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벽대전2는 영화 트로이에 대한 오마쥬로도 보인다. 서구인의 이해를 돕기 위해 '미녀에 의한 전쟁'이란 요소를 넣었다고 한다. 이러한 배려 덕분에 동양인은 익숙한 작품에서 낯설음을 느끼게 된다. 삼국지 애호가가 보기엔 심정적으로도 불편한 설정이다. 전쟁의 실제 이유가 한 여인 때문이라면 전장에서 죽어나갈 병사들의 시퍼런 각오가 가여워 보인다. 소교와 차를 마시느라 출병을 늦춘 조조는 그래서 공감을 사기 힘들다. 시인으로도 유명할 만큼 감성적인 조조라 하나 100만 대군의 수장으로서의 자질은 누구보다 충만하다. 하지만 미인계에 빠져 대사를 그르친 조조라면 격이 떨어진다. 여자를 탐하다 전위라는 용장을 잃은 조조다. 같은 실수를 두번 반복하는 인물이 천하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는건 역사를 너무 우습게 보는거다.   

 영화 트로이에도 나왔던 거북이 등껍질 전법은 또 어떠한가. 트로이의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별동대를 가지고 이 전법을 운용했다. 영화적 상상력을 발휘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최정예가 아니면 이 전법은 성공하기 힘들다. 세계 1차 대전에 처음 등장한 탱크와 같은 역할을 이 영화 속 거북이 진형은 소화해 낸다. 즉 우수한 방어력을 바탕으로 적진까지 다가가거나 적의 참호를 무력화 시킨다. 하지만 이 진법으로는 공격이 거의 불가능하다. 갖고 있는 장점이래 봤자 엄청난 방어력 뿐이다. 또한 움직일 때 마다 발맞춰 나가야 되기 때문에 기동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무거운 방패를 지고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체력적 소모가 심하고 공격으로 전환할 때 적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기도 한다. 일당백의 용사로 이뤄진 아킬레우스의 군사들이나 쓸만한 전법이다. 삼국지에서 진법의 실제 활용은 조인의 신야성 침공전에서 나타난다. 오나라는 해상전을 주축으로 주태나 손책과 같은 개인의 무용에 의지하는 전투 양상을 보여왔기에 이러한 진법은 영화를 위한 보여주기식 전법이다. 진가신 감독은 명장이란 영화에서 이러한 '장난질' 없이도 전쟁을 잘 표현했다. 지나친 상상력은 재미를 반감시키는 법이다.

 군더더기 장면 또한 너무 많다. 역병에 걸린 병사를 이용한 심리전이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떡을 나눠주는 장면, 폭약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감녕 등은 영화의 전개상 불필요하다. 이런 군더더기 씬을 줄여 1부와 2부를 한편으로 만들었다면 영화는 좀더 괜찮은 매무새를 자랑 했을테다. 박찬욱 감독의 경우 올드보이 촬영 당시 유지태의 연기에 대하여 한가지 지적을 하였다. 대사의 호흡이 느린 유지태 때문에 관객이 지루해할 수 있으므로 호흡을 빨리 가지라 하였다. 대사의 호흡에서도 관객을 배려한 박찬욱에게서 오우삼은 배워야 한다.  

 적벽대전은 기승전결에 있어서도 명쾌한 클라이막스를 내놓지 못한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데쓰 프루프라는 영화를 보자. 이 영화는 참 지루하게 흘러간다. 초반 40분이 특히 그렇다. 하지만 그러한 지루함은 영화 중간의 짧은 충돌신과 마지막 장면의 엄청난 카타르시스로 해소된다. 반전 영화와는 다르지만 좀 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묘미가 있다. 소위 '한방'이 있다는 거다. 사람들은 적벽대전을 보면서 이 한방을 기다렸을 테다. 나 또한 그 한방이 언제 터지나 궁금해 하며 계속 영화를 봤다. 올리버 스톤 감독의 알렉산더처럼 매의 눈으로 바라본 전장의 그림과 같은 참신한 영상이 터지길 기대했다. 물론 오우삼도 한방 터뜨리긴 했다. 불발탄이지만서도. 인물 중심의 전쟁신 전개는 전쟁의 전체 맥락을 파악하기 힘들게 했다. 전쟁의 비장함을 강조하기 위한 설정도 눈에 거슬렸다. 또한 적벽대전은 해전을 중심으로한 전투가 주를 이룰거라 생각했는데 지상전이 중심이 되면서 클리셰한 느낌도 주었다. 지상에서 일어나는 회전은 영화에서 많이 다루지 않았는가. 

