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소스라치게 차갑다. 잘해주지 못했던 인연들에게 미안하단 사죄의 연락을 남기고픈

날이 있었다. 지금은 오히려 내게 부지부식간에 상처를 주거나 내몸에 무자비한 생채기를

남긴 이들에게 잘못하였단 말을 듣고 싶다. 별로 너그럽지도 그다지 참을성이 많지도 않은 내게

그 깊이를 시험해 보는 냥 무던히 많은 짱돌을 던졌던 이들에게 논리적인 설교가 아닌

감성적인 삿대질을 하고 싶다. 그대들이 무던히도 짓밟고 가볍게 여겼던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바다처럼 멍들어 있다는 것을 하늘도 보란듯 큰소리로 보여주고 싶다. 누가 아프라고

그랬냐는 비겁한 변명은 귀싸대기를 날리고픈 충동마져 일어나게 할 것이 명약관화.

어찌하든 미안하였다며 다시는 그대 마음 아프게 하지 않으리란 나직한 음성의 보살핌이야말로

울음섞인 참회보다 더 절절한 감정이입의 증거. 가끔은 나도 아프기 싫다고 가끔은 나도

애달픈 이가 목터지게 불러보고 싶다고 가끔은 나도 누군가에게 아무렇지 않게

하고픈 말 하고 싶다고.. 그러면 나의 이 아무것도 아닌 허상 뿐인 궁전은 무너져 내릴지 모른다.

스스로에게 괜찮다.. 하는 약물의 효능이 이제 다 했다며 죽어 지낸 시절들을 보상받고 싶다며

팅팅 부어 오른 내 심장의 우심방과 좌심실에도 휴가를 주고 싶다며 번잡한 내 귓가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하고 싶다며 부족한건 내가 아니라 그대들이라 말하고 싶다면..

그러면 나의 이 유리막 같은 신경세포는 수습불가능한 상태로 부서질지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쾌걸 홍길동에서 사채 광고를 풍자한 것이 화제다. 평소에 사채에 대하여 안좋은 인식이 많은

대중의 성향이 이러한 화제를 낳은 것이라 본다. 사채 광고는 그렇게 나쁜 것인가?

내가 배우는 경제학에선 사채는 나쁘긴 커녕 수요와 공급 곡선 하에서 모두의 효용을

최대화 시키는 좋은 것이라고 한다. 이건 경제학 원론만 배워도 알 수 있는 것이기에

경제학도들은 사채 광고에 대한 별다른 유감을 갖지 않는다. 이것은 내 주위의

경제학과 친구들에게 자체 조사한 것이다. 사채가 비록 권장할 것은 아니지만

제도권의 높은 장벽을 넘지 못한 다수의 서민들에겐 나름의 탈출구로서의 순기능이 있다고

보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사채 광고를 탓하기 전에 제도적으로 서민에게 높을 수 밖에 없는

제도권 금융계에 대한 구조적 비판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또한 사채에 대한 감정적 비난 뒤에는

사채를 쓰는 사람들의 절박한 심정을 헤아리는 마음보다는 그들의 경제력 부족의 연유가 된

무능함을 탓하는 손짓이 많고 또 비난하는 자신들은 그러한 사채를 절대 쓰지 않을 것이란

끝간데 없는 믿음이 있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구조하에서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거나

금융자산을 많이 보유하지 않은 대다수의 그 누구라도 사채의 굴레에 묶일 수 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맹신하는 경쟁에 대한 찬양과 본인은 이러한 경쟁의 승자가 될 수 있을

것이란 판타지 소설류의 맹목적 믿음 때문에 사람들은 본인이 '갑'의 위치에 있지 '을'의

위치에 놓일 것이라 생각 않는다. 사실 노동 운동을 비판하고 노조위원장 하는 사람들을

골수 좌파로 생각하며 사회에 나온 사람들이  종국엔 머리에 빨간띠를 두르고 생존을 위해

'부르다가 내가 죽을' 그 무엇을 외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즉 미디어에 의해 갑의 위치에 있다는 환상을 꾸준히 교육받은 대중이 현실에선

을의 입장에 서는 것이 오히려 더 보편적인 현상이란 것이다.

결국 모두가 노동자가 되고 상류층이 되지 못하는 사회에서 사채에 대한 감정적 비난은

조금 자제하고 이성적인 비판이 필요하다. 그들이 쏘는 비난의 화살이 어느 곳보다

맹목적으로 향해야 할 곳은 오히려 아파트 광고라 할 수 있다. 성균관대의 김태동 교수와

그의 동생인 김헌동씨가 지은 '바보들아, 문제는 부동산이야' 라는 책에서도 언급했듯이

수십억의 개런티를 지불한 일류 배우를 기용하여 방영되는 저 많은 아파트 광고들이야

말로 아파트 거품이라는 문제의 가장 표층에 나와있는 실체이고 지탄받아 마땅한 대상이다.

