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 있게 결정하라 - 불확실함에 맞서는 생각의 프로세스
칩 히스, 댄 히스 지음, 안진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바야흐로 선택의 시대. 사람은 하루에 평균 150번의 선택을 한다. 양념이냐 후라이드냐, 짜장이냐 짬뽕이냐, 부먹이냐 찍먹이냐……. 미국 네티즌 사이에서는 이미지 파일 확장자 ‘GIF’를 지프로 발음할 것이냐 기프로 발음할 것이냐로 한동안 뜨거운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인생 참 피곤하지 않은가? 사실 양념이니 후라이드니, 짜장이니 짬뽕이니, 부먹이니 찍먹이니 하는 고민은 무얼 선택하든 삶에 큰 영향을 주진 않을 듯싶다. 반반, 짬짜면, 덜어 먹으면 그만 아닌가. 그런데 살다 보면 최소 5분 이상 고민을 거듭할 수밖에 없는 난감한 상황에 놓일 때가 있는 법이다. 조금이라도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간 내 삶의 궤적 자체가 바뀔지도 모르는 중대한 상황.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자신 있게 결정하라』의 공저 히스 형제는 우선 분석의 환상부터 깨라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투자분석가부터 증권분석가, 신용분석가 등등 참말 많기도 하다. 개인은 물론이거니와 기업 그리고 정부까지 사회 전체가 이 분석에만 의존하는 경향이 심한 건 사실이다. 비즈니스에 능하다는 기업들조차 분석이라는 환상에 빠져서 필요없는 곳에다 기꺼이 돈을 버리는 상황. 그들이야 돈을 버리든 말든 상관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만일 정부가 국가 예산을 결정하거나 주요 정책과 관련된 중대한 선택의 순간에 놓였을 때는? 그래도 상관이 없을까? 때문에 ‘프로세스’가 중요하다. 프로세스란 말 그대로 절차를 의미한다. 결정에도 체계화된 절차가 필요하다는 것. 히스 형제는 프로세스가 분석보다 약 여섯 배나 중요하다는 연구 자료를 들며 이것이 왜 필요한 것인지 설명한다. 더불어 이 책은 결정에 최적화된 프로세스 가이드북이기도 하다.





히스 형제가 제안하는 의사결정 4단계 프로세스는 선택에 직면한 최초 상황, 놓인 선택안을 검증, 최종 결정, 실패에 대한 비용 준비까지 세밀하게 짜인 하나의 설계도와 같다. 나는 이 가운데 ‘우칭’이 참 와 닿았다. 마트의 시식 코너나 인터넷 서점의 미리보기와 같은 일종의 체험판 개념이라 보면 되겠다. 우리 인생도 마트나 서점처럼 실패의 리스크를 줄여주는 이런 체험판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현실은 그야말로 시궁창.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세요” 라는 말에 혹해 멀쩡히 다니던 직장 때려치우고 진짜 좋아하는 일을 지원했다가 영영 지원만 하는 삶을 살지도 모를 일이다. 우칭은 이럴 때 유용하다. 작은 실패 모델을 만들어 가설을 검증해보는. 무작정 모든 걸 그만두고 내가 좋아하는 일에 뛰어들기보다는 우선 취미 활동 정도로 작게나마 체험을 해보는 것이다. 히스 형제에 따르면 성공한 창업가들이 우칭을 본능적으로 실천했던 사람들이라고 한다.




결정을 내릴 때는 그 결과를 알 수 없다. 성공은 우리가 하는 결정의 질과 우리가 받는 행운의 양에 달려 있는 법이다. 행운은 우리의 권한 밖이지만 선택 방식은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다.


