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더블린 사람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216
제임스 조이스 지음, 이강훈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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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지배계급이 겪는 고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동시에 제국주의의 악행을 고발하는 것만이 식민지 문학으로 알고 있었는데 내 어리석은 착각이었다. 소설 속 더블린의 풍경은 지금껏 읽은 식민지 문학과는 표현 양식이나 분위기나 여러모로 다르게 다가온다.  이 소설 또한 영국의 식민지 아일랜드와 그 속에서 그들이 겪는 척박한 삶을 그려내고 있긴 하다. 다만, 이러한 표면적 고통은 활자 이면에 감추어져 있으며 저자 제임스 조이스 역시 애당초 그렇게 표현할 의도가 전혀 없었던 것 같다. 대단하다. 당시 제임스 조이스는 어떻게 이런 책을 쓸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이는 몇 세기에 걸쳐 영국의 지배 아래 놓여 있던 아일랜드의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긴 식민지 역사에서 나타나는 피지배계급의 삶의 양상은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다를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어쨌든 이 감상을 어떤 말로 표현하면 좋을까 했는데 단편 「작은 구름」에서 꼬마 챈들러라는 인물이 ‘반복되는 신념과 체념, 소박한 즐거움으로 정련된 우울’(p.105)라는 표현으로 정확하게 정의하고 있었다. 아일랜드의 오랜 식민지 역사와 그 중심에 있는 도시 더블린. 그들은 반복되는 신념과 체념 속에서도 소박한 즐거움을 찾아 살아가지만 그것은 결국 정련된 우울일 뿐이라는 것. 마치 제임스 조이스가 “당신이 내 글을 읽고 이렇게 느낄 줄 알고 있었어요.”라고 직접 말하는 듯한 기분. 그는 더블린 사람들의 일상을 필요 이상으로 꼼꼼하게 묘사함으로써 아일랜드가 가진 오랜 피지배적 상흔을 활자 이면으로 던져버렸다. 때문에 그들이 느끼는 삶의 고통이 앞서 언급했듯 표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매 단편 이어지는 일순 깨달음은 그러기에 더 치명적이다. 어쩌면 이것이 그가 말했던 ‘에피퍼니’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오늘날까지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했다면 우리들의 일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한편으로는 상상해보게 된다.


수록 단편 「애러비」를 읽다 문득 내 유년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같은 교회에 다니는 친한 여동생의 생일이었고 나에겐 생일 선물을 살 돈이 없었다. 절대 빈손으로 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꼼꼼하게 뒤지던 책상 서랍에서 새 노트 한 권을 찾았다. 제본이 고급스러운 양장 노트였으면 좋으련만, 어릴 적 학교에서 쓰던 흔한 ‘공책’이었다. 200원. 노트 뒷면에 쓰인 가격이 내심 마음에 걸렸지만 이제 생일 파티에 참석할 수 있게 됐다는 설렘을 안고 집을 나섰다. 꽤 먼 거리였지만 들뜬 마음에 걷다 보니 어느새 나는 초인종을 누르고 있었다. 실로 많은 사람이 생일상에 둘러앉아 있던 기억. 모두 비밀히 준비했을 선물들이 예쁜 포장지에 싸여 저마다 앉은 자리 뒤편에 놓여 있었다. 불안했다. 케이크에 촛불이 켜지고 축하곡이 한 소절 끝날 때까지도 내 머릿속에는 온통 다가올 선물 증정식 생각뿐이었다. 저녁 시간 창 밖이 어두워졌다. 생일상 아래, 아무도 관심 없는 그 어두운 공간에, 가지고 왔던 공책을 두고 나왔다. 겨울이었던 것 같다. 집에 가는 길이 유난히 멀고 차가운 바람에 입고 나온 코트 소매가 펄럭대던 기억이 난다. 걷는 내내 생일상 아래 두고 온 공책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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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공부 - 내 삶의 기초를 다지는 인문학 공부법
윌리엄 암스트롱 지음, 윤지산.윤태준 옮김 / 유유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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펼쳐 들었다가 예상했던 부류의 책이 아니란 것을 알고 적이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사기 전에는 비교적 근자에 출간된 데이비드 리스의 『연필 깎기의 정석』이나 오가타 다카히로의 『비밀기지 만들기』 같은 부류의 책인 줄만 알았다. 듣는 법, 도구를 사용하는 법, 책과 도서관을 활용하는 법 등 난센스한 목차만 보면 얼핏 그런 부류의 책 같기도 하다. 그런데 막상 구입해서 읽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뭐 어쩌겠나. 잘 알아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지른 내 잘못인걸. 그렇게 책장 구석에 꽂아두고 눈길 한 번 주지 않다가 구매한 지 몇 년이 지나서야 읽었다. 사실 ‘사놓은 책부터 읽자’는 작심삼일식 다짐마저 없었다면 나는 이 책의 존재를 아주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마치 내 불안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단단한 공부』라는 이름에 걸맞게 딱딱한 느낌이 없지 않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다른 독자들에게는 평이 괜찮은 모양. 아무래도 공부와는 친하지 않은 내 천성의 문제인 듯하다. 사실 이런 책은 나 같은 사람이 읽어야 하는데 말이다. 평생 공부라는 걸 해보지 않고 살아온, 그래서 뒤늦게 시작한 공부에 조금이나마 개념을 잡아주는…. 다만, 좋게 말하면 고전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진부하다고 해야 하나? ‘공부하는 방법을 공부하는 책’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조금 더 가볍게 쓰였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무려 60년이나 된 책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인 것 같기도 하고.


