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4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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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사람들은 그야말로 다양한 종류의 경험을 ‘산다’. 하기야 돈만 많다면 못할 것이 없는 세상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는 예외다. 그것은 바로 고통. 엄밀히 말하자면 죽음의 고통이다. 사무친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높은 곳에서 몸을 던지는 누군가와 곤궁한 삶에 배를 주리다 죽는 순간마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종이에 써놓고 가는 사람, 편안한 삶을 포기한 채 사회 부조리에 온몸으로 맞서다 공권력의 희생양으로 허망하게 유명을 달리하는 투사까지. 돈으로는 절대 경험하지 못하는, 그 자리에 서보지 않은 이는 감히 경험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죄가 되는 죽음의 고통. 소세키는 말한다. 이런 고통을 '맛본' 사람만이 문학자가 될 수 있다고. 




(…) 문학은 말이지요, 학문이나 학문 연구를 방해하는 것이 적이 됩니다. 예를 들면 가난하다거나 바쁘다거나, 압박이나 불행이나 비참한 사정이나 불화나 싸움 등이 그것이지요. 이런 것들을 피해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얻으려고 합니다. 문학자 역시 지금까지는 그래왔습니다. 그래왔을 정도가 아니지요. 여러 학문 중에서 문학자가 가장 여유로운 시간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여겨져왔습니다. 웃긴 것은 당사자들조차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문학은 인생 그 자체입니다. 고통이 있고, 궁핍이 있고, 고독이 있고, 무릇 인생길에서 만나는 것들이 곧 문학이고, 이런 것들을 맛본 사람이 문학자입니다.

p.100



소세키의 말에 따르면 문학자는 세상의 좋은 것만 느끼고 그것을 책에 담아 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함민복의 곤궁함과 김신용의 비행을 느껴본 독자들은 자전거 좋아하는 모 작가가 라면 어쩌고 운운하는 가난에서 어떤 얄팍함을 간파하기 마련이다부실한 경험에 문장이라는 양념을 쳐놔서 분간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지만, 그의 일상 언어(인터뷰 등)를 자주 접하다 보면 단번에 구분할 수 있다. 그게 조미료에 불과하다는 걸. 


영국의 작가 잭 런던은 20세기 초 산업 자본주의가 가져온 호황기 런던 밑바닥 삶을 탐구하고자 거리의 노동자가 되었다. 그곳 곤궁한 사람들과 똑같이 생활하며 런던 이면에 어떠한 인간적 고통이 존재하는지 그는 몸소 체험했고 그 경험이 고스란히 담긴 책이 바로 『밑바닥 사람들』 이다. 이 책은 훗날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에 영감을 주기도 했다.


에밀 졸라는 어떤가? 그는 오늘날 프랑스 인권의 토대를 마련한 '드레퓌스 사건' 당시 선두에 서서 누명을 쓴 대위를 위해 자신의 작가적 지위와 명성을 포기하고 자국 프랑스와 맞선위대한 작가였다. 소세키가 말한 '고통을 맛본' 문학자란 바로 이들인 것일까? 힙합에서는 이것을 흔히 ‘스트리트 크레디빌리티’ 라고 한다. 경험에서만 나오는 일종의 에토스인 것이다. 오늘도 따땃한 방구석에서 키보드나 두들기는 나 같은 사람은 소세키의 말처럼 진정한 작가 정신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준 그들의 궤적을 훑으며 그저 사색하는 길 외에는 어쩔 도리가 없을 성싶다. 


하지만 정말 나 같은, 그러니까 경험이 없는, 고통을 모르는 사람들은 소세키의 말처럼 진정한 문학인이 될 수 없는 걸까? 하지만 나는 위대한 문학이 반드시 어떤 고통을 동반해야만 탄생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물론 그런 경험이 위대한 문학을 만드는 밑거름임을 부정하진 않겠다. 실제로 지금 우리 삶을 바꾼 몇몇 문학 작품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다만, 그것이 마치 불변의 테제처럼 여겨지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쓴다면 그것은 분명 거짓이며 좋은 문학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진정 ‘안다는 것’ 은 무엇인가? 그것이 꼭 고통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산물일까? 어떤 작가들은 평생을 고통과 함께 살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좋은 글을 써내는 것은 아니다. 또 누군가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비교적 유유자적하며 살다가 몇 세기를 굳건하게 버텨낼 고전 작품을 여러 개나 써내기도 한다.


