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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들 - 윌리 로니스의 사진 그리고 이야기들 내 삶의 작은 기적
윌리 로니스 지음, 류재화 옮김 / 이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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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이 책의 개정판이 나온 모양이다. 생각난 김에 몇 자 적어보자면 이 책은 기본적으로 사진집이지만 나는 같이 실린 글들이 훨씬 좋았다. 필사를 여러 번 했고 지금도 가끔 꺼내 읽는다.  사실 나는 사진에 사자도 잘 모르는 문외한이고 흑백사진이라고 하면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라는 영화로 화제가 된 사진가 비비안 마이어(그녀의 사진집도 한 권 소장하고 있다.)와 이 책의 주인공인 윌리 로니스밖에 모른다. 그래도 감히 비교를 해보겠다. 일단 비비안 마이어의 매력을 코멘트의 부재에서 찾을 수 있다면 윌리 로니스의 매력은 사진만큼이나 인상적인 코멘트에 있다. 셔터를 누르던 그 순간으로 독자를 데려다 놓는 매력적인 산문들 말이다. 일테면 이런 문장들.




보통, 나는 일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 그저 바라보고, 기다린다. 어떤 사진이든 그냥 그 상황의 인상에 따른다. 내 순간성을 잡을 수 있는 좋은 위치만 찾으려고 애쓸 뿐이다. 실재가 더 생생한 진실 속에 드러나도록. 그것은 시점의 쾌락이다. 때론 고통이기도 하다. 일어나지 않은 것을, 혹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어날 일을 바라는 것이기 때문에.


p.30



사실, 내 사진 인생을 통틀어 내가 가장 붙잡고 싶은 것은 완전히 우연한 순간들이다. 그 순간들은 내가 할 줄 아는 것보다 더 훌륭하게 나에게 이야기해줄 줄 안다. 내 시선을, 내 감성을 표현해주는 것이다. 사진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데 뭔가 일어나고 있다.


p.91



나는 비비안 마이어 작품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질문들도 좋지만 윌리 로니스의 친절한 해설도 좋아한다.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윌리 로니스 정도, 그러니까 해설 역시 작품에 비견할 정도가 아니면 함께 싣지 않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 비비안 마이어처럼 말이다. 내가 두 사진가를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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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 한문화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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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책마다 고유의 호흡이 있다고 믿는다. 이 책을 펼치고 몇 장 넘겼을 때 유난히 긴 호흡이 느껴졌었다. 단박에 읽고 치울 만한 책이 결코 아니었기에 하루에 몇 장씩 아껴 읽었다. 읽는 내내 멈추고 생각하고 옮겨적다 보니 어느새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고민이 많았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잘 쓴 글인가, 쓴다는 행위 그 자체인가. 그러고 보니 은유 작가의 『글쓰기의 최전선』을 읽을 때도 비슷한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책을 덮으니 답이 따라왔다. 꾸준히 쓰고 싶다는 것. 내 마음은 내가 쓴 글이 아니라 쓰고 있는 나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좋은 글에 대한 감각을 기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많이 읽기. 둘째, 많이 쓰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잘’이 아니다. ‘많이’다. ‘잘’ 쓴다는 것은 우선 많이 쓰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떤 커피가 맛있는 커피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바리스타가 될 수 있을까? 원두의 배전도가 어떤지, 얼마나 갈아야 하는지, 탬핑은 어떻게 하고 머신의 압력은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하는지 따위는 어디까지나 ‘기술’일 뿐. 바리스타가 되려면 기술을 익히기에 앞서 맛있는 커피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하는 게 순서다. 그들은 우연히 맛있는 커피를 맛보고 이 세계에 매료되어 바리스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지 기술부터 익히고 뒤늦게서야 커피 맛을 배운 게 아니다. 비단 바리스타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일이 이와 다르지 않다. 마찬가지로 잘 쓰기 위해서는 일단 어떤 글이 좋은 글인지를 알아야 한다. 좋은 글에 대한 나만의 좌표도 없는 사람이 허구한 날 베스트셀러 작가가 추천하는 ‘좋은 문장 만들기’ 따위를 외운다고 해서 좋은 글을 쓸 리 만무하다. 그러니까 일단 ‘잘 쓰기’에서 ‘잘’은 내려놓고 ‘쓰기’와 친해져야만 한다. 쓰기 근육을 단련해야 좋은 문장을 부릴 줄도 아는 것이다. 될 수 있으면 많이 읽는 것도 겸하면 좋고.


