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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시대 -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알랭 드 보통 지음, 최민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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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을 (지금도) 잘 모른다. 이름만 들어봤지 단 한 번도 그가 쓴 책을 읽은 적이 없었다. 일부러 읽지 않은 건 아니고 인연이 닿지 않아서, 딱히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해야겠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게 그는 연애 소설 작가 정도의 이미지가 전부였으니까. 그러다 제작년 즈음 강렬한 북 트레일러 한 편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오늘날 뉴스에 대해 조용히 읊조리는 저자 알랭 드 보통의 내레이션과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몽환적인 화면들. 흡사 한 편의 뮤직 비디오를 보는 듯한 느낌의 그 트레일러에 매료되어 어떤 책인지도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냅다 주문을 해버렸던 기억이 난다. 나는 한 마디로 알랭 드 보통의 영업에 당한 것이다.


핑계를 좀 대보자면 정말 잘 만든 북 트레일러였다. 흔히 책 한 권 출판되면 대충 급조되는 그런 영상물들과는 다르게 러닝타임이 무려 3분 16초(?)에 달하는, 공을 좀들인 ‘작품’에 가까웠단 말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나처럼 트레일러만 보고 책을 사들인 사람도 적지 않으리라(라고 나를 위안해본다). 책을 읽고 저자에 대해 좀 알아보았다. 연애 소설 작가로만 단순히 알고 있었는데 착각이었다. 커리어 스펙트럼이 꽤 넓다. 문학을 비롯한 철학, 종교, 역사, 건축 등 다방면에서 두루 활동하는 ‘운동가’에 가까운 느낌. 실제 지금도 그는 여러 사회 운동에 몸을 담고 있다. 그런 그가 뉴스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공유했다.


책의 제목처럼 우리는 『뉴스의 시대』를 살아간다. 그런데 정작 이것을 어떻게 소비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래도 한동안 떠들썩했던 종편 채널 문제와 더불어 지난 대선 터졌던 국정원 댓글 사건 같은 큼지막한 일들을 경험하며 어렴풋하게나마 이 뉴스라는 것이 ‘진실’만을 말하고 있지는 않구나 정도는 많이들 알게 되었을 성싶다. 그러나 내 성향에 맞는 뉴스를 선택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 그렇다고 뉴스를 끊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뉴스 없이는 살지 못하는 현대인들. 뉴스가 변하지 않으면 시청자가 변할 수밖에 없다.




권력을 공고히 하길 소망하는 당대의 독재자는 뉴스 통제 같은 눈에 빤히 보이는 사악한 짓을 저지를 필요가 없다. 그 또는 그녀는 언론으로 하여금 닥치는 대로 단신을 흘려보내게만 하면 된다. 뉴스의 가짓수는 엄청나되 사건의 배경이 되는 맥락에 대한 설명은 거의 하지 않고, 뉴스 속 의제를 지속적으로 바꾸며, 살인자들과 영화배우들의 화려한 행각에 대한 기사를 끊임없이 갱신하여 사방에 뿌림으로써, 바로 조금 전 긴급해 보였던 사안들이 현실과 계속 관계를 맺은 채 진행중이라는 인식을 대중이 갖지 않도록 조처하기만 하면 된다.


