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학교. 많은 사람들이 무언갈 꾸준히 열심히 한다. 열람실을 가보면 전부다 전공서적 내지는 어학관련 공부..혹은 자격증 공부. 교양서적을 읽는 나 같은 사람은 스스로를 어색하게 여기는게 당연할 정도로 열람실은 상아탑보다는 사회와 맞닿은 공간이다. 전체적으로 부분 군집을 이루는 군상들이 많은 우리 학교의 특성상 군중속의 고독 현상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삼성이라는 기업의 모토와 걸맞게 대부분이 효율성과 특성화에 걸맞게 움직이는 학교의 체제를 보면 몇몇 아해들이 부르짖는 '민족성대 대동단결'이란 구호가 어색해 보인다. 아니 들린다. 그리고 학교 올라오는 길에 보이는 이랜드 노조 탄압에 대한 문과대 학생들의 투쟁적인 글귀가 왠지 맘에 들지 않는다. 조금은 대중친화적인 투쟁을 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투쟁의 진정한 목표가 승리라면 방법론에 있어선 조금 더 유연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전략적으로 옳다고 본다. 물론 그 방법론적 유연함에서 파생되는 내부적 균열이나 운동권 특유의 저항정신이 쇠퇴할 수도 있지만 조금은 예술적 형태의 노동운동이 필요하다고 본다. 요즘 대중들의 시각적 이미지지에 민감히기 때문이다. 내가보는 운동권의 특징 중 하나는 '나는 옳고 그대는 그르다..' 뭐 이런 이분법적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열렬한 투사로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어제 황석영씨 원작의 영화 오래된 정원을 보았는데 운동권 내에 보이는 파시즘에 관한 성찰이 보인다. 386세대라 불리우는 그세대들에 대한 나름 3자적 시각이 돋보이는 이 영화는 혁명의 끝자락에 남아 불같이 타올랐던 순박한 영혼들에게 조그마한 진혹곡을 연주해 준다. 울지말라고.. 울지말라고.. 관객을 다독거리는 듯한 감독의 영상화된 말들은 결국 김지하와 황석영의 주된 테마가 삶이라는 걸 그리고 단순한 개혁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다.

 탈레반에 잡혀간 사람들에 대해 악플이 난무하는 시기. 법 아래에 자고 있는 자들을 법은 지켜주지 않는다고 말하였던 법학개론 시간의 교수의 말이 생각난다. 조금 더 많은 것들을 다양한 관점으로 다루어져야할 시기에 20여명의 목숨에 4천만이 모두 노이로제에 걸린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다. 직접적으로 목숨이 달린 그들의 삶보다 간접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다가오는 괴물에 대한 실체는 몇몇 선각자들이 대처해야 할 몫으로 남아있다.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하여 도저히 좋은 시각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로마가 남긴 3대 유산(로마 법, 로마 길)중에 하나라는 기독교라는 종교의 독선과 아집에 대해서는 재론할 필요조차 없다고 본다.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 유태인의 것은 유태인에게.. 라고 역설하였던 예수의 말처럼 각자의 다양성 존중이야 말로 종교의 참 의미가 아닐까 한다. 로마의 붕괴가 기독교와 관련이 있다는 몇몇 사가들의 주장이나 시오노 나나미의 생각은 기독교가 지배하는 서구사회의 주류패러다임에 저항하는 참신한 시각이라 본다. 김밥천국 예수지옥이란 말이 유행처럼 번져가는 이 시점에 단지 대중의 가학성과 비인도적 자세를 탓하며 피랍자들을 옹호하는건 설득력이 약하다. 기독교 내부에 있었던 독선과 아집을 반성하고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던 그들의 세계를 비판하지 않는다면 이번 사건에 대한 대중 여론은 꾸준히 비난을 강화하는 쪽으로 치달을 것이다. 