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전이긴 하지만 고등학교 국사시간에 자본주의 맹아라는 부분을 공부한 기억이 있다.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식민사학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하나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뉴라이트, 혹은 교과서 좌편향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옛날 식민사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사 연구의 과제는 여전히 여전히 식민사학을 극복하고 새로운 한숙사의 체계를 세우는 일이었다. 식민사학의 논리 중 사람들에게 가장 호소력이 강하고 영향이 큰 것은 당파성론과 타율성론이었지만, 식민사학의 뿌리는 일선동조론과 정체성론이었다. 일선동조론은 일보의 한국 병합이 두 나라 민족을 원래 상태로 회복하는 것이라는 정치적 의도를 깔고 있었다. 그렇지만 일선동조론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파고 들지 못하였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고 한국이 독립된 뒤로, 일선동조론은 더 이상 그 생명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이에 반해 정체성론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 식민지로 만든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국제사호에서 통용되던 논리였다. 우승열패의 사회진화론은 강국이 약소국을 식민지화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너희는 세계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으며, 그래서 발전한 국가의 식민지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사회 변화의 이치이다. 그러는 편이 너희도 발전을 할 수 있는 길이다"라는 제국주의 논리가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었다. 역사적으로 한국은 독립적으로 발전하지 못했으며, 특히 조선은 정체된 사회라는 것이 일본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이었다. 그 근거로 극심한 당쟁, 성리학만을 떠받드는 사상적 경직성, 봉건사회 결여론 등의 논리를 내세웠다. 한국사학자들은 해방 이후 이런 논리들을 여러 측면에서 반박하였다.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깨뜨리는 것이 식민사학을 극복하는 길이었으며, 한국사 연구의 핵심 과제였다. 이러한 과제의 실천은 실증적 연구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한국사 연구는 두 가지 측면을 밝혀야 했다. 하나는 한국사도 역사발전의 일반적 단계를 거쳤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의 영향력 없이도 한국사가 자생적 근대화의 가능성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155쪽)

 

식민사학의 정체성론을 극복하기 위한 더 적극적인 연구는 조선후기 사회경제사에 집중되었다. 한국사에도 자생적인 근대적 발전의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명시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이들 연구는 조선후기 한국사회 내부에 자본주의 맹가가 존재하였음을 밝히는 작업이었다. ....

조선후기 농업에서는 이앙법(모내기)을 비롯하여 견종법(골뿌림법) 등 농법의 개선과 이모작 등 효율적인 농지 이용으로 농업생산력이 높아지고 노동력이 절감되어 광작이 가능해졌다. 그 결과 한편에서는 경영형 부농이 생겨났지만, 다른 한편으로 농지에서 밀려난 농민들이 임금 노동자가 되었다. 상업에서는 사상(私商)이 성장하여 자본력을 바탕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는 특권상인들의 경쟁하였다. 상인들중에는 막강한 자본력으로 물품을 독점하는 도고상인들도 나타났다. 수공업에서도 점차 민영수공업이 성장하였다. 일부 대상인들은 선대제를 도입하여 수공업자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항하는 자유수공업도 마타났다. 상인들은 자본을 동원하여 광산경영에 손을 대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조선후기 사회에서 자본주의적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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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교육의 역사 - 고대부터 현대까지 한국 역사교육이 걸어온 길
역사교육연구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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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역사교육이 시작을 알기는 어렵지만, 조선전기 <동몽선습>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동몽선습>은 역사서라기 보다는 중국중심의 충, 효 등이 강조된다. 조선후기에 이르러서야 자국사라는 개념이 생겼다.