저자 윌리엄 암스트롱은 나 같은 사람의 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인지 ‘새것을 배운다는 것은 곧 관성적인 편안함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다. 새로운 정보가 낯설고 어려울수록 지금의 편안한 마음은 불편해질 것이다.’(p.15)라고 서문에 미리 적어두었다. 뜨끔하며 밑줄을 그었다. 공감한다. 쉽게 하는 공부가 어디 있겠는가. 60년이 지난 그의 이론이 새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이 얼마나 많은 먼지를 뒤집어썼건 간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면 새것 아니겠는가. 책을 잘 알아보지도 않고 산 나를 나무라듯 여기서 저자는 한 번 더 나의 정곡을 찌른다.




모르는 사람과 함께 여행을 떠나야 한다면, 떠나기 전에 그 사람에 관해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알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다 읽는 데 며칠이 걸릴지, 몇 주가 걸릴지, 어쩌면 몇 달이 걸릴지도 모르는 책에 대해서는 왜 읽기 전에 조사해보려 하지 않을까?


p.150



「읽은 것에서 더 얻는 법」이라는 챕터가 인상 깊었다. 책이 어렵더라도 우선은 통독해볼 것, 정확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책을 읽을 것, 단어가 아닌 단락과 장을 위주로 주제나 주장을 읽을 것(‘가치를 지니는 것은 사상이나 사유다. 단어는 그저 상징일 뿐이다.’ p.99), 읽은 부분을 나만의 언어로 바꿔서 써볼 것 등등. 독서에 관련한 통찰있는 조언들이 이 챕터에 가득하다. 다른 챕터 역시 그 분야에서 여러모로 도움이 될 법한 조언들이 실려 있다. 챕터마다 예습과 복습을 위한 공간도 보이는데 이 부분은 학기 전 교재로 활용해봐도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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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효의 글쓰기 만보 - 일기 쓰기부터 소설 쓰기까지 단어에서 문체까지
안정효 지음 / 모멘토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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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효 작가는 아마 《하얀전쟁》,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의 원작자로 더 유명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는 소설가이기 앞서 백 권이 넘는 외국문학을 번역한 역자이기도 하다. 그가 번역한 책 목록을 살펴보면 상당히 익숙한 작품들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번역 역시 엄연한 창작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에 드는 외국 소설을 읽었을 때 내가 눈여겨 보는 부분은 역자가 누구냐는 것이다. 역자에 따라 걸작이 졸작으로, 졸작이 걸작으로 탈바꿈하는 사례도 심심찮게 보아왔기 때문. 소설가이자 역자인 사람을 굳이 찾아본다면야 안정효 작가 한 명뿐일까. 다만, 두 분야 모두 그렇다 할만한 성취를 이뤄낸 사람은 드문 듯하다. 하여, 소설가로서, 또한 역자로서 작가 안정효가 생각하는 글쓰기란 어떤 것일까 알고 싶어 이 책을 펼쳤다.