따라서 이 책은 어떤 문장이 좋은 문장인지, 어떤 글이 논리적인 글인지를 논하지 않는다. 저자인 나탈리 골드버그는 좋은 문장, 논리적인 글 ‘이전에’ 일단 ‘쓰기’라는 행위에 자체로 돌아갈 것을 요구한다. 그녀가 강조하는 것이 바로 ‘많이 쓰기’다. 글을 완성하지 않아도 좋으니 일단 많이 쓰라고 말이다. 아니, 완성하지 말라니? 매번 쓸 때마다 '한 편'의 완성된 글을 쓰도록 교육받은 나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완성된 글에 대한 부담감은 ‘쓰지 않기’라는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질 때가 많다. 잘 써야 하는 것도 모자라 완성까지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손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글쟁이는 어쨌든 써야만 한다. 써야 작가든 칼럼리스트든 뭐든 할 것이 아닌가. 그럼 결국 이 부담감을 어찌 해소하는가에 대한 고민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한다. 잘 쓰려고 하지 마라, 완성하려고도 하지 마라, 문법이니 논리니 전부 내려놓고 일단 ‘많이’ 써라. 당신이 쓰기와 친해진다면 잘 쓰는 것은 물론이요 글 한 편 완성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그녀는 내가 쓴 글에서 떠나라고까지 말한다. 어쩌다 괜찮은 글을 한 편 썼다고 자만하지 말라는 것이다. 공감한다. 글을 쓰는 ‘행위’가 바로 나다. 그러므로 작가는 자신이 쓴 글에서 미련없이 떠날 줄 알아야 하고 멈추지 말고 써야만 한다. 내가 쓴 글과 나를 동일시하는 순간 나의 글은 정체될 것이다.  


나는 책을 읽을 때 실제로 밑줄을 긋진 않는다. 다만 옮겨 적을 뿐이다. 만약 이 책에 실제로 밑줄을 그었다면 아마 지금쯤 거진 모든 페이지에 밑줄이 그어져 있지 않을까 싶다. 독서 기간 동안 알라딘에 꾸준히 밑줄을 등록했는데 오늘 마지막 밑줄 두 개를 등록하려고 보니 ‘밑줄긋기는 최대 50개까지 작성할 수 있습니다.’라는 경고창이 떴다. 이 책이 알라딘에 등록할 수 있는 최대 밑줄 개수를 알려준 셈이다. 많이도 그었다. 책에 밑줄이 많다는 것은 내 마음을 움직인 문장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매일 쓰기로 했다. 이제는 백지가 망망대해처럼 느껴지진 않는다. 내 앞에 놓인 백지는 이를테면 스펀지다. 곧 내가 부려놓을 상념들을 머금을 준비를 하고 내 앞에 놓여 있는 스펀지. 두렵지 않다. 백지는 내가 그 어떤 수치스럽고 비밀한 이야기를 털어놓더라도 묵묵히 포용해 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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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인간의 조건 - 꽃게잡이 배에서 돼지 농장까지, 대한민국 워킹 푸어 잔혹사
한승태 지음 / 시대의창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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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장기(將棋)라 불리는 체스에는 폰(Pawn)이라는 말이 있다. 한 번에 한 칸씩밖에 이동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장기로 치자면 졸(卒)과 쓰임새가 같다. 그런데 이 폰이 어찌어찌 상대편 진영 끝에 도달하게 되면 퀸(Queen), 여왕이 된다고 한다. 체스에서는 이것을 퀴닝(Queening)이라고 부른다. 저자 한승태는 서문 「우리도 퀴닝 할 수 있을까?」 에서 책의 제목은 본래 ‘퀴닝’이지만 출판사의 반대 때문에 『인간의 조건』이라는 진부한 제목으로 출간되었음을 밝혀놓았다. 저자의 불만에 공감한다. 여기에는 가장 약한 말이지만 한 번에 한 칸씩 꾸준히 오르면 여왕이 될 수 있는 체스의 규칙처럼 대한민국의 수많은 워킹푸어가 삶에 쏟아 붓는 노력만큼 대가가 주어지는 현실이 오길 바란다는 저자의 염원이 담겨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제목(인간의 조건)을 부제로, 저자가 정한 제목 ‘퀴닝’을 원제로 쓰고 싶다. 이렇게 말이다. 『퀴닝: 인간의 조건』.




