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의 에밀은 아이들을 위한 인류의 지침서라고 불리울 만큼 사려깊고 따스한 책이다. 하지마 장자크 루소는 이 에밀이라는 책의 저자라고 불리우기 무색하게도 자신의 아이 다섯 명을 고아원에다 맡긴 인물이다. 근자에 읽은 광기와 천재라는 책이 말하길 루소의 이러한 부조리는 어른으로서 세상을 감당할 정신의 미성숙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희대의 천재 사상가에게 있어 정신의 미성숙이라는 말이 어울리지는 않겠지만 그의 정신적 범위가 형이상학적인 분야에 특화돼 있다는 면에서 볼 때 그의 세속적 정신의 굳셈은 타인에 비해 상당히 무딜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루소는 어릴 때 부터 조숙하여 어른과 비슷한 사고수준을 보였다고 한다. 이러한 조숙함이 후기에 있어서 평균으로의 회귀 현상과 맞물려 점점 유아적 행태를 띄게 되었고 이것은 결국 균형점이 아닌 유아성의 양태에 더 가까운 정신의 편중현상은 낳은 원인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루소의 이중성과 부조리함을 언급하는 이유는 사상적 천재에게 드러날 수 밖에 없는 인간으로서의 왜소함과 나약함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광기와 천재라는 책에서는 루소 뿐만이 아니라 하이데거와 미셸푸코, 히틀러 등이 나온다. 파놉티콘이란 근대의 지적 발명품을 현대에 널리 전파시킨 미셸푸코에 대해서는 동성애라는 성적 정체성의 혼란으로 인해 조금씩 왜소해 질 수 밖에 없었던 그의 삶을 알 수 있었다. 히틀러 또한 어릴적 아버지로 부터의 학대와 그의 그림 실력을 알아주지 못하는 사회에 대한 불만 그리고 폐인처럼 지냈던 청년기를 통해 그의 삶을 관통하는 비이성적 분노와 억압적 자기표출 기제에 대하여 알아 볼 수 있었다. 특히 인상 깊은 것은 비트겐 슈타인에 관한 것인데 그는 히틀러와 거의 동시대 살았으면서 또한 히틀러가 그렇게 싫어했던 유태인이였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워낙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서인지 열등감이라는 분노기제가 상대적으로 덜 했고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뼈대만 남은 진실에 관한 열렬한 욕망 뿐이였다. 비트겐슈타인이 열등감을 가질 분야는 오히려 또 다른 천재들이라 부를 수 있는 그의 남매들 뿐이였다. 비트겐슈타인의 강한 자신감과 신적인 카리스마는 지극히 옳은 것에 천착하는 그의 강력한 지적의지와 세상 두려울 것 없는 자기 확신이 있었기에 형성 가능한 것이였다. 그 외에도 이 책에서는 많은 천재들을 언급한다. 물론 세상이 보기엔 너무나 비합리적이고 고결하지 못한 군상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행위는 진정 천재만이 보일 수 있는 사회적 일탈과 더불어 나타난 사회와의 부정합성 이였다.

  정신적 문제를 가진 대부분의 천재에겐 대부분 유년의 트라우마나 애정결핍과 같은 심리적 기본 욕구가 불충족된 경우가 많았다. 천재의 특성은 아마도 어느한부분에 있어서는 현저히 떨어지는 그들의 불완정성일 테다. 괴테의 '천재를 꿈꾸며 고뇌하는 젊음에게' 라는 소설에서 등장하는 젊은 베르테르의 아픔이 쉽게 전이된 이유는 그 시대의 사람들 또한 스스로를 천재라 여기며 그의 내면의 깊이를 알아주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불만족과 결합된 것 때문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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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즈넉히 살다가 고즈넉히 가면 그만인데 왜그리들 힘들게 사시는지..' 참 있어 보이는 말이다. 내가 한 말은 아니고.. 누가 한 말인데 속세를 초월한 듯한 그의 말투에 비위를 상하게 하는 거만함이 느껴진다. 편하기 위해 힘들게 사는 현대인의 역설을 그 사람은 아실지.. 아신다 한들 먹고 살만한 혼자만의 가업이 따로 있기에 그런 말을 내 뱉으시는지.. 아니면 뭔지. 