p.36



이 책은 쏟아지는 정보에 휩쓸리지 않고 미디어를 소비하는 방법 즉, ‘뉴스 항해술’과 같다.대소사에 대해 떠들면서도 정작 ‘뉴스 자신’은 말하지 않는 것이 바로 뉴스라는 촌철살인으로 도입부를 여는 게 인상 깊다. 이어서 정치, 해외, 경제, 유명인, 재난, 소비자 정보, 여섯 가지로 뉴스의 범주를 크게 나누고 미디어라는 망망대해를 좀 더 안전하게 건널 수 있는 항해술을 공유한다. 낮게 읊조리던 트레일러 속 알랭 드 보통의 목소리가 책에서도 죽 이어진다. 때문인지 좀 심심한 면이 있다. 마치 두꺼운 철학서적을 한 권 펼쳐 놓은 기분도 들고. 다만, 재미로 치장한 가벼운 교양 몇 권 읽는 것보다 이런 책도 가끔 읽어보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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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공부 - 내 삶의 기초를 다지는 인문학 공부법
윌리엄 암스트롱 지음, 윤지산.윤태준 옮김 / 유유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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펼쳐 들었다가 예상했던 부류의 책이 아니란 것을 알고 적이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사기 전에는 비교적 근자에 출간된 데이비드 리스의 『연필 깎기의 정석』이나 오가타 다카히로의 『비밀기지 만들기』 같은 부류의 책인 줄만 알았다. 듣는 법, 도구를 사용하는 법, 책과 도서관을 활용하는 법 등 난센스한 목차만 보면 얼핏 그런 부류의 책 같기도 하다. 그런데 막상 구입해서 읽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뭐 어쩌겠나. 잘 알아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지른 내 잘못인걸. 그렇게 책장 구석에 꽂아두고 눈길 한 번 주지 않다가 구매한 지 몇 년이 지나서야 읽었다. 사실 ‘사놓은 책부터 읽자’는 작심삼일식 다짐마저 없었다면 나는 이 책의 존재를 아주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마치 내 불안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단단한 공부』라는 이름에 걸맞게 딱딱한 느낌이 없지 않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다른 독자들에게는 평이 괜찮은 모양. 아무래도 공부와는 친하지 않은 내 천성의 문제인 듯하다. 사실 이런 책은 나 같은 사람이 읽어야 하는데 말이다. 평생 공부라는 걸 해보지 않고 살아온, 그래서 뒤늦게 시작한 공부에 조금이나마 개념을 잡아주는…. 다만, 좋게 말하면 고전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진부하다고 해야 하나? ‘공부하는 방법을 공부하는 책’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조금 더 가볍게 쓰였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무려 60년이나 된 책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인 것 같기도 하고.


저자 윌리엄 암스트롱은 나 같은 사람의 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인지 ‘새것을 배운다는 것은 곧 관성적인 편안함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다. 새로운 정보가 낯설고 어려울수록 지금의 편안한 마음은 불편해질 것이다.’(p.15)라고 서문에 미리 적어두었다. 뜨끔하며 밑줄을 그었다. 공감한다. 쉽게 하는 공부가 어디 있겠는가. 60년이 지난 그의 이론이 새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이 얼마나 많은 먼지를 뒤집어썼건 간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면 새것 아니겠는가. 책을 잘 알아보지도 않고 산 나를 나무라듯 여기서 저자는 한 번 더 나의 정곡을 찌른다.




모르는 사람과 함께 여행을 떠나야 한다면, 떠나기 전에 그 사람에 관해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알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다 읽는 데 며칠이 걸릴지, 몇 주가 걸릴지, 어쩌면 몇 달이 걸릴지도 모르는 책에 대해서는 왜 읽기 전에 조사해보려 하지 않을까?


p.150



「읽은 것에서 더 얻는 법」이라는 챕터가 인상 깊었다. 책이 어렵더라도 우선은 통독해볼 것, 정확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책을 읽을 것, 단어가 아닌 단락과 장을 위주로 주제나 주장을 읽을 것(‘가치를 지니는 것은 사상이나 사유다. 단어는 그저 상징일 뿐이다.’ p.99), 읽은 부분을 나만의 언어로 바꿔서 써볼 것 등등. 독서에 관련한 통찰있는 조언들이 이 챕터에 가득하다. 다른 챕터 역시 그 분야에서 여러모로 도움이 될 법한 조언들이 실려 있다. 챕터마다 예습과 복습을 위한 공간도 보이는데 이 부분은 학기 전 교재로 활용해봐도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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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를 훔친 소설가 - 문학이 공감을 주는 과학적 이유
석영중 지음 / 예담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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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모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타인의 상식을 판단할 때 시금석 삼아 “관우 아세요?”라는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 삼국지의 그 관우 말이다. 관우를 아느냐 모르느냐로 한 사람의 상식 전반을 결정한다는 얘기다. 이런 몰지각한 행동이 그 커뮤니티 유저들 사이에서도 잠깐 논쟁거리가 되었던 모양. 그런데 이런 발상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나는 황당하다. 어떻게 해야 특정 질문 하나만으로 그 사람이 가진 지식을 판단한다는 추접스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길게 볼 거 없다. 삼국지가 ‘필독서’로 읽히는 사회에서 이런 몰지각한 이들이 나타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그 어떤 훌륭한 문학 작품이라도 그것이 권위로 ‘읽히게’ 되는 순간, 작품이 본래 지닌 훌륭한 점은 지워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관우 아세요?” 따위의 어처구니 없는 질문을 질문이랍시고 하는 사람들이 그 자리를 메우게 되는 것이다.