 또 한가지 이해가 안되는 장면은 손사향과 조조군 병사의 우정이다. 솔직히 그건 우정이 아니고 사랑으로 보아도 무방해 보였다. 결국 그 병사는 호모섹슈얼이란 느낌을 주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갓 알게된 사내를 무등태워주며 속없이 챙겨주기만 할 리 없다. 그 병사가 마음 좋은 사람이라 치부하며 애써 넘겨보려 했으나 남자가 남자를 무등태워준다는 건 내 편협한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본다면 숫제 이해하기 힘들다. 무엇보다 그러한 관계에 대한 묘사가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 이건 전쟁의 유해함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고 손사향의 안타까운 사랑에 대한 묘사도 아니다. 다만 관객에게 잔재미를 주기위한 설정인 듯 한데, 전혀 재미 없었다. 

 물론 소설이나 만화를 영화로 만든다는 건 어렵다. 그러한 점을 십분 이해한다 하더라도 오우삼의 적벽대전은 지나쳤다. 원작을 영화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원작 마니아들의 불만은 종종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오우삼의 영화는 꽤나 중요한 에피소드를 제 맘대로 윤색하거나 무난히 넘겼기에 더 많은 질타를 받은 듯하다. 특히 계략을 쓰는 부분이 눈에 거슬렸다. 주유가 조조로 하여금 채모와 장윤의 목을 베게끔 책략을 구사하는 장면은 연의와 조금 다르다. 원전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으로 좋게 보아 넘길수도 있었으나 이 부분이 전혀 납득 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영화는 주유가 채모의 배신이 담긴 밀서를 적의 밀사로 보이는 장간에게 들키게 한다. 이 상황에서 주유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장간을 죽이는 것이다. 전시라는걸 감안하고 사안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것이다. 헌데 주유는 어쭙잖은 농담으로 넘어가려 한다. 군사기밀보다 친구가 중요해서 그랬다고 봐야 하나. 아니다. 이건 당연히 조조에게 계략을 거는 것이다. 조금만 생각을 하면 알 수 있다. 근데 조조가 넘어갔다. 연의에서는 이 부분에 꽤나 많은 공을 들인다. 반간계라는 것이 그만큼 성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근데 주유는 이러한 허술한 책략으로 채모와 장윤의 목숨을 앗아버린다. 희대의 두 영웅의 품격을 급격히 떨어뜨린 사례라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제갈량이 화살을 얻어가는 장면 또한 안개가 끼였다곤 하나 낮장면이었기에 쉬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시계가 아무리 짧다 하나 제갈량이 무모하게 낮에 화살을 받으러 갈리는 없다고 본다. 연의는 이것을 밤이라 묘사한다. 짙은 안개가 있다 하나 제갈량에겐 낮보다 밤이 더 좋은 시간 때일 테다. 밤 촬영이 어려워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낮으로 설정한 이유가 궁금하다. 또 한가지 짚고 가야할 것이 채모와 장윤이 쏜 화살의 개수다. 둘은 10만개 정도의 화살을 쏜 것 같다고 영화에서 말한다. 여기서 오류가 발생한다. 조조군이 쏜 화살 중 제갈량이 온전히 실어갈 수 있는 양은 그 절반이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수의 화살이 배를 맞추지 못하고 바다에 빠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갈량이 10만개의 화살을 얻었으니 조조군은 20만 개는 족히 넘는 화살을 쏘았을 테다. 하지만 영화에선 10만개를 쏜 것 같다고 한다. 좀 더 디테일한 부분에 신경쓸 수 없었는지 의문이다. 물론 번역이 잘못됐을 수도 있다. 번역자인 홍주희씨에 대해서 알아 봤더니 '엘리자베스'란 영화로 악명이 자자하더이다.  
 