 아무도 개미의 노동을 부러워 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부러워 하는 것은 그 노동 뒤에 보장되는 따스한 겨울과 풍성한 식량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밥 좀 빌어 먹자고 열렬히 치열한 군상들에게 독야청정 한듯한 식자들의 고담준론은 베짱이의 바이올린 무반주 소나타보다 더 저속할 뿐이다.

 그리고선 모두가 행복을 향해 나아간다.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판단의 일련의 모임들이 하나의 탑을 이루어 그들의 인생을 반추해볼 만큼 충분히 그 높이가 커졌을 때 개인은 생각한다. 과연 그때의 나의 선택은 정말 최선이였나.. 반성과 후회가 이웃하여 나란히 마음을 할퀴고 지나가면 삶에 대한 열렬한 애정 보다는 무거워져 가는 어깨의 무게감에 한숨을 내쉬기 마련이다.

 그리고선 돌아갈 수 없는 옛 추억에 몸을 의탁해 하나 씩 현실의 무게를 줄여 나간다. 버리고 또 버리다 보면 시인 이상의 '거울'이라는 시에 나오는 원전 형태의 자아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애절한 마음으로 누구도 보아주지 않는 혼자만의 승무를 춘다. 날아라.. 날아라.. 훨훨~ 얇은사 하이얀 고깔이 고이 접어 나빌리는 그런 애틋하고 아름다운 승무가 아니라 아이를 잃고 장이 뒤틀어 졌던 그 단장이란 고사의 주인공인 원숭이의 표정과 마음으로 승무를 춘다.

 하나씩 벗기고 또 버리고 하다 보면 윤동주님의 싯귀에 나온 부끄럽고도 그리운 나의 자화상이 보인다. 그리곤 죽음보다 강렬한 나르시즘에 빠져 야상곡에 귀를 기울이며 해가 좀 더 늦게 뜨길 기원하며 이불을 몰아쥔다.

 가끔 그런 잡생각에 머리가 아파 잠이 깰 때는 이런 통속적인 글귀에 마음의 비계 덩어리를 실어 이글이글 구워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덜 굽혀도 내 살이고 바싹 타도 내 살이기에 햇살 맑은 날 다시 보면 비록 역겨워 지더라도 그런 화식(火食)을 빙자한 인육의 카니발도 썩 괜찮은 행위다. 그리곤 맘의 홧톳불에다 대고 이렇게 얘기하면 오늘의 숙면은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고기는 익혀 먹되 야채와 같이 먹는 습관을 들이며 될 수 있는한 많이 씹어 위에 부담이 되지 않게 하고 탄 부위는 먹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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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tsam 2007-09-02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계붙은 삼겹살.
잘 얻어먹고 간다ㅡ
 