‘읽어야 하는 책’은 없다. ‘필요에 따라 읽을 책’이 있을 뿐. 저마다 선 위치가 다르고 살아가는 환경도 다른 법. 누군가에게 좋은 책이 또 누군가에게는 쓰레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정말 읽어야 하는 책이라면 그 이유를 먼저 설명해주는 게 맞지 않을까? 더 나아가 독서가 좋은 것이라면 어떤 면에서 좋은지, 또 읽는다는 것이 왜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인지를 논리적으로 밝히는 게 순서 아니겠느냐는 말이다. 그런데 이 사회는 어째서 독서 목록 따위를 지정해서 읽기만을 강요할까? 학교는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책을 읽으면 머리가 좋아진다’, ‘책을 많이 읽어야 커서 부자가 될 수 있다’, ‘저 책은 읽으면 안 되고 이 책은 무조건 읽어라’, ‘이 책이 요즘 유명하니까 읽어라’ 등등.


이유는 없다. 한국 사회에서 책이란 그저 읽어야만 하는, 읽지 않으면 안 되는 권위적인 도구에 불과하다. 주입식 교육은 ‘필독서’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독서를 강요하고 학생들은 책에 대한 감상마저 ‘독후감’이라는 숙제로 제출해야만 한다. 그 누구도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나 문학의 필요성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여기서 문학은 일종의 존엄. 학생 가운데 하나가 혹여나 문학의 필요성을 따진다면 십중팔구 “그걸 말이라고 하냐?”, “어디서 건방진 게 감히!” 라는 핀잔이 돌아온다. 이따위로 ‘책’을 배웠으니 성인이 되어서도 자발적 독서를 할 리 없다.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독서 무용론과 한국 성인의 낮은 평균 독서량은 학교가 국민을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어딘가에서는 끊임없이 문학의 필요성을 논리적으로 입증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바로 석영중 같은 작가. 『뇌를 훔친 소설가』는 지금껏 학교가 우리에게 가르쳐주지 못했던 ‘문학이 공감을 주는 과학적 이유’를 친절하고 재미있게 설명한 저작이다. 흥미로운 것은 겨우 20세기에 와서야 밝혀진 인간의 신경과학적 행동들이 당시 문학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바꿔 말하자면 이는 당시 문호들의 관찰력과 통찰력이 그만큼 뛰어났다는 의미다. 저자는 거울 뉴런, 기억 저장소, 몰입, 뇌가소성 등 다양한 신경과학 이론을 통해 작게는 문학 속 등장인물부터 크게는 독서라는 행위에 대해 의미를 찾고자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문학 그 자체를 설명하려 드는 것은 아니다. 신경과학은 어디까지나 현재 진행형인 데다 아직 연구 초기 단계인 분야이기에 애당초 저자는 이것으로 문학을 설명하려는 무리수는 두지 않는다. 도리어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저자가 자신의 전공인 러시아 문학에 주안점을 두고 이야기를 전개하기 때문이다. 어렵게만 느껴졌던 러시아 대문호들의 문학 작품들을 두루 소개받을 수 있고 거기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신경과학으로 풀어주기에 쉽게 다가온다. 일종의 각론인 셈. 나는 감당하지도 못할 분야를 방대하게 다루다 변죽만 울리고 마는 책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 하여, 이렇게 자신 있는 분야로 초점을 맞춘 각론이 내겐 더 맞는다. 석영중 작가가 다른 나라도 아니고 바로 한국에 있다는 것은 그래서 내겐 마치 축복과 같다. 독서를 강요하기만 하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침묵했던 이 나라 교육자들과 기성세대는 이 책을 읽고 잠시나마 반성의 시간을 가져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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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 웃자 2016-02-20 2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공감되네요

5DOKU 2016-02-20 23:40   좋아요 2 | URL
다행이네요. ^ㅡ^

비로그인 2016-02-20 2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서를 왜 해야할까? 라는 생각에 잠시 잠깁니다. *^

5DOKU 2016-02-20 23:42   좋아요 0 | URL
저마다 이유야 다르겠지만 저는 읽지 않으면 제 안에서 목소리가 사라지는 느낌이 들어서.....

yamoo 2016-02-20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맛난 글 잘 읽었습니다. 정말 님의 글을 읽을때마다 군더더기가 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5DOKU 2016-02-20 23:42   좋아요 0 | URL
군더더기가 아직 많습니다. ㅠ_ㅠ 칭찬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생각의 좌표 -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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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잠깐이나마 외부인의 시선을 견지(見地)해본 사람은 내부의 문제점이 너무나도 명확하게 보이게 마련인 듯하다. 홍세화 그 역시도 마찬가지였을까? 프랑스 망명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그에게 한국 사회가 처음으로 건낸 말은 “여러분 부―자 되세요! 꼭이요!”라는 자본의 목소리였다. 유행어가 될 만큼 국민은 그 목소리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고 내남없이 지갑을 열어 응답했다. 그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고국을 떠나 있었던 세월 동안 한국이라는 나라의 어딘가가 많이 변했다는 것을.