'어느 곳에 사느냐가 그사람을 말해 줍니다' 따위의 계층 분화를 촉진 시키고 사회적 내분을 

조장하는 문구를 럭셔리 마케팅이란 이름하에 거리낌없이 구사하는 저 많은 건설 업체가

지금의 사채광고가 먹고 있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욕의 정당한 수용자다. 사채 광고를

한다고 하여 사채를 쓰는 사람의 접근성은 높아질 지언정 사채를 쓸만큼의 경제적 어려움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파트 광고는 아파트 가격의 상승을 초래하여 아파트 구매에

대한 일반의 접근성을 낮추는 동시에 집값 상승으로 인한 물가 상승 등의 여파로 한 가정의

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또한 아파트는 필수재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비싸다고

안살 수 없기에 서민경제에 대한 폐해를 더욱 크게 끼친다. 이러한 현실하에 시민단체에서

아파트 광고에 출연하는 다수의 특급 연예인들에게 광고 출연 자제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는데 송혜교만이 이에 대한 긍정적 회답을 보냈다고 한다. 완소 혜교*^^*

사채 광고가 주는 부정적 이미지와 아파트 광고가 주는 럭셔리 이미지는 연예인들 사이에서도

자본이 아닌 이미지에의한 양극화 현상을 낳았다.

전성기가 지나거나 신인급의 연예인들이 자주 출연하는 사채광고는 출연 연예인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어 한채영 같은 경우도 '사채영'이라는 닉넴으로 불릴 정도로 이미지의 급적진하

를 경험하였다. 최민식 같은 경우도 스크린 쿼터 사수 문제와 사채광고 출연등의 악재가 겹쳐

지금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충무로의 특급배우 목록에서 빠지고 있는 추세이다. 하지만 아파트

광고는 오히려 출연 연예인의 이미지 상승효과를 가져와 정상의 연예인이라는 인식을 

대중에게 심어주어 광고주와 출연 연예인 둘에게 다 이익이 된다. 장동건, 이영애, 배용준 등은

광고를 통해 오히려 그들의 고급스런 이미지가 강화되고 수십억에 달하는 개런티를 얻는

부수입까지 얻은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대부분의 서민들은 부자를 위하는 이명박을 지지하지 말고 서민을 위하는

민노당이나 못해도 신당을 찍었어야 했지만 이명박을 지지하는 서민이 훨씬 많았다.

그들이 처한 현실과 그지지하는 우상간의 괴리는 비단 선거에서 뿐만 아니라 사채 광고와

아파트 광고를 대하는 대중에게서도 발견된다. 현실을 호도하는 대중매체와 많이 노출되는

이미지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는 베이컨의 '우상'과 같은 잘못된 믿음

그리고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실체 없는 노스탤지아를 향해 대중의 손수건을 흔들게 하는

상류층 등이 이러한 현상의 원인이 아닐까 한다.

악당 두목에게는 사회적 부러움가 경외심이 쏟아지고 중간급 보스나 잔챙이들이 욕을 먹는

갱스터 무비의 전형이 지금 대한민국의 도처에서 펼쳐지고 있다.

민중이 민중임을 자각하지 않는다면 프란시스포드 코폴라 감독이나 마틴 스콜시지 감독도

그리지 못할 수십조단위의 거대한 갱스터 무비가 현재 진행형으로 기약없이 상영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지금 본인은 꽤나 심한 감기에 걸려 몸이 안좋다. 몽롱한 정신과 끝을 알 수 없는 콧물의 물줄기가 내 몸이 처한 상황을 나타내주는 훌륭한 지표 노릇을 한다.

 작년에 읽었던 책들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감기에 걸린 부실한 육체로 할 수 있는 것이 몇 개 없다보니 이런 수동적이며 비창조적인 사업에 몰두하게 된 것이다. 학교에서 읽은 책들과 동네 도서관에서 읽은 책들 중 내가 대여 하여 읽은 책들을 추렸고, 그 중 전공서적이나 학교에서 독후감 명목으로 읽게한 책들을 열외로 하였다. 그리고 이 책들 중 10여권은 읽었는지 안읽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무슨 호사를 누리자고 기억이 나지도 않을 책들을 허겁지겁 읽어 제꼈는지 모르겠다. 

 전공이 경제학이지만 음악과 영화 그리고 미술에 관한 책이 주류를 이룬다. 전공서적을 넣지 않은 것을 감안하더라도 경제학 관련 도서가 너무 적다. 일천한 실력으로 여기까지 해온 것만해도 대단하다고 스스로에게 위안을 주기엔 뭔가 부족함이 많이 느껴지는 독서 목록이다.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 나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강한 이들은 이러한 독서목록에서 나의 지적허영과 과시욕을 느낄 것이다. 왜 이러한 독서목록을 만들어서 스스로에 대한 마케팅을 하냐는 류의 비판. 최근에 그러한 지적을 하는 분들이 몇몇 있어 왔기 때문에 전혀 잘못된 지적은 아닐 것이다. 물론 그들의 비판을 오롯이 수용하기엔 그들이 안다고 생각하는 나의 실체와 스스로가 인지하는 나의 자아가 조금은 다르기 때문에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그들의 비판에 10분지 1정도 만큼만 귀를 열어줄 용의는 있다.