이 괴상망측한 사회가 비틀거리면서도 여전히 굴러갈 수 있는 이유는 수많은 사람들이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음에도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p.567



노동의 숭고함? 개나 줘버리라지. 이 책에는 VJ 특공대와 극한직업이 보여주지 않는 이 나라 중노동의 민낯이 있다. 대한민국 노동의 숭고함은 웬 친일파 독재자가 국민에게 ‘잘 살아보세’를 외치게 하던 그 순간 사라졌다. 낡은 것을 쓰레기 취급하고 느린 것을 도태시키는 사회에서 숭고한 노동과 노동자를 기대한다는 게 어불성설. 저자는 자신의 경험으로 그것을 증명한다. 현 사회가 당연시 생각하는 24시간 영업, 저렴한 가격, 친절한 서비스의 이면에는 변기통에 버려진 휴짓조각보다 못한 누군가의 인권, 위생, 안전이 깔려 있다. 내일이 없는 이곳에서 우리는 피부색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타인의 죽음에서 휴식을 탐하는 개망나니만도 못한 인간이 될 뿐이다.


누군가가 바다에 빠졌다는 소식을 ‘오늘은 일하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다’로 해석하려면 그 사람이 하는 일이란 대체 얼마나 힘든 것일까? 이 책의 첫 번째 일화, 바로 꽃게잡이 어선 이야기다. 일이 너무 힘들어지자 자해까지 고민하고 곧이어 그 고민이 또 다른 누군가를 해할(그래야 쉴 수 있으니) 생각으로 번지는 대목은 이 나라 중노동의 지난함을 여실없이 보여준다. 배에서 탈출하려다 익사한 어느 중국인 노동자의 시신을 망연히 바라보며 이 일을 그만두겠노라고 다짐하는 저자의 심정은 어땠을지. 몇 개월 치 임금 체불은 예사인 이곳에서 그만 두겠다는 그를 순순히 보내주는 선주의 행동을 일종의 배려로 인식하는 동료들의 모습은 애석하고 또 씁쓸하다. 지옥 같았던 6주가 40만 원이라는 어이없는 금액으로 환산되어 돌아와도 이제는 그만해도 된다는 사실 하나에 안도하게 되는 일.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바닷일이란 6시 내 고향 같은 티비 프로그램에서 비춰지는 낭만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을 역설한다.


