 요즘 세간이 페미니즘 담론으로 시끌벅적하지 않은가.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손창섭의 후기작들에 대한 사회적 조명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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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2-06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대를 앞선 천재입니다.

5DOKU 2016-02-06 22:49   좋아요 0 | URL
삼부녀도 조만간 읽어볼 예정입니다.
 
자기만의 방 펭귄클래식 99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소연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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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는 이 책을 쓰고 10년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밝혀진 원인은 우울증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에 쓰인 그녀의 독백은 더없이 적요하다. 여성에게도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이 당연한 말을 강연으로, 또 책으로 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당시 그녀를 더 우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문득 궁금하다. 2016년 오늘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졌는가? 일견 오늘날 여성의 지위는 울프가 바라던 그 모습에 가까워진 듯 보인다. 하지만 만일 그녀가 살아 있다면 지금의 사회에 만족할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현대 여성에게 자기만의 방이 생긴 건 맞다. 문제는 그 집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건 오늘날의 젊은 세대가 똑같이 겪는 문제가 아닌가? 그러나 함께 겪는 문제에도 위계가 있다면 그것은 똑같다고 볼 수 없다. 현대 (남성)사회는 여성에게 자기만의 방을 제공하되, 유리 천장도 함께 선물했다. 이것이 울프가 살아 있었더라도 지금의 모습에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한 이유다. 이 책의 제목만 놓고 오늘날 현대 여성은 자기만의 방을 가졌으니 세상 좋아졌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을 듯싶다. 착각이다. 어디까지나 골자는 ‘여성은 왜 가난한가?’이지 ‘물리적인 방의 필요’는 표면에 지나지 않는다.


울프가 말하는 것은 하나다. 여성에게도 ‘돈’이 있어야 한다는, 당연한 진리. 방이 아니다 돈이다. 재화 말이다. 속물적인가? 그러나 울프는 그저 종이를 살 수 있는 16펜스의 필요성을 역설했을 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당시 사회에서 인간이 정상적인 사고를 하며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돈이 필요했다. 그러나 시장은 절반(남성)의 몫이었고 때문에 여성은 마땅히 누려야 할 인간다운 삶을 구걸할 수밖에 없었다. 울프는 여성이 여성이라는 가면이 아닌 진정 자신의 얼굴로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남성과 평등한 삶의 조건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다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 문제가 21세기 현대에도 여전하다는 사실이다.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에 달려 있습니다. 시는 지적 자유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여성은 항상 가난했습니다.


p.174



그녀에게 나타난 최초의 정신이상 증세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직후라고 한다. 7년 뒤 아버지마저 사망하자 그녀의 증세는 더 악화됐다. 나는 우울증이라는 병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 안다. 하루하루를 그저 버텨내는, 살아 있어도 사는 게 아닌 지옥과 같은 나날. 그런 상황 속에서 그녀가 온전한 언어로 세상을 비판하고 펜을 휘두를 수 있었다는 게 기적처럼 느껴진다. 더군다나 모두가 그녀의 성취에 박수를 보낼 때조차 우울증을 앓던 그녀는 무의미의 진창을 걸었을 테니 말이다.


성취 속에서 울프가 느낀 무의미는 어쩌면 앞으로도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적 직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직감에 화답이라도 하듯 오늘 사회는 여전히 그 문제를 포용하고 있지 않은가. 아니, 오히려 더 공고히 다져놓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당대에 정말로 필독서라는 게 있다면 나는 이 책을 1순위로 꼽겠다. 우리는 그녀가 느낀 ‘무의미’를 ‘의미’로 바꿀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진보’했다(고 주장하)는 현대인의 진정한 표상이 될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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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밖의 경제학 - 이제 상식에 기초한 경제학은 버려라!
댄 애리얼리 지음, 장석훈 옮김 / 청림출판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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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의 센스가 참으로 아쉽다. 『상식 밖의 경제학』이라니. 너무 진부하고 딱딱하잖아? 이미 나온 책이지만 『누가 내 지갑을 조종하는가』 정도가 이 책을 집게 만들 만한 좋은 제목인 듯한데 말이다. 이 말은 즉, 진부한 제목 때문에 잊히기에는 이 책이 너무나 훌륭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경제학으로만 놓고 보기에 책에서 논의되는 이야기들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따지면 누가 내 지갑을 조종하는가는 어울리긴 하나 싶지만 적어도 제목만큼은 이목을 집중시키기엔 적당하지 않은가?


책 자체는 행동경제학을 근거로 인간 심리를 다방면에서 파고들지만 나에게는 아무래도 4장, ‘돈이 해결해줄 수 없는 것들…’에서 논의된 사회규범과 시장규칙에 관한 이야기가 와 닿았다. 저자가 제시하는 다양한 실험에서 처음에는 그저 선의로 무언가를 시작했던 사람들이 ‘돈’과 관련된 ‘말’이나 ‘글’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이기적인 모습으로 돌변한다. 이 부분을 읽어 보면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이 어째서 불행할 수밖에 없는지를 깨닫게 된다. 더 절망적인 것은 한 번 시장규칙에 지배된 사회를 사회규범으로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다.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세상인데 또 그 돈 때문에 불행한 삶을 이어가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아무 대가도 받지 않을 때와 합리적인 수고비를 준다고 했을 때 기꺼이 도와주었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수고비를 준다고 하니 그냥 가버렸다. 선물도 비슷했다. 사람들에게 작은 선물을 준다고 하자 기꺼이 도와주었지만, 선물의 가격을 말하자 시장규칙에 따라 요청했을 때보다 더 빨리 등을 보이며 가버렸다.


p.118



이렇게 행동경제학은 인간의 어리석은 역사를 단순히 윤리적 잣대로만 판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마치 “인간이 어리석은 건 맞아. 근데 그게 단순히 못 배우거나 덜 착하기 때문은 아니야. 내 말을 들어봐.”라고 말하는 듯하다. 기존 주류경제학은 모든 것을 자유시장과 개인의 판단에 맡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행동경제학은 우리 인간이 어리석은 이유가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이고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부터가 개선의 출발이라고 말한다. 더불어 그것이 어리석음을 옹호하기보다는 그 이유를 명확히 밝히고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겠다는, 일종의 의지로서 다가오기 때문에 행동경제학을 단순히 ‘경제’ 분야로 치부하기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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