‘일기 쓰기부터 소설 쓰기까지 단어에서 문체까지’라고 부제에서 언급하고 있듯 문장론부터 시작해 소설 쓰기까지 다루는 백과사전 같은 책이다. 500페이지면 결코 얇은 편이 아니건만 두께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다룬다. 보통 이야기를 지어내는 방식에 치중하는 작법 책, 쓰기라는 행위 자체에 초점을 맞춘 글쓰기 책 등 이런 부류의 책들도 엄연히 분야가 나뉘는데 이 책은 그 모든 것을 다루고 있다는 게 특이하다. 그럼에도 대충 넘어가는 챕터가 없다는 게 장점. 일테면 “심화는 다른 책으로 하시구요.” 같은 느낌을 주지 않아서 마음에 든다. 이렇게 많은 부분을 다루면서도 꼼꼼하게 엮인 책을 읽은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 다만 제시하는 방법들 가운데 몇 가지는 너무 저자 개인적 상황에 맞춰져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들었는데 읽다 보니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책에서 저자는 글쓰기 관련 서적들을 읽는 것도 좋지만 ‘자신만의 원칙’을 만드는 것이 우선되지 않으면 다 부질없다는 점을 먼저 강조한다.




나에게 원칙이 없으면 선택의 여지도 없고, 그래서 타인들의 원칙을 노예처럼 따르기만 할 따름이다. 먼저 나에게 원칙이 있어야 타인의 원칙을 만날 때 비판하고 취사선택 할 능력이 생겨난다. 그래야 나 스스로 계속해서 새로운 원칙을 만들어낸다.


p.24



앞선 아쉬움은 바로 저자의 이러한 가치관에서 형성되었던 것. 틀린 말이 아니기에 반론의 여지도 없다. 쓰는 법은 차치하고 읽는 법을 주제로 한 책도 수없이 쏟아지는 요즘 아니던가. 선택의 다양성이 늘어나는 건 독자로서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남들이 만든 방법을 취하기 전에 비록 효율적이진 않더라도 나만의 원칙을 먼저 만들어두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나만의 원칙이 없기 때문에 여태껏 남들이 만든 원칙들만 노예처럼 주워섬겼던 것이 아닌가 뜨끔하기도 하고. 특히 ‘쓰기’는 스스로 생각하는 힘 없이는 불가능한 행위인데 요령 따위를 수십, 수백 가지 익힌다고 해서 그게 될 리가 없으니 말이다. 저자는 ‘능력 대신 요령을 익히면, 그만큼 손해를 본다. 손해를 보는 듯싶지만 남의 일까지 대신 다 하는 사람은 능력 또한 남의 몫까지 얻는다. 그러니까 손해를 봐야 손해를 안 본다’(p.21)라고 말하며 나만의 원칙은 온갖 요령을 주워섬기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바로 미련하리만치 힘들게 쓰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임을 역설한다.


여담이지만,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내가 쓰는 문장에 ‘있다’, ‘수’, ‘것’이 이렇게나 많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저자는 이른바 ‘있을 수 있는 것’을 문장에서 모조리 없애야 한다고 지적한다. 전형적인 번역체이기 때문. 커리어 통틀어 번역과 소설 쓰기에 매진해 온 안정효 작가의 충고이기에 허투루 넘길 수 없지 않은가. 이 세 요소가 문장의 가독성과 읽는 맛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모든 글을 천편일률적이게 만들어 개성을 죽는다고 한다. 지금은 덜한데 이 책을 읽었던 시기 한동안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저자의 지적을 접한 이후 내 눈에는 온통 ‘있을 수 있는 것’만 보이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습관처럼 읽던 인터넷 기사와 잡지 칼럼, 자주 방문하는 블로그까지. 저 ‘있을 수 있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는 읽는 게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문제는 덩달아 쓰는 것도 힘들어졌다는 사실. 혹시나 내 문장에 있다와 수 그리고 것이 포함되어 있지 않나 자꾸만 의식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생산력마저 떨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니 저자의 지적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혼자 유난을 떨었던 면도 없지 않다.