p.344



이 책 한 권 읽는다고 해서 앞으로 펼쳐질 선택지마다 최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프로세스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최선이 최고의 결과물로 이어지진 않는다는 얘기다. 어차피 미래는 예측 불가능이니까. 그보다는 혹여나 실패하더라도 내가 내린 최종 결정에 최선을 다했다는 만족감이 더 중요하다. 최선을 다했다면 적어도 후회는 없을 것이며, 최고의 결과에 근접할 가능성 또한 커지게 마련이니까. 프로세스는 그 ‘최선’과 같다. 히스 형제는 말한다. ‘우리의 결정은 절대 완벽해질 수는 없지만 나아질 수는 있다’(p.381)고. 이제 나에게는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도구가 생긴 셈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6-02-12 2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12 2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박람강기 프로젝트 3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안현주 옮김 / 북스피어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간문 즉, 편지 형식의 글만이 주는 이점이 있다. 첫째, 대상이 명확하다는 것. 이것은 바꾸어 말하자면 불특정다수를 향해 쓰인 글 특유의 보편타당함이나 모호함이 없다는 뜻이다. 둘째, 날 것 그대로의 생생함을 지녔다는 것. 다시 말해 교정이나 편집, 검열 등을 거치지 않은 일종의 에너지가 느껴진다는 점이다. 때문에 편지에는 쓴 사람의 감정과 관점이 오롯이 담겨 있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는 그런 편지를 하나로 엮은 책이다. 중요한 건 누구의 편지냐는 것인데, 이 책은 무려 하드보일드의 전범, 버버리 코트에 담배 한 개비를 꼬나문 차가운 도시 남자의 전형, 밀실에 갇힌 추리 장르를 건물 바깥으로 끌어낸 인물. 다름 아닌 레이먼드 챈들러의 편지라는 사실.


레이먼드 챈들러라는 이름은 솔직히 말하자면 단지 무라카미 하루키를 위시한 몇몇 익숙한 작가의 찬사로서만 접해본 게 다였다. 그는 분명 한 시대를 풍미한 것도 모자라 하나의 장르를 정립한 인물임에도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는 덜 알려진 감이 있다. 그런데 그에게 큰 영향을 받은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떤가. 지금의 한국 문학이 그의 영향력에서 자유롭다고 장담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하여, 궁금했다. 레이먼드 챈들러는 대체 어떤 작가일까. 될 수 있으면 이미 출간된 소설로 접하기보다는 창작인으로서의 챈들러, 인간 챈들러를 알고 싶었다. 그리고 이 서간문이라는 형식은 그 조건을 충족시켜주기에 충분했다.


“이 작가, 쿨하다...!” 책을 덮은 후 느낀 감상. 이력 따윈 중요하지 않다느니 독자들의 의견에 휘둘릴 필요는 없다느니 챈들러가 동료 작가와 편집자 그리고 특정 독자에게 보낸 이 예순여덟 편의 편지는 이렇듯 하나같이 ‘쿨’하다. 이런 걸 보면 차도남 필립 말로가 괜히 탄생한 것이 아니구나 싶기도 하고 말이다. 편지로 그는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하기도 하고 거침없이 화를 내기도 하며 또 언제그랬냐는 듯 자세를 고쳐 앉아 나긋나긋한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 쓴다는 것, 다시 말해 창작에 대한 챈들러의 관점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쿨한 문장으로 짜인 창작론. 이론서의 진부함도 없고 지루하지 않아 좋다.




글쓰기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스타일이고, 스타일은 작가가 시간을 들여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투자입니다. 스타일에 대한 투자는, 성과는 느리고, 에이전트의 비웃음과 출판사의 오해를 살 겁니다. 그러다 서서히 당신이 들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겠죠. 글을 쓰면서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작가는 항상 성공할 거라는.


p.35



특히 ‘스타일’과 관련된 그의 충고들은 가슴에 새겨둘 생각이다. 자신의 작품을 표절한 작가에게 그는 도리어 응원의 편지를 보낸다. 다만, ‘어느 지점까지는 연료를 좀 빌려 쓰고 가더라도, 언젠가 자기 속의 걸 태워서 스스로 탱크를 몰아야 하는 날이 올’(p.47) 거라며, 모방으로 시작한 창작도 좋지만 결국은 ‘스타일’이 없는 작가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나의 장르를 정립한 인물의 충고답다. 또한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하루에 네 시간 이상 일정한 시간을 두고, 그 시간에는 글쓰기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p.56) 할 각오로 부단히 써야 한다는 사실도 빼놓지 않는다.


