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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천국에서
김사과 지음 / 창비 / 2020년 2월
평점 :
판매중지
나는 어떤 세상을 꿈꾸는가, 나의 재능을 어디에 쓸 것인가 고민하세요. 그 꿈을 좇다 보면 돈을 버는 거지, 돈 벌어서 어디에 쓰겠다, 그건 아니에요. 자기 몸에 맞는 옷을 입고 살 때 얼굴에서도 가장 예쁜 빛이 나요. 얼마 전에 만난 젊은이에게 꿈을 물었더니 ‘7급 공무원’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정신 차리라”고 한 대 때렸어요. 7급 공무원은 네가 뭔가를 하고 싶은 과정이 될 순 있어도 그 자체가 어떻게 꿈이 될 수 있느냐고요.
_한비야, 인터뷰 「반장 하면 ‘반기문’ 되기 유리하냐고요?」 중에서
역시 대한민국 최고의 ‘판타지’ 소설 작가다운 발언이다. 한비야, 그녀야말로 자신의 꿈을 팔아 돈을 번 장본인이 아니던가. 하지만 한국의 모든 젊은이가 그녀처럼 판타지 소설 작가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오늘의 한국은 그녀의 말마따나 꿈을 좇다 보면 돈을 벌게 해주는 그런 곳이 아니다. 그보다 돈을 벌어서 내 입에 풀칠이라도 하는 것이 시급한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 꿈은 그 이후에나 꿔볼 수 있는 사치와 같다. 그녀에겐 7급 공무원은 그저 과정일 뿐이겠지만 누군가는 일단 사는 게 목표이기 때문에 안정적인 벌이를 제공하는 7급 공무원은 엄연한 꿈이다.
『천국에서』의 케이는 한비야와 같은 어른들이 만든 ‘천국’의 대표적인 희생양이다. 케이는 먼저 뉴욕에서 그 천국을 맛본다. 꿈을 좇는 사람들이 건설한 화려한 도시 뉴욕 말이다. 그곳에서 또래의 친구들이 자유롭게 살아간다. 이어 서울로 돌아온 케이는 어떤 무질서를 느낀다. 뉴욕과 같은 천국이 되고는 싶지만 헬조선으로 대변되는 현실 속에서 서울은 그저 최대한 뉴욕처럼 보이고 싶은 도시일 뿐. 그래서 케이는 진짜 꿈을 좇는 친구들을 찾아 홍대로 간다. 뉴욕만큼은 아니지만 그들은 적어도 꿈과 자유를 좇지 않던가.
그러던 케이의 생활은 초등학교 동창 지원을 만나면서 급격히 바뀐다. 지원의 생활은 케이가 경멸하던 삶의 전형이다. 꿈 따위는 포기한지 오래. 인천의 작은 공단에서 힘든 노동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삶. 지원과 그 가족들의 모습은 케이가 뉴욕과 홍대에서 느낀 천국의 모습과는 완전히 상반된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곳에서 케이는 천국에서 느낄 수 없었던 ‘진짜’를 경험한다. 비록 비루한 삶이지만 최소한 그들은 오늘날 꿈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케이는 지원을 떠날 수 없다.
아마도 케이는 그제야 자신이 그렇게 원하던 천국의 실체를 깨달았을 것이다. 뉴욕, ‘꿈을 좇아’ 남의 땅을 찾아와 원주민들의 삶을 송두리째 갈아 만든 도시. 그리고 서울, ‘꿈을 좇아’ 이전의 낡은 것을 모두 무너뜨리고 건설한 도시. 두 곳은 각각 그 나라를 대표하는 천국이다.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 최고의 가치라 여겨지는 곳. 이곳에서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보이지 않는 그곳에 진짜 삶이 있다. 케이에게 사는 대로 생각하는 지원은 ‘꿈’이 아니라 ‘진짜’다.
모든 게 망가졌는데, 왜 아무것도 무너져내리지 않아? 왜 다 무너져내렸는데 아무것도 끝장나지 않지? 왜 끝장이 났는데,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는 거냐고? 분명히 뭔가 잘못된 거야. 뭔가 심각하게 잘못된 거라고. 그런데 여기가 천국이래.
p.446
꿈을 좇는 삶, 생각하는 대로 사는 삶이 최고의 가치인 한비야에게 7급 공무원이 꿈인 젊은이는 ‘맞아야 할’ 대상이다. 사는 대로 생각했을 뿐인 젊은이는 꿈을 좇지 않았다는 이유로 ‘맞았다’. 똑같은 이유로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침략자들에게 학살당했고, 서울의 어느 세입자는 오늘도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다. 하지만 모두들 이곳을 천국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