 디워에 대한 수많은 논쟁이 사회를 뒤덮고 있다. 덕분에 탈레반에 잡혀간 아해들의 소식이 덜 들려와 내 귀를 편안히 해주고 있지만 디워에 관한 논쟁에 다시금 귀가 동하여 마음이 그리 편치많은 않다. 디워를 지지하는 몇몇 사람들이 쓴 추천글들을 보면 참 못썼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나마 변씨 아저씨가 쓴 디워 지지 글은 좋았다. 하지만 난 기본적으로 진중권씨의 입장을 지지하는 편이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이 탐탁지 않다. 진중권에 대한 많은 비판 중 눈에 띄는 것은 그가 언급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에 관한 논쟁이다. 진중권은 학술적 용어라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끄집어 와 서사구조의 부재를 비판하였는데 참으로 옳다고 볼 수 있다. 디워를 보면 그러려니 넘어가기엔 지나친 시나리오 상의 헛점이 많이 보인다. 등장 인물 하나하나가 긴밀한 이야기 구조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소환되고 또 소멸한다.예를 들어 조선시대에 있었던 부라퀴 군단의 침공은 세계 지배가 가능할 정도의 힘을 보여줬기에 굳이 이무기의 힘이 없어도 그들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고 본다.  혹자들은 여기서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선악의 대결에서도 그런 악의 무리가 반지 하나 때문에 대군단을 일으키는 것은 말이 안된다면 디워를 옹호하고 있는데 디워에서 선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은 누군지 불분명하다. 그리고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선한 종족들은 악의 세력과 비등하게 겨룰 수 있는 힘이 있었지만 디워의 선한쪽은 아무런 힘이 없이 그저 난도질 당할 뿐이다.
 그리고 혹자는 비평가들의 자질을 논하며 인상파의 효시인 마네의 올랭피아 사건을 들먹이며 심형래를 옹호하고 있다. 두 사건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올랭피아의 미학적 가치가 폄훼된 이유는 신이 아닌 인간을 그렸기 때문이다. 즉 아름다운 여신이 아닌 일개 창녀를 그림의 주제로 그렸기 때문에 미적 아름다움을 우선시 하던 그당시 보수 논객들에게 비판을 당했던 것이다. 즉 신으로 대표되던 아름다움이 인간이라는 평범한 대상에게 아름다움을 뺏긴것에 대한 당혹과 혼란이 주된 정서였다. 마네의 올랭피아는 당시의 미술과 예술 전반에 걸쳐 있던 예술이 지향해야 하는 미(美)에 대한 반기를 든 것이고 후의 포스트 모더니즘의 씨앗이라고도 볼 수 있다. 비평가들의 자질을 논하며 올랭피아 사건을 예로 들기엔 심형래의 영화에선 그런 문화의 진보적 논쟁을 일으킬 요소가 전무하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비유를 하려면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 불가능 한 형편없는 곡이라 비난했던 안톤 루빈스타인과 같은 피아니스트의 예를 드는 것이 더 적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루빈스타인은 차이코프스키에 대한 약간의 질시와 보드카 냄새 나는 그의 음악에 대한 거부감으로 혹평을 날렸기 때문에 현재 사람들이 비난하는 평론가들과 비슷한 양상을 띄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디워는 서사를 드러내기 위해 씨지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씨지를 사용하기 위해 서사를 끌어다 붙이 조악한 형태를 띄고 있다. 사람들이 여기서 많이 이야기 하는 트랜스 포머나 300과 같이 비교적 서사구조가 빈약하다고 볼 수 있는 영화와의 비교 또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트랜스 포머와 같은 경우는 조금은 억지스럽지만 최대한 인과성을 부여하기 위해 끊임없는 서사의 이음새에 대한 담금질이 일어난다. 또한 외계 생물체의 지구 조난이라는 설정부터 다소 이해심을 유발하는 서사 구조기에 그들이 보이는 눈부신 그래픽의 향연 만으로도 억지스럽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300또한 많은 디테일에 신경을 쓴 영화로서 디워의 다소 쌩뚱맞은 진행과는 비교하기가 어렵다.

 예전에 딴지일보에서 읽은 기사에서 몬스터 주식회사에 대하여 극찬한 영화평이 있었다. 그 기자가 놀란것은 그 털하나하나 움직이는 것을 표현한 세밀한 그래픽이 아니라 저런 엉뚱한 소재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헐리우드의 소프트 파워에 관한 것이였다. 심형래 감독 본인도 인터뷰에서 영화는 상품이고 이것이 통하기 위해서 줄거리를 최대한 단순하게 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영화의 미적 가치를 숭상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반발을 살 수 있다. 문화가 고급문화와 저급문화로 나뉘지는 않지만 일반인들의 인식에는 클래식과 대중음악 내지는 순수문학과 무협지 등을 대칭 구조로 보는 시각이 있기에 사람들은 문화의 계층성을 부지부식간에 인정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디워라는 영화는 영화라는 예술이 추구하였던 심미안적 가치를 기술의 진보가 선사하는 시각적 이미지로서 대체하려는 경향을 보였고 이것이 어느정도 반감을 산 것이라 본다.

