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들 - 윌리 로니스의 사진 그리고 이야기들 내 삶의 작은 기적
윌리 로니스 지음, 류재화 옮김 / 이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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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이 책의 개정판이 나온 모양이다. 생각난 김에 몇 자 적어보자면 이 책은 기본적으로 사진집이지만 나는 같이 실린 글들이 훨씬 좋았다. 필사를 여러 번 했고 지금도 가끔 꺼내 읽는다.  사실 나는 사진에 사자도 잘 모르는 문외한이고 흑백사진이라고 하면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라는 영화로 화제가 된 사진가 비비안 마이어(그녀의 사진집도 한 권 소장하고 있다.)와 이 책의 주인공인 윌리 로니스밖에 모른다. 그래도 감히 비교를 해보겠다. 일단 비비안 마이어의 매력을 코멘트의 부재에서 찾을 수 있다면 윌리 로니스의 매력은 사진만큼이나 인상적인 코멘트에 있다. 셔터를 누르던 그 순간으로 독자를 데려다 놓는 매력적인 산문들 말이다. 일테면 이런 문장들.




보통, 나는 일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 그저 바라보고, 기다린다. 어떤 사진이든 그냥 그 상황의 인상에 따른다. 내 순간성을 잡을 수 있는 좋은 위치만 찾으려고 애쓸 뿐이다. 실재가 더 생생한 진실 속에 드러나도록. 그것은 시점의 쾌락이다. 때론 고통이기도 하다. 일어나지 않은 것을, 혹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어날 일을 바라는 것이기 때문에.


p.30



사실, 내 사진 인생을 통틀어 내가 가장 붙잡고 싶은 것은 완전히 우연한 순간들이다. 그 순간들은 내가 할 줄 아는 것보다 더 훌륭하게 나에게 이야기해줄 줄 안다. 내 시선을, 내 감성을 표현해주는 것이다. 사진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데 뭔가 일어나고 있다.


p.91



나는 비비안 마이어 작품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질문들도 좋지만 윌리 로니스의 친절한 해설도 좋아한다.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윌리 로니스 정도, 그러니까 해설 역시 작품에 비견할 정도가 아니면 함께 싣지 않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 비비안 마이어처럼 말이다. 내가 두 사진가를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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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 한문화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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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마다 고유의 호흡이 있다고 믿는다. 이 책을 펼치고 몇 장 넘겼을 때 유난히 긴 호흡이 느껴졌었다. 단박에 읽고 치울 만한 책이 결코 아니었기에 하루에 몇 장씩 아껴 읽었다. 읽는 내내 멈추고 생각하고 옮겨적다 보니 어느새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고민이 많았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잘 쓴 글인가, 쓴다는 행위 그 자체인가. 그러고 보니 은유 작가의 『글쓰기의 최전선』을 읽을 때도 비슷한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책을 덮으니 답이 따라왔다. 꾸준히 쓰고 싶다는 것. 내 마음은 내가 쓴 글이 아니라 쓰고 있는 나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좋은 글에 대한 감각을 기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많이 읽기. 둘째, 많이 쓰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잘’이 아니다. ‘많이’다. ‘잘’ 쓴다는 것은 우선 많이 쓰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떤 커피가 맛있는 커피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바리스타가 될 수 있을까? 원두의 배전도가 어떤지, 얼마나 갈아야 하는지, 탬핑은 어떻게 하고 머신의 압력은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하는지 따위는 어디까지나 ‘기술’일 뿐. 바리스타가 되려면 기술을 익히기에 앞서 맛있는 커피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하는 게 순서다. 그들은 우연히 맛있는 커피를 맛보고 이 세계에 매료되어 바리스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지 기술부터 익히고 뒤늦게서야 커피 맛을 배운 게 아니다. 비단 바리스타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일이 이와 다르지 않다. 마찬가지로 잘 쓰기 위해서는 일단 어떤 글이 좋은 글인지를 알아야 한다. 좋은 글에 대한 나만의 좌표도 없는 사람이 허구한 날 베스트셀러 작가가 추천하는 ‘좋은 문장 만들기’ 따위를 외운다고 해서 좋은 글을 쓸 리 만무하다. 그러니까 일단 ‘잘 쓰기’에서 ‘잘’은 내려놓고 ‘쓰기’와 친해져야만 한다. 쓰기 근육을 단련해야 좋은 문장을 부릴 줄도 아는 것이다. 될 수 있으면 많이 읽는 것도 겸하면 좋고.