눈치챘겠지만 나는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최대한 줄인다고 줄인 게 이 모양. 한동안은 저 ‘있을 수 있는 것’을 철두철미하게 문장에서 몰아내고자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생각보다 이게 어렵다. 있다, 수, 것 없이는 논리적인 문장을 쓸 수(또!!!) 없는 지경에 이른 것(또 또!!!)이다. 그래서 지금은 의식하지 않고 우선 초고를 작성한 후 퇴고할 때 불필요한 부분만 줄이려고 한다. 사실 저것들을 굳이 배제하지 않아도 좋은 문장을 써내는 작가들도 많지 않은가. 또한 저것들을 문장에서 몰아낸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글이 된다는 보장도 없다. 이런 걱정을 하기에 앞서 한 자 더 써내는 게 지금 내게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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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를 훔친 소설가 - 문학이 공감을 주는 과학적 이유
석영중 지음 / 예담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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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모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타인의 상식을 판단할 때 시금석 삼아 “관우 아세요?”라는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 삼국지의 그 관우 말이다. 관우를 아느냐 모르느냐로 한 사람의 상식 전반을 결정한다는 얘기다. 이런 몰지각한 행동이 그 커뮤니티 유저들 사이에서도 잠깐 논쟁거리가 되었던 모양. 그런데 이런 발상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나는 황당하다. 어떻게 해야 특정 질문 하나만으로 그 사람이 가진 지식을 판단한다는 추접스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길게 볼 거 없다. 삼국지가 ‘필독서’로 읽히는 사회에서 이런 몰지각한 이들이 나타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그 어떤 훌륭한 문학 작품이라도 그것이 권위로 ‘읽히게’ 되는 순간, 작품이 본래 지닌 훌륭한 점은 지워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관우 아세요?” 따위의 어처구니 없는 질문을 질문이랍시고 하는 사람들이 그 자리를 메우게 되는 것이다.


‘읽어야 하는 책’은 없다. ‘필요에 따라 읽을 책’이 있을 뿐. 저마다 선 위치가 다르고 살아가는 환경도 다른 법. 누군가에게 좋은 책이 또 누군가에게는 쓰레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정말 읽어야 하는 책이라면 그 이유를 먼저 설명해주는 게 맞지 않을까? 더 나아가 독서가 좋은 것이라면 어떤 면에서 좋은지, 또 읽는다는 것이 왜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인지를 논리적으로 밝히는 게 순서 아니겠느냐는 말이다. 그런데 이 사회는 어째서 독서 목록 따위를 지정해서 읽기만을 강요할까? 학교는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책을 읽으면 머리가 좋아진다’, ‘책을 많이 읽어야 커서 부자가 될 수 있다’, ‘저 책은 읽으면 안 되고 이 책은 무조건 읽어라’, ‘이 책이 요즘 유명하니까 읽어라’ 등등.