<동사강목>은 유교적 도덕 사관을 바탕에 깔고 있는 강목체 역사서답게 대의명분과 충성, 절의라는 도덕 기준에 따라 자국사를 바라보고, 절의를 지킨 인물과 애국 항재을 강조했다.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파악하던 견해를 부정하고, 화(華)와 이(夷)를 구분하는 기준이 지리에 있지 않음을 역설함으로써 전통적 화이관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강목체 사서의 기본 특징인 유교적 교훈 중심의 정치사, 사대부 중심의 역사인식이라는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었지만, 독자적인 자국사 연구와 편찬에서 일대 획을 그은 책이었다. (55쪽)

 

조선말에 이르러서 주체적인 역사와 역사교육에 대한 개념이 형성되었지만, 일제시대 들어 역사교육자체가 말살되는 데에까지 이른다. 일제시대의 국사는 일본사의 한 부분을 차지할 뿐이었는데, <보통학교 국사>가 대표적이다.

"천황은 히로시마 대본영에 계셨는데 좁은 집무실에서 밤낮으로 모든 일을 친히 처리하셨다. 그리고 황송하옵게도, 출정군인과 고락을 함께하시겠다는 생각으로, 불편함을 숨기시고 마디마디가 에이는 혹한에도 스토브조차 사용하지 않으실 정도였다. 그리하여 출정 장병은 집을 잊고 몸을 던져서 점점 충성과 용맹을 나타내고, 국민은 모두 이것을 후원하여 상하가 마음을 하나로 하여 국사에 열심을 다했기 때문에 드디어 이와 같은 커다라 승리를 얻었던 것이다.<보통학교 국사 하권, 134~135쪽>"

 

천황의 솔선수범과 국민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청일전쟁의 승리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한국사는 부정적인 내용으로 일관되었다.

 

"당파싸움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율곡은 이것을 걱정하여 그 싸움을 그치게 하려고 힘을 다했지만 효력이 없었고, 점차 많은 당파를 만들어 각각 정권을 잡으려고 다른 사람을 죄에 빠뜨리려 꾀하매, 이때부터 정치는 크게 어지러워졌다. 지금까지도 조선인 사이에 노,소,남,북 4색의 구분이 있음은 그 잔재이다.<보통학교 국사>하권 11쪽"

 

<보통학교 국사>에는 위대한 일본제국의 역사상과 부끄러운 한국의 역사상이 하나의 교과서에서 선명하게 대비되어 있었다. 전자를 통해서는 한국의 독립이 불가능함을 알게 하고, 후자를 통해서는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을 당연하게 여기도록 가르친 것이다. (115쪽)

 

일제강점기는 이렇게 왜곡된 역사를 가르쳤지만 더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 역시 역사에 개입하게 하는 여지를 만들어준 것이다.

역사교육을 국민통합과 국민의식 형성의 중요한 도구로 활용하려 했던 조선총독부의 정책은 광복 이후에도 교육정책 입안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렇듯 한국사교육을 민족의식과 국민의식 형성을 위한 도구로 적극 활용하려는 과도한 정책적 의도와 경향은 황국신민화 정책기의 역사교육 정책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150쪽)

 

그리고 뒤이어 벌어진 한국전쟁은 한국역사가 객관적인 시각을 갖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6·25전쟁은 우리나라 역사교육의 방향을 바꾸어놓았다. 학자들 사이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해방 직후만 해도 역사교과서에 38선의 성립과 남북 문제에 관해 미국과 소련 양쪽에 공평하게 책임을 돌리는 서술이 우세했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민족의 대립이 동족상잔으로 이어지고 분단이 고착되면서 외세나 제국주의가 아니라 민족의 다른 반쪽이 가장 중요한 적으로 등장하는 적 개념의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까지 경계의 대상이었던 외세가 '새로운 적'인 민족의 다른 반쪽을 넘어서기 위한 지원 세력으로 여겨졌다. 전쟁으로 남북 분단이 고착되면서 교육과정과 교과서 속에 이데올로기 문제가 핵심 사안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까지도 남북 양쪽에서 정권 유지와 반대 세력 축출에 6·25전쟁과 남북 분단을 활용하는 폐해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169쪽)

 

역사교과서과 본격적으로 정권의 홍보물로 전락한 것은 박정희시대 후반부부터이다.