  왕자웨이나 이안 감독이 적벽대전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이모우는 '영웅'이란 작품에서 특유의 유장함을 통해 지루한 면모를 보여줬기에 열외로 뒀다. 왕자웨이라면 감각적인 영상으로 영상시를 쓰지 않았을까. 서사 또한 짐작이 간다. 적벽의 불길을 더욱 인상깊게 보이기 위해 전반부의 상영시간은 인물의 고민을 시각적으로 설명하는데 썼을 테다. 왕자웨이가 그려내는 적벽의 불꽃은 전쟁영화 사상 가장 아름다운 불길로 표현될 것이다. 이안 감독이였다면 꾸준히 타오르는 적벽의 불길로만 세시간의 영화를 만들었을 것 같다. 회상씬을 위주로 하여 칼이 오가는 전장을 하나의 호흡으로 그려내지 않았을까. 주유와 제갈량의 어릴적 트라우마도 곁들여 졌을 테다. 전쟁 자체에만 집중하여 세시간을 그려낼 수 있는 내공. 이안이면 가능하다. 오우삼도 세시간 정도로 적벽대전을 그릴 수 있었을 터이다. 제작사의 농간인지 오우삼의 편집능력 부족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5시간에 가까운 적벽대전은 오우삼에겐 적벽처럼 불태우고 싶은 기억으로 남지 않을런지. 오우삼의 분발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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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 있는 나의 서재는 참 외롭다. 옆에는 푸우도 있고 피글렛도 있고 티거도 있지만 내 서재는 언제나 고적하다. 한때는 푸우와 같은 한없이 나른한 일상을 꿈꿨지만 막상 나른해지고 나니 조급증이 생긴다. 역시 푸우는 성인의 경지에 도달한 인물이었던 것이였던 것이다. 뭐 곰돌이라 인격을 부여하는게 좀 그렇긴 하지만 푸우는 인간을 넘어선 자연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푸우와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 푸우의 배를 퉁퉁 두들기며 푸우가 선사하는 그 어눌한 옛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푸우~ 곰돌이 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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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은 내 생일이다. 허나 간만에 외로이 보내게 됐다. 내 친구는 이게 다 내가 백수라 그렇다 한다. '나 백수 아닌데..' 허나 사회와의 접촉을 몇 달 이월시켰을 뿐이므로 백수라 해도 할 말 없다. 백수면 뭐 어떤가. 삶의 불확실성을 긍정하고 자신의 삶을 꾸준히 긍정하면 그만이지. 불현듯 삶의 비천함을 조금씩 느껴오던 지난 시간에 슬픈 작별을 고하고 싶다. 김영하가 '퀴즈쇼'에서 이야기 했듯, 나의 삶도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했을 경우의 정신적 충격을 감내하기 위한 꾸준한 사보타주로 점철되었는지 모른다. '퀴즈쇼'의 주인공이 그러했듯.  

 상경계열에 영어회화도 곧잘 하고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대학을 아직 다니고 있기에 발생한 정신적 해이상태일지도 모른다. '왜 나는 그토록 치열해지지 않았던가'라는 질문과 '왜 나는 그리도 운이 없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오던 시간이 이어져 온 두달여. 운이 없음이 아닌 실력이 없음을 탓해야 함을, 아니 그래야 마음도 편해지고 삶의 동력또한 쉽게 끌어올릴 수 있음을 근자에 깨달았다.  

 할 일 없으면 기자나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딱히 마음에 드는 언론사는 몇군데 없다는 걸 시나브로 깨닫게 된다. 이런 잡생각 때문에 글 쓴게 아닌데.. 점점 글이 잡스러워 진다. 작년에 읽었던 120여 권의 책을 온라인 상으로나마 훑어 보며 홀로 황홀한 심사가 된다. 영화 또한 그만큼 보았고 꾸준히 사들인 클래식 음반을 듣느라 남은 여유마저 다 지독한 습관에 묻어버린 시간. 타인을 업수이 여긴다는 몇몇 지인의 비판도 이젠 겸허히 받아들일 때가 아닐까 한다. 27살의 겨울은 '렛미인'의 스웨덴 보다 시리고 뿌옇다. 또 그만큼 설레기도 한다. 아.. 놀아줘..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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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1-18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 심한 몸살감기에. 입술까지 헐어서 고생이었던 날들이었죠. 그래서 영화 & 음악과 함께 푹 쉬었던 주말이었습니다. 글을 읽다보니 학생 때 어설프지만 열심히었던 저의 지나간 날들이 생각납니다. 지금은 그렇게 살려고 해도 상황이 쉽지 않고, 또 무엇보다 몸이 받쳐주질 않네요..
삶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얼마전까지만 해도 어렴풋하지만 알 것 같다 생각했는데 또 물음표가 생겨버렸습니다..
암튼..생일 축하드립니다~ :D