해서 나는 감히 주장한다. ‘안다는 것’ 이란 반드시 고통의 여부나 경험의 넓이와는 비례하지 않는다고. 안다는 것, 그러니까 지혜란 어느 작은 경험이라도 그것을 사유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질적 향상이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다. 자기가 가진 경험의 넓이를 자랑하는 사람은 많다(내가 해봐서 아는데....). 그런데 그런 경험은 창고에 쌓아만 둔 채 정리하지 않는다면 한낱 쓰레기에 불과할 뿐이다. 앞서 열거한 좋은 문학가들은 결국 단순히 고통에서 그것을 건져낸 사람이 아니라 그 고통을 부단히 사유했기에, 위대한 작품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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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 타임슬립 필립 K. 딕 걸작선 1
필립 K. 딕 지음, 김상훈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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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며 필립 K. 딕(이하 PKD)에 대해 확신한 두 가지 사실이 있다. 첫째, 그는 우리 인간들이 비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이상 영원히 행복을 찾을 수 없을 거라고 보았다는 점이다. 실사화된 그의 작품들과는 달리 원작들은 대개 비관적인 관점을 줄곧 유지하는데 그 갈등은 결말에서도 풀리지 않은 채 끝이 나버리곤 한다. 많은 SF소설이 미래의 첨단 기술과 그로 말미암은 인간들의 편리하고 윤택한 삶을 그리는 반면 PKD가 그려내는 미래란 절망적이며 언뜻 보면 암울했던 중세 시대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화성의 타임슬립』 또한 예외가 아니다. 지구를 떠난 일부 인간들은 화성을 식민화, 개척하지만 그들은 대개 궁핍하며 여러 정신병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부(富)란 일부 치들의 전유물이라는 사실은 지구나 화성이나 매일반이며 화성의 자본가들 또한 역시 탐욕에 눈이 멀어 오로지 재화만이 최고의 가치라 여기며 살아간다. 돈과 기술이 우선인 그러한 비자연적 삶에 놓여진 등장인물들은 영원한 고통 속에서 남은 생을 연명한다. PKD는 우리 인간의 가치관 자체가 바뀌지 않는 한 유토피아란 결코 오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PKD는 우리가 흔히 슈퍼 히어로라고 부르는 초능력자와 정신병자들을 딱히 구분해서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알려졌다시피 그는 거진 평생을 온갖 정신병에 시달리며 살다간 인물이다. 그의 작품은 대개 뒷골목에서 구한 불법 약물 복용 후 일어나는 각성 상태에서 쓰여진 것인데 이때 쓰여진 몇 작품이 당시 좋은 평가를 얻었다고 한다. 가난과 정신병, 그의 삶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이 두 가지 악연은 약물로 인한 각성 효과로 이어졌고 이는 일종의 ‘초능력’ 이라는 상징으로서 그의 작품에 녹아든 셈이다. 때문에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초능력자나 안드로이드들은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음에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아니, 불행 그 자체다.


『화성의 타임슬립』 에 등장하는 만프레드라는 꼬마를 보자. 이 아이는 시공간을 제어할 수 있는 초능력자다. 시간과 공간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다니! 마블과 디시 코믹스에 등장하는 슈퍼 히어로들의 화려한 모습이 벌써부터 아른거리지 않는가? 그런데 PKD는 다르게 보았다. 만프레드가 가진 이 초능력은 그가 자폐아이기 때문에 지니게 ‘된’ 일종의 퇴행성 질병과 같은 것이다.




…잭은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신경증이 왜 인위적인 발명품인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신경증이란 병에 시달리는 개인이나 위기에 직면한 사회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필요가 빚은 발명품인 것이다. 따라서 신경증을 너무 나쁘게만 보지 말라는 실비아의 말은 타당했다. 신경증이란 의식적인 멈춤이기 때문이다. 어떤 시점에서 삶을 동결시켜 더 이상 사태가 악화되는 걸 막는 행위라고나 할까.