1969년 교육과정의 부분 개정 이후 국사 교과서에 나타난 변화를 살펴보면, 각 시대별로 대외관계를 중시했으며, 현대사 부분에서 베트남 파병, 경제개발5개년계획, 새마을운동, 국가비상사태 선언, 남북 대화 등 구체적인 정부시책을 홍보하고, 5·16 쿠테타를 혁명으로 부르면서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이 개정은 이후 교육과정과 교과서의 방향을 보여주었으며, 국사교과서가 정권의 홍보 수단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는 출발점이 되었다.(177쪽)

 

이후 박정희 정권은 '국적있는 교육'을 강화하며 국사교과서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국사교과서가 국정화된 것도 이 때이다. 그리고 아울러 <시련과 극복>이라는 책을 역사 읽기 교재로 활용한다.

"고려인의 독립자존의 정신과 꺾이지 않는 기개는 국가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발휘되었는데, 특히 이것은 무인의 전통으로 이어져, 일찌기 거란과의 항쟁에 있어서도 그러하였거니와, 몽고와의 항전에도 여지없이 발휘되었다."라거나, "삼별초가 3~4년 동안에 걸쳐 대몽 자주 항쟁을 벌인 것은 역시 고려 무인의 전통적 기백을 드러낸 것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라는 <시련과극복>의 서술은 무인의 국난 극복 정신을 높이 평가하는 단적인 사례다. 이러한 서술은 박정희 정부가 쿠테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이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192~193쪽)

 

그런데, 이러한 정권의 하수인 역할을 역사교과서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1994년에 있었다. 당시의 역사연구를 반영하여 6·25전쟁은 한국전쟁으로 바꾼다거나, 4·3항쟁으로 용어를 바꾸고 이승만과정의 독재화 과정 및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사항 등에 객관적 서술을 권고했는데, 이는 보수 우파의 강력한 공격을 받았다.

개정 시안의 내용이 알려지자 보수 언론과 단체들은 무차별 공격을 퍼부었다. 시안의 내용이 '위험한' 민중사관에 근거하여 북한을 지지하고 남한을 비판하는 입장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 이런 비판에 직면한 교육부는 논란이 된 용어나 내용을 대부분 종전의 교과서와 같이 되돌렸다. ...

이 사건은 국정 <국사> 교과서가 지나치게 지배층 중심의 역사관을 대변하고, 반공 이데올로기를 따르고 있으며, 정권의 홍보 역할을 해왔다는 비판에 대한 보수·우익의 반격이었다. 민중사학이나 기존의 교과서 비판에 맞서 보수·우익 관점의 <국사>교과서 서술을 그대로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1994년의 '국사교과서 준거안 파동'은 2000년대 들어 <한국 근·현대사>교과서와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란과 역사 이념 논쟁으로 이어졌다.(222쪽) 

 

2000년대 후반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들은 다시 역사교과서에 손을 댄다. 그리고 뉴라이트라는 집단이 나타나 역사전쟁의 선봉에 선다. 금성출판사는 그 논란의 중심에 섰다.

 

뉴라이트 파동과 관련해 저자는 신자유주의의 태동이라는 시각을 제시한다. 1980년대 부터 뉴라이트가 등장한 영국, 미국을 중심으로 자국사를 강화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역사를 객관적으로 반성의 입장에서 보려는 시각을 자학사관이라고 비판한 점 등이 비슷하다.

