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아람 누나와 만났을 때의 이야기다. 우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탈레반 사태에서 부터 심형래 감독의 영화 이야기. 그리고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 가끔은 현실적 이야기. 지도자의 덕목.. 등. 많은 이야기. 나는 누나에게 삼국지에 나오는 서서와 유비의 일화를 이야기 하여 주었다. 유비의 적로를 처음 본 서서는 아직 일면식도 하지 않은 유비에게 대뜸 이야기 한다. "이 말을 주인을 해칠 것이오, 그러니 타인에게 양도하여 이 말이 새 주인을 해하고 난뒤 다시 유황숙께서 타시면 평생 유황숙을 보필하는 명마로 남을 것이오", 그러자 우리의 유비는 아니나 다를까 그 제안을 거절한다. "나를 살리자고 타인을 해칠순 없소!" 라는 말과 함께.. 그러자 서서는 생각한다. '이자가 내가 그의 사람됨을 떠보기 위해 질문을 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런 대답을 하였다면 무서운 사람이다. 하지만 이것이 그의 마음에서 나온 진정한 답변이라면 더욱 무서운 사람이다.' 결국 유비의 그냥 무서운 사람인지 정말 무서운 사람인지는 논의가 분분 하기에 나 또한 어느 한쪽에 힘을 실어주긴 힘들다. 하지만 서서의 이 말에서 나는 이성보다는 감성의 힘을 느낄 수 있었고 진정한 도는 아는 것이 아니라 깨우친 것이고 생각하지 않고 마음이 이끄는데로 하여도 사람을 절로 감명케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이 말을 듣고난후 아람 누나는 내게 유비와 같은 자질이 있다며 덕으로서 사람을 이끌 수 있는 사람이 되라 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한나라 말기와 같이 유학사상이 민중의 기저에 전반적으로 갖추어져 있거나 의협심과 같은 도덕적 가치가 숭상받지 못하는 시기. 법에 의한 지배와 사회적인 계약에 의한 인간관계가 난립하는 시가. 고로 나는 그러한 덕 만으로는 현실의 세계에서는 지도자의 위치에 서기 어렵다 하였다. 하지만 누나는 그 덕의 힘을 계속 믿고 싶어 하였고 나는 그 덕이라는 힘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역설하기에 바빳다.

 나또한 서서가 이야기한 더 무서운 사람이 되고파 한다.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사람을 움직인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이며 또 경이로운가. 하지만 그런 천성을 가진 사람들은 집단 행동 규율을 강요하는 정규학교 과정을 마치고 난 후 적자생존의 원리에 따라 조금씩 계산적으로 변하게 된다. 이런 세태속에 나는 그런 계산 보다는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하려 애쓴다. 더욱 큰것을 노리기 위한 작은것에 대한 무관심이 아닌 진정 마음이 그리 행하기에 더욱 큰것을 얻게 되는 그런 것 말이다. 하지만 내 주윗사람들 중 일부는 나의 이상하게끔 뛰어난 기억력과 빠른 암산 능력 내지는 약간 궤변적인 말투 때문에 엄밀한 계산에서 나온 행동의 결과로 나의 행동방식을 규정하곤 한다. 가끔 그럴때도 있지만 항상 그것을 망각하려 하고 또 그 망각하려는 생각 또한 그냥 넘겨버리려 애쓰기 때문에 그런 비판을 들을때 마다 나의 수양이 부족함을 느낀다. 나의 수양이 어느정도 완성이 되고 나서야 나는 현실에 뛰어 들고 싶지만 예상외로 수양의 진척은 느리고 시간의 흐름을 가파라 진다. 짧은 수양으로는 그러한 도를 완성할 수 없기에.. 내가 경멸하였던 세속적 무리의 일원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수양보다 더 중요한 것은 행복이라는 가치이기에.. 조금 마음을 바꾸어 더 편한길을 택할지도 모르겠다. No risk, No return이 적용되기에 아마 내가 꿈꿔왔던 삶과는 멀어질 것이다.