p.122



어쩌면 만프레드의 시공간 제어 능력은 자본이 만들어낼 지옥같은 삶에 대항하는 의식적 멈춤이자 삶의 동결이며 이것이 자폐증으로서 나타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PKD에게 정신병 환자란 이렇듯 누가 보더라도 파멸로 향하고 있는 것이 자명한 인간군상에서 보여지는 위기감을 남들보다 좀 더 빠르게 감각하는 인물들이었던 게 아닐까? 그런 예민한 통각을 가진 그들의 모습이 슈퍼 히어로처럼 화려할 리 만무하다. 사실 이는 오늘날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각성 상태의 PKD가 그려냈던 미래의 모습들은 하나같이 암울하고 절망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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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ve the Cat! : 흥행하는 영화 시나리오의 8가지 법칙 Save the Cat! 시리즈
블레이크 스나이더 지음, 이태선 옮김 / 비즈앤비즈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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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캠벨은 카를 구스타프 융의 심리학을 활용해 ‘갔다가 돌아오는’ 신화 속 인물들의 여정을 17단계로 구분(『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하여 도식화한 인물이다. 그리고 그를 매우 사랑한 크리스토퍼 보글러는 조셉 캠벨의 이론을 ‘시나리오’ 라는 틀에 맞게 다시 12단계로 구분(『신화, 영웅 그리고 시나리오 쓰기』)했다. 오늘날 현대 영화 스토리 구조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시드 필드는 어떤가?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속 3막 구조에 사건과 위기라는 개념을 도입해 ‘패러다임’ 이론을 정립(『시나리오란 무엇인가』)한 인물이다. 이외에 6단계 플롯구조를 제시한 마이클 허그, 스토리 A, B구조를 만든 린다 시거,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로버트 맥기, 필립스 & 헌틀리까지. 


서구 문화의 발단이 된 그리스 로마 신화나 중앙아시아의 라마야나 그리고 요즘 내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는 동아시아 서사 콘텐츠의 원천 서유기 등, 과거부터 현재까지 세상에는 진정 수많은 이야기가 넘쳐 흐른다. 그리고 평생을 소설책 속에서 파묻혀 살았다는 사람은 많다. 차고 넘친다. 그런데 그 많은 이야기 가운데서 어떤 원형(原型)을 발견하고 그것을 도식화까지 해내는 사람은 극히 일부분이다. 대단하지 않은가? 나는 그들을 보면 왠지 모를 경외감이랄지 시기심까지 들곤 한다. 창작욕은 있으나 매번 행동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나에게 그들은 부러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 블레이크 스나이더. 그의 말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단 열 가지 장르로 구분이 가능하며 개별 이야기들은 다시 열다섯 가지 시퀀스로 나눌 수 있다. 더불어 그가 만들어낸 만든 비트 시트에 적용할 수 없는 이야기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른바 Save the Cat! 구조론이라 불리는 그의 이론은 어렵게만 느껴지던 시나리오 창작 활동에 일종의 쉬운 가이드를 제시함으로써 많은 작가 지망생에게 작게나마 실마리를 제공했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런 그의 이론을 증명하는 하나의 결과물이자 짧지만 유익한 시나리오 작법서이기도 하다.


책의 두께만 봐도 짐작할 수 있듯이 내용은 비교적 짧다. 사람들은 좋은 책이란 대개 무겁거나 혹은 두꺼우며 어딘지 모르게 학술적 냄새를 풍길 것(예컨대 로버트 맥키라든가....)이라고 생각하는데 블레이크 스나이더는 그런 기대를 한방에 박살내며 좋은 이론은 반드시 무겁고 어려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보여준다. 나는 이 책이 어렵고 딱딱한 전문적 용어들을 들먹이지 않고 심지어 재밌게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비록 그의 방법론이 소위 ‘팔리는’ 시나리오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는 하나 나는 그 팔린다는 것자체가 이미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야기란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도 내겐 큰 의미였다.


누군가는 이런 구조론적인 접근에 불쾌감을 드러낸다. 이야기란 그렇게 몇 가지 틀로 찍어낼 수 있는 공산품 따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디 건방지게 서사를 더럽히는가? 신성 모독이다!” 이거다. 하지만 진정 그런가? 그렇다면 기원전부터 오늘까지 살아남은 이야기들에서 끊임없이 발견되고 시대마다 변주되는 어떠한 공통점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우리가 아는 고전들은 단순히 그 시절 세간을 뒤흔들거나 실험적이거나 문제적이기만 해서 시간의 검증을 받게 된 건가? 나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저자 또한 나와 생각이 비슷한가보다.