 

역사교육의 역사로 보면 우리에게 역사교육은 항상 왜곡으로 가득차 있다. 정치적인 공세는 다시 역사교과서를 국정화시키는데까지 돌아간다. 역사계의 성과에는 눈을 감고 가르치고 싶은 것만 왜곡해서 가르치겠다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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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 위험한 교과서, 바로 읽기 - 뉴라이트의 위험한 역사 인식에 맞닥뜨려 오늘, 대한민국을 돌아보다!
역사교육연대회의, 김종훈 외 지음 / 서해문집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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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정부는 역사교과서의 국정화를 추진하고 있다. 현 역사교과서의 반발은 2000년대 중반부터 있어왔다. 2008년에 출간된 뉴라이트 교과서가 그 시초이고, 그 뒤 교학사 교과서이다. 국정화된 역사교과서의 방향은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마도 2008년 출간된 뉴라이트 교과서일 것이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현행교과서가 자학적 사관에 빠져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교묘하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은 친일파들이 만들어낸 독재개발이다. 그래서 자랑스러운 역사는 일부 시간에만 한정된다. 조선 중후반 서술의 이면에는 어쩔 수 없이 일제가 들어올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식민지 시대를 거쳐 대한민국의 기초를 쌓았다고 본다. 광복절을 이야기하지 않고, 건국절을 이야기하며 친일파들을 옹호한다. 그들이 말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은 단지 친일파를 긍정적으로 말하기 위함이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조선이 잘못해서 일제가 들어올 수 밖에 없다는 식으로 몰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중화제국론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조선에 대한 청의 규정력을 과대포장하고, 그것을 해체시킨 것이 일본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고종의 황제 즉위에 대하여, 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개화파의 노력이나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려는 고종의 의도보다도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배했다는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근본적인 변화"를 강조하는 서술(56~57쪽)에서 잘 드러난다. 그리고 이러한 서술은 일본이 조선을 독립시켜주었으나 결국 스스로 자강개혁에 실패하여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서술로 이어진다. (81쪽)

 

대놓고 일본의 시각을 대변하는 경우도 있다.

방곡령에 대한 설명에서도 "조선왕조는 흉년을 명분으로 방곡령을 발동하여 일본상인에게 타격을 주었다."(45쪽)고 했는데, 이는 당시 일본인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82쪽)

 

러일전쟁의 배경에 대한 설명을 보자. 러시아에 대해서는 '야심'이라고 하는 반면, 일본에 대해서는 '진출'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점도 형평성에 어긋난다. 이같이 '침략'을 '진출'이라고 하는 것은 일본의 우익세력들이 후쇼샤 교과서를 통해 역사 인식을 바꾸려고 시도하는 대표적 사례로서 (83쪽)

 

그리고 조선후기 민중봉기나 일제시대 의병 등 일반인들에 대해서는 평가절하한다. 이들의 사고방식은 역사는 위대한 지도자에 의해 움직인다고 보는 시각일 것이다. 그 위대한 지도자란 이승만과 박정희이다. 그래서 그 시대의 공은 이승만과 박정희에 돌리지만, 과는 대충얼버무리며 넘어간다. 기본적으로 학자적 자질이 의심스러운 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교과서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건국의 지도자인 이승만 대통령과 근대화 혁명의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의 역사적 역할을 강조한다. 역사를 설명할 때 구조와 행위자(주체)를 어떻게 결합시켜 서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자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 엘리트 집단, 그리고 그 정점이 되는 지도자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일관성이 흔들린다.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 집권기에 달성된 긍정적인 업적을 이야기 할 때는 지도자의 역할이 부작된다. 반면 유신체제의 수립 원인 등 비민주적 정치 행태가 언급될 때에는 중공업화, 안보 위기, 당시 정치 구조의 한계 등 환경적·구조적 문제가 강조된다. 이승만 대통령의 뛰어난 능력과 업적은 구한말부터 해방 이후까지 본문 서술과 별도의 박스 등을 통해 여러 번 자세히 소개되나. 그렇지만 1960년 3·15부정선거를 언급하는 대목은 "자유당 강경파는"으로 시작된다.(뉴라이트 교과서 173쪽)

 

뉴라이트 교과서가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식민지 근대화이다. 식민지시절 경제발전을 통해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의 초석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조선말기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해서 일제 식민지를 당연한 결과로 생각하게 하고, 경제발전의 배경에는 일제가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며서 독립운동을 자연스럽게 배제한다. 결과적으로 친일파들이 대한민국의 발전에 공을 세웠음을 보이지 않게 이야기한다.