이유는 없다. 한국 사회에서 책이란 그저 읽어야만 하는, 읽지 않으면 안 되는 권위적인 도구에 불과하다. 주입식 교육은 ‘필독서’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독서를 강요하고 학생들은 책에 대한 감상마저 ‘독후감’이라는 숙제로 제출해야만 한다. 그 누구도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나 문학의 필요성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여기서 문학은 일종의 존엄. 학생 가운데 하나가 혹여나 문학의 필요성을 따진다면 십중팔구 “그걸 말이라고 하냐?”, “어디서 건방진 게 감히!” 라는 핀잔이 돌아온다. 이따위로 ‘책’을 배웠으니 성인이 되어서도 자발적 독서를 할 리 없다.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독서 무용론과 한국 성인의 낮은 평균 독서량은 학교가 국민을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어딘가에서는 끊임없이 문학의 필요성을 논리적으로 입증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바로 석영중 같은 작가. 『뇌를 훔친 소설가』는 지금껏 학교가 우리에게 가르쳐주지 못했던 ‘문학이 공감을 주는 과학적 이유’를 친절하고 재미있게 설명한 저작이다. 흥미로운 것은 겨우 20세기에 와서야 밝혀진 인간의 신경과학적 행동들이 당시 문학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바꿔 말하자면 이는 당시 문호들의 관찰력과 통찰력이 그만큼 뛰어났다는 의미다. 저자는 거울 뉴런, 기억 저장소, 몰입, 뇌가소성 등 다양한 신경과학 이론을 통해 작게는 문학 속 등장인물부터 크게는 독서라는 행위에 대해 의미를 찾고자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문학 그 자체를 설명하려 드는 것은 아니다. 신경과학은 어디까지나 현재 진행형인 데다 아직 연구 초기 단계인 분야이기에 애당초 저자는 이것으로 문학을 설명하려는 무리수는 두지 않는다. 도리어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저자가 자신의 전공인 러시아 문학에 주안점을 두고 이야기를 전개하기 때문이다. 어렵게만 느껴졌던 러시아 대문호들의 문학 작품들을 두루 소개받을 수 있고 거기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신경과학으로 풀어주기에 쉽게 다가온다. 일종의 각론인 셈. 나는 감당하지도 못할 분야를 방대하게 다루다 변죽만 울리고 마는 책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 하여, 이렇게 자신 있는 분야로 초점을 맞춘 각론이 내겐 더 맞는다. 석영중 작가가 다른 나라도 아니고 바로 한국에 있다는 것은 그래서 내겐 마치 축복과 같다. 독서를 강요하기만 하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침묵했던 이 나라 교육자들과 기성세대는 이 책을 읽고 잠시나마 반성의 시간을 가져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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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 웃자 2016-02-20 2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공감되네요

5DOKU 2016-02-20 23:40   좋아요 2 | URL
다행이네요. ^ㅡ^

비로그인 2016-02-20 2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서를 왜 해야할까? 라는 생각에 잠시 잠깁니다. *^

5DOKU 2016-02-20 23:42   좋아요 0 | URL
저마다 이유야 다르겠지만 저는 읽지 않으면 제 안에서 목소리가 사라지는 느낌이 들어서.....

yamoo 2016-02-20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맛난 글 잘 읽었습니다. 정말 님의 글을 읽을때마다 군더더기가 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5DOKU 2016-02-20 23:42   좋아요 0 | URL
군더더기가 아직 많습니다. ㅠ_ㅠ 칭찬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보여줘라, 아티스트처럼 - 당신의 능력이 빛을 보게 하는 가장 현실적인 10가지 방법
오스틴 클레온 지음, 노진희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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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잘하고자 하면서 배우기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글쓰기가 대표적 사례가 아닐까 싶다. 모두 글을 잘 쓰고 싶어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 그런데 이상한 게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사람들이 쓰지는 않고 읽기만 한다. 잘 쓰려면 물론 어느 정도는 다독을 해서 좋은 문장을 골라내는 능력을 키우는 게 우선이지만 백날천날 읽기만 하면서 잘 쓰고 싶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야말로 글을 글로 배우는 격. 당연한 말이지만 잘 쓰려면 쓰는 게 먼저다. 그것도 많이. 쓰지 않고서는 ‘잘’ 쓸 수가 없다. 왜 인풋을 하는가? 결국 아웃풋을 하기 위해서다. 안 그런가? 뭐 인풋 그 자체로 만족하는 사람들도 있을 듯싶다. 다만 우리가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굳이 눈에 보이는 어떤 성취가 아니더라도 결국 활용, 아웃풋을 하기 위해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열심히 배웠으니 이제 그것을 보여줄 차례인 것이다.