효과를 거두는 이유는 한 가지다. 이 스토리텔링을 지배하는 법칙이 모든 상황에서 매번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할 일은 왜 그것이 효과를 거두며 어떻게 이 이야기 톱니들이 맞물리는지 배우는 것이다. (…) 법칙은 다 이유가 있어서 존재하는 것이다.

p.66



제아무리 복잡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그 안에는 어떤 플롯이 존재할 거라고 본다. 좋은 이야기란 그 플롯을 교묘하게 감추는 능력, 뒤집어 말하자면 이야기에만 온전히 집중하도록 정교하게 ‘설계된’ 작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단지 ‘깊이’가 다를 뿐이다. 누군가는 이 책을 가지고 팔릴 만한 이야기 한 편을 즉석에서 구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얄팍한 이야기는 척봐도 딱이다. 모든 것은 결과물이 말해줄 것이다. 다만 이 책은 ‘누구나’ 이야기라는 것을 쓸 수 있도록 하나의 메뉴얼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혹여나 즉석에서 이야기를 써내는 누군가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미래의 스티븐 킹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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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서유기 2 대산세계문학총서 22
오승은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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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서천 여정 길에 오르는 삼장 법사. 당태종과 의형제를 맺고 그의 칙명을 받아 경을 찾으러 떠난다. 2권은 삼장과, 오행산에서 그를 500년 동안 기다려 온 손오공과의 만남 이후 일련의 일화를 다룬다. 저오능(저팔계)와의 만남은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성사되는데 사오정은 여전히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삼장이 다심경을 익힐 때 오정과 관한 짧은 암시가 등장하긴 하지만 말이다.


2권을 읽으며 확신한 게 한 가지가 있는데 바로 삼장과 제자들의 관계다. 삼장은 어질긴 하나 천성적으로 겁이 많으며 걱정이 태산인 인물이다. 여정 길에서 일어나는 많은 어려움 속에서 실제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그저 신세를 한탄하며 눈물을 흘리는 일뿐이지 않은가. 이는 분명 나약한 우리 인간 존재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와 동행하는 제자들, 오공과 팔계 그리고 아직 합류하지 못한 사오정은 그 나약함을 이겨낼 수 있는 마음가짐들을 뜻하는 게 아닐까? 그들은 한낱 요괴에 불과하나 셋이 모였을 때 비로소 삼교삼합(三交三合)을 이루며 서방 여정의 다짐을 굳건히 하게 된다는 것이다. 책에 이를 보여주는 구절이 나온다.




금성(金性)은 강하고 굳세어 목성(木性)을 이겨내니, 심원(心猿)이 목룡(木龍)을 항복시켜 이끌고 돌아간다. 금은 따르고 목은 순종하니 모두가 하나요, 목은 스승을 그리워하고 금은 인자하니 저들의 천성을 남김없이 발휘하겠네. 하나는 주인이요 하나는 손님이나 서로 간격이 없고, 삼교삼합(三交三合)에 오묘한 기미(機微)가 담겨 있다. 성정과 기쁨의 원정(元貞)이 한데 뭉쳐지니, 서방으로 함께 동행하기를 다짐하는 말에 어긋남이 없으리. 

p.464



여기서 금성(金性)은 사오정을 뜻하고 손오공은 심원(心猿), 저팔계는 목성(木性)이다. 그러니까 2권은 손오공이 팔계를 항복시켜 사오정을 만나러 간다는 얘기인 것 같은데 알려진 대로 소설 『서유기』 는 현장 법사가 7세기 무렵 인도를 유람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저자 오승은의 허구가 덧입혀진 이야기이다. 당시 오승은은 그곳을 여행하던 현장이 몹시 외롭고 힘들었으리라 추측한 듯하다. 그래서 따로 떨어져 있을 때는 조야하기 그지없는 심성들(세 제자)을 그에게 붙여줌으로써 여정 길을 응원한 게 아닐까 싶은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서유기도 단순한 오락 소설로 즐기기에는 배울 점이 많은 소설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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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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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지만 평화학자 정희진의 저서 『정희진처럼 읽기』 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시작한다.