 지금의 나는 고민이 많을 시기. 타인들의 고민을 주로 상담해 주고 또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한 나의 시각을 물어보는 지인들이 많아 지면서 나의 의견이 지인들에게 가지는 힘은 점점 강해지고 있다. 그런 강함을 유지하기 위한 지적 분석작업과 다각적 시각에 대한 고찰은 나를 조금씩 힘들게 하고 정신적으로 고갈되게 하고 있다. 브람스의 교향곡 3번을 아르농쿠르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의 연주로 듣고 있는데 글쓴다고 귀에 하나도 안들어 온다. 음악을 들으면 혹자들이 이야기 하는 우주의 진리와 극한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까.. 솔직히 회의적이다. 그들이 느꼈던 아름다움은 다른 가치에서 느낄 수 있는 쾌락을 포기하면서 선택한 가치이기에.. 일반적으로 수용되기 어려운 주장이다. 내일은 덕규랑 디워를 보러 가기로 했다. 영화를 상품으로만 보고 영화의 미덕은 기술적 진보가 보여주는 스펙터클이라고 믿는 심형래 감독의 영화는 탐탁지 않다. 영화의 성공이 창출할 부가가치를 역설하고 한국 기술의 진보를 역설하지만 그것은 영화가 지니는 부수적 가치일 뿐 영화의 절대적 가치라 할 수 없다. 트랜스 포머라는 영화 또한 그 재기발랄한 시나리오에 맞추기 위해 첨단 기술을 동원한 것이지 첨단 기술을 보여주기 위해 시나리오를 쓴 것이 아니다. 본말이 전도된 시각을 갖고있는 그의 영화에 대한 사상은 이틀에 한번꼴로 영화를 보는 나의 입장에서 보기에 무지몽매하여 보인다. 예전처럼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횡횡하는 애국주의적 마케팅과 영화라는 장르가 예술이라는 장르의 일부라는 것을 망각한 듯한 영화의 줄거리. 탐탁지 않다. 디워가 잘 되어야지만 국가적 신인도도 높아지고 이 후에 추진될 영화 산업 또한 탄력을 받아서 잘 될것이라는 말들.. 참 이런 당위적인 말을 하는 이들을 볼때마다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당위성 앞에서 매국노가 될 수 밖에 없는 일부 비평가들은 보이지 않는 위험을 지적하는 선지자가 되지 못한다. 기껏해야 지적 우월성과 고상함을 내새워 딴지나 거는 저급한 지식인의 하나로 매도될 것이다. 난 개인적으로 심형래 감독의 영화가 망했으면 한다. 영화의 양념격인 컴퓨터 그래픽을 주재료로 써버린 이 빈곤한 식단이 많은 이의 호응을 얻게 된다면 앞으로도 계속 우리는 양념으로 가득한 밥상을 받게 될 것이다. 물론 그 양념은 맛있다. 하지만 양념만으로는 배를 채우기도 알싸하게 씹어먹는 느낌도 그리고 식사의 즐거움도 가질 수 없다. 특히 미각이 발달된 사람일 수록 이 밥상을 먹고 더욱 허기를 느낄지도 모르겠다. 조금은 냉정해지자. 조금 더 나은 밥상을 위해서 지금의 이 비싼 밥상을 아깝다 하지말고 걷어 차버리자. 이 밥상이 많은 호응을 얻을 수록 우리는 계속 이러한 밥상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미각의 다양성을 인정해주기는 커녕 양념맛에 찌들어 기존의 미각마저 상실해 버릴 우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 밥상을 엎어버리자. 그리고 단식투쟁을 하자. 비록 그 배고픔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할 테지만 그 후의 빛나는 밥상을 위해선 지금의 배고픔은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진통이다. 참 매몰비용이 크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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