『훔쳐라, 아티스트처럼』이 ‘인풋’을 위한 책이었다면 이번에는 ‘아웃풋’이다. 지금까지 이것저것 많이 훔쳤던 이유는 바로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저자 오스틴 클레온은 먼저 ‘잘’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가 아웃풋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개 ‘잘’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 때문인 경우가 많다. 문제는 ‘잘’ 보여주려다 ‘안’ 보여주고 마는 게 다반사라는 사실. 그러니까 그냥 그 부담감 내려놓고 일단 뭐라도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저자는 말한다. ‘진짜 중요한 차이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과 뭐라도 하는 것에 있다.’(p.24)고. 나는 보여줘야 할 대상이 반드시 남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남들에게 보여주기가 민망하다면 ‘나’에게 보여주면 그만 아닌가? 요지는 어쨌든 뭐라도 하라는 것이다. 잘하든 못 하든 뭔가를 하는 그 ‘과정’ 자체가 이미 작품 활동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아웃풋은 곧 ‘결과물’이라는 건 통념일 뿐이다. ‘과정’ 역시 엄연한 아웃풋이다.




“쌓아두는 것의 문제는 그 축적물에만 의지해 살게 된다는 점이고, 그러면서 점점 당신이 고리타분해진다는 점이다. 쌓아둔 모든 걸 버리고 당신에게 아무것도 안 남으면 어쩔 수 없이 새롭게 보고, 자각하고, 다시 채워 나가게 된다. 더 많이 버릴수록 더 많이 얻게 된다.” - 폴 아덴


p.80



책을 읽다 보면 아웃풋에는 실로 다양한 방식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작게는 하루하루 나만의 프로젝트 일지 작성하기부터 크게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그룹을 만들어 협업해보기까지. 여기서 핵심은 바로 ‘공유’. 저자는 역사 속 천재들이 대개 어느 집단의 일원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가 아는 그들의 결과물이 세상에 알려지기 이전, 그들은 서로의 작품을 피드백하며 용기를 얻고, 영향을 주고 받는 과정을 거쳤다는 사실을.


아웃풋 과정에 생길 수 있는 여러 문제, 일테면 표절이나 비난 같은 걱정거리에 대해 저자가 던지는 몇 가지 충고가 좋다. ‘비법을 가르쳐준다고 해서 당장 경쟁자가 붙는 것은 아니다. 마스터의 기술을 안다고 해서 곧장 그대로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p.124)이라거나 ‘비난 하나하나가 전부 새로운 작품에 대한 가능성이 된다. 어떤 비평을 받게 될지는 컨트롤할 수 없지만,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지는 컨트롤할 수 있다’(p.159) 같은 말들은 비단 아티스트뿐만 아니라 공동체 생활을 하는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될 만하다.


특히 ‘배고픈 아티스트’라는 낭만적 환상을 극복하라는 충고가 와 닿았다. 예술가는 가난하다는 아니, 가난해야만 훌륭한 작품을 완성시킬 수 있다는 고정관념. 당신이 이 진부한 환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한평생 돈만 저주하다 그 가난이라는 진창 속에서 죽게 될 거라고 말이다. 저자는 돈이 창작을 타락시키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의미 있는 문화재나 예술 작품들은 실제로 돈 때문에 만들어진 경우도 많다고 한다. 공감. 나는 돈과 예술에 대한 이분법이 도리어 예술을 망치는 길이 아닐까 싶다. 목적이 오로지 돈이라면 문제겠지만 돈이 없으면 내가 좋아하는 일도 하지 못하는 시대에 여유로운 삶을 갈망하는 것은 욕심이 아니라 예술가로서 지녀야 할 당연한 마음가짐이다. 물론 생과 사를 논하는 순간에서 걸작이 탄생한 사례도 있다. 근데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들의 삶이 좀 더 여유로웠다면 더 나은 걸작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책을 읽고 완벽이라는 부담과 가난이 곧 예술이라는 환상을 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뭐라도 해보자 하는 자신감도 얻게 되었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 아티스트는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에서 탄생한다는 걸 알게 됐다면 망설이지 말고 아웃풋이다. 쌓아두지만 말고 이제는 보여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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