따라서 이 책은 어떤 문장이 좋은 문장인지, 어떤 글이 논리적인 글인지를 논하지 않는다. 저자인 나탈리 골드버그는 좋은 문장, 논리적인 글 ‘이전에’ 일단 ‘쓰기’라는 행위에 자체로 돌아갈 것을 요구한다. 그녀가 강조하는 것이 바로 ‘많이 쓰기’다. 글을 완성하지 않아도 좋으니 일단 많이 쓰라고 말이다. 아니, 완성하지 말라니? 매번 쓸 때마다 '한 편'의 완성된 글을 쓰도록 교육받은 나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완성된 글에 대한 부담감은 ‘쓰지 않기’라는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질 때가 많다. 잘 써야 하는 것도 모자라 완성까지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손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글쟁이는 어쨌든 써야만 한다. 써야 작가든 칼럼리스트든 뭐든 할 것이 아닌가. 그럼 결국 이 부담감을 어찌 해소하는가에 대한 고민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한다. 잘 쓰려고 하지 마라, 완성하려고도 하지 마라, 문법이니 논리니 전부 내려놓고 일단 ‘많이’ 써라. 당신이 쓰기와 친해진다면 잘 쓰는 것은 물론이요 글 한 편 완성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그녀는 내가 쓴 글에서 떠나라고까지 말한다. 어쩌다 괜찮은 글을 한 편 썼다고 자만하지 말라는 것이다. 공감한다. 글을 쓰는 ‘행위’가 바로 나다. 그러므로 작가는 자신이 쓴 글에서 미련없이 떠날 줄 알아야 하고 멈추지 말고 써야만 한다. 내가 쓴 글과 나를 동일시하는 순간 나의 글은 정체될 것이다.  


나는 책을 읽을 때 실제로 밑줄을 긋진 않는다. 다만 옮겨 적을 뿐이다. 만약 이 책에 실제로 밑줄을 그었다면 아마 지금쯤 거진 모든 페이지에 밑줄이 그어져 있지 않을까 싶다. 독서 기간 동안 알라딘에 꾸준히 밑줄을 등록했는데 오늘 마지막 밑줄 두 개를 등록하려고 보니 ‘밑줄긋기는 최대 50개까지 작성할 수 있습니다.’라는 경고창이 떴다. 이 책이 알라딘에 등록할 수 있는 최대 밑줄 개수를 알려준 셈이다. 많이도 그었다. 책에 밑줄이 많다는 것은 내 마음을 움직인 문장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매일 쓰기로 했다. 이제는 백지가 망망대해처럼 느껴지진 않는다. 내 앞에 놓인 백지는 이를테면 스펀지다. 곧 내가 부려놓을 상념들을 머금을 준비를 하고 내 앞에 놓여 있는 스펀지. 두렵지 않다. 백지는 내가 그 어떤 수치스럽고 비밀한 이야기를 털어놓더라도 묵묵히 포용해 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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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서유기 5 대산세계문학총서 25
오승은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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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가 컸던 홍해아와의 난투는 생각보다 지리했다. 그보다 뒤이어 등장하는 차지국(車遲國)의 삼청관 도사, 호력대선(虎力大仙), 녹력대선(鹿力大仙), 양력대선(羊力大仙)과의 내기 대결이 무척 흥미롭게 읽혔다. 여러모로 도교 풍자(?)적 성격이 돋보이는 에피소드였기 때문이다. 서유기는 기본적으로 도교와 불교가 혼합된 환상 소설이지만 읽을 때마다 도교에 대한 저자 오승은의 풍자가 느껴지곤 했다. 한낱 원숭이 요괴가 옥황상제의 천궁을 뒤엎는다는 설정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서천길 여정 동안 틈만 나면 소환되어 괴롭힘을 당하는 산신령과 사해 용왕의 모습만 보더라도 이 소설에서 도교가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삼청관 도사 에피소드에서는 이것이 일종의 확신으로 이어졌다. 세 도사의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이들은 각각 호랑이, 사슴, 양 요괴가 둔갑한 것인데 기우제를 빌미로 스무 해 동안이나 차지국을 손바닥 주무르듯 하고 있다. 이곳에서 지내던 승려들은 비를 내리게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노예로 전락한다. 손오공은 도사들과 세 차례의 기우제 내기를 벌이는데 세 도사의 최후가 그야말로 충격적이다. 호력대선은 목이 잘리고 녹력대선은 오장육부를 쏟고 양력대선은 펄펄 끓는 기름에서 녹아 사라진다. 이전에 등장하던 요괴들이 대개 관음보살의 도움으로 적당히 수습되거나 또는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며 심판을 받는 게 전부였던 것을 생각해보면 세 요괴에게만은 오승은이 아주 비참한 결말을 선사한 셈. 


