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혐오가 어쨌다구? - 벌거벗은 말들의 세계 우리 시대의 질문 2
윤보라 외 지음 / 현실문화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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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이전의 우리나라는 여성차별의 시대였다. 여성차별이 약화된 - 실제로는 여전한- 시대에 여성차별은 여성혐오로 대체된다. 기존에 나쁜 여자의 이미지가 있었다면 '김치녀', '김여사'로 대변되는 여성은 혐오의 대상이다.

 

 흥미로운 것은 '나쁜 여자'와 '착한 여자라는 이분법적 구분 자체가 흐려진 현 상황이다. 여성을 성녀와 창녀로 나누어 보상과 처벌을 반복하는 것은 가부장적 사회질서가 여성을 통제하는 매우 오래된 방식이지만, 현재의 '여성 혐오 현상은 거의 모든 한국 여 성들을 '나쁜 여자로 만든다, 2006년에 등장한 '된장녀' 담론과 현재의 김치녀, 담론을 보라 "모든 여성은 아니지만 일부 여성들이 분수에 맞지 않는 사치를 부린다는 궁핍한 이유로 굳이 스타벅스 커피잔을 들고 다니는 여성을 색출해왔다면, 이제는 그럴 필요조차 사라졌다 김치녀라는 말이 내포하듯 이제 한국의 모든 여성이 '나쁜 여자의 몇 가지 유형 안에 꼼짝없이 갇혀버렸다. 이 유형들은 마치 거푸집과 같아서 여성 전체를 엇비슷한 방식으로 찍어낼 수 있게 되었다. 지금과 같은 구도 속에서는 어떤 여성도 이 거푸집을피해갈수가 없다. (17쪽)

 

실제 여성혐오는 광범위하다. 진보적인 팟캐스트도 여혐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젊은 진보 작가들의 여성폭력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기도 했다. 게다가 여성혐오를 양산하는 이벤트들은 조작된 경우도 심심치 않다. 사실확인에 앞서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단죄를 하고 끝나 버린다.

 

그리고 이 여성혐오는 지난한 싸움이다. 지속적인 동일한 혐오에 동일한 대응. 정희진이 이야기하는 '낡은 새로움'은 이 싸움에 걸맞는 언어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남성실업의 일상화가 도사리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의 위협이 여성에 대한 혐오로 나타난다.

 

우리는 언제나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같은 억압'에 반복해서 대응해야 하고,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야 한다. 나는 이 고통을 거부한다. 그러므로 여성 혐오 현상에 대해서 대응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평생을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모욕에 대응하면서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원하는 것이다. 미국처럼 사법상 혐오 범죄 hate crime 규제를 법제화하 거나 국가가 해결할 일이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언제나 피해자가 나서야 하고, 가해자는 표현의 자유를 외친다. 
그러나 공중파 방송에서의 노골적인 발화는 다르다 그래서 나는 이런글을'또' 쓴다. 물론 작금의 여성혐오 현상은 남성 실업의 일상화, 즉 자본주의의 질적인 변화와 매체 환경의 급격한 변화와 맞물린 시대적 배경이 있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지금 벌어지는 일련의 현상을 낡은 새로움이라고 본다. 여성 혐오, 약자 혐오, 피해자 혐오에 대해 한국사회는 유독 관대하다. 자신과 체제에 대한 분노를 약자에게 투사하는 방식,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문화, 모든 계급 갈등을 봉합하는 막강한 남성 연대 종속적 남성 입장에서는 패권적 남성에 대한'짝사랑. (98쪽)

 

그리고 그 차별, 혐오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젠더를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 성별은 인류가만든위계와 불평등 중 가장 오래된 제도다. 이렇게 장구한 역사 때문에 제도라는 생각은 사라지고 자연스러운 문화, 무의식, 인간 몸의 일부로 체화 되었다. 그래서 수많은 차별적 제도, 인간의 모든 지배와 피지배 관계의 모델이 된 것이다. 계급, 연령, 인종적 소수자, 환자, 장애인이나 성소수자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시와 억압, 착취, 혐오는 남성이 여성에게 한 행위를 기준으로 삼고 '배운' 것이다. (115쪽)

 

여성 뿐만이 아니다. 성소수자의 혐오 역시 이에 크게 다르지 않다.

