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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 한문화 / 201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책마다 고유의 호흡이 있다고 믿는다. 이 책을 펼치고 몇 장 넘겼을 때 유난히 긴 호흡이 느껴졌었다. 단박에 읽고 치울 만한 책이 결코 아니었기에 하루에 몇 장씩 아껴 읽었다. 읽는 내내 멈추고 생각하고 옮겨적다 보니 어느새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고민이 많았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잘 쓴 글인가, 쓴다는 행위 그 자체인가. 그러고 보니 은유 작가의 『글쓰기의 최전선』을 읽을 때도 비슷한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책을 덮으니 답이 따라왔다. 꾸준히 쓰고 싶다는 것. 내 마음은 내가 쓴 글이 아니라 쓰고 있는 나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좋은 글에 대한 감각을 기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많이 읽기. 둘째, 많이 쓰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잘’이 아니다. ‘많이’다. ‘잘’ 쓴다는 것은 우선 많이 쓰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떤 커피가 맛있는 커피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바리스타가 될 수 있을까? 원두의 배전도가 어떤지, 얼마나 갈아야 하는지, 탬핑은 어떻게 하고 머신의 압력은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하는지 따위는 어디까지나 ‘기술’일 뿐. 바리스타가 되려면 기술을 익히기에 앞서 맛있는 커피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하는 게 순서다. 그들은 우연히 맛있는 커피를 맛보고 이 세계에 매료되어 바리스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지 기술부터 익히고 뒤늦게서야 커피 맛을 배운 게 아니다. 비단 바리스타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일이 이와 다르지 않다. 마찬가지로 잘 쓰기 위해서는 일단 어떤 글이 좋은 글인지를 알아야 한다. 좋은 글에 대한 나만의 좌표도 없는 사람이 허구한 날 베스트셀러 작가가 추천하는 ‘좋은 문장 만들기’ 따위를 외운다고 해서 좋은 글을 쓸 리 만무하다. 그러니까 일단 ‘잘 쓰기’에서 ‘잘’은 내려놓고 ‘쓰기’와 친해져야만 한다. 쓰기 근육을 단련해야 좋은 문장을 부릴 줄도 아는 것이다. 될 수 있으면 많이 읽는 것도 겸하면 좋고.
따라서 이 책은 어떤 문장이 좋은 문장인지, 어떤 글이 논리적인 글인지를 논하지 않는다. 저자인 나탈리 골드버그는 좋은 문장, 논리적인 글 ‘이전에’ 일단 ‘쓰기’라는 행위에 자체로 돌아갈 것을 요구한다. 그녀가 강조하는 것이 바로 ‘많이 쓰기’다. 글을 완성하지 않아도 좋으니 일단 많이 쓰라고 말이다. 아니, 완성하지 말라니? 매번 쓸 때마다 '한 편'의 완성된 글을 쓰도록 교육받은 나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완성된 글에 대한 부담감은 ‘쓰지 않기’라는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질 때가 많다. 잘 써야 하는 것도 모자라 완성까지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손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글쟁이는 어쨌든 써야만 한다. 써야 작가든 칼럼리스트든 뭐든 할 것이 아닌가. 그럼 결국 이 부담감을 어찌 해소하는가에 대한 고민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한다. 잘 쓰려고 하지 마라, 완성하려고도 하지 마라, 문법이니 논리니 전부 내려놓고 일단 ‘많이’ 써라. 당신이 쓰기와 친해진다면 잘 쓰는 것은 물론이요 글 한 편 완성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그녀는 내가 쓴 글에서 떠나라고까지 말한다. 어쩌다 괜찮은 글을 한 편 썼다고 자만하지 말라는 것이다. 공감한다. 글을 쓰는 ‘행위’가 바로 나다. 그러므로 작가는 자신이 쓴 글에서 미련없이 떠날 줄 알아야 하고 멈추지 말고 써야만 한다. 내가 쓴 글과 나를 동일시하는 순간 나의 글은 정체될 것이다.
나는 책을 읽을 때 실제로 밑줄을 긋진 않는다. 다만 옮겨 적을 뿐이다. 만약 이 책에 실제로 밑줄을 그었다면 아마 지금쯤 거진 모든 페이지에 밑줄이 그어져 있지 않을까 싶다. 독서 기간 동안 알라딘에 꾸준히 밑줄을 등록했는데 오늘 마지막 밑줄 두 개를 등록하려고 보니 ‘밑줄긋기는 최대 50개까지 작성할 수 있습니다.’라는 경고창이 떴다. 이 책이 알라딘에 등록할 수 있는 최대 밑줄 개수를 알려준 셈이다. 많이도 그었다. 책에 밑줄이 많다는 것은 내 마음을 움직인 문장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매일 쓰기로 했다. 이제는 백지가 망망대해처럼 느껴지진 않는다. 내 앞에 놓인 백지는 이를테면 스펀지다. 곧 내가 부려놓을 상념들을 머금을 준비를 하고 내 앞에 놓여 있는 스펀지. 두렵지 않다. 백지는 내가 그 어떤 수치스럽고 비밀한 이야기를 털어놓더라도 묵묵히 포용해 줄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