 내가 일부러 어려운 용어만 쓰고 나만의 용어로 나만의 성을 만들어 나간다는 그들의 비판에 대하여 내가 해줄 말은 이정도다. 즉, 아직 나는 미숙하고 어려운 것을 쉽게 풀어 쓰거나 쉬운것을 또 쉽게 얘기하는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기에 지적허영에 가득찬 인상을 주는 것이라고. 그리고 아직 배워나가는 단계이기 때문에 그냥 너그러이 좀 봐주면 안될까 하는.. 그냥 이러한 저러한 말이 필요없는 튼실한 간판이라도 있다면야 그들의 비판적 손가락은 내가 아닌 그들 스스로를 향하게 될 것이지만 우파적 실력주의가 만연하고 또 정당화 되는 현실에선 다 나의 잘못일 뿐이다.   

 이런 돈 안되는 일을 할 바에는 대중들이 숭배하는 자격증이나 학점 내지는 몇몇 유려한 간판을 만드는데 나의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한다. 가만히 돌이켜 보면 자본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 분야에서 나의 재능이 강세를 보였을 때 나를 숭배하는 듯한 컬트적 무리들은 스스로의 부족함을 책망했으면 했지 나의 다채로운 관심에 대해서는 대부분 찬양일색이였다. 하지만 이제는 현실이라는 무게를 딛고 일어서서 스스로가 꿈꾸는 이상향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가치관에 대한 재빠르면서도 열렬한 추종자가 되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지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쩝.. 결론이 우울하다. 독서목록을 만들고 나서 무언가 글을 남겨야 겠다는 생각에 쉽게 쓰여지던 글이 다시금 어렵게 끝맺어지려 한다. 그리고 육개월 동안 리플이 하나도 안달렸다. 누가 리플 좀 달아줬으면 좋겠다. 아무래도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한거 같다. 장국영이 부른 월량대표아적심이 귓가에 흐른다. 감기 나으라고 자장가처럼 수면의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자야겠다. 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루가 지나면 다시 새로운 하루가 나타난다. 하루의 개념이란건

 인간이 정해놓은 어떤 일정한 굴레에 의해 규정 되는 것이지

 원천적으로 하루라는 개념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언어가 지닌 분절성을 이용하여 존재하지 않는 

 개념을 만들어내고 또 규정한다. 말할수 없는 것에 대해선 말하지

 말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언어가 지닌 한계에 대한 역설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하루를 마감하는 어느 

 시점에 충만한 행복감이 솟아오르지 않는한 억지로 규정된 하루가

 너무 측은해지지 않을까 하는 배려심이다.

 경쟁을 권장하고 사회적 위계질서에서의 우위를 점하기 위한 다툼이 치열할수록 이러한 행복이 증대되는 소수의 사람이 있다.

 이러한 이들에겐 하루하루가 명멸해 가는 어린날의 꿈으로 이어주는 노스탤지어 빛의 기찻길이다. 

 특정한 색이 없는 노스탤지어에서 자기만의 색깔을 뽑아 내는 사람은 이러한 적자생존의 사회가 심히 버겁게 느껴질 것이다.

 이 적자생존의 시장을 흔히들 레드오션이라한다.

 모두가 레드오션이라는 삼성경제 연구소가 창안한 개념에 뛰어들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어쩌면 저 레드오션이란 단어다. 현 경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발명된 블루오션이란 개념은 기존에 존재해 있던 사회적 현상이 삼성경제연구소가 지닌 사회적 권력에 의해 엄청난 발명품인 것 마냥 포장되었다. 기실 형이상학적 철학 개념이 아닌 이상 이러한 사회학적 용어는 발견이라 볾이 옳은 듯 하다. 부르디외의 아비튀스나 들뢰즈의 노마디즘이란 사회학적 용어 또한 발견이라 보아야 겠다. 하지만 이 레드오션 운운하는 이야기가 문제인 것은 모두가 블루오션을 원하지만 레드오션으로 갈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창의력 부족으로 쉽게 전이하는 그 편의성에 있다. 또한 이것은 사회적 효용의 증대를 낳았다기 보다는 삼성경제연구소의 사회적 입지 강화와 관련 서적 판매로 인한 인지세 수입의 증대로 인한 사회적 경제적 부의 쏠림현상을 심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즉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블루오션에 대한 열망만 심화시킨고 그 열망이 창출한 사회적 잉여는 이 언어를 생성한 자의 배만 불리게 한 양식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쓰는 언어에는 이렇게 잘 알지 못하는 많은 권력과 함정이 숨어 있다. 글의 결론이 이렇게 교조주의 행태를 띄는 것은 계몽 운동에 대한 태생적 반감을 극복하지 못한 소심한 자아가 결국 교조주의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어버린 아이러니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다시 보니까 글이 참 두서없다. 컨텐츠는 나름 좋은것 같으나 성긴 구성이 내용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묽게 만들어 버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물수제비 뜨다 햇살이 볼에 튀다.

차가운 계절을 알리는 

그대는 따스한 겨울이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