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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를 훔친 소설가 - 문학이 공감을 주는 과학적 이유
석영중 지음 / 예담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국내 모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타인의 상식을 판단할 때 시금석 삼아 “관우 아세요?”라는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 삼국지의 그 관우 말이다. 관우를 아느냐 모르느냐로 한 사람의 상식 전반을 결정한다는 얘기다. 이런 몰지각한 행동이 그 커뮤니티 유저들 사이에서도 잠깐 논쟁거리가 되었던 모양. 그런데 이런 발상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나는 황당하다. 어떻게 해야 특정 질문 하나만으로 그 사람이 가진 지식을 판단한다는 추접스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길게 볼 거 없다. 삼국지가 ‘필독서’로 읽히는 사회에서 이런 몰지각한 이들이 나타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그 어떤 훌륭한 문학 작품이라도 그것이 권위로 ‘읽히게’ 되는 순간, 작품이 본래 지닌 훌륭한 점은 지워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관우 아세요?” 따위의 어처구니 없는 질문을 질문이랍시고 하는 사람들이 그 자리를 메우게 되는 것이다.
‘읽어야 하는 책’은 없다. ‘필요에 따라 읽을 책’이 있을 뿐. 저마다 선 위치가 다르고 살아가는 환경도 다른 법. 누군가에게 좋은 책이 또 누군가에게는 쓰레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정말 읽어야 하는 책이라면 그 이유를 먼저 설명해주는 게 맞지 않을까? 더 나아가 독서가 좋은 것이라면 어떤 면에서 좋은지, 또 읽는다는 것이 왜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인지를 논리적으로 밝히는 게 순서 아니겠느냐는 말이다. 그런데 이 사회는 어째서 독서 목록 따위를 지정해서 읽기만을 강요할까? 학교는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책을 읽으면 머리가 좋아진다’, ‘책을 많이 읽어야 커서 부자가 될 수 있다’, ‘저 책은 읽으면 안 되고 이 책은 무조건 읽어라’, ‘이 책이 요즘 유명하니까 읽어라’ 등등.
이유는 없다. 한국 사회에서 책이란 그저 읽어야만 하는, 읽지 않으면 안 되는 권위적인 도구에 불과하다. 주입식 교육은 ‘필독서’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독서를 강요하고 학생들은 책에 대한 감상마저 ‘독후감’이라는 숙제로 제출해야만 한다. 그 누구도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나 문학의 필요성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여기서 문학은 일종의 존엄. 학생 가운데 하나가 혹여나 문학의 필요성을 따진다면 십중팔구 “그걸 말이라고 하냐?”, “어디서 건방진 게 감히!” 라는 핀잔이 돌아온다. 이따위로 ‘책’을 배웠으니 성인이 되어서도 자발적 독서를 할 리 없다.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독서 무용론과 한국 성인의 낮은 평균 독서량은 학교가 국민을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어딘가에서는 끊임없이 문학의 필요성을 논리적으로 입증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바로 석영중 같은 작가. 『뇌를 훔친 소설가』는 지금껏 학교가 우리에게 가르쳐주지 못했던 ‘문학이 공감을 주는 과학적 이유’를 친절하고 재미있게 설명한 저작이다. 흥미로운 것은 겨우 20세기에 와서야 밝혀진 인간의 신경과학적 행동들이 당시 문학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바꿔 말하자면 이는 당시 문호들의 관찰력과 통찰력이 그만큼 뛰어났다는 의미다. 저자는 거울 뉴런, 기억 저장소, 몰입, 뇌가소성 등 다양한 신경과학 이론을 통해 작게는 문학 속 등장인물부터 크게는 독서라는 행위에 대해 의미를 찾고자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문학 그 자체를 설명하려 드는 것은 아니다. 신경과학은 어디까지나 현재 진행형인 데다 아직 연구 초기 단계인 분야이기에 애당초 저자는 이것으로 문학을 설명하려는 무리수는 두지 않는다. 도리어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저자가 자신의 전공인 러시아 문학에 주안점을 두고 이야기를 전개하기 때문이다. 어렵게만 느껴졌던 러시아 대문호들의 문학 작품들을 두루 소개받을 수 있고 거기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신경과학으로 풀어주기에 쉽게 다가온다. 일종의 각론인 셈. 나는 감당하지도 못할 분야를 방대하게 다루다 변죽만 울리고 마는 책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 하여, 이렇게 자신 있는 분야로 초점을 맞춘 각론이 내겐 더 맞는다. 석영중 작가가 다른 나라도 아니고 바로 한국에 있다는 것은 그래서 내겐 마치 축복과 같다. 독서를 강요하기만 하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침묵했던 이 나라 교육자들과 기성세대는 이 책을 읽고 잠시나마 반성의 시간을 가져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