사람의 생명이 우선이라는 절대적 명제와 국익과 비용을 고려할 수 밖에 없는 현실적 문제의 충돌에서 보이는 주류 언론과 네티즌 언론과의 괴리는 이번 사태 속에 내재된 딱 집어 말할 수 없는 사회적 모순의 표출이라고 볼 수 있겠다. 평소에는 다양한 의견을 나타내지만 생명이란 절대적 명제앞에서는 일관된 의견을 내놓을 수 밖에 없는 주류언론의 경직성과 마녀사냥의 모습이든 개인의 의견피력의 모습이든 자기검열이 없는 네티즌 과의 충돌은 기술의 발달이 낳은 언중의 힘을 보여준다고도 볼 수 있다. 지금 주류언론이 하는 작태는 지록위마의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지금도 수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관심조차 받지 못하는 많은 이들에게 쏟아질 관심이 20여명의 피랍자들에게 집중되는 것은 한정된 재화를 분배할 수 밖에 없는 경제학의 논점에서 보면 힘의 낭비이다. 경제학은 이렇게 비인간적이지만 벤담의 공리주의적 사상에 비추어보면 명쾌한 답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 너는 누군가에게 그렇게 뜨거운 사람이였던 적이 있었느냐'는 싯귀가 떠오른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뜨거웠던 적이 있었는가.. 누군갈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자아비판을 하다 보면 취직에 매달리는 주위 사람들이 보인다. 뜨거울 수 있는 마음조차 사치라 여기는 저 노동예비군들 앞에서 홀로 고상한척 하는 나의 모습 또한 연탄재 보다 못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의 괴리는 그렇게 넓고 또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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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울할 땐 심연의 깊이를 측정하지 말고 그냥 그 심연이 흐르는 데로 몸을 맡기는 것이 좋다. 두둥실 떠가는 감정의 파장 사이로 마음은 점점 안정을 찾아간다. 이런 우울한 날엔 라흐마니노프가 좋다. 그의 교향곡 2번이 귓가에 울린다. 로덴츠벤스키가 지휘한 런던 심포니의 연주다. 이런 우울의 기저를 추적해 보면 어제 엄마와의 말다툼이 놓여있고 또 한번 더 건너면 아무렇지도 않은것에 많은 신경을 써버려 심지가 다 타버린 나의 복잡한 마음이 있다. 먼곳에 있으면 더더욱 생각난다는 어머니라는 존재. 나는 조금 있다 약간의 수면을 취한 뒤 다시 서울로 간다. 서울로 가면 더더욱 아플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난 어머니에게 한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 나라도 엄마의 심경을 편케 해드리겠다는 마음이 굳건한 의지가 되어 나는 어메 앞에선 보살이 되었다. 하지만 내 스스로가 고백했듯 최근에 나의 날카로워진 이성은 가끔씩 나타나는 엄마의 히스테리에 대한 나의 면역성을 현저히 저하 시켰다. 그리고 나는 어머니와 같은 데시벨로 나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소리와 소리가 맞닿는 지점엔 무한한 여백이 있는 것 같다. 그 짧은 순간 나는 그 여백을 느끼고 누군가에게도 화를 낼 수 없는 혼자만의 홧병이 가슴을 뚫고 차올랐다. 그 여백은 은은한 종소리처럼 서로에게 휴전을 강요하고 각자의 사업에 복귀 하였지만 이미 흐트러진 나의 마음엔 지극히 적절지 않으면서 또 뚜렷한 목표또한 없는 분노가 떠다녔다. 내가 화를 거의 내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화를 내고 난뒤의 내 스스로를 추스리기에 나의 수련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냥 잠을 청했다. 갑자기 찾아온 수마에 의해 나는 모르페우스가 이끄는 꿈속에서 갖가지 세상을 만났다. 꿈을 꾸었다는건 깊은 잠을 자지 못하였다는 것이기에 나는 새벽녁에 눈을 떳다. 그리고 보람찬 하루를 위해 영화를 보기로 하고선 에비타를 틀었다. 