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글은 비슷한 구석이 있다. 글을 쓸 때 손가락 가는 데로 쓰는 경우가 있다. 나 혼자 후련해지고 부분 부분 이음새는 매끄러워 그럭저럭 읽을만 하다. 하지만 전체적으론 구성이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통일성이 없으며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먹기 힘들다. 피아노 연주를 들을 때도 그런 생각을 한다. 감정이 흐르는 데로 연주를 하다 보면 열정적이고 순간순간 아름답지만 전체적인 곡의 구성은 깨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연주자들은 대성하기 힘들다. 재즈와 같은 즉흥 연주가 아니고선 이런 연주기법을 용납할 클래식음반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 전체적인 구성을 생각하고 이음매를 손보며 명쾌한 문장으로 글을 쓸 때가 있다. 글을 다 쓰고 나면 전체적으로 만족스럽다. 하지만 너무 전체를 생각해서인지 부분부분 감정을 절제한 듯한 부분은 혼자 속앓이 하기 충분하다. 피아니스트도 마찬가지일게다. 곡 전체를 고려하여 연주를 하다 보면 자신을 많이 제어해야 한다. 좀 빠르게 연주하고픈 부분도 전체를 위해선 제 속도에 맞춰야 하고 감정을 이입하고 싶은 부분 또한 곡의 명쾌한 해석을 위해 이성으로 연주해야 한다.

 글쟁이들은 글을 많이 쓰는것도 중요하지만 많이 읽는 것도 중요하다고 한다. 다독을 하게 된다면, 다른 책에서 영감을 얻어 더 다양한 소재를 다룰 수도 있고 문장을 보는 힘도 기를 수 있다. 하지만 피아니스트들은 다른 연주를 자주 듣지는 않는다 한다. 타인의 곡 해석에 자기가 영향을 받아 제 색깔을 없앨까 저어하는 마음에서 그런다 한다. 그래도 이런 면에서 또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피아노를 두드리기만 한다고 좋은 피아니스트가 될 수 없듯, 글을 무조건 쓰기만 한다고 좋은 글쟁이가 될 수 없는 이치. 하나를 다루기 위해선 수만가지의 다른 주제가 인생을 풍부히 변주케 하고 자신에 의해 읽혀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주제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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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익이가 간만에 네이트에서 말을 건다. 서태지  앨범 나왔다고 난리다. 간만에 애가 흥분한 것 같다.  27살에는 설렘도 사치일 때가 많기에 그러한 두근거림이 신기하기도 반갑기도 하다. 싱글 앨범이라서 정규 앨범 나오면 살거란다. 지금은 벅스에서 음악을 듣는다나. 대중 친화적인 음악 이라며 좋다고 난리다.

 서태지 덕분에 절친 한명이 어린 아이 마냥 좋아하게 되어 나도 좋다. 나 또한 서태지를 좋아 한다. 예전 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의 음악을 좋아한다. 서태지의 음악에 절대성을 부여하지는 않지만 시대의 아이콘으로서 그의 음악은 귓가에 울리는 소리보다 더 큰 잔향을 풍긴다.

 하지만 약간의 거부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만원이 넘는 싱글 앨범 가격이 우선 마음에 안든다. 싱글이라면 모름지기 조금 저렴하게 나와야 하거늘 이 가격은 웬만한 가수의 정규앨범 한장 가격이다. 서태지 찬양가를 부르는 사람들도 못마땅 하다. 서태지의 음악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다수 군중을 꾸짖는 그들의 선민의식이 마음에 안든다. 음악은 취향이고 서태지의 진보성은 묘하게 대중의 정서와 궤를 같이 한다. 그렇기에 태지의 음악을 맘에 안들어 하는 사람들을 음맹으로 매도하고 상대적 문화적 우월감을 지니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 서태지의 음악을 무조건적으로 찬양하는 그들의 태도는 그러려니 하기에는 조금 지나치다.