바밤바 2009-01-19 22:41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ㅋ 일기를 써논거 같아서 비공개로 쓰려고 했는데 여긴 비공개로 쓸 수 있는 기능이 안보이네요.. 해피 뉴이어!ㅋ

2009-02-03 0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4 05: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동진 기자의 블로그를 다녀왔다. 한때는 나도 필력있는 그 누군가처럼 글 쓰게 되길 바랐던 적이 있었다. 그들이 읽은 책을 따라 읽으려 하고 그들이 가진 관점을 내 것인 것마냥 읊조린 적도 있었다. 이동진 기자의 블로그에 댓글을 남긴 사람들을 보면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내 생각과 비슷하다며 애써 권위자와 스스로를 동일시 하려던 어린 모습, 나와 다른 생각을 보면 나의 부족함을 우선 책망하는 자신감이 결여 된 모습. 내 생각이란 숫제 교열 받을 준비가 된 발로 쓴 교과서 같은 것이고 그 분의 생각이야 말로 사표로 삼을 국정 교과서라는 생각. 조금 아닌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내 목소리를 내거나 고민을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생각에 불현듯 아쉬움이 든다. 영화 '과속 스캔들'에 대한 이동진 기자의 평점에 동의하는 댓글은 예전에 느꼈던 아쉬움을 현재로 치환시킨다. '기자님과 저는 생각이 비슷한 것 같아요'라는 글은 글쓴이가 자신의 생각을 기자와 맞췄다는 생각이 들게한다. 지적 허영의 표출이다. 이동진은 문화권력 이니까. 아님 말고.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남들보다 유식하다고 생각했다. 본인의 부족함을 아는 소크라테스이기에 자신의 부족함을 모른 채 젠체하기 바쁜 그리스인들보다 유식하다고 본 것이다. 자신이 부족한 지 모른 채 타인의 사상을 좇으며 그의 생각이 마치 자신의 것인냥 여기는 헛똑똑이들. 그러한 점을 지적이라도 할라 손 치면 십중팔구는 이런 반응을 보인다. 내 생각은 오롯이 나의 것이라며 등기부 설정이라도 해 놓은 듯한 그 결연한 확신으로 애써 지적해 준 사람을 무안케 한다. 넘사벽을 절감케 하는 순간이다. 그냥 본인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아직 배우는 단계라 잠시 타인의 의견을 임차했을 뿐이니 너무 지적마시게나'하면 본인의 생각을 갈고 닦고 타인과 소통을 증진하는데 도움이 될 터인데. 안타깝다. 다들 자기계발이다 뭐다 하며 발전을 추구하지 않는가. 발전을 하려면 스스로를 객관화 해야 한다. 그러려면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너 자신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내생각인지 남의 생각인지는 알아야 한다는 거다.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듯 내 생각이라는 것 또한 이런저런 생각의 집합체일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자기화된 생각만큼은 오리지널리티를 주장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한마디 덧붙이자면 과속스캔들은 좋은 영화다. 이동진이 말한 '재치의 부스러기'나 '공장느낌이 나는 코미디'는 좀 과하다. 내게 이 영화는 이음새가 매끈하고 매력이 넘치며 적당히 영리한 영화로 다가온다. 리얼리티에 신경을 쓰고 봤다면 영화를 잘못본 것이다. 개연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직전에 넘어가는 유연한 극적 흐름을 보라. 장르적 클리셰로 빠질만한 부분도 잘 벗어났다. 과하지 않은 웃음을 주고 시나리오에 고민한 흔적이 많이 보인다. 그렇게 허술하면서도 쉽게 이야기를 진행시킨 것도 아니다. 왜 평론가 사이에나 통할 예술적 잣대를 들이대는가. 아마츄어 같이..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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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ung 2008-12-31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무슨말인지 알 것 같아요.
예전에 책을 취미로 많이 읽었을때 저도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어느샌가
제 생각이라 믿고, 제 표현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그들의 것임에 불과하단 생각이 들고는 오싹하기도 했네요.