이뿐만 아니다. 최후를 맞이하기 전 이들은 손오공, 저오능(저팔계), 사오정 세 형제의 소변까지 성수(聖水)로 알고 받아 마시기까지 한다. 이쯤 되면 서유기에 등장하는 악당들을 통틀어도 가장 푸대접이 아닌가 싶다. 기우제부터가 도교식 제사가 아니던가? 사실 진원대선이 등장할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아주 작정하고 도교를 조롱하는 모양새다. 시대가 변하면 이전의 문화는 대개 낡은 것으로 취급되곤 한다. 특히 종교는 발전한 기술력과 비교되어 배척되는 정도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 어쩌면 서유기는 도교에서 불교로 옮겨가는 당시의 사회상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지 소설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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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인간의 조건 - 꽃게잡이 배에서 돼지 농장까지, 대한민국 워킹 푸어 잔혹사
한승태 지음 / 시대의창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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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장기(將棋)라 불리는 체스에는 폰(Pawn)이라는 말이 있다. 한 번에 한 칸씩밖에 이동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장기로 치자면 졸(卒)과 쓰임새가 같다. 그런데 이 폰이 어찌어찌 상대편 진영 끝에 도달하게 되면 퀸(Queen), 여왕이 된다고 한다. 체스에서는 이것을 퀴닝(Queening)이라고 부른다. 저자 한승태는 서문 「우리도 퀴닝 할 수 있을까?」 에서 책의 제목은 본래 ‘퀴닝’이지만 출판사의 반대 때문에 『인간의 조건』이라는 진부한 제목으로 출간되었음을 밝혀놓았다. 저자의 불만에 공감한다. 여기에는 가장 약한 말이지만 한 번에 한 칸씩 꾸준히 오르면 여왕이 될 수 있는 체스의 규칙처럼 대한민국의 수많은 워킹푸어가 삶에 쏟아 붓는 노력만큼 대가가 주어지는 현실이 오길 바란다는 저자의 염원이 담겨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제목(인간의 조건)을 부제로, 저자가 정한 제목 ‘퀴닝’을 원제로 쓰고 싶다. 이렇게 말이다. 『퀴닝: 인간의 조건』.




이 괴상망측한 사회가 비틀거리면서도 여전히 굴러갈 수 있는 이유는 수많은 사람들이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음에도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p.567



노동의 숭고함? 개나 줘버리라지. 이 책에는 VJ 특공대와 극한직업이 보여주지 않는 이 나라 중노동의 민낯이 있다. 대한민국 노동의 숭고함은 웬 친일파 독재자가 국민에게 ‘잘 살아보세’를 외치게 하던 그 순간 사라졌다. 낡은 것을 쓰레기 취급하고 느린 것을 도태시키는 사회에서 숭고한 노동과 노동자를 기대한다는 게 어불성설. 저자는 자신의 경험으로 그것을 증명한다. 현 사회가 당연시 생각하는 24시간 영업, 저렴한 가격, 친절한 서비스의 이면에는 변기통에 버려진 휴짓조각보다 못한 누군가의 인권, 위생, 안전이 깔려 있다. 내일이 없는 이곳에서 우리는 피부색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타인의 죽음에서 휴식을 탐하는 개망나니만도 못한 인간이 될 뿐이다.