여성 혐오와 성소수자 혐오에는 공통의 기반이 있다. 성별 고정관념과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가 그것이다. 성소수자들의 존재는 여성 차별적인 성별 고정관념과 가족 제도를 위반한다. 여성들의 삶의 변화가 여성의 평등과 해방을 위한 열망으로 분출했을 때마다 성소수자들도 운명의 변화를 꿈꿨던 것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다. 여성 혐오는 단지 비뚤어진 인식과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형식적인 평등 이미지로 인해 기만적으로 은폐되는 체계적 차별과 폭력의 문제다. 한국사회에서 성소수자들은 시민성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이기 때문에 혐오의 파괴적 영향을 좀 더 극적으로 보여주는 위치에 있다. 다른 한편에서, 오늘날 여성 혐오 현상은 성소 수자 운동의 목표와 전략에 중요한 교훈을 던진다. 제도적 인정과 형식적 평등만으로는 천대와 혐오를 없앨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230쪽)

 

결국 여성에 대한 혐오는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연결되어 있다. 민주주의가 위협받을 때 사회문제의 원인을 소수자에 돌려버리는 것이다. 살기가 점점 힘들어질 때 소수자에 대한 마녀사냥으로 그 출구를 찾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해결책은 법적 규제와 더불어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민주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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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6월 11일)은 성소수자의 날이란다. 성소수자들은 퀴어축제를 열고 보수단체는 그 반대집회를 열었다고 하는데, 오늘 읽었던 책에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오늘은 성소수자의 날" 서울광장 퀴어축제..동성애 반대 맞불집회도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60611142859087

 

오늘날 동성애와 성소수자 의제는 보수 개신교 세력과 우익 단체들이 '종북' 다음으로 주요하게 다루는 문제가 됐다. 국가기구는 이런 목소리를 핑계로 차별을 정당화하는 일을 되풀이하고 있다. 성소수자 인권을 긍정하는 제도적 조치를 취하려 할 때마다 대다수 국민을 자칭하는 이들의 거센 공격을 받게 되면서 공적 공간에서 성소수자 인권 의제를 다루는 것은 극도로 기피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지배체제에 대한 도전과 저항을 가로막는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로 작용한 반공주의(레드콤플렉스)에 더해 이른바 '레인보 콤플렉스'가 등장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상황은 일베 현상으로 대표되는 소수자 혐오의 부상과도 맞닿아 있다. 성소수자와 더불어 여성, 이주민, 종북 좌파, 전라도, 세월호 유가족 등 체계적 인 차별과 권력의 피해자들을 향한 노골적인 혐오의 표출이 희망 없는 시대에 좌절과 무기력이 낳은 공백을 채우고 있다. (230-231쪽)

 

 

