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휴가에 부산의 여동생과 동주네와 남포동 광복동 일대를 한 바퀴 돌았다.
최종 목적지는 자갈치시장 꼼장어구이 노천식당.
남자 둘은 뻘쭘한 표정으로  뒤떨어져 여자들을 따라오며 어서 빨리 이 염천의 쇼핑이
끝나기만 바라는 눈치.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눈을 빛내며 상점들의 진열장을 훑었다.

드디어 자갈치시장으로 건너가는데 지하상가에서 여동생이 나를 다짜고짜 잡아끌더니
트레이닝복과 나이키 운동화를 한 켤레 고르라고 했다. 
쪄도 너무 쪄 못 봐주겠다며 앞으로는 운동을 하라는데, 거의 협박과 애걸에 가까웠다.
할 수 없이 가벼운 운동화만 하나 골랐다.

동생이 비싼 운동화를 사준다고 기다렸다는 듯 당장 운동에 나서는 건 쪽팔리지 않나?
그래서 어제까지는 딴전을 부리다가 조금 전에야 운동화를 신고 문 밖을 나섰으니
아파트 꼭대기층까지 한 번 걸어서 올랐다 걸어서 내려왔다.
뭐든지 처음부터 너무 무리를 하면 안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아파트 계단을 오르며 엘리베이터 앞이나 계단에 내놓은 자전거나 재활용 쓰레기,
유모차 같은 걸로 그집 가족 구성원을 대략 파악할 수 있었다.
603호인지 604호인지는 아기에게 모 사의 분유를 먹이고 있고 그집 아빠는
분유깡통을 재털이로 아예 계단 구석에 내놓고 담배는 xx.를 피운다.
그 층의 모퉁이를 지날 때 던힐의 희미하고 부드러운 향이 코끝에 맡아지는 듯했다.

16층 왼쪽편 집 여인은 꼼꼼함이 지나쳐 강박 증세가 좀 있는 듯.
초등학교 아이의 두 발 자전거에 검정색 매직으로 아이 이름과 동호수를
도배를 해놓다시피 써놓았다.
아무도 거들떠 볼 것 같지 않은 낡은 자전거인데......

18층의 어느 집에선 미니 오디오를 내놓았는데 xx사의 것으로 겉은 멀쩡했다.
내려오는 길에 집에 들고 가서 연결해 볼까나 하는 생각을 하며 계단을 올랐다.

10층을 지날 무렵 약간 호흡이 가빠지는 증상이 있었지만 1분여 멈춰서서
심호흡을 해주고 나니 괜찮았다.
건너편 아파트 복도의 창에 마침 담배를 피러 나온 시인이 있어
건너편 아파트의 모든 계단을 헉헉대며 걸어 올라가는 뚱뚱한 아줌마의 모습을 지켜본다면
시가 한 편 나올 것인가?
제목, 고독한 여인.

계단을 내려올 때는 너무 수월해서 그런지 아파트 복도와 상관없는
제법 다른 생각들이 떠올랐다.
이번 휴가 때 문경의 한 휴게소에 들렀더니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는데
"잡상인은 연민의 대상이 아닙니다"였다.
그 구호는 이상하게 시도때도 없이 눈앞에 나타난다. 헛것으로.

우리들이 자갈치의 한 노점에서 꼼장어구이를 먹을 때 입성이 초라한 한 할아버지가 다가와
소주를 반 병만 먹을 수 있겠는가 하고 주인 여자에게 물었다.
안주 없이.......
우리 꼼장어를 조그만 접시에 담아서 드리고 소주든 맥주든 한잔 대접하고 싶었는데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할아버지를 그냥 보내는 주인 여자가 너무 냉정하다고 투덜거렸더니
모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할아버지를 도와주는 거라고......
글쎄, 과연 그럴까?

사흘째, 한여름에 문을 꽁꽁 걸어닫고 방학(어린이집도 학원도 며칠간의 방학이 있다)을 한
아이들과 세 끼를 챙겨 먹으며 지내다보니 비상식량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낀다.
결국 어제 저녁에는 모 홈쇼핑을 보다가 충동적으로 바비큐 폭립을 주문했다.
오늘 보니 아파트의 복도에는 홈쇼핑의 빈 택배 상자들이 2, 3층  걸러 한 집 꼴로 나와
재활용품을 분류하고 담아놓는 상자로 쓰이고 있었다.
사람들 사는 모습이 어쩜 그리 빤한지.......