  하지만 이 사태의 본질은 애국마케팅과 결부된 일종의 네티즌의 파시즘적인 경향이다. 파시즘이라는 것이 굳이 우상에 대하여 나타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약자를 옹호하는 면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심형래 감독은 지금 네티즌에게 약자라는 위치에 놓인 비주류로 인식되고 있으며 이것은 주류세력이 다 헤쳐먹고 있는 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민중의 반감과 약자에 대한 동정심이 교묘하게 결합되어 크나큰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 무솔리니나 히틀러 또한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자들의 분노를 촉발시켜 파시즘을 일으켰듯이 지금 네티즌이 보이는 진중권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은 우상의 붕괴에 분노하는 파시즘과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물론 파시즘에 대한 역사적인 교훈을 다들 지니고 있지만 20대 80사회로 진행되고 있는 현재의 사회 구조는 조금더 세련된 형태의 파시즘의 등장의 변수또한 지니고 있다고 본다. 디워에 대한 다양한 비평이 네티즌의 과도한 심형래 옹호로 인해 제기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의 전가의 보도라는 다수결의 원칙이란 미명하에 다양한 문화의 싹을 죽이는 것이다. 물론 네티즌들의 분노의 원천은 충무로라는 기득권이 보이는 심형래 감독에 대한 배타적 행위와 일반 관객의 시각을 무시하는 듯한 비평가들에 대한 비난에 근저가 있다. 하지만 비평가들의 평가를 많이 수용하는 사람들도 많고 충무로의 문화권력에 대한 대항마로 심형래에 대한 무조건적인 옹호는 장기적으로 우리 문화의 토양을 많이 척박하게 할 것이다. 서사가 조약하여도 그래픽과 정성만 있다면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비정상적 영화관을 투자자나 신인 감독에게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은 냉정해 지자. 진중권또한 네티즌이 보이는 마녀사냥의 행태에서 파시즘을 경향을 읽고 저런 공격적인 말투를 보이는 것일 게다. 언중의 힘은 그렇게 강하기에 그렇게 위험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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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7-08-14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약자에 대한 동정심'도 결합되어 있군요. 가끔 이렇게 놀러온답니다. 그러하여도 괜찮겠죠.ㅎㅎ 잘 읽었어요. 유사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구요. 좀더 진지한 분석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습니다. 비판을 넘어서 보듬고 같은 곳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바밤바 2007-08-15 04:27   좋아요 0 | URL
자주 놀러오시옵소서 ㅋ. 비판을 넘어 보듬고 같은 곳을 보기엔 세상을 제로섬 관점으로 보는 사람이 많아서 힘들죠. 이상으로 접근하기 위해선 현실적인 수단이 동반되어야 하니 아무래도 순순한 이상적 접근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 홈피니까 제 맘대로 쓰는거 이해해주시구요.. ㅎ 그래도 나름 비슷한 시각을 견지하는 것 같아서 좋네요^^ㅋㅋ
 

간만에 마이 리뷰를 썼다. 거의 폭주했다. 11개나 쓰다니.. 도라이다..

이건 귓발로 쓴게 아니고 글발로 쓴거 같다는 느낌이 든다.

상당히 뭔가 아는척 하는듯한 말투는 부족한 나의 실력을 숨기기 위함이다.

근데도 적었던 것은 왠지 오늘의 글은 너무 예쁘게 잘 나올거 같아서 였다.

물론 다 몇번씩 청취하였던 음반이기도 하기에.. 윤동주님의 쉽게 쓰여진 편지마냥

그렇게 쉽게 적었다. 거의 2시간 정도 걸린 이 리뷰 작업은 내 블로그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내가 글쓴걸 어떻게 알았는지 몰겠다. 새벽에 22명이라니..

누가 알면 좀 갈쳐 줬으면 좋겠다. 댓글을 남겨 주세요~ 제가 사랑해 드릴꼐요~ 호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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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7-08-03 0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요 ^^

바밤바 2007-08-13 00:56   좋아요 0 | URL
화이팅!! 아자아자!!

푸하 2007-08-10 0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팽의 리뷰보고 왔어요. 가뜩이나 클래식이 듣고 싶던 차인데 욕망을 돋우는 리뷰네요... ^^:

바밤바 2007-08-13 00:57   좋아요 0 | URL
뭐 듣고 싶으면 들으셔야죠~ 하하.. 요즘 즐길게 너무 많아서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기 쉽상인데 고전음악 들으면 그나마 세파에 덜 휩쓸리는듯해요~ 껄껄

레이저휙휙 2007-08-19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앙, 클래식 분야에 리뷰를 폭탄 투하해주셔서 얼렁 건너왔지요. 그저 감사합니다!