우리를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책은 피사체(被/寫體)를 내가 모르는 위치에서 찍은 것이다. 하늘 위에서가 아니라 건물 옆에서, 지하에서, 건물 뒤에서, 아주 멀리서. 혹은 나와 완전히 다른 배경에 있는 사람이 찍은 것이다. 건물 안에서는 건물을 볼 수 없다. 즉 피사체, 문제 대상(사회)을 자신과 동일시하거나 그 안에 있으면 자신을 알 수 없다. 교회의 문제점은 교회 안에서는 볼 수 없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외부에서만 보인다. 사회 밖, 틀 밖, 궤도 밖에 서 있는 연습이 필요하다.

p.23



‘건물 안에서는 건물을 볼 수 없다’는 그녀의 지적처럼 우리는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제삼자의 눈으로 나를 관찰하는 연습이 필요할 터.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일본의 한 작가는 이러한 사상을 하나의 소설로서 승화시켰다. 책의 제목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이며 저자는 다름 아닌 나쓰메 소세키. 이 책의 화자(?)이기도 한 고양이는 정희진이 말한 ‘내가 모르는 위치에서’ 나를 관찰하고 ‘우리를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바로 그 대상이다. 이 요망한 고양이는 ‘하늘 위에서가 아니라 건물 옆에서, 지하에서, 건물 뒤에서, 아주 멀리서’ 우리네 삶에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를 늘어놓지만 단순히 네 발 달린 길짐승의 푸념이라고 하기에 그 잔소리에는 우리의 낯을 붉게 만드는 어떤 날카로움이 느껴진다.




하늘과 대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들 인류가 얼마만큼의 노력을 했는가. 조금의 도움도 주지 않았지 않은가. 자신이 만들지 않은 물건을 자신의 소유로 정하는 법은 없으리라. 자기 소유로 정하는 것이야 별 지장이 없겠지만, 다른 사람의 출입을 금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이 드넓은 대지에 빈틈없이 울타리를 치고 말뚝을 세워 누구누구의 소유지로 구획하는 것은, 마치 창공에 새끼줄을 치고 여기는 나의 하늘, 저기는 그의 하늘이라고 신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만일 토지를 잘라내어 한 평에 얼마를 받고 소유권을 매매한다면,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를 한 30세제곱미터로 나누어 팔아도 된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공기는 나누어 팔 수 없고 하늘에 새끼줄을 치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토지의 사유 역시 불합리하지 않은가. 이러한 관점에 따라 이러한 법칙을 믿고 있는 나는, 그렇기에 어디에든 들어간다.

p.186



사실 고양이만큼 가까운 곳과 동시에 주변부에 머무르며 노상 우리 인간을 관찰하는 존재가 있을까 싶다. 개들은 어떤가? 활동 반경이 고양이보다 제한적이다. 집 밖으로 나가보자. 담벼락을 가뿐히 넘어다니고 지붕을 자유자재로 타고 다닐 수 있는 짐승은 고양이뿐이다. 동시에 이들은 소세키의 표현처럼 ‘어디에든’ 존재하며 ‘어디를 걸어도 서툴게 소리를 내는 일이 없다. 하늘을 밟는 듯, 구름 속을 가는 듯, 물속에서 경(磬)을 치는 듯, 동굴 속에서 슬(瑟)을 타는 듯’(p.167) 우리가 모르는 사이 우리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는 존재. 나쓰메 소세키의 눈에는 우리 인간의 너절함을 직시할 이보다 좋은 ‘관찰자’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기꺼이 짐승이 되기로 마음먹었던 모양이다. 이 책이 21세기 오늘날까지 훌륭한 풍자극으로서 유효한 이유는 이처럼 시간의 무게마저 짓밟지 못할 ‘소재’를 골라내는 저자 나쓰메 소세키의 작가적 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설 속 고양이가 말하는 ‘주인’은 누구인가? 바로 소세키 자신이다. 그는 지식인이라는 가면을 쓰고 집 안에 처박혀 잠만 자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고양이의 입을 빌려 그야말로 신랄하게 비꼬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쓰메 소세키는 희희덕대며 읽을 만한 재밌는 소설을 쓸 줄 아는 타고난 글쟁이이기도 했다. 이 책이 단순한 풍자극이기만 했다면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받지 못했을 성싶은 게 앞서 말한 대로 이 책은 무려 ‘재미’ 있기 때문이다. 요즘말로 ‘꿀잼 허니잼’ 인 소설을 찾는다면 이 책의 두께에 겁부터 집어먹지 말고 일단 펼쳐 들고 볼 일이다. 10페이지 정도만 읽어 봐라. 어쩌면 앉은 그 자리에서 모조리 읽게 될지도 모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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