무례한 손님들을 상대하며 하루하루 변해가는 주유소, 편의점 아르바이트 일화도 남 일 같지 않다. 그는 카스트제를 언급하며 한국의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처우는 수드라와 다를 게 없다고 말한다. 사실상 계급사회라는 얘기다. 고시원 일화를 읽을 때는 박민규의 단편 소설 「갑을고시원 체류기」가 많이 생각났다. 문제는 그가 겪은 일들이 허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돼지 농장에서 몽골인들을 차별했던 고백은 열악한 근무 환경과 짐승만도 못한 처우가 만든 중노동에 지친 인간이 얼마나 야박해질 수 있는지 시사한다. 춘천 비닐하우스 주인아주머니의 눈물은 우리 사회에 워킹푸어와 삶의 조건이 크게 다르지 않은 고용인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들려주는 일화들은 이처럼 고발적이기보다는 고백적이기에 와 닿는다. 나는 저자가 노동의 고단함을 말하고자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보다 이 나라 자본이 노동과 노동자를 어떻게 취급하는지를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독자가 발견하길 기대하지 않았나 싶다. 기실 그가 겪은 일들은 우리가 매일 겪고 있는 일상의 한 단면일 뿐이니까. 꼭 육체적 고통이 따라야만 중노동인가? 그가 보고 경험한 일들을 ‘남’의 얘기로 인식하게 되는 순간 이 책은 주말 저녁 시간 때우기 시사 다큐와 다를 게 없어질 것이고 ‘나’의 일로 인식하게 되는 순간 진정 그의 고백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노동은 숭고한 것이라는 편견을 깨고 그 안에서 어떤 부조리한 구조를 발견했을 때 비로소 퀴닝이 가능한 사회가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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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6-03-16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3년에 나왔던 책들 중에서 가히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만한 명저라는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었지요. `노동은 숭고한 게 아니라 그저 통증일 뿐이다` 저는 한승태란 저자의 다음 책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5DOKU 2016-03-16 17:36   좋아요 0 | URL
이분은 지금도 어디에선가 중노동을 하고 계실 것만 같습니다.....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 - 일기 쓰기부터 소설 쓰기까지 단어에서 문체까지
안정효 지음 / 모멘토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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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효 작가는 아마 《하얀전쟁》,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의 원작자로 더 유명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는 소설가이기 앞서 백 권이 넘는 외국문학을 번역한 역자이기도 하다. 그가 번역한 책 목록을 살펴보면 상당히 익숙한 작품들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번역 역시 엄연한 창작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에 드는 외국 소설을 읽었을 때 내가 눈여겨 보는 부분은 역자가 누구냐는 것이다. 역자에 따라 걸작이 졸작으로, 졸작이 걸작으로 탈바꿈하는 사례도 심심찮게 보아왔기 때문. 소설가이자 역자인 사람을 굳이 찾아본다면야 안정효 작가 한 명뿐일까. 다만, 두 분야 모두 그렇다 할만한 성취를 이뤄낸 사람은 드문 듯하다. 하여, 소설가로서, 또한 역자로서 작가 안정효가 생각하는 글쓰기란 어떤 것일까 알고 싶어 이 책을 펼쳤다.


‘일기 쓰기부터 소설 쓰기까지 단어에서 문체까지’라고 부제에서 언급하고 있듯 문장론부터 시작해 소설 쓰기까지 다루는 백과사전 같은 책이다. 500페이지면 결코 얇은 편이 아니건만 두께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다룬다. 보통 이야기를 지어내는 방식에 치중하는 작법 책, 쓰기라는 행위 자체에 초점을 맞춘 글쓰기 책 등 이런 부류의 책들도 엄연히 분야가 나뉘는데 이 책은 그 모든 것을 다루고 있다는 게 특이하다. 그럼에도 대충 넘어가는 챕터가 없다는 게 장점. 일테면 “심화는 다른 책으로 하시구요.” 같은 느낌을 주지 않아서 마음에 든다. 이렇게 많은 부분을 다루면서도 꼼꼼하게 엮인 책을 읽은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 다만 제시하는 방법들 가운데 몇 가지는 너무 저자 개인적 상황에 맞춰져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들었는데 읽다 보니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책에서 저자는 글쓰기 관련 서적들을 읽는 것도 좋지만 ‘자신만의 원칙’을 만드는 것이 우선되지 않으면 다 부질없다는 점을 먼저 강조한다.




나에게 원칙이 없으면 선택의 여지도 없고, 그래서 타인들의 원칙을 노예처럼 따르기만 할 따름이다. 먼저 나에게 원칙이 있어야 타인의 원칙을 만날 때 비판하고 취사선택 할 능력이 생겨난다. 그래야 나 스스로 계속해서 새로운 원칙을 만들어낸다.