모방에서 자유로운 작가는 없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챈들러 역시 누군가의 연료를 빌려 쓰며 달려온 작가일 터. 하지만 위대한 작가들은 결국 자신만의 스타일을 창조했다는 점 또한 간과해선 안 된다는 사실. 이것이 챈들러가 수십 편의 편지로 말하고자 했던 단 하나의 진리가 아니었을지. 그는 자신의 작가 인생을 통해 그것을 증명하지 않았던가.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16-02-11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글을 잘 쓰네요.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네요.
부럽습니다. *^^*

5DOKU 2016-02-12 00:29   좋아요 0 | URL
과찬이십니다.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ㅠ_ㅠ

김연화 2016-02-12 0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작가세요jQuery18309043138869129239_1455229148914? 평론가만큼 쓰시는듯

5DOKU 2016-02-12 14:52   좋아요 0 | URL
못난 글 좋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ㅜ

김연화 2016-02-12 0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작가세요jQuery18309043138869129239_1455229148914? 평론가만큼 쓰시는듯
 
훔쳐라, 아티스트처럼 - 죽어 있던 생각을 아이디어로 바꾸는 가장 현실적인 10가지 방법
오스틴 클레온 지음, 노진희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뭐랄까. 그냥 그 자체로 톡 쏘는 하나의 비타민C 캔디 같다. 딱딱하고 어려운 문장이 없고 글 중간마다 작가가 직접 그려 넣은 일러스트도 잘 그렸다기보다는 마치 이 책의 존재를 증명해주듯 개성적인. 크기도 작아서 독자에 따라서는 작은 가방에 넣어 다니며 생각날 때마다 꺼내보는 맛도 있을 듯싶다. 일단 제본에 공을 좀 들인 흔적이 묻어난다. 글꼴이며 편집이며 모든 것을 원서와 최대한 흡사하게 현지화했다. 특히 글꼴은 직접 손글씨로 쓴 것 같은데 출판사의 이런 정성을 보면 독자로서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조언들이 마음에 든다. 대개 이런 부류의 책은 영적 기운이니 내면의 움직임이니 하는 추상적인 경우가 많지 않은가. 우선 저자 오스틴 클레온의 ‘창작론’부터가 확 와 닿는다. 제목이 말하듯 훔치라는 것. 세상에 오리지널 따위는 없다는 것. 모든 예술가는 그들이 존경하던 이들의 창작물을 훔친 일종의 도둑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모든 창작물은 ‘무’에서 탄생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당신이 존경하는 사상가들이 추앙했던 인물 셋을 찾아 그들을 공부하고 또 그들이 추앙했던 사상가를 찾아 공부하는 과정을 거듭하는 ‘가계도 그리기’를 권한다. 이런 건 따지고 보면 우리가 누군가를 소위 ‘팔 때’ 거치는 흔한 과정 아닌가? 그런데 작가는 이런 것 하나까지도 일러스트를 그려 보여주는 구체적인 방식을 제시한다.