 개콘에서 왕비호가 서태지를 깐(?)적이 있다. 대통령도 뭐라 못한다는 서태지의 절대성에 딴지를 건 그의 행동이 신선했다. 서태지의 음악적 성취나 사회적 영향력을 감안 한다면 공중파에서 대놓고 그를 비방하기는 쉽지 않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 또한 아이돌 그룹의 상품성을 비난 타겟으로 삼던 왕비호에게 서태지라는 존재는 만만치 않은 공격 대상이다. 하지만 그러한 절대 권력에게 한마디 한 것 만으로도 왕비호의 B급 정서는 빛났다. 주류의 근엄함을 조롱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B급 정서의 아름다움이 왕비호의 언어를 빛나게 한다. 

 서태지는 완벽한 주류다. 비주류처럼 행동하기에 주류로서의 생명력은 더더욱 빛난다. 말을 아끼고 음악으로 이야기 하기에 그의 절대성은 더더욱 공고해진다. 말의 무게와 사용빈도는 반비례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문화계의 절대자인 서태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완벽주의적 성향은 드럼 소리 하나도 신경써서 듣게 만든다. 대중 보다 딱 한발 정도 나아간 서태지의 음악은 주류 문화를 자신의 스타일로 대체시킨다. 재미있는 부분은 이러한 문화적 전복이 거부감은 커녕 대중의 자발적 동조를 통해 성취 된다는 것이다. 혁명적 이미지와 천재라는 대중의 인식은 자본주의에 대한 경각심 마저 무너뜨리며 그의 음악을 음악 그 이상의 존재로 만든다.

 서태지와 동시대에 활동했으며 그나마 그의 위치에 근접이나마 할 수 있는 뮤지션으로 사람들은 신해철을 꼽는다. 비평가들은 서태지를 모차르트에 신해철을 베토벤에 종종 비유하곤 했다. 머리에 모든 곡이 완성 되어 있던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서태지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사회적인 발언을 종종하고 대마초 등으로 음악적 고난이 많았던 신해철에겐 베토벤의 이미지가 슬쩍 오버랩 된다. 무엇보다도 직관적 영감의 서태지와 노력의 신해철이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비유로 형상화 되었다. 하지만 신해철은 한 인터뷰에서 이와는 반대되는 견해를 펼친다.

 서태지의 완벽 주의성은 모차르트 보다 베토벤에 가까운 노력의 결과라고. 오히려 신해철이 직관에 의존하거나 순간적인 착상으로 음악을 더 만드는 편이라고. 서태지와 관련된 천재성에는 대중의 바람이 만든 이러한 편견이 조금은 개입돼 있다. 뭐 딱히 나쁘지는 않다. 어릴때 부터 우리는 천재를 희구하고 열망하는 교육을 받아오지 않았는가. 천재에 대한 환상이 어느 나라보다 많은 편인 우리나라에서 서태지의 상품 가치는 그래서 더욱 빛난다.

 이 추세라면 서태지는 한국 대중 음악의 확고부동한 전설이 될 것이다. 영.미 권에서 비틀즈가 누리는 지위를 한국에선 서태지가 누릴 것이다. 존레논은 비틀즈 전성 시기에 '비틀즈는 예수보다 위대하다'라는 생뚱맞은 발언을 해서 많은 파문을 일으켰다. 지금의 서태지는 예수보다 위대한지는 모르겠지만 이 나라의 그 누구보다도 위대하다. 사실 나는 지금도 노래방에 가면 서태지의 '교실 이데아'를 즐겨 부른다. 아직도 그의 노래를 부르면 몸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다. '울트라 맨이야'나 '필승' 등의 노래를 부를 때면 아드레날린이 온 몸을 덮는 느낌이다. 그렇다. 나는 아직도 서태지를 무지무지 좋아한다.

 그렇지만 이 글을 쓴 것은 너무 편향적인 서태지 찬가에 대한 나름의 반골 의식이 발동했기 때문이리라. 사실 서태지를 칭찬 하는 글이나 비판 하는 목소리는 적당히 균형을 이루며 그의 신화를 확대 재생산하는데 큰 몫을 했다. 미필적 고의든 치밀한 계산하에 벌인 고도의 서태지 찬양론이든 간에 서태지에 대한 이야기는 서태지의 입지를 강화 시킨다. 내 글도 결과적으로 그렇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내 마음속에 각인된 서태지의 위상이 새벽에 쓴 이 글로 인해 더욱 튼실해질 터이다.