혐오의 정치는 사회문제의 원인을 미움받는 특정 집단으로 돌리는 마녀사냥의 정치이기도 하다. 혐오의 시대에 성소수자들은 출신율 저하와 에이즈 확산부터 국가 안보 위기, 심지어 건강보험료 인상의 주범으로서 가정, 사회, 국가를 위협 한다고 지목된다. 이주민 혐오나 여성 혐오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만든다. 이주민은 내국인의 일자리를 빼앗고 지역을 더럽히고 범죄를 저지르는 집단으로 매도당한다. 여성들은 특혜와 보호를 받으면서도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김치녀로 비하된다. 경제위기와 불평등의 심화 속에서 지배자들은 복지를 축소하고 노동시장 구조를 개악함으로써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제물로 삼아 위기를벗어나려 하고 있다. 이런 현실이 양산하는 불평등과 불안은 혐오가 자라나는 토양이다. 극단적인 경쟁만이 사람들에게 주어진 선택지인 상황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생각, 민주주의와 인권 보 장이 필요하다는 합의는 형식적인 수준일지라도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역사적으로 성소수자 혐오를 부추겨 차별과 탄압을 정당화한 시대를 살펴보면 지배 질서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민주적 권리 전반을 후퇴시키고 소수자들을 속죄양 삼는 정치적 배경이 존재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서는 독일 민족의 우월함과 순수성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유대인 이주민, 성소수자들이 글자 그 대로 대량 학살당했다. 스탈린주의 소련에서는 동성애자를 파시스트로, 나중에는 자본주의적 일탈자로 비난했다. 1950년대 미국에서 벌어진 매카시즘 선풍의 또 다른 희생양은 동성애자들이었다. '종북 게이'를 떠올리게 하는 코미 핑코 퀴어 commie pinko queer 호모빨갱이라는 표현이 당시 언론에 둥장했다. 최근 러시아와 아프리카 일부 국가들에서도 서구에 대한 반감을 이용해 동성애를 비전통적이라고 비난하며 반민주적인 독재정권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성소수자 혐오를 활용하곤 한다. 2008년 이후 지속된 세게적인 경제 위기와 정치 위기 상황에서 미국, 유럽 등에서 나치의 부상과 함께 성소수자 혐오와 이주민 혐오가 부각되기도 했다. 시민 혁명으로 오랜 독재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린 이집트에서는 군부의 통치가 부활하면서 동성애자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고 있다. (235-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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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학계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라는 이름의 웹사이트가 생겼다. 대학에 몸담은 수백명의 여자들이 그동안 남자들에게 가르침당하고, 무시당하고, 말을 가로채인 경험을 그 웹사이트에서 공유했다. 또 내 글이 발표된 직후에 '맨스플레인(mansplain)'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는데, 가끔은 내가 그 말을 만든 사람으로 언급되기도 했다. (남자man와 설명하다explain를 합한 신조어 '맨스플레인'은 남자들이 무턱대고 여자들에게 아는 척 설명하려 드는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로, .... ) 사실 나는 그 단어의 탄생과는 관계가 없다. 현실에서 그 개념을 구현한 남자들과 더불어 내 글이 그 단어의 탄생에 영감을 좀 준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정작 나는 그 단어가 약간 미심쩍게 느껴지기 때문에 잘 쓰진 않는다. 그 단어는 모든 남자에게 그런 타고난 결함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 같은 느낌인데, 실제로는 남자들 중에서도 일부가 가르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려 들고 들어야 할 말을 듣지 않으려는 것뿐이다. 혹시라도 본문에서 내 뜻이 명료하게 전달되지 않았을까봐 부연하자면, 나도 애가 흥미가 있지만 미처 몰랐던 사실에 대해서 그 내용을 잘 아는 상대가 설명해주는 것은 아주 좋아한다. 대화가 어긋나는 것은 내가 알고 상대가 모르는 것을 상대가 내게 가르치려 들 때다.) 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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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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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따금 불쑥 아무 상관없는 일들이나 음모론을 늘 어놓는 사람 중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지만, 내 경험 상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자신감이 넘쳐서 정면 대결을 일삼는 사람은 유독 한쪽 성에 많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그리고 다른 여자들을 가르치려 든다.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든 모르든 어떤 남자들은 그렇다.

 

여자라면 누구나 내 말을 이해할 것이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어느 분야에서든 종종 괴로움을 겪는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나서서 말하기를 주저하고, 용감 하게 나서서 말하더라도 경청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길거리 성희롱과 마찬가지로 젊은 여자들에게 이 세상은 당신들의 것이 아님을 넌지시 암시함으로써 여자들을 침묵으로 몰아넣는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자기불신과 자기절제를 익히게 되는 데 비해 남자들은 근거 없는 과잉 확신을 키운다. (15쪽)

 

저자 레베카 솔닛은 황당한 경험을 한다. 한 파티에서 한 남자가 자신이 작가라는 이야기를 듣자, 책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책의 저자가 바로 상대방인 레베카 솔닛이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남녀관계에 있어서 종종 보게되는 장면인 것 같다. 물론 나 자신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애써 기억을 더듬어보면 나 자신도 무언가 자꾸 설명하려 든 것이기 때문에. 물론 이런 내용이 불편하다. 그래도 남들보다는 남녀평등에 관심을 가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남자는 자신이 고른 피해자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자유도 없지만 자신에게는 그녀를 통제하고 처벌할 권리가 있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폭력은 무엇보다도 일단 권위주의적 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폭력은 내게 상대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45쪽)

강간을 비롯한 폭력적인 행동들, 극단적으로는 살인에까지 이르며 폭력을 쓰겠다는 위협까지 포함하는 이 모든 행동은 일부 남자들이 일부 여자들을 통제하려는 시도로 펼치는 방어막에 해당한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런 폭력이 두려워 스스로를 제약하며, 그러다보면 자신도 익숙해 져서 그런 상황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게 된다. (50쪽)

 

남자들이 자꾸 여자를 가르치려 드는데에는 근본원인은 권위주의다. 그 권위주의는 가장 큰 문제는 사회적으로 굳어져서 실체를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는 데 있다.

