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물론 이따금 불쑥 아무 상관없는 일들이나 음모론을 늘 어놓는 사람 중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지만, 내 경험 상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자신감이 넘쳐서 정면 대결을 일삼는 사람은 유독 한쪽 성에 많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그리고 다른 여자들을 가르치려 든다.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든 모르든 어떤 남자들은 그렇다.

 

여자라면 누구나 내 말을 이해할 것이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어느 분야에서든 종종 괴로움을 겪는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나서서 말하기를 주저하고, 용감 하게 나서서 말하더라도 경청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길거리 성희롱과 마찬가지로 젊은 여자들에게 이 세상은 당신들의 것이 아님을 넌지시 암시함으로써 여자들을 침묵으로 몰아넣는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자기불신과 자기절제를 익히게 되는 데 비해 남자들은 근거 없는 과잉 확신을 키운다. (15쪽)

 

저자 레베카 솔닛은 황당한 경험을 한다. 한 파티에서 한 남자가 자신이 작가라는 이야기를 듣자, 책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책의 저자가 바로 상대방인 레베카 솔닛이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남녀관계에 있어서 종종 보게되는 장면인 것 같다. 물론 나 자신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애써 기억을 더듬어보면 나 자신도 무언가 자꾸 설명하려 든 것이기 때문에. 물론 이런 내용이 불편하다. 그래도 남들보다는 남녀평등에 관심을 가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남자는 자신이 고른 피해자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자유도 없지만 자신에게는 그녀를 통제하고 처벌할 권리가 있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폭력은 무엇보다도 일단 권위주의적 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폭력은 내게 상대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45쪽)

강간을 비롯한 폭력적인 행동들, 극단적으로는 살인에까지 이르며 폭력을 쓰겠다는 위협까지 포함하는 이 모든 행동은 일부 남자들이 일부 여자들을 통제하려는 시도로 펼치는 방어막에 해당한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런 폭력이 두려워 스스로를 제약하며, 그러다보면 자신도 익숙해 져서 그런 상황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게 된다. (50쪽)

 

남자들이 자꾸 여자를 가르치려 드는데에는 근본원인은 권위주의다. 그 권위주의는 가장 큰 문제는 사회적으로 굳어져서 실체를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는 데 있다.

 

무려 40세대를 망라하는 신약 마태복음의 가계도는 아브라함에서 요셉까지 이어진다(다만 요셉이 아니라 하느님이 예수의 아버지로 추정된다는 사실은 언급 되지 않는다). 이새의 나무(Tree of Jesse)-마태복음에 나온 예수의 부계를 그림으로 표현한 일종의 토템폴-는 스테인드글라스를 비롯한 중세의 여러 예술작품에서 묘사되었으며, 오늘날 우리가 작성하는 가계도의 선조라고 일컬어진다. 이처럼 - 가부장제의, 가계의, 내러티브의 - 일관성은 삭제와 배제를 통해 확보된다. (103쪽)

여성을 사라지게 만드는 방법은 또 있다. 이름의 문제를 생각해보라 어떤 문화에서는 여성이 자기 이름을 간직하 지만 대부분의 다른 문화에서는 여자가 낳은 아이에게 아버지의 성이 붙는다. 영어권 나라들에서는 최근까지도 여자가 결혼을 하면 남편의 성 앞에 ‘부인(Mrs.)을 붙여 불렀다. 여자가 결혼을 하면, 그때부터는 가령 샬럿 브론테 이기를 그만두고 아서 니콜스 부인이 되었다. 이름은 여성의 계보를 지우고 여성의 존재마저 지운다. (105-106쪽)

 

실제로 사회제도 자체가 여성을 일관성있게 배제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남성에 대한 권위는 배제된 여성위에서 만들어졌다.

여성에 대한 배제는 현실적으로 발생한다. 사회에서도 쉽게 발생하는 일들인데, 교수에 의한 조교에 대한 성폭력 문제나, 회사내 임원의 여직원에 대한 성폭력에 대한 문제가 있을때, (남성과 여성의 발언이 있을때) 여성의 발언은 믿을만하지 못하다는 인식이다.

여자가 무언가 남자를 힐책하는 말을 하면, 특히 그것이 기득권의 핵심에 놓인 남자에 대한 말이라면, 사람들은 그 발언의 진실성을 의심할 뿐 아니라 그녀에게 그렇게 말할 능력이 있는가, 심지어 권리가 있는가의심하는 반응을 보 인다. 이런 일은 전혀 드물지 않게 벌어진다. 그동안 세대 를 막론하고 모든 여자는 자신들이 망상적이고, 헷갈려하 고, 타인을 조종하려 들고, 사악하고, 음모론적이고, 선천 적으로 부정직하다는 비난을 들어왔다. 가끔은 그 모든 표 현들을 동시에 (154쪽)

 

뿐만 아니라, 행동거지 즉 옷차림 등을 거론하며 차별하는 것이 현실이다. 실제로 일어나지만, 나 조차도 인식하지 않고 있었던 문제들이다.

 

캘리포니아에서 한 살인사건이 있었다.

한명의 비참한 젊은 남성 살인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전체가 문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금요일의 아일라비스타에서 우리의 평형은 깨어졌다. 지각판 사이의 긴장이 분출해 지진이 난 것처럼, 젠더의 영역들이 약간 이동했다. 학살 때문에 이동한 것이 아니었다.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방대한 대화의 네트워크에 모여서 경험을 나누고, 의미와 정의를 재고하고, 새로운 이해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 곳곳의 여러 추모제에서 사람들이 촛불을 치켜들었다면, 이 대화에서는 사람들이 생각과 단어와 이야기를 치켜들었다. 그것들 또한 어둠을 밝혔다. 어쩌면 이 변화는 앞으로 더 자랄 것이고 더 지속될 것이고, 더 중요해 질 것이고, 그리하여 피해자들에 대한 영원한 기념비가될 것이다. (197쪽)

 

그리고 우리도 2016년 강남역 사건을 경험하면서 그동안 묻어 두었던 것들에 균열이 일어났다. 여성이란 무엇인지, 여성혐오가 무엇인지에 대해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이 사건으로 얼마나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사회적으로 여성혐오라는 것을 드러낸 중요한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사실 이 책의 결론은 많이 식상하다. 너무 뻔한 좌파적 결론을 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방되어야 할 구속은 또 있다. 경쟁과 냉혹함 과 단기적 사고와 가혹한 개인주의를 높이 사는 체제 환경파괴와 무제한 소비를 너무나 잘 뒷받침하는 체제, 한마디로 자본주의라고 불러도 무방한 체제이다. 이런 체제는 최악의 마초성을 현실로 구현하고, 지구에 존재하는 최선 의 것들을 파괴한다.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이런 체제에 좀 더잘적응하긴 하지만, 이 체제는 사실 둘 중 어느쪽에도 진정으로 유익하지 않다. 사빠띠스따(Zapatista) 혁명처럼 페미니즘은 물론이거니와 환경, 경제, 토착문화 둥둥 여러 관점을 폭넓게 아우르는 이데올로기에 따른 운동들을 떠 올려보자 그런 운동이야말로 페미니즘만은 아닌 페미니 즘의 미래일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이미 페미니즘의 현 재인지도 모른다, 1994년에 일어난 사빠띠스따 혁명은 지 금껏 진행되고 있으며, 그밖에 다른 사업들도 무수히 많 다 그들은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자 어떻게 살 수 있는지를 새롭게 상상하고 있다. (225-22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