그리고는 이런 의문이 들었어요

활자화된 그들의 생각은 의외로 공신력이 있어보여
어쩌면 옳지 않은 생각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분별하게 수긍하고 있을 수 있겠다고 말에요.

그때부터였나봐요
무작정 책을 읽기 보다는
그 책을 읽는 나를 더 돌아보게 된게요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바밤바 2008-12-31 12:03   좋아요 0 | URL
첨 뵙네요. 개콘 많이 보세요. 개콘은 따라해도 무방하거든요. 새해복 많이 받으시구요. ^^

CQ 2008-12-31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바밤바님. 영화 커뮤니티 씨네마틱 편집부입니다.

바밤바님이 블로그에 올리신 <평점 유감> 게시물을 씨네마틱 칼럼란에 게재하고 싶어 이렇게 연락드립니다.

허락 여부 답변 부탁드립니다. 만약 게재가 가능하다면, 글의 우측 하단에 게재될 본명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www.cinematiq.co.kr

바밤바 2008-12-31 20:51   좋아요 0 | URL
이건 영화리뷰라고 하긴 좀 그런데.. 물론 게재하셔도 되구요. 본명은 어떻게 알려드리면 되나요? 전번이라도 남기시면 문자로 가르쳐 드리면 되는데..

CQ 2009-01-01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가능하시다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감사합니다.
 

 어릴적 외할아버지 댁에 가는 길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버스가 한 대 밖에 없었고 그 마저도 배차 간격이 좀 길었던 듯하다. 그 버스의 종점이 외할아버지 댁 근처였다. 외할아버지 댁 옆에도 2차선의 국도가 나있었지만 트럭이 간간히 오갈뿐 거의 한산한 느낌의 길이었다. 그 길의 끝에는 뭐가 있을지 궁금했다. 어린 마음은 그 길의 끝자락이 세상의 끝이라고 여겼던 듯하다. 콜럼버스의 전기에 나오던 세상 끝에 대한 삽화가 떠오르며 그 길 또한 어딘가 위험한 곳으로 나를 이끌 것이라 보았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지금의 나도 내 앞에 놓여진 길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듯하다. 내가 나가야 할 길이 어디로 통할지 모르기에 세상이 그려놓은 삽화에 걸맞은 불안한 미래를 상상하고 있다. 기실 아무것도 아님이 분명한데도 내 마음은 어릴적 동심마냥 끝간데 없이 불안하고 촐랑거린다. 다 잘될거라는 말이 허황된 레토릭이 아니고 '이 순간도 다 지나가리라'라는 말이 고금을 막론한 진리라는 사실을 잘 알지만 내 영혼을 잠식하는 불안은 암세포마냥 마구 커나간다.  

 마음의 여유를 찾기 위한 방법을 나름 모색해 보았다. 첫째는 운동이다. 둘째는 명상이다. 셋째는 친구고 넷째는 여유다. 이러한 조합이야 말로 허황된 레토릭을 갈음할만할 아스트랄한 방법이다. 모차르트의 제우스가 귓가에 울리고 노곤한 햇살은 시린 공기에 사람 냄새를 가져다 주지만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인생에 삼재(三災)가 있다 하였는데 이제 다 지나가지 않았나 하며 마음을 다시금 추스린다. 불안을 조장하는 사회에 살고 있기에 이처럼 불안에 잠식당한다면야 난 사회가 착취할만한 유용한 대상일 듯. 어쩔 수 없이 나만은 불안해하지 않겠다는 결기서린 눈빛을 스스로에게 쏘아 보낸다. 기실 불안을 활용하려다 잠식당한 사례이기에 쉬이 극복할 수 있을 듯. 이러다 진짜 신선이 되면 어쩔까 하는 또 다른 불안이 생긴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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