집에 돌아와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마흔 두 집 중에 어떻게 문을 연 집이 한 집도 없다냐?
나를 포함하여 모두 무슨 꿍꿍이로 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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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8-02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아파트를 오르락 내리락 하시면서
주변사물을 관찰하시는 모습이 마치 미스마플 같습니다...^^

하루(春) 2006-08-02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집어졌다가 일어나서 눈물을 훔쳤어요. ^^;
운동하고 싶으신 생각이 없으신 거로군요.

로드무비 2006-08-02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FTA 반대 하루 님, 어느 대목에서 뒤집어지셨는데요?
고독한 여인, 부분?ㅎㅎ
운동을 좀 하긴 해야 할 텐데, 우선 하루 한 번 복도나 오르내리려고요.;;

메피스토님, 미스마플이 누구죠?
관찰한 게 아니고 그냥 눈에 띈 대로 지껄인 것에
불과하다니까요.

Mephistopheles 2006-08-02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중 한명이에요.^^
할머니인데 뛰어난 관찰력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캐릭터..라더군요..

물만두 2006-08-02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관문 닫으세요~!!! 요즘같은 세상에... 시절이 하수상하잖아요 ㅠ.ㅠ

mong 2006-08-02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사는 아파트는 복도식이거든요
일요일에 문 열어 놓고 있으면 다른 집 애들 혼나는 소리며
반찬 종류며 다 알수 있어요 히힛

라주미힌 2006-08-02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소한 일상인 듯 하면서도 소소하지가 않네용...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까욤. 흠.. 저도 살 빼야 하는뎅..

ceylontea 2006-08-02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요즘 무슨 꿍꿍이로 사는지 이 더위에 모두 문을 꽁꽁 잠가 놓고 있지요..--;

urblue 2006-08-02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뱃살 빼는 데는 역시 줄넘기가 최고라고 해서 오늘부터 줄넘기 할까 생각중이에요.

조선인 2006-08-02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윽, 이 더위에 어떻게 문을 닫고 견디죠? 놀랍네요.

nada 2006-08-02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던힐의 희미하고 부드러운 향의 세계를 아신단 말이어요? 남을 돕는다는 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누군가 나를 돕는답시고 한 일도 내겐 황당할 때가 있는 걸 보면.. 그래도 할아버지랑 술 한 잔, 괜찮을 거 같은데.

로드무비 2006-08-02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우님, 모두 무슨 보물단지라도 숨기고 사는 것이면 차라리 좋으련만....
우리 집은 저층인데도 모든 창문은 에브리데이 활짝활짝입니다.^^

FTA 반대 조선인 님, 어쩌면 옷차림이 너무 민망하고 그래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덥다보니 다들 벗다시피......^^

블루님, 할까 생각중이면 안 되고요,
저처럼 실천을 하시는 게 중요합니다.=3=3=3
(흥, 날씬하기만 하더만.=3)

실론티님, 굳게 닫힌 문들 앞에서 절로 '꿍꿍이'라는 단어가
생각나더군요.;;

FTA 반대 라주미힌 님, 이것저것 모두 언급하면 너무 잡다해져서.
어쩌면 소소한 일상이 인생의 거의 모든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라주미힌님도 떽끼!! 뺄 살이 어딨다고.=3)

mong님, 저녁 무렵 어디선가 반찬 냄새가 풍겨오면
코를 벌렁거리는 것도 한 즐거움.
깻잎 간장에 졸이는 냄새랑 잘 끓인 된장국 냄새가
참 좋더라고요.
그 대신 치고 박고 싸우는 소리가 들려오면 가슴이 조마조마.;;

FTA 반대 물만두 님, 30 분 만에 문 닫았어요.
좀 거시기해서....^^;;

메피스토님, 뛰어난 관찰력은 좋은데 할머니라굽쇼?ㅎㅎ
언제 읽어봐야겠군요.