p.24



앞선 아쉬움은 바로 저자의 이러한 가치관에서 형성되었던 것. 틀린 말이 아니기에 반론의 여지도 없다. 쓰는 법은 차치하고 읽는 법을 주제로 한 책도 수없이 쏟아지는 요즘 아니던가. 선택의 다양성이 늘어나는 건 독자로서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남들이 만든 방법을 취하기 전에 비록 효율적이진 않더라도 나만의 원칙을 먼저 만들어두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나만의 원칙이 없기 때문에 여태껏 남들이 만든 원칙들만 노예처럼 주워섬겼던 것이 아닌가 뜨끔하기도 하고. 특히 ‘쓰기’는 스스로 생각하는 힘 없이는 불가능한 행위인데 요령 따위를 수십, 수백 가지 익힌다고 해서 그게 될 리가 없으니 말이다. 저자는 ‘능력 대신 요령을 익히면, 그만큼 손해를 본다. 손해를 보는 듯싶지만 남의 일까지 대신 다 하는 사람은 능력 또한 남의 몫까지 얻는다. 그러니까 손해를 봐야 손해를 안 본다’(p.21)라고 말하며 나만의 원칙은 온갖 요령을 주워섬기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바로 미련하리만치 힘들게 쓰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임을 역설한다.


여담이지만,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내가 쓰는 문장에 ‘있다’, ‘수’, ‘것’이 이렇게나 많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저자는 이른바 ‘있을 수 있는 것’을 문장에서 모조리 없애야 한다고 지적한다. 전형적인 번역체이기 때문. 커리어 통틀어 번역과 소설 쓰기에 매진해 온 안정효 작가의 충고이기에 허투루 넘길 수 없지 않은가. 이 세 요소가 문장의 가독성과 읽는 맛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모든 글을 천편일률적이게 만들어 개성을 죽는다고 한다. 지금은 덜한데 이 책을 읽었던 시기 한동안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저자의 지적을 접한 이후 내 눈에는 온통 ‘있을 수 있는 것’만 보이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습관처럼 읽던 인터넷 기사와 잡지 칼럼, 자주 방문하는 블로그까지. 저 ‘있을 수 있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는 읽는 게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문제는 덩달아 쓰는 것도 힘들어졌다는 사실. 혹시나 내 문장에 있다와 수 그리고 것이 포함되어 있지 않나 자꾸만 의식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생산력마저 떨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니 저자의 지적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혼자 유난을 떨었던 면도 없지 않다.


눈치챘겠지만 나는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최대한 줄인다고 줄인 게 이 모양. 한동안은 저 ‘있을 수 있는 것’을 철두철미하게 문장에서 몰아내고자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생각보다 이게 어렵다. 있다, 수, 것 없이는 논리적인 문장을 쓸 수(또!!!) 없는 지경에 이른 것(또 또!!!)이다. 그래서 지금은 의식하지 않고 우선 초고를 작성한 후 퇴고할 때 불필요한 부분만 줄이려고 한다. 사실 저것들을 굳이 배제하지 않아도 좋은 문장을 써내는 작가들도 많지 않은가. 또한 저것들을 문장에서 몰아낸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글이 된다는 보장도 없다. 이런 걱정을 하기에 앞서 한 자 더 써내는 게 지금 내게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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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줘라, 아티스트처럼 - 당신의 능력이 빛을 보게 하는 가장 현실적인 10가지 방법
오스틴 클레온 지음, 노진희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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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잘하고자 하면서 배우기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글쓰기가 대표적 사례가 아닐까 싶다. 모두 글을 잘 쓰고 싶어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 그런데 이상한 게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사람들이 쓰지는 않고 읽기만 한다. 잘 쓰려면 물론 어느 정도는 다독을 해서 좋은 문장을 골라내는 능력을 키우는 게 우선이지만 백날천날 읽기만 하면서 잘 쓰고 싶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야말로 글을 글로 배우는 격. 당연한 말이지만 잘 쓰려면 쓰는 게 먼저다. 그것도 많이. 쓰지 않고서는 ‘잘’ 쓸 수가 없다. 왜 인풋을 하는가? 결국 아웃풋을 하기 위해서다. 안 그런가? 뭐 인풋 그 자체로 만족하는 사람들도 있을 듯싶다. 다만 우리가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굳이 눈에 보이는 어떤 성취가 아니더라도 결국 활용, 아웃풋을 하기 위해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열심히 배웠으니 이제 그것을 보여줄 차례인 것이다.