바밤바 2007-08-22 01:45   좋아요 0 | URL
그냥 저 좋자고 쓴건데요 뭐~ 글을 몰아쓰는건 안좋은 습관같아요~
꾸준히 자주가 젤 좋지 않을까요~ 그럼 존하루~^^

무버스 2008-05-11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공부 많이 하고잇습니다^
너무 고맙습니다 바밤바님.
 

 며칠전 아람 누나와 만났을 때의 이야기다. 우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탈레반 사태에서 부터 심형래 감독의 영화 이야기. 그리고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 가끔은 현실적 이야기. 지도자의 덕목.. 등. 많은 이야기. 나는 누나에게 삼국지에 나오는 서서와 유비의 일화를 이야기 하여 주었다. 유비의 적로를 처음 본 서서는 아직 일면식도 하지 않은 유비에게 대뜸 이야기 한다. "이 말을 주인을 해칠 것이오, 그러니 타인에게 양도하여 이 말이 새 주인을 해하고 난뒤 다시 유황숙께서 타시면 평생 유황숙을 보필하는 명마로 남을 것이오", 그러자 우리의 유비는 아니나 다를까 그 제안을 거절한다. "나를 살리자고 타인을 해칠순 없소!" 라는 말과 함께.. 그러자 서서는 생각한다. '이자가 내가 그의 사람됨을 떠보기 위해 질문을 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런 대답을 하였다면 무서운 사람이다. 하지만 이것이 그의 마음에서 나온 진정한 답변이라면 더욱 무서운 사람이다.' 결국 유비의 그냥 무서운 사람인지 정말 무서운 사람인지는 논의가 분분 하기에 나 또한 어느 한쪽에 힘을 실어주긴 힘들다. 하지만 서서의 이 말에서 나는 이성보다는 감성의 힘을 느낄 수 있었고 진정한 도는 아는 것이 아니라 깨우친 것이고 생각하지 않고 마음이 이끄는데로 하여도 사람을 절로 감명케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이 말을 듣고난후 아람 누나는 내게 유비와 같은 자질이 있다며 덕으로서 사람을 이끌 수 있는 사람이 되라 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한나라 말기와 같이 유학사상이 민중의 기저에 전반적으로 갖추어져 있거나 의협심과 같은 도덕적 가치가 숭상받지 못하는 시기. 법에 의한 지배와 사회적인 계약에 의한 인간관계가 난립하는 시가. 고로 나는 그러한 덕 만으로는 현실의 세계에서는 지도자의 위치에 서기 어렵다 하였다. 하지만 누나는 그 덕의 힘을 계속 믿고 싶어 하였고 나는 그 덕이라는 힘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역설하기에 바빳다.

 나또한 서서가 이야기한 더 무서운 사람이 되고파 한다.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사람을 움직인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이며 또 경이로운가. 하지만 그런 천성을 가진 사람들은 집단 행동 규율을 강요하는 정규학교 과정을 마치고 난 후 적자생존의 원리에 따라 조금씩 계산적으로 변하게 된다. 이런 세태속에 나는 그런 계산 보다는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하려 애쓴다. 더욱 큰것을 노리기 위한 작은것에 대한 무관심이 아닌 진정 마음이 그리 행하기에 더욱 큰것을 얻게 되는 그런 것 말이다. 하지만 내 주윗사람들 중 일부는 나의 이상하게끔 뛰어난 기억력과 빠른 암산 능력 내지는 약간 궤변적인 말투 때문에 엄밀한 계산에서 나온 행동의 결과로 나의 행동방식을 규정하곤 한다. 가끔 그럴때도 있지만 항상 그것을 망각하려 하고 또 그 망각하려는 생각 또한 그냥 넘겨버리려 애쓰기 때문에 그런 비판을 들을때 마다 나의 수양이 부족함을 느낀다. 나의 수양이 어느정도 완성이 되고 나서야 나는 현실에 뛰어 들고 싶지만 예상외로 수양의 진척은 느리고 시간의 흐름을 가파라 진다. 짧은 수양으로는 그러한 도를 완성할 수 없기에.. 내가 경멸하였던 세속적 무리의 일원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수양보다 더 중요한 것은 행복이라는 가치이기에.. 조금 마음을 바꾸어 더 편한길을 택할지도 모르겠다. No risk, No return이 적용되기에 아마 내가 꿈꿔왔던 삶과는 멀어질 것이다.