타국 생활을 해본 사람들 가운데서도 제3의 눈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나뉜다. 전자는 내부에서 볼 수 없는 건물의 균열을 외부를 비롯한 다양한 위치에서 파악하고 사유할 줄 아는 데 반해 후자는 잠깐 경험한 이상적인 건물의 내부와 현재 자신이 머무르는 건물의 내부를 비교하는 데서 그치고 만다. 결국 ‘지 자랑’일 뿐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는 관심 밖이다. 아마도 홍세화는 전자에 가까운 인물일 것이다. 그는 내부인이자 외부인의 시선으로 이 나라의 교육에서부터 노동, 주류와 비주류, 앎과 무지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을 세세히 훑어 내려간다. 대개 그가 다녀온 프랑스와의 비교로 채워져 있긴 하다. 다만 단순히 서구 중심적 관점에서 나온 비교라 보기에 그의 비판은 논증의 구조는 견고하고 사유의 날은 뾰족하다.


책을 읽다 보니 우리는 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하는 물음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문제는 오늘 사회가 이 책이 나온 시점보다 더 절망적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줄곧 말하는 ‘생각의 주인’으로 살기가 이제는 정말이지 힘들기만 한 세상이다. 물신 지배로 부추긴 계급 사회와 교육 획일화를 통한 세대 양극화는 자본과 정치가 합작한 최고의 발명품이자 이데올로기. 기업은 더 교묘한 방법을 동원해 소비자로 하여금 원해서 지갑을 열었다는 착각에 빠뜨리고 정치는 오늘의 사회를 개선할 의도가 전혀 없다. 선거철이 다가오면 으레 그렇듯이 우리는 여전히 전쟁 중이란 사실을 상기시킬 다양한 정치적 공세를 펼쳐댄다. 이는 삶의 불안감을 조성하고 보수를 집결시키는 진부한 레퍼토리지만 유권자들은 내가 던지는 표가 누구의 판단에서 나왔는지는 전혀 의심하지 못한다.


가령 그들은 개성공단 폐쇄가 정부의 ‘합리적’ 판단이라 믿는다. 언제 북한이 핵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마당에 돈줄(개성공단)을 계속 방관할 수 없다는 것. 우리가 받을 경제적 타격이 억 단위든 조 단위든 무슨 상관이랴. 오로지 “니들은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지?”로 대변되는 공포만이 현재 사회 최고 역점으로 부각한다.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살아온 노인들은 당대 정치의 좋은 먹잇감이다. 선동과 선거의 도구가 따로 없다. 노인들이 ‘요즘 애들’을 운운할 때 입시 제도 교육에 길든 젊은 세대는 그들을 멍청한 개 취급한다. 정작 이 세대 전쟁의 승자가 누군지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전쟁의 주체는 표를 챙기고 뒤처리는 국민의 몫이다. 도래할 경제적 타격과 사회적 부작용은 지금 이 순간 그들에겐 보이지 않는 부채와 같다.




우리의 애국주의는 자발성을 기대할 수 없다. 국가는 나를 지배할 뿐 나를 위해 해주는 게 없다. 그래서 '대-한민국'을 외치게 하고, 애국주의를 주입시키려고 애쓴다. 학교에서는 애국을 강조하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우게 한다. 후진국일수록 스포츠가 '국위선양'의 도구로 동원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p.166