『훔쳐라, 아티스트처럼』이 ‘인풋’을 위한 책이었다면 이번에는 ‘아웃풋’이다. 지금까지 이것저것 많이 훔쳤던 이유는 바로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저자 오스틴 클레온은 먼저 ‘잘’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가 아웃풋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개 ‘잘’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 때문인 경우가 많다. 문제는 ‘잘’ 보여주려다 ‘안’ 보여주고 마는 게 다반사라는 사실. 그러니까 그냥 그 부담감 내려놓고 일단 뭐라도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저자는 말한다. ‘진짜 중요한 차이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과 뭐라도 하는 것에 있다.’(p.24)고. 나는 보여줘야 할 대상이 반드시 남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남들에게 보여주기가 민망하다면 ‘나’에게 보여주면 그만 아닌가? 요지는 어쨌든 뭐라도 하라는 것이다. 잘하든 못 하든 뭔가를 하는 그 ‘과정’ 자체가 이미 작품 활동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아웃풋은 곧 ‘결과물’이라는 건 통념일 뿐이다. ‘과정’ 역시 엄연한 아웃풋이다.




“쌓아두는 것의 문제는 그 축적물에만 의지해 살게 된다는 점이고, 그러면서 점점 당신이 고리타분해진다는 점이다. 쌓아둔 모든 걸 버리고 당신에게 아무것도 안 남으면 어쩔 수 없이 새롭게 보고, 자각하고, 다시 채워 나가게 된다. 더 많이 버릴수록 더 많이 얻게 된다.” - 폴 아덴


p.80



책을 읽다 보면 아웃풋에는 실로 다양한 방식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작게는 하루하루 나만의 프로젝트 일지 작성하기부터 크게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그룹을 만들어 협업해보기까지. 여기서 핵심은 바로 ‘공유’. 저자는 역사 속 천재들이 대개 어느 집단의 일원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가 아는 그들의 결과물이 세상에 알려지기 이전, 그들은 서로의 작품을 피드백하며 용기를 얻고, 영향을 주고 받는 과정을 거쳤다는 사실을.


아웃풋 과정에 생길 수 있는 여러 문제, 일테면 표절이나 비난 같은 걱정거리에 대해 저자가 던지는 몇 가지 충고가 좋다. ‘비법을 가르쳐준다고 해서 당장 경쟁자가 붙는 것은 아니다. 마스터의 기술을 안다고 해서 곧장 그대로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p.124)이라거나 ‘비난 하나하나가 전부 새로운 작품에 대한 가능성이 된다. 어떤 비평을 받게 될지는 컨트롤할 수 없지만,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지는 컨트롤할 수 있다’(p.159) 같은 말들은 비단 아티스트뿐만 아니라 공동체 생활을 하는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될 만하다.


특히 ‘배고픈 아티스트’라는 낭만적 환상을 극복하라는 충고가 와 닿았다. 예술가는 가난하다는 아니, 가난해야만 훌륭한 작품을 완성시킬 수 있다는 고정관념. 당신이 이 진부한 환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한평생 돈만 저주하다 그 가난이라는 진창 속에서 죽게 될 거라고 말이다. 저자는 돈이 창작을 타락시키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의미 있는 문화재나 예술 작품들은 실제로 돈 때문에 만들어진 경우도 많다고 한다. 공감. 나는 돈과 예술에 대한 이분법이 도리어 예술을 망치는 길이 아닐까 싶다. 목적이 오로지 돈이라면 문제겠지만 돈이 없으면 내가 좋아하는 일도 하지 못하는 시대에 여유로운 삶을 갈망하는 것은 욕심이 아니라 예술가로서 지녀야 할 당연한 마음가짐이다. 물론 생과 사를 논하는 순간에서 걸작이 탄생한 사례도 있다. 근데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들의 삶이 좀 더 여유로웠다면 더 나은 걸작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책을 읽고 완벽이라는 부담과 가난이 곧 예술이라는 환상을 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뭐라도 해보자 하는 자신감도 얻게 되었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 아티스트는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에서 탄생한다는 걸 알게 됐다면 망설이지 말고 아웃풋이다. 쌓아두지만 말고 이제는 보여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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