 생각이 많은 밤이다. 서태지 정규 8집이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문화의 독점적 공급자의 위치에 있는 전설이 조금 더 탈 자본주의화 되길 바라며. 사람들 가슴에 더 많은 예쁜 꽃을 심어주길 바라며. 과거에 매몰되어 앞으로 한걸음 내딛기도 버거운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기를 바라며. 삶의 무게에 짓눌려 숨쉬기도 버거운 많은 영혼들의 마음이나마 가볍게 해주길 바라며. 무엇보다도 아직 세상은 살 만 하다는 희망의 바이러스를 퍼뜨려 주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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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에 겨울을 연상시키는 연주자가 있다. 마우리치오 폴리니. 냉정한 타건은 얼음보다 시리다. 기계적인 연주라는 세간의 평에 아랑곳 하지 않고 미스터치 하나 없는 냉정함으로 귓가를 때린다.

겨울에 여름을 연상시키는 연주자가 있다. 마르타 아르헤리치. 열정적인 타건은 불꽃보다 뜨겁다. 자의적인 해석이라는 세간의 평에 아랑곳 하지 않고 감정의 과잉으로 귓가를 불태워 버린다.

 동시대의 최고 피아니스트 둘을 꼽으라면 대부분 이 둘을 꼽을테다. 둘 사이에 열정과 냉정 사이란 없다. 극단의 열정과 극단의 냉정. 중용이란 가치는 설자리를 잃고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만이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둘은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쇼팽 콩쿠르 우승자 출신이다. 폴리니는 1960년 아르헤르치는 1965년.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아르투로 베네디티 미켈란젤리를 사사한 점. 하지만 둘의 평은 그들의 연주 스타일만큼 다르다.

 "나는 미켈란젤리에게 피아노의 모든 것을 배웠다." 폴리니의 말이다.

 "나는 미켈란젤리에게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 아르헤르치의 말이다. 같은 스승에게 사사한 두명의 극단적인 평가는 후에 보여주는 해석의 차이를 수긍하게끔 한다. 이 둘이 주는 다른 느낌을 한폭의 캔버스에 그려 보면 어떨까. 우선, 피아니스트를 대표하는 두 얼굴이 하나로 오버랩 된다. 쇼팽 콩쿠르 우승과 미켈란젤리의 제자라는 공통점이 얼굴의 윤곽을 이루고, 다른 연주행태가 얼굴에 살을 붙인다. 묘하게 데칼코마니를 이루는 이 그림은 완전 대칭을 선호하던 근대적 미학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촛불로 뜨겁고 불신으로 냉정한 한국의 모습 또한 살포시 떠오른다. 현재 한국을 움직이는 두가지 기제는 공포와 욕망이다. 빼앗기지 않으려는 공포, 실업자가 되길 두려워 하는 공포. 더 가지려는 욕망, 남들 위에 서고싶은 욕망.

 공포와 욕망의 두가지 테마는 한국의 얼굴을 형성한다. 민족주의라는 뼈대위에 세워진 서로 다른 모습의 한국인. 공포에 그늘지고 욕망에 화색이 도는 모습은, 딱히 어울리진 않지만 묘한 끌림을 준다. 아마 그 끌림의 기원은 동질성이 것이다. 모두가 욕망과 공포를 쉬이 인정하려 하지 않지만 자신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두 가지 기제를 다 읽을 수 있을테다. 