중학교때 에비타 음반을 샀었기 때문에 익숙한 음률과 가사들이 영화를 보는 도중에 약간의 기시감도 주었다. 그리고 그 영어 가사를 알아 들을 수 있게 된 나 자신의 지적 성장에 대한 만족감도 느끼고 있었다. 영화를 보며 나는 내가 평소에 주로 생각하는 사회적 문화적 관점을 위주로한 영화평을 영화내내 마음위에 쓰고 있었다. 영화를 이성으로 보던 나의 눈빛이 You must love me 란 노래의 등장과 함께 감성으로 보는 눈빛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녀의 억척스러워 보였던 삶과 일생이 그대가 떠날까봐 두려웠었다는 진실한 고백과 함께 자신을 사랑해 달라는 말.. 그 말이 나의 가슴에 묘한 파장을 일으켰다. 그리고 엄마가 생각났다. 자식을 위해 억척스러울 수 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삶도 아마 에비타가 읖조리는 저 노래 가사처럼 가지기 위한 욕심이 아니라 잃지 않기 위한 방어적 욕심이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

그리곤 갑자기 슬퍼졌다. 그 후 도서관을 가고 친구를 만나고 집에 돌아오니 엄마가 평소와는 달리 용돈도 주시고 먹을것도 많이 사놓으셨다. 나는 내일 떠나는데.. 그걸 모르실리가 없는데.. 그냥 이적지 자식을 허술히 대한 듯한 마음에 대한 누구에게 향하는지를 모를 사죄의 표현인듯 하였다. 그리곤 왠지 기운이 없어 보이는 엄마의 뒷모습.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힘든 나날을 여지껏 자신만의 방식으로 꾸려오셨을 그 뒷모습에 그냥 우울해졌다. 많은 꿈을 지녔던 고등학교 시절에 공부잘하는 자식 덕분에 선생님들에게 극빈 대우를 받으셨다며 좋아하시던 그때.. 수능 성적이 나오고선 못내 속상하셨으면서도 더 속상했을 자식을 생각하여 재수하란 말도 못하셨던 그때. 아버지 암에 걸리셨던 걸 처음 알았던 날 홀로 통곡하셨던 그때. 나또한 많이 울었지만 운체 할 수 없었더랬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와의 이별이 너무 두렵고 무서웠기에 계속 병원을 지키는 일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하루하루가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나날이 내겐 직시하고 싶지 않았던 현실이였고 나름 최선을 다해 살았다는 우리 가족의 삶이 너무 불쌍하고 억울해서 나는 계속 다른 곳을 보았다. 그외에 나를 힘들게 했던 주윗사람들..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던 그때에 나를 붙잡아 주었던 그아이 선영이. 그래서 선영인 나에게 영원한 hightest second position이다. 여친이 아니라는 말이지.. 그러한 나날뒤에 맞았던 아버지의 죽음과 내게 많은 힘이 되었던 따스한 사람들. 나보다 엄마가 더 힘들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울지 않으려 했고 또 엄마 앞에서 거의 울지 않았다. 애들이 독종이라며 대단하다 하였지만 나의 가슴은 더 크게 울었고 더 많이 울었고 더 높게 울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고 집안에서 제일 똑똑했다던 나는 오히려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지금까지 회피하고 있었다. 천갈래 찢어진 내 마음을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다는걸 알기에 나는 다시금 담담하며 유쾌한 나로 돌아갔지만 가끔 꿈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아버지의 모습에 나는 여전히 어떤 것이 꿈인지 모르는 듯한 이성의 붕괴를 경험한다. 때마치 라흐마니노프는 교향곡 2번 3악장을 연주한다. 내가 손 꼽을 정도로 좋아하는 악장이다. 내가 왜 불현듯 이런 미친듯한 솔직한 글을 쓰는지 모르겠다. 나의 치료를 위해서인지 아니면 끊임없는 나의 하늘을 향한 그리움에서인지..