 

뉴라이트 특유의 식민지근대화론은 대한민국을 일제 식민통치(조선총독부)의 근대화 성과를 계승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또한 이들의 건국절 제기는 친일 세력과 그 후계자들에게 '친일의 면죄부'를 줄 뿐 아니라 애국자이자 건국 공로자로 만들어주고 있으니, 뉴라이트 교과서야말로 친일 세력과 그 후계자들에게는 가뭄 끝에 단비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86쪽)

 

또한 일제에 협력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보통의 한국인들도 강제적으로 또는 자발적으로 전시체제에 참여하였다. 황민화 교육이 한창이던 전시기에 수많은 한국인 학생이 각급 학교에 다투어 진학하였다. 졸업생들은 전시공업화 정책으로 늘어난 국내외 일자리에 취업하였다. 하급직의 관료와 회사원은 징집된 일본인들이 떠나면서 남긴 자리를 이어받았다.

상공업자들은 1943년 전반까지 계속된 전시 경제의 호황으로 사업을 확장하였다. 일제의 광기어린 전시체제에 저항하기는 어려웠다. 공공연히 협력자로 나서지 않은 애국지사들도 식민지 말기 수년간은 숨죽여 지낼 수밖에 없었다.(170쪽, 뉴라이트 교과서 132쪽에서 재인용)

일제 체제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였고, 저항하기 어려웠다는 점을 들어 은근슬쩍 항일운동에 대한 언급없이 넘어간다. 이 글만 읽으면 일제 말기에는 독립운동이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독립에 기여한 바가 없음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독립불가론을 강조해 친일이 어쩔 수 없었던 것임을 강조하여, 독립운동을 역사에서 지운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여자정신근로령' 부분은 박스 안에 자세히 쓰고 위안부 문제는 사진 설명으로 작게 기술하였다. 정신대 문제를 자세하게 쓴 것은 이 문제가 위안부 문제와 다름을 강조하고 싶어서인 것으로 보인다. 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업자들이 여성들에게 큰 돈벌이가 있다고 하자 여성들이 이러한 꾐에 빠져서 갔다는 식으로 서술하였다.(뉴라이트 교과서 93쪽) 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피해자들이 말하고 있는 강제연행, 인신매매, 유괴 등을 이 책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134쪽)

 

국정교과서의 방향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는 없지만, 국정화를 노골적으로 강행한 것을 보았을 때, 박근혜정부가 만들어 낼 국정교과서는 노골적으로 근대화를 강조할 것이다. 이승만의 건국과 박정희의 경제발전을 이야기하면서 친일파는 건국의 영웅으로 거듭날 것으로 보인다. 2018년 대한민국 건국절 70주년에 영웅으로 드러나는 사람들, 그냥 친일파로 보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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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까 - 현장 교사들이 쓴 역사교육론
전국역사교사모임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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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일종의 역사교육론에 관련된 책이어서 일반인이 읽기에는 부담될 수 있다. 실제 교육사례 등은 관심도가 적으니까 말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관련되어 역사전쟁, 역사교육에 대한 책을 찾아 읽다 보니 이 책까지 손에 들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책 전체보다는 현재 벌어지는 일에 대한 관심분야에 집중해서 읽을 수 밖에 없다.

 

교과서 사용에 관한 국가의 결정권이 이 정도로 강력한 나라는 소수 사회주의 국가를 제외하고는 보기 드물다. 교과서 제도에 관한한 우리는 아직 일제 군국주의와 유신체제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셈이다.