 '노다메 칸타빌레'를 보면 치아키와 노다메가 모차르트의 '두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를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욕망과 공포의 이중주에 일그러져 가는 한국인에게도 이런 아름다운 연주가 절실하다. 폴리니와 아르헤르치의 연주라면 더욱 좋을테다. 서로 다른 색깔의 피아노가 충돌하지 않고 화합하는 모습은 포근한 안식을 선사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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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반기 독서 목록을 정리했다. 대충 오십 여권 읽었다. 초한지나 나라 훔친 이야기 같은 소설은 권수로 따지면 꽤나 많으나 한권으로 정리했다. 상반기에는 생각보다 책을 많이 못읽었다. 100권은 읽을려고 했는데 다 내 게으름의 소치다. 물론 스터디와 더불어 한시간 정도 걸리는 신문 읽기, 그리고 오까다와의 동거 등도 지진한 독서의 원인이 되긴 하였다. 그리고 올린 책 중 몇권은 제대로 못읽었다. 시간 내서 다시 읽어야 겠다.

 어쩌면 많이 읽어야 한다는 조급증에 빠졌는지도 모른다. 영화도 계속 일주일에 두세편 꼴로 봐주고 클래식도 들어야 되고 널리 퍼져있는 인간관계도 돈독히 하고.. 게다가 학점 관리 까지 하려다 보면 이정도 독서 목록도 어지간하다. 그런데 왜 자꾸 스스로가 부족한 것 같은지는 모를 일이다. 어쩌면 진짜 조급증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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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조바랑 영국 여행을 갔던 추억이 떠오른다. 낯선 공기와 낯선 풍경들 속에 묘한 쾌감이 혈류를 관통하던 그 햇살 가득한 날은 아마 하늘이 내게 준 선물이였으리라. 유럽에서 받았던 많은 영감들과 깨달음을 페이퍼 형태로 적으려 했었지만 귀국직 후 들었던 아버지 소식에 나의 감상은 사치가 되버렸다.

그때 경흠이 아버지가 케이티 엑스와 무궁화를 타고 왔던 나와 경흠이를 데리러 오셨다. 유럽에서 도착한지 얼마 안된 몽롱함과 왠지 모를 아쉬움이 있었지만 약간의 서운함도 있었다. 왜 우리 아버지는 날 데리러 안오셨을까? 경비도 다 경흠이네 집에서 부담했는데 이런건 좀 신경 써주시면 안되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경흠이 아버지는 약간 피곤해 보이셨다. 그렇게 오피러스를 타고 갔다. 경흠이 아버지는 우리집에 가지 말고 아버님 집에서 밥을 먹자고 하셨다. 보름만에 귀국한 아들을 그리워할 엄마와 아빠 얼굴이 떠올랐지만 서로 다 헤아림이 있어서 그리한거라 보고 아버님 말씀을 따랐다. 경흠이 어머니께서는 갈비 구이를 해놓으셨다. 왠지 모를 무거운 분위기. 집에 안좋은 일이 있을것 같다는 예감이 자꾸 있었기에 불안했다. 왜냐하면 양 쪽 가족이 다 친하니까 같이 밥을 먹는 그림도 그려 본 상태로 경흠이 집에 당도했기 때문이다.

 불길한 예감을 접고 나는 보름만에 한국산 쌀을 입에 넣었다. 약간 텁텁한 느낌이 드는게 외국 음식에 익숙해진 내 입맛 때문은 아니였으리라. 경흠이 어머니께서는 밥을 빨리 먹고 어딜 가자고 하셨다. 아버지가 아프시다며. 별로 크게 아프신건 아닌데 일단 밥먹고 같이 병원에 가자고.

 순간 그릴 수 있는 모든 최악의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운명에 쉽게 순응하는 편인지라 왠지 모를 분노도 희망도 없었다. 그냥 그 최악의 시나리오가 맞을것 같다는 직감만이 강하게 들 뿐. 그리고 도착한 병원에는 친지가 다 모여있었다. 엄마도 울고 누나도 울었다. 삼촌도 울고 종국이 아저씨도 울었다. 나는 안울었다. 사태가 일목요연하게 짐작이 되기에 마른침을 삼키며 애써 의연한척 했다.