그렇다고 표절을 권하는 것은 절대 아닌 게, 저자가 말하는 도둑질도 엄연히 착한 도둑질(카피)과 나쁜 도둑질(표절)로 나뉘기 때문이다. 저자는 표절은 조작이지만 카피는 일종의 역설계(逆設計)라는 것을 강조하며 도둑질도 급이 다르다는 자신의 창작론을 확고히 한다. 그러면서 이 또한 도표로 그려 넣어주는 세심함까지 보인다. 내겐 이런 부분이 앞서 말한 것과 같이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와 닿았다. 이외에도 나만의 칭찬 폴더 만들기, 도메인 갖기, 아티스트인 척 해보기, 낮잠 자기 등 일견 사소해 보이지만 창작자로서는 따라서 해볼 만한 깨알 같은 조언들을 아낌없이 퍼준다. 나는 무언가 큰 성취를 이뤄서 유명해진 사람이 해주는 조언도 좋지만 이렇게 그저 나와 같은 처지에서 나보다 한 발 정도만 앞서 걷는, 어찌 보면 ‘친구’ 같은 이들이 해주는 조언에 더 감응할 때가 많다. 오스틴 클레온은 바로 그런 ‘친구’ 같은 작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민감한 진실
존 르 카레 지음, 유소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2년 대선 이후 마치 암세포처럼 대한민국 사회를 뒤덮은 존재가 있다. 지난 3년간 한국 사회에서 일어났던 크고 작은 사건들 속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세 글자, 국.정.원. 대체 이들이 관여되지 않은 사안이 있기나 한 것인지 의구심이 드는 가운데 지난여름 의문의 사건 하나가 세간을 혼란에 빠트렸다. 바로 국정원 직원 자살 사건이다. 공식 발표된 정보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바보가 아닌 이상 도무지 믿어 넘기기 어려운 그 일은 언제나 그랬듯 온갖 가십성 음모론들만 남긴 채 냄비처럼 식어버렸다. 물론 나 또한 그 냄비 중 하나였고. 그리고 얼마 전 이 소설을 읽다 문득 잊혀졌던 그 기억이 되살아났다. 정부의 기밀 공작, 의문의 자살, 서둘러 화장된 시신. 이것은 비단 소설 속 이야기인가?


르 카레가 SIS(영국 정보국 비밀정보부) 출신 작가라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똑같은 SIS 출신인 이언 플레밍의 소설과는 다르게 그의 작품에서 그려지는 요원들은 대개 평범하며 추레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나는 이쪽이 좀 더 진실에 가깝다 본다. 소설 속 인물 키트 프로빈은 우리가 욕하던, 한국으로 치자면 국정원에 해당하는 부류이자 커리어 통틀어 뭐 하나 제대로 이룬 것 없이 쓸쓸한 은퇴를 준비하고 있는 중년 남성이다. 그런 그에게 퍼거스 퀸이라는 신임 외부무 차관의 은밀한 제의가 들어온다. 영국령의 작은 섬 지브롤터에서 ‘야생동물작전’으로 명명된 반테러 소탕 작전이 곧 벌어질 예정이고 그는 여기서 차관의 눈과 귀의 역할만 해주면 된다는 것이다. 프로빈은 거진 강제로 이 작전에 투입되지만 긴박한 상황 속에서 난데없는 작전 성공 소식만을 접한 채 강제 귀환한다. 뒤이어 쫓기듯 치러진 정부의 기사 작위 수여와 이어진 달콤한 은퇴 생활. 그의 머릿속에서 의문의 ‘야생동물작전’이 서서히 희미해져 갈 때쯤 당시 작전에 함께 투입되었던 동료 ‘젭’이 찾아오고 그날의 진실이 드러난다.




자네가 무슨 정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몰라도―망상이든, 진술이든, 전자장비든, 말하지 마―자네가 파멸하게 전에 파기해. 어리석은 계획들은 화이트홀 구석구석에서 매일 같이 오가다가 폐기돼. 부디, 자네의 미래를 위해서, 이것 역시 그중 하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여.


p.150



이번 작품을 읽고 나는 한국 국정원에 대한 막연한 불신과 적대감을 철회했다. 연민은 아니다. 엄밀히 말해 무조건적인 비난보다는 이제는 조금 더 냉정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뜻이다. 사실 여하를 막론하고 눈살부터 찌푸리게 만드는 그들을 말이다. 사실 국정원은 연민의 대상이 아니다. 이는 엄연히 그들이 자초한 이미지일 터. 하지만 지난여름의 사건과 이번 독서 경험은 어쩌면 내가 모르는 ‘민감한 진실’이 있을지도 모르며 국정원 그들 또한 소설 속 젭과 같이 정부에게 이용되고 버려질 수 있는 한낱 소모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불러왔다. 특히 이 소설은 다른 작가도 아닌 바로 그들과 같은 길을 걸어온 존 르 카레가 쓴 이야기이기에 호소력이 더욱 짙다. 