교과서 제도는 근대 공교육체제의 산물이다. 국민국가 수립과정에서 공교육은 '국민만들기'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수신','국어','국사'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교과서 제도는 '국민의식'의 형성을 위해 국가가 교육 내용을 통제하기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

해방이후 역사과에서 국정제 교과서 제도가 중대한 문제로 논란이 된 것은 유신체제 아래 제3차 교육과정 때의 일이다. 10월 유신 이후 유신정권은 주체성 있는 국민정신교육을 강조하면서 검정제로 발행되던 국사 교과서를 국정 단일화하였다. (54쪽)

 

이런 국정교과서는 지배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도 많은 문제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국정화다 보니 국사교과서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집단이 있을수도 있고, 사회적으로 첨예한 부분에서는 모호하게 가져갈 수 밖에 없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근현대사와 고대사이다. 근현대사 서술에 관한 논란은 곧바로 현실 정치 세력의 정치 노선 충돌로 이어지면, 이념 투쟁의 성격을 갖는다. 1948년 4월 제주도에서 있었던 비극적 사건을 '폭동'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항쟁'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그 인식의 차이를 좁히기는 어렵다. 고대사에 관한 논란은 문화사상, 민족정기 등 상대적으로 추상적인 관념과 연계된다. 단군을 역사적 실체로 인정해야 한다는 상고사학회, 그것을 우상숭배라고 주장하는 기독교단체, 문헌 증거만으로 말해야 한다는 실증사학 진영 등 다양하고 양극적인 주장을 조정할 여지는 거의 없다. 따라서 모호하게 초점을 흐리게 하는 방법을 동원할 수 밖에 없는데, 이는 국정교과서가 밋밋할 수 밖에 없는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64쪽)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오래되어서 잘 몰랐는데, 최근에는 '동아시아사'라는 과목이 생긴 듯 하다. 책은 졸속하게 만들어진 문제들을 지적하다. 그에 반해 실제 역사를 고민하는 이들에 의해 <내일을 여는 역사>와 같이 정식 교과서는 아니지만 한중일 공동 작업의 결과물이 나오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국사라는 과목이 필요한가라는 생각이 든다. 세계사와 동아시아사 정도로 구분해서 배우는 것도 한 방법일 것 같다. 물론 그안에 대한민국사에 대한 비중을 늘리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도 현실적인 문제들을 이 책은 지적한다.

한국사와 세계사의 관계도 역사 교육과정의 오랜 과제다. 주된 관심은 어떻게 하면 국사와 세계사 교육을 통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세계사의 맥락 속에서 한국사를 공부해야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한국인의 관점에서 세계사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취지였다.(42쪽)

 

교사들의 실제 사례가 나오기도 하고, 역사교육의 방향에 대한 고민도 있다. 현직교사들의 비판도 있고,

이웃 나라를 타자화시키는 용어 사용도 문제가 된다. 고구려의 수당전쟁과 신라의 대당전쟁 관련 서술을 읽어보면, '야심', '야욕'이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이는 중국에 대해 부정적 정서 반응을 일으키게 하는 서술이다. 또 고구려가 수,당을 물리침으로써 '민족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든지, 신라가 당의 야욕을 물리치고 통일을 완수한 것은 '자주적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서술은 고구려·백제·신라가 '같은 민족'이고, '수·당은 다른 민족'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고대에 민족이 형성되지 않았다고 볼 때 이 서술은 타당하지 않다. (254쪽)

 

후삼국 시기, 홍경래 난, 동학농민전쟁 등 몇 차례 내정이 있었으나, 고려시대 이후 전쟁은 대부분 외세 침략과 그에 맞선 항쟁으로 전개되었다. 수업에서 다루는 전쟁도 대부분 이러한 경우다. 그런데 이 경우 각각의 사건은 대부분 "전 민족이 단결하여 나라의 어려움을 막아냈다."는 서사 속에 용해되고 만다. 그러나 많은 전쟁이 지배층의 무능 때문에 일어났고, 지배층이 자신의 안위를 민중의 희생보다 중시하는 속에서 민중의 자발적 참여로 전쟁을 극복하는 경우가 많았다.