누군가가 바다에 빠졌다는 소식을 ‘오늘은 일하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다’로 해석하려면 그 사람이 하는 일이란 대체 얼마나 힘든 것일까? 이 책의 첫 번째 일화, 바로 꽃게잡이 어선 이야기다. 일이 너무 힘들어지자 자해까지 고민하고 곧이어 그 고민이 또 다른 누군가를 해할(그래야 쉴 수 있으니) 생각으로 번지는 대목은 이 나라 중노동의 지난함을 여실없이 보여준다. 배에서 탈출하려다 익사한 어느 중국인 노동자의 시신을 망연히 바라보며 이 일을 그만두겠노라고 다짐하는 저자의 심정은 어땠을지. 몇 개월 치 임금 체불은 예사인 이곳에서 그만 두겠다는 그를 순순히 보내주는 선주의 행동을 일종의 배려로 인식하는 동료들의 모습은 애석하고 또 씁쓸하다. 지옥 같았던 6주가 40만 원이라는 어이없는 금액으로 환산되어 돌아와도 이제는 그만해도 된다는 사실 하나에 안도하게 되는 일.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바닷일이란 6시 내 고향 같은 티비 프로그램에서 비춰지는 낭만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을 역설한다.


무례한 손님들을 상대하며 하루하루 변해가는 주유소, 편의점 아르바이트 일화도 남 일 같지 않다. 그는 카스트제를 언급하며 한국의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처우는 수드라와 다를 게 없다고 말한다. 사실상 계급사회라는 얘기다. 고시원 일화를 읽을 때는 박민규의 단편 소설 「갑을고시원 체류기」가 많이 생각났다. 문제는 그가 겪은 일들이 허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돼지 농장에서 몽골인들을 차별했던 고백은 열악한 근무 환경과 짐승만도 못한 처우가 만든 중노동에 지친 인간이 얼마나 야박해질 수 있는지 시사한다. 춘천 비닐하우스 주인아주머니의 눈물은 우리 사회에 워킹푸어와 삶의 조건이 크게 다르지 않은 고용인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들려주는 일화들은 이처럼 고발적이기보다는 고백적이기에 와 닿는다. 나는 저자가 노동의 고단함을 말하고자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보다 이 나라 자본이 노동과 노동자를 어떻게 취급하는지를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독자가 발견하길 기대하지 않았나 싶다. 기실 그가 겪은 일들은 우리가 매일 겪고 있는 일상의 한 단면일 뿐이니까. 꼭 육체적 고통이 따라야만 중노동인가? 그가 보고 경험한 일들을 ‘남’의 얘기로 인식하게 되는 순간 이 책은 주말 저녁 시간 때우기 시사 다큐와 다를 게 없어질 것이고 ‘나’의 일로 인식하게 되는 순간 진정 그의 고백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노동은 숭고한 것이라는 편견을 깨고 그 안에서 어떤 부조리한 구조를 발견했을 때 비로소 퀴닝이 가능한 사회가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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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6-03-16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3년에 나왔던 책들 중에서 가히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만한 명저라는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었지요. `노동은 숭고한 게 아니라 그저 통증일 뿐이다` 저는 한승태란 저자의 다음 책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5DOKU 2016-03-16 17:36   좋아요 0 | URL
이분은 지금도 어디에선가 중노동을 하고 계실 것만 같습니다.....
 