이러한 세상에서 진정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것이 가능할까? 홍세화는 끊임없는 자문만이 정답이라고 말한다. ‘스피노자가 강조했듯 사람은 이미 형성한 의식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나 또한 지금 갖고 있는 생각을 고집하고 쉽게 버리지 않는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더욱 물어야 한다.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생각이 어떻게 내 것이 되었나, 라고.’(p.16) 말이다. 독서와 토론을 통해 주체적 성찰을 게을리하지 않고 익숙한 제도 교육과 쉴새 없이 떠드는 미디어의 목소리를 부단히 의심하는 생활. 이것만이 내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버리고 이 미친 세상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살아갈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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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달인, 호모 로퀜스 - 언어가 춤을 춘다 세상을 다 말하라!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3
윤세진 지음 / 그린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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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제 트위터에서 다소 황당한 일을 목격했다. 맞춤법이 엉망인 어떤 글을 캡쳐한 트윗이 타임라인에 올라왔다. 캡쳐 사진을 올린 유저는 단지 맞춤법만으로 캡쳐 속 사람이 ‘비서울권’, ‘고졸’, ‘일용직 노동자’라는 걸 유추해냈다. 물론 실제로 그러한지는 확실하지 않다. 만약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언어 능력 하나만으로 누군가의 학력과 지역, 나아가 경제 능력까지 판단해버리는 게 문제다. 캡쳐 트윗을 올린 유저를 옹호하는 다른 트윗도 보았다. 그 사람을 비하하거나 무시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단지 가여워했을 뿐이라는, 말인지 방구인지 당최 분간이 안 되는 옹색한 변명. 비난은 안 되지만 연민은 상관없다 그 말인가?


이 책을 읽으며 처음에는 저자가 좀 엉뚱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줄임말이나 신조어, 사투리나 비속어가 실은 아무 문제가 없다는 주장. 분명 저자의 말은 언어에 대한 나의 통념을 재고하도록 부추기는 면이 있었다. 우리는 반드시 글을 형식에 맞도록 써야하며, 독서를 할 때에는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기본이라 배웠건만 저자는 그런 것에 굳이 얽매이지 말라는 것이다. 이상하다? 티브이에선 아나운서가 18번은 일제의 잔재니까 애창곡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다던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고?


저자는 이것이 엄연한 편견이라고 주장한다. 애당초 우리가 사용하는 한국어부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수많은 언어가 닿고 섞여서 조금씩 변화해 온 것인데 언어순혈주의를 내세워 18번이니, 애창곡이니 하는 것 자체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18번이라 부르면 어떻고 애창곡이라 부르면 어떤가? 이미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또 잘 사용해오고 있는데 말이다. 표현의 본래 속성이 잘못된 것이 아닌 이상 구태여 쓰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듣고 보니 그렇다. 이어서 저자는 묻는다. ‘이 말은 일본어에서 나온 말이라고 해서 버리고, 저 말은 영어에서 나온 말이라고 해서 또 버리고, 그런 식으로 버리다 보면 마지막에 남는 '순우리말'은 얼마나 될까?’(p.118)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관계 맺은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배우고 익힌 언어들을 통해 내가 나의 언어를 갖게 된 것처럼, 이렇게 낯선 언어가 자신의 것과 뒤섞이는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됨으로써 이러저러한 언어들이 생겨난 것이 아닐까? 언어란 그렇게 처음부터 이질적인 것들의 ‘화합물’로 있었던 것이지, 결코 단일 원소로 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국어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건 일종의 강박관념일 뿐이다.


p.114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결국 ‘창의력’. 우리는 스스로 언어의 용법을 속박하고 있다. 언어를 가두면 가둘수록 사고 또한 갇히게 마련이고 이는 필시 창의력의 빈곤을 불러온다. 인간의 행위가 언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안다면 굳이 속박하여 사고를 제한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넌 어린애도 아니고 왜 자꾸 줄임말을 쓰냐?”, “보그체 그거 다 허세 아니야?”, “저 연예인은 아직도 사투리를 못 ‘고쳤네’”……. 이런 편견을 알게 모르게 내면화한 사람들이 모인 사회가 결국 ‘다름’을 ‘틀림’으로 해석하고 빼어난 사람을 나댄다고 비난한다. 


여기서 그치면 다행. 우리는 어쩌면 앞서 언급했던 어느 트위터 유저와 같이 규범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인생까지 모조리 재단해버리는 치들과 함께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늦었는지도 모르겠다. 한글이 탄생하던 시기 조선의 고관대작들은 그것을 천한 것들이나 사용하는 언문(諺文)이라 불렀다. 그리고 2016년 현재, 우리는 그 언문으로 또다시 그들과 같은 벼슬아치 짓거리를 반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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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DOKU 2016-02-15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책 정보 노출에 오류가 있는 모양이다.

책 제목은 『언어의 달인, 호모 로퀜스』다.

알라딘, 일해라!

yureka01 2016-02-15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어는 결국 많이 쓰이면 그게 맞는 거란 생각입니다.자장면이 짜장면이 되듯이....

5DOKU 2016-02-15 19:28   좋아요 0 | URL
간혹 하나를 구조 전체에 영향을 주는 사례가 있긴 합니다. 다만, 일반적인 경우 저도 님이 말씀하신 게 맞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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