 분위기가 주는 공기의 무게에 억눌린 나는 시차로 인한 여독을 호소하며 집에서 쉬어야 겠다고 한다. 도망침이다. 비겁하다. 아버지의 고통을 직시할 수 없는 약한 심장이 상황 회피를 택한다. 그리고선 경흠이 부모님의 차를 타고 집에 왔다. 눈물이 안난다. 왜 그렇지. 통곡해야 하는데, 너무나 아픈데 울기는 커녕 피곤하다. 잠을 자고 싶은데 잠은 안온다. 눈시울은 젖어 드는데 울어 제끼진 않는다. 그냥.. 그렇게..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 놓인 주변인 마냥 몸을 추스리지 못한다. 조금 있다 엄마가 들어오셨다. 아빠가 암이란다. 말기란다. 모든걸 예상한듯한 나의 얼굴은 별다른 비애를 나타내지 않는다. 짐작되로구나..라며.

 그리고선 유럽을 함께 다녀온 가방을 푼다. 술을 좋아하시기에 면세점에서 산 발렌타인 17이 제일 눈에 먼저 띈다. 이 무슨 아이러닌가 하다. 대장암 환자를 위한 발렌타인 17. 그분이 제일 사랑하는 아들이 그분을 너무나 사랑하여 마음에 담아 드리고팠던 그 선물이 이젠 가슴을 저리게 하는 송곳같다. 아프다. 너무 아팠다. 그리고 엄마를 위해 샀던 향수 세트를 꺼낸다. 좋아하신다. 좋다. 이렇게 나마 웃을 수 있어서 좋다. 나보다 더 힘드실 텐데 내가 웃음을 줄 수 있어서 좋다. 누나한텐 스와치 시계를 줬다. 나름 고른 예쁜 시계라 그런지 누나도 잠시 얼굴에 행복이 스친다. 고맙다. 다른애들을 위해 준비했던 초콜렛은 다 냉장고에 넣어둔다. 여기서 친구를 챙기는건 내 입장에선 사치다. 마지막으로 연수를 위해 사두었던 향수와 스위스산 에델바이스 연주기계를 꺼낸다. 그리고선 태엽을 돌린다. 에델바이스가 나온다. 아름답다. 가장 슬픈 순간에도 나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스스로가 이율 배반적이다.

 연수에겐 그 다음날 이 선물을 주었다. 많은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황폐화 된 가슴은 무슨 말이든 다 미숙하게 뽑아 낸다. 내겐 미안한 마음이 언제나 앞섰던 아이였지만 이젠 그애가 나한테 미안해 한다. 연수를 보기전 수술 뒤 깨어난 아빠를 보았다.

 응급실에서 였다. 자기 몸에 암세포가 득실 거리는 것도 모르는 아버지는 마냥 편안한 웃음을 지으며 유럽이 어땟는지 나에게 묻는다. 이런 저런 일로 맘이 상해있었던 자식이 안쓰러웠던지 계속 웃어 보인다. 아픈데 안아프려고 하시는 모습이 가슴에 멍을 준다. 누나랑 엄마는 억지로 울음을 감춘다. 아빠는 간호사 얘기를 하신다. 내가 고등학생인줄 알았다는 간호살 말을 전하며 몇 달 간의 맘고생으로 몇 년은 더 늙어버린 아들의 얼굴과 가슴을 북돋우러 하신다. 그런 마음 씀씀이가 너무 아팠다. 그 아픈 순간에도 미소를 지으며 나를 챙기는 그 처절한 부정이 너무 아프다. 지금도 아프다.

 유럽에서의 추억을 말하려다 다른 얘기가 되버렸다. 지금까지 졸렬한 나를 잘 보살펴준 경흠이네가 너무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친구 아버지도 아버지라는 경흠이 아버지 말이 빈말이 아닌걸 알기에 아직도 힘이 된다. 무릇 범용한 가슴에 수직의 파문을 일으켜 가슴이 다 타들어갈 적에도 내게 기갈을 해결할 수 있는 온정을 베풀어준 이들에게 다시금 감사한다. 사회적으로 손가락질 받으면서도 언제나 나를 사랑해줬던 연수한테도 감사한다. 모두가 그 애를 욕해도 그 마음을 알기에 내겐 아직도 소중하다. 과거를 반추하다 불현듯 튀어나오는 이 아픔의 둔중함은 아마 심장의 피가 다 땅위에 뿌려질 때 까지 계속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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