 

무려 40세대를 망라하는 신약 마태복음의 가계도는 아브라함에서 요셉까지 이어진다(다만 요셉이 아니라 하느님이 예수의 아버지로 추정된다는 사실은 언급 되지 않는다). 이새의 나무(Tree of Jesse)-마태복음에 나온 예수의 부계를 그림으로 표현한 일종의 토템폴-는 스테인드글라스를 비롯한 중세의 여러 예술작품에서 묘사되었으며, 오늘날 우리가 작성하는 가계도의 선조라고 일컬어진다. 이처럼 - 가부장제의, 가계의, 내러티브의 - 일관성은 삭제와 배제를 통해 확보된다. (103쪽)

여성을 사라지게 만드는 방법은 또 있다. 이름의 문제를 생각해보라 어떤 문화에서는 여성이 자기 이름을 간직하 지만 대부분의 다른 문화에서는 여자가 낳은 아이에게 아버지의 성이 붙는다. 영어권 나라들에서는 최근까지도 여자가 결혼을 하면 남편의 성 앞에 ‘부인(Mrs.)을 붙여 불렀다. 여자가 결혼을 하면, 그때부터는 가령 샬럿 브론테 이기를 그만두고 아서 니콜스 부인이 되었다. 이름은 여성의 계보를 지우고 여성의 존재마저 지운다. (105-106쪽)

 

실제로 사회제도 자체가 여성을 일관성있게 배제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남성에 대한 권위는 배제된 여성위에서 만들어졌다.

여성에 대한 배제는 현실적으로 발생한다. 사회에서도 쉽게 발생하는 일들인데, 교수에 의한 조교에 대한 성폭력 문제나, 회사내 임원의 여직원에 대한 성폭력에 대한 문제가 있을때, (남성과 여성의 발언이 있을때) 여성의 발언은 믿을만하지 못하다는 인식이다.

여자가 무언가 남자를 힐책하는 말을 하면, 특히 그것이 기득권의 핵심에 놓인 남자에 대한 말이라면, 사람들은 그 발언의 진실성을 의심할 뿐 아니라 그녀에게 그렇게 말할 능력이 있는가, 심지어 권리가 있는가의심하는 반응을 보 인다. 이런 일은 전혀 드물지 않게 벌어진다. 그동안 세대 를 막론하고 모든 여자는 자신들이 망상적이고, 헷갈려하 고, 타인을 조종하려 들고, 사악하고, 음모론적이고, 선천 적으로 부정직하다는 비난을 들어왔다. 가끔은 그 모든 표 현들을 동시에 (154쪽)

 

뿐만 아니라, 행동거지 즉 옷차림 등을 거론하며 차별하는 것이 현실이다. 실제로 일어나지만, 나 조차도 인식하지 않고 있었던 문제들이다.

 

캘리포니아에서 한 살인사건이 있었다.

한명의 비참한 젊은 남성 살인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전체가 문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금요일의 아일라비스타에서 우리의 평형은 깨어졌다. 지각판 사이의 긴장이 분출해 지진이 난 것처럼, 젠더의 영역들이 약간 이동했다. 학살 때문에 이동한 것이 아니었다.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방대한 대화의 네트워크에 모여서 경험을 나누고, 의미와 정의를 재고하고, 새로운 이해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 곳곳의 여러 추모제에서 사람들이 촛불을 치켜들었다면, 이 대화에서는 사람들이 생각과 단어와 이야기를 치켜들었다. 그것들 또한 어둠을 밝혔다. 어쩌면 이 변화는 앞으로 더 자랄 것이고 더 지속될 것이고, 더 중요해 질 것이고, 그리하여 피해자들에 대한 영원한 기념비가될 것이다. (197쪽)

 