뉴스의 시대 -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알랭 드 보통 지음, 최민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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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을 (지금도) 잘 모른다. 이름만 들어봤지 단 한 번도 그가 쓴 책을 읽은 적이 없었다. 일부러 읽지 않은 건 아니고 인연이 닿지 않아서, 딱히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해야겠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게 그는 연애 소설 작가 정도의 이미지가 전부였으니까. 그러다 제작년 즈음 강렬한 북 트레일러 한 편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오늘날 뉴스에 대해 조용히 읊조리는 저자 알랭 드 보통의 내레이션과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몽환적인 화면들. 흡사 한 편의 뮤직 비디오를 보는 듯한 느낌의 그 트레일러에 매료되어 어떤 책인지도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냅다 주문을 해버렸던 기억이 난다. 나는 한 마디로 알랭 드 보통의 영업에 당한 것이다.


핑계를 좀 대보자면 정말 잘 만든 북 트레일러였다. 흔히 책 한 권 출판되면 대충 급조되는 그런 영상물들과는 다르게 러닝타임이 무려 3분 16초(?)에 달하는, 공을 좀들인 ‘작품’에 가까웠단 말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나처럼 트레일러만 보고 책을 사들인 사람도 적지 않으리라(라고 나를 위안해본다). 책을 읽고 저자에 대해 좀 알아보았다. 연애 소설 작가로만 단순히 알고 있었는데 착각이었다. 커리어 스펙트럼이 꽤 넓다. 문학을 비롯한 철학, 종교, 역사, 건축 등 다방면에서 두루 활동하는 ‘운동가’에 가까운 느낌. 실제 지금도 그는 여러 사회 운동에 몸을 담고 있다. 그런 그가 뉴스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공유했다.


책의 제목처럼 우리는 『뉴스의 시대』를 살아간다. 그런데 정작 이것을 어떻게 소비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래도 한동안 떠들썩했던 종편 채널 문제와 더불어 지난 대선 터졌던 국정원 댓글 사건 같은 큼지막한 일들을 경험하며 어렴풋하게나마 이 뉴스라는 것이 ‘진실’만을 말하고 있지는 않구나 정도는 많이들 알게 되었을 성싶다. 그러나 내 성향에 맞는 뉴스를 선택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 그렇다고 뉴스를 끊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뉴스 없이는 살지 못하는 현대인들. 뉴스가 변하지 않으면 시청자가 변할 수밖에 없다.




권력을 공고히 하길 소망하는 당대의 독재자는 뉴스 통제 같은 눈에 빤히 보이는 사악한 짓을 저지를 필요가 없다. 그 또는 그녀는 언론으로 하여금 닥치는 대로 단신을 흘려보내게만 하면 된다. 뉴스의 가짓수는 엄청나되 사건의 배경이 되는 맥락에 대한 설명은 거의 하지 않고, 뉴스 속 의제를 지속적으로 바꾸며, 살인자들과 영화배우들의 화려한 행각에 대한 기사를 끊임없이 갱신하여 사방에 뿌림으로써, 바로 조금 전 긴급해 보였던 사안들이 현실과 계속 관계를 맺은 채 진행중이라는 인식을 대중이 갖지 않도록 조처하기만 하면 된다.


p.36



이 책은 쏟아지는 정보에 휩쓸리지 않고 미디어를 소비하는 방법 즉, ‘뉴스 항해술’과 같다.대소사에 대해 떠들면서도 정작 ‘뉴스 자신’은 말하지 않는 것이 바로 뉴스라는 촌철살인으로 도입부를 여는 게 인상 깊다. 이어서 정치, 해외, 경제, 유명인, 재난, 소비자 정보, 여섯 가지로 뉴스의 범주를 크게 나누고 미디어라는 망망대해를 좀 더 안전하게 건널 수 있는 항해술을 공유한다. 낮게 읊조리던 트레일러 속 알랭 드 보통의 목소리가 책에서도 죽 이어진다. 때문인지 좀 심심한 면이 있다. 마치 두꺼운 철학서적을 한 권 펼쳐 놓은 기분도 들고. 다만, 재미로 치장한 가벼운 교양 몇 권 읽는 것보다 이런 책도 가끔 읽어보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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