르 카레 소설 속 인물들의 특징은 ‘무모한’ 도전을 반복한다는 점이다. 더불어 그 무모한 도전에 화답이라도 하듯 르 카레는 자신이 창조한 그들에게 기꺼이 실패를 선물한다. 혹자는 의미 없는 작업이라 비난할 것이다. 현실감을 살리는 건 좋지만 너무 하는 거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 실패를 주목한다. 만약 그들의 도전이 성공으로 끝난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그것은 진실을 가리는 거짓된 작업이다. 포장된 진실. 다만, 르 카레는 몇 백 페이지에 걸친 이들의 실패 역사가 사람들이 노상 미디어로만 접한, 선별되고 잘린 결말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숭고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의 소설은 그런 실패의 자명함에도 굴하지 않는 소수에 대한 찬사와 같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친 수많은 실패에 하나씩 이름을 붙여주는 작업. 만일 세상 사람 모두가 입을 모아 비난하는 부류의 인간을 어느 개별자의 유일한 삶으로 조명하는 것이 문학의 사명이라면 『민감한 진실』은 그 사명에 대한 가장 명확한 응답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디테일, 서울 -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기
김지현 글.사진 / 네시간 / 2015년 4월
평점 :
판매중지


칼럼 한 편으로 우연히 알게 된 작가 김지현. 자주 들르는 다른 모 작가님의 블로그 소개를 통해 그 글을 읽게 되었고 이어 연재분을 엮어 만든 이 책의 존재도 알게 되었다. 현재는 책이 출판된 지 꽤 오래된 상황이라 연재분 일부만 공개되어 있지만 다행히 그 글은 지금도 열람이 가능하다. 사회 통념과는 달리 오늘날 이웃에겐 서로 없는 듯 지내는 것이 곧 배려라는 아이러니하면서도 신선했던 기억. 방송 작가 출신이라 그런가? 어쩜 이리 도시유목민의 감성을 잘 표현해내는지.


저자는 타국을 여행하던 중 그곳 관광지 주민의 권태스러운 표정을 우연하게 목격했다고 한다. 그곳은 객들에게나 별천지이지 발붙이고 살아가는 주민에게는 그저 익숙한 ‘우리 동네’일 뿐이었던 것. 방금까지 유난을 떨어대는 그곳 관광객과 다름없던 그녀는 문득 그렇게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고 한다. 하여, 그녀는 자기만 알고 있던 우리 동네 관광법(들)을 소박한 문장들과 깨알 같은 팁을 곁들여 독자들에게 전수하는데 차진 문장들이 읽는 맛을 돋운다.


이 요약하자면, ‘도시유목민들이여, 지도 안으로 행군하라!’ 가 좋겠다. 당신이 사는 곳의 반경 5km 정도를 ‘여행’ 해보라는 것. 그러면 타인들에겐 내가 사는 이 동네가 곧 관광지이자 여행 코스와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테니까. 문득 나는 이 동네를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익숙하다는 핑계와 집이 최고라는 이유로 늘 무시해온 우리 동네. 정작 5분 거리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장을 보고 가끔 외식 한 끼 하고 이발하는 게 전부 아니던가. 고작 생활필수 코스로 그린 내 머릿속 우리 동네 지도는 이토록 조야하다.




누군가에겐 떠나온 곳이 누군가에게는 떠나고 싶은 곳이다. 어디 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있느냐가 관건이 아닌가.


p.226



분야를 ‘여행’으로 한정하기에는 또 무리가 있다. 이 책은 제목만 『디테일, 서울』이지 기실 그녀와 같은 도시유목민들이라면 한 번쯤 시도하고 생각해볼 만한 산문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한 모 씨가 그랬던가?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고. 나도 그러고 싶다. 근데 어쩌나. 이제 세상은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온갖 위험도 마다치 않는 그런 낭만을 허락하질 않으니 말이다. 반면 김지현의 글에는 도시유목민 특유의 사유가 묻어 있다. ‘지금 여기’를 즐기지 못하고, 이 공간에서 언제 벗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지내는 현대인의 고충들. 나 역시 그들 중 하나일 터. 그래서 그런지 유목민 선배격인 그녀의 글이 내겐 또 다른 질량으로 다가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