그리고 우리도 2016년 강남역 사건을 경험하면서 그동안 묻어 두었던 것들에 균열이 일어났다. 여성이란 무엇인지, 여성혐오가 무엇인지에 대해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이 사건으로 얼마나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사회적으로 여성혐오라는 것을 드러낸 중요한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사실 이 책의 결론은 많이 식상하다. 너무 뻔한 좌파적 결론을 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방되어야 할 구속은 또 있다. 경쟁과 냉혹함 과 단기적 사고와 가혹한 개인주의를 높이 사는 체제 환경파괴와 무제한 소비를 너무나 잘 뒷받침하는 체제, 한마디로 자본주의라고 불러도 무방한 체제이다. 이런 체제는 최악의 마초성을 현실로 구현하고, 지구에 존재하는 최선 의 것들을 파괴한다.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이런 체제에 좀 더잘적응하긴 하지만, 이 체제는 사실 둘 중 어느쪽에도 진정으로 유익하지 않다. 사빠띠스따(Zapatista) 혁명처럼 페미니즘은 물론이거니와 환경, 경제, 토착문화 둥둥 여러 관점을 폭넓게 아우르는 이데올로기에 따른 운동들을 떠 올려보자 그런 운동이야말로 페미니즘만은 아닌 페미니 즘의 미래일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이미 페미니즘의 현 재인지도 모른다, 1994년에 일어난 사빠띠스따 혁명은 지 금껏 진행되고 있으며, 그밖에 다른 사업들도 무수히 많 다 그들은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자 어떻게 살 수 있는지를 새롭게 상상하고 있다. (225-2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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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손에 든 것은 김대식의 책들이다. <내 머리속에선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을까>와 <이상한 나라의 뇌과학>은 뇌에 대한 것들을 담은 책이다.

세상은 뇌가 보는 것이 아니다. 뇌가 아는 것을 본 것이 세상이다.(191쪽, 내 머리속에선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두 책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 보고, 느끼는 것이 우리 자신이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뇌라는 프레임이 인식하는데로 보고, 느끼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파검 드레스 논란이다. 우리 뇌는 뇌가 알고 있는 상황에서 적절하게 정보를 해석한다.

<내 머리속에선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을까>와 <이상한 나라의 뇌과학>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림을 보는 재미가 더 있는 <이상한 나라의 뇌과학이 조금 더 추천할만 하다.

 

<김대식의 빅퀘스천>은 인간, 존재, 역사 등 좀 더 큰 의미의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물론 후반부에는 인공지능 시대를 이야기한다. 즉, 인공지능시대를 맞아 인간에 대해 되돌아보는 책이다. 이 책은 호불호가 굉장히 갈리는 책이다. 다루는 분야가 다양하다 보니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충분히 문제를 삼을 수도 있고, 때로는 기존의 이론들을 뒤집어 버리기 때문인데, 개인적으로는 김대식 교수의 이런 주장은 일리가 있다.

 

<김대식의 인간vs기계>는 인공지능의 입문서로 그만이다. 인공지능을 설명하는 다른 책들과는 달리 지능이 무엇인지부터 설명해 들어간다. 설명은 무엇인지? 그것이 언어로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약 절반에 가깝게 설명하는데, 조금은 지루해보일수도 있지만 이 부분이 그간 인공지능이 왜 어려웠는지, 지금의 인공지능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가 명확하게 보인다.

 

        

 

 인공지능 시대에 김대식교수의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 리뷰들

내 머리속에선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http://blog.aladin.co.kr/rainaroma/8492230

이상한 나라의 뇌과학 http://blog.aladin.co.kr/rainaroma/8493756

김대식의 빅퀘스천 http://blog.aladin.co.kr/rainaroma/8524551

김대식의 인간vs기계 http://blog.aladin.co.kr/rainaroma/8525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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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6-06-22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공지능에 관련되어 한국에도 좋은 작가, 좋은 책이 있었군요. 리뷰들의 주소까지 챙겨주시고 감사합니다^^

페미니즘도 그렇고 인공지능도 그렇고 관심분야를 파시는 스타일이신가 보네요. 부럽습니다. 저는 몇 권 읽으면 관심이 줄어들어서 우향님처럼 많이 못 읽겠어요ㅠ

친구신청하고 갑니다~^^

雨香 2016-06-23 09: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

궁금한 게 생기면 그쪽분야 책들을 좀 챙겨보는 편입니다.
종종 방문하여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