···

민족적 단결로 국난을 극복하자는 취지 자체는 부정될 수 없다. 그러나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라고 요구하거나, 존재하는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민족적 위기를 과장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306쪽)

 

이 책은 역사교육에 대한 고민과 비판, 실제 역사교육 현장에서의 사례와 2000년대 후반의 제7차 교육과정에 대한 논의가 있다. 그리고 점점 중요해지는 과학기술사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상대적으로 소외된 여성에 대한 부분, 노동사, 생활사, 지역사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도 제안을 한다. 이런면에서 일반인이 전체를 다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문제와 관련해 관심있는 사람들이라면 부분 발췌독이 좋을 것 같다. 역사교육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고민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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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기사

젊은 사학자들 뿔났다 "낙랑군 평양설을 식민사학 매도"

계간 '역사비평'통해 "재야 사학 사이비" 정면 비판                

 

동북아역사재단 지원 아래 추진됐던 미국 하버드대 한국고대사(EKPㆍEarly Korea Project) 사업 지원이 지난해 중단됐다.

 

한사군 가운데 하나인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내용이 문제였다. 학계에서 한탄이 나왔다. “해외 연구자들이 1920, 30년대 일제시대 일본학자들이 간행한 영어논문 밖에 접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 학자들이 만든 최신 연구 성과를 외국에 소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 사업은 국내뿐 아니라 하버드대와 연계한 사업이었다. 한국이 진행하는 사업은 국내의 정치적 논란에 따라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는 나쁜 인상을 남긴 셈이다. 동북아역사재단 지원 아래 8년간 추진되던 ‘동북아역사지도 편찬사업’도 좌초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 지도에도 역시 낙랑군이 평양에 표기되어 있다.

두 사건 모두 재야사학자들의 빗발치는 항의와 이에 호응한 국회의 움직임이 있은 뒤 일어난 일이다.

http://www.hankookilbo.com/v/4fd805dceff34e6d9b0966933faff809 

 

그런데 이 재야사학자들이라는 사람들이 참 웃긴 사람들이다. 그냥 사기꾼이다.

 

 그러나 재야사학자들은 이와는 반대로 극단적 민족주의와 반공사상을 내세우는 보수적 성향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전두환정부가 들어선 1980년대에는 정치권과 연결하여 국사 교과서의 상고사 내용을 전면 개편해야 한다는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고자 했다.그러나 한국사학계는 이들의 주장을 무시하고 있다. 이들이 전거로 내세우는 사료들은 역사학의 기본인 사료 비판을 전혀 거치지 않은 후서에 조작된 위서이거나, 그 내용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253쪽)

1982년에 간행된 국사교과서에서는 단군신화가 고조선 건국과정의 역사적 사실과 홍익인간의 건국이념을 밝혀준다는 내용이 들어갔으며, 한군현의 위치를 생략하였다. 단군신화를 '신화'로 취급하는 것은 식민사관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한군현이 한반도에 위치하지 않았다는 이들의 주장이 어느정도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들어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이 이전보다 훨씬 활발해지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낸 것은, 당시 사회적 상황과 관련이 있다. 1980년 ... 이들은 강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어서, 역사적 사실의 근거와 상관없이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에 호기심을 보였다. .. 재야사학자들은 국사 교육이 국민을 무장시키는 정신교육이 되어야 하며, 강력한 민족주의, 심지어 국수주의를 통해서라도 국민을 정신무장시켜야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이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단군이래의 최대 숙정작업이 일어나고 있는 이 때야 말로 국사를 식민사관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기회라고 강조했다. 이들이 말하는 숙정작업이란 전두환 정권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사회개혁의 명분을 내세워 자행한 정치규제, 언론숙청, 삼청교육 등 일련의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12,12 군사정변과 5,18 광주항쟁의 무력진압으로 정통성에 커다란 약점을 가지고 있던 전두환 정부에 참여한 정치인들에게 관심을 끌만한 것이었다. (257쪽, 역사교육으로 읽는 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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