로드무비 2006-08-02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양배추님, 제가 모르는 게 어딨다고.(거만거만.)
왕년에 음주가무('무'는 빼고...)의 세계에서 저도 한 가닥 했다고요.ㅎㅎ
내가 할아버지라면, 하고 처지를 바꾸어 보면 됩니다.
선행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는 어떤 일을 할까 말까 망설일 때는.....
전 먹고 죽자 쪽이거든요.

해리포터7 2006-08-02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잡상인은 연민의 대상이 아닙니다'ㅋㅋㅋ 어디에서도 본적이 없는 감상적인 문구군요.ㅎㅎㅎ 이더운날에 계단을 올랐은 님을 생각하니 제가 다 호흡이 가빠집니다.^^

로드무비 2006-08-02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리포터7 님, '잡상인'에 다른 단어들을 넣어봤어요.
노숙자, 전과자, 기타 등등.
2년 전에도 한 번 계단 오르기를 해본 적이 있는데 그때보다 오히려
숨이 덜 차더라고요.
책을 읽으며 계단을 오르내리면 심심하지도 않고
괜찮을 것 같다 했더니 깜짝 놀라서 말리더군요 남편이.
굴러떨어져 다치면 어떡하냐고.ㅎㅎ

해리포터7 2006-08-02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말리고 싶어요..제가 책보며 가끔 계단 밟다가 놓치는 경우가 많아요..ㅎㅎㅎ

로드무비 2006-08-02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휘청,하는 경우는 양반이지요.
말려주셔서 고맙습니다.^^

2006-08-02 17: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날개 2006-08-02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단 오르내리는건 무릎관절에 무리가 많이 간다 하더이다..^^
평지 걷기로 바꾸시지요...

야클 2006-08-02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마.... 서재이미지의 진공청소기 든 아줌마 정도는 아니겠죠? ^^

니르바나 2006-08-02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마 로드무비님을 엄청 사랑하시는
남편자랑, 동생자랑 하시려는 꿍꿍이는 아니겠지요.^^

에로이카 2006-08-03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저는 거울을 보다 너무 뚱뚱해서 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마음을 먹으면, 갑자기 볼 책도 많아지고, 할 일도 많아지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도 많아지는 걸까요? ^^ 운동 꾸준히 하시기를 빕니다.

플레져 2006-08-03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계단 여행 다녀오셨나요? ^^
우리 층에는 자전거가 무진장 많아요. 정작 자전거가 자리를 비우는 건 한번도 못 보았네요. 오늘은 뭐 발견하셨나 궁금!

반딧불,, 2006-08-03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쉬 무비님 페이퍼는 달콤해.(이건 중독증세)

건우와 연우 2006-08-03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씩 아파트의 닫힌 창문들을 베란다에서 물끄러미 바라다보면 다들 무슨 생각들을 하며 사는지...할때가 있어요.
그러면서 사는게 외로워지기도하고 또 사는것에 단련되는 느낌도 들고...
로드무비님은 사는 여러모습들을 문득문득 깨우쳐주시네요...^^

로드무비 2006-08-03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우와 연우님, 저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도 문득.
그런데 '깨우쳐 준다'는 말은 거두어 주세요.^^

반딧불님, 호호, 말씀도 달콤하셔라.^^

플레져님, 계단 여행 오전 열시에 다녀왔습니다.
다리가 아파 죽갔시요.
뭘 발견했는지는 <도쿄기담집> 리뷰에 썼답니다. 읽어주세요.^^

에로이카님, 그러니까요.
살을 좀 빼볼까 생각하면 맛난 음식 먹을 일이 얼마나 많이 생기는지!ㅎㅎ
운명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계단 오르기 당분간 꾸준히 할 생각입니다.^^
(님도 찌셨다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3=3=3)

니르바나님, 아이참, 저의 그런 꿍꿍이를 노출시키시면
어떻게 한답니까.ㅎㅎ

야클님, 뭐 비슷합니다.^^

날개님, 그, 그, 그래요?
요즘 더워서 걷기는 좀 그런데, 핑계김에 운동 가을까지 미룰까요?ㅎㅎ

시작이 반 님, 가끔 댓글 남겨주시와요.
모처럼 제 페이퍼에서 만나니 얼마나 반가운지요.^^

2006-08-03 19:0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