 지금의 나는 고민이 많을 시기. 타인들의 고민을 주로 상담해 주고 또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한 나의 시각을 물어보는 지인들이 많아 지면서 나의 의견이 지인들에게 가지는 힘은 점점 강해지고 있다. 그런 강함을 유지하기 위한 지적 분석작업과 다각적 시각에 대한 고찰은 나를 조금씩 힘들게 하고 정신적으로 고갈되게 하고 있다. 브람스의 교향곡 3번을 아르농쿠르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의 연주로 듣고 있는데 글쓴다고 귀에 하나도 안들어 온다. 음악을 들으면 혹자들이 이야기 하는 우주의 진리와 극한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까.. 솔직히 회의적이다. 그들이 느꼈던 아름다움은 다른 가치에서 느낄 수 있는 쾌락을 포기하면서 선택한 가치이기에.. 일반적으로 수용되기 어려운 주장이다. 내일은 덕규랑 디워를 보러 가기로 했다. 영화를 상품으로만 보고 영화의 미덕은 기술적 진보가 보여주는 스펙터클이라고 믿는 심형래 감독의 영화는 탐탁지 않다. 영화의 성공이 창출할 부가가치를 역설하고 한국 기술의 진보를 역설하지만 그것은 영화가 지니는 부수적 가치일 뿐 영화의 절대적 가치라 할 수 없다. 트랜스 포머라는 영화 또한 그 재기발랄한 시나리오에 맞추기 위해 첨단 기술을 동원한 것이지 첨단 기술을 보여주기 위해 시나리오를 쓴 것이 아니다. 본말이 전도된 시각을 갖고있는 그의 영화에 대한 사상은 이틀에 한번꼴로 영화를 보는 나의 입장에서 보기에 무지몽매하여 보인다. 예전처럼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횡횡하는 애국주의적 마케팅과 영화라는 장르가 예술이라는 장르의 일부라는 것을 망각한 듯한 영화의 줄거리. 탐탁지 않다. 디워가 잘 되어야지만 국가적 신인도도 높아지고 이 후에 추진될 영화 산업 또한 탄력을 받아서 잘 될것이라는 말들.. 참 이런 당위적인 말을 하는 이들을 볼때마다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당위성 앞에서 매국노가 될 수 밖에 없는 일부 비평가들은 보이지 않는 위험을 지적하는 선지자가 되지 못한다. 기껏해야 지적 우월성과 고상함을 내새워 딴지나 거는 저급한 지식인의 하나로 매도될 것이다. 난 개인적으로 심형래 감독의 영화가 망했으면 한다. 영화의 양념격인 컴퓨터 그래픽을 주재료로 써버린 이 빈곤한 식단이 많은 이의 호응을 얻게 된다면 앞으로도 계속 우리는 양념으로 가득한 밥상을 받게 될 것이다. 물론 그 양념은 맛있다. 하지만 양념만으로는 배를 채우기도 알싸하게 씹어먹는 느낌도 그리고 식사의 즐거움도 가질 수 없다. 특히 미각이 발달된 사람일 수록 이 밥상을 먹고 더욱 허기를 느낄지도 모르겠다. 조금은 냉정해지자. 조금 더 나은 밥상을 위해서 지금의 이 비싼 밥상을 아깝다 하지말고 걷어 차버리자. 이 밥상이 많은 호응을 얻을 수록 우리는 계속 이러한 밥상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미각의 다양성을 인정해주기는 커녕 양념맛에 찌들어 기존의 미각마저 상실해 버릴 우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 밥상을 엎어버리자. 그리고 단식투쟁을 하자. 비록 그 배고픔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할 테지만 그 후의 빛나는 밥상을 위해선 지금의 배고픔은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진통이다. 참 매몰비용이 크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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