 아버지는 내게 행정고시를 공부하라고 하셨다. 재경직을.. 동네에서 머리가 좋다고 소문난 나이기에 아버지는 기대를 하셨다. 하지만 자식이 숙환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강요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다 보면 몸이 더 안좋아질 것 같다는 아버지의 배려였다. 그런 배려뒤에 자식이 꿈을 펼치지 못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시던 아버지의 눈물자욱이 가끔은 느껴졌었다. 누구보다도 똑똑하다고 여겼던 아들인데 재능에 걸맞는 운을 타고 나지 못해서 조금씩 퇴보하는 것을 보는 것은 나보다 아버지에게 더 큰 아픔이였을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나는 마음이 아프다. 왜 이런 글을 쓰는지 모르겠지만 뭔가 나 자신에 대한 돌이킴 없이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아버지는 유전적으로 관련이 있는 이 질병때문에 아들이 힘들어 하시는 것 때문에 많은 자책을 하셨던 것 같다. 나또한 아버지의 암 세포를 잉태시킨 하나의 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버지의 나에 대한 사랑은 대단하였고 그리고 언제나 나를 믿고 또 믿어 주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1.5년이 지났지만 난 그동안에 아버지가 바래왔던 아들의 모습에 전혀 근접한 것 같지가 않다. 아버지의 부재또한 외면하려 했고 홀로 네버랜드를 지키려고 했다. 하지만 이젠 떠나야겠다. 이젠 별로 시간이 없는 것 같다. 무엇이 최선이고 무엇이 최고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이제 나는 나를 믿고 나를 사랑하는 지인들을 믿고 내가 지키려 했던 가치들을 믿어야 겠다. 지금 내겐 아무것도 중요치 않다. 현재만이 중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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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내 맘을 다 보듬어 줄 것 같은 사람이 보고싶다. 에비타를 보고 난 후 이노래를 다시 들으니 눈물이 난다. 그대가 떠날까 두려웠다는 에비타의 고백은 독한여자로 규정되어지던 에비타의 이미지를 너무나 보듬고 싶은 사람으로서 에비타를 만든다. 페론이 에비타를 안고 올라가는 계단에서 불렀던 이 노래는.. 모두가 손가락질 하던 그 강인함을 지탱해주던 힘이 단순한 한사람의 마음이 돌아설까 조마조마 했던 두려움이라는 것만으로 에비타는 나의 성녀가 되었다. 모든 것을 이루고 저물어가는 햇살조차도 오늘이 마지막일 것 같다는 안타까움에 더욱더 눈에 아로새기는 에비타의 눈에 감도는 고독은 그녀가 흔히들 말하는 그저 여자라는 것을 보여준다. 가슴에 품었던 그 지고지순한 고백이 그대가 떠날까봐 두려웠었다는.. 그래서 당신은 나를 사랑해야 한다는.. 에비타의 말에 가슴이 저리다. 아프다. 고딩때 가을동화 보고 이런 감성적인 눈물은 첨인것 같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심은하가 유리창 깨는 장면에서도 너무 안타까와 눈시울이 젖었지만 오늘의 나의 심장은 더 절절하다. 저런 노래를 진심으로 내게 불러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자비심의 발로라 할지라도 나는 그녀를 택할 것이다. 세상의 눈과 돌팔매질이 너무나 무섭지만 차라리 내가 부서지고 말리라는 마음으로 당신을 사랑할 것이다. 모두가 창녀니 팜므파탈이니 하며 그녀를 욕하지만 그런 구설 속에서 부서졌을 그녀의 마음이 오직 나만을 보고 그렇게 묵묵히 나아간 것이라면.. 설레임이란 가장 근사한 감정을 넘어서는 자애와 폭발할 듯한 심장의 뜨거움으로 그대를 곁에 둘 것이다. 오직 위로만 올라가려던 사람. 강하고 싶어서 강해진 것이 아니라 강할 수 밖에 없어서 강해진 여자. 사랑의 영원성을 믿지 못하였지만 당신만은 나를 버리지 말라는 에비타의 진심. 마음. 에비타에 관한 정치경제학적 분석이 싫어졌다. 난 그녀가 좋다. 몸을 팔지 않기 위해서 몸을 팔았던 여자. 그대를 갖기 위해서 그대를 소홀히 대했던 여자. 난 당신을 사랑할 것입니다. I must lov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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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7-07-25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비타 CD, 저도 정말 좋아하는 CD랍니다. 강인하면서도 금방 무녀져내릴 듯한, 호소력 있는 목소리에 실린 가사도 좋고, 영화도 참 좋았어요.

바밤바 2007-07-26 21:53   좋아요 0 | URL
근데 마돈나가 15살 때의 에바페론을 연기하는게 좀 웃기긴 했어요^^ ㅋㅋ
 

 전보다 글을 쓰는데에 있어서 자기 검열이 더 심해졌다. 방문자수가 매일 20명이 넘는 것에 대한 부담이 작용한 것 같다. 이 블로그를 꾸민건 집에 있는 CD를 정리하려고 구매 리스트를 작성하면서 부터였다. 내가 갖고 있는 씨디가 몇장정도 되는지 나 스스로가 궁금 하였기에 구매 목록에 여지껏 사모았던 음반들을 하나씩 정리 하였다. 내가 가지고 있지만 알라딘에서는 정보 검색이 안되는 음반들도 꽤나 있었다. 그렇게 정리를 하고 보니 왠지 뿌듯하였지만 좀 더 일목요연한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음반을 장르별로 묶기 위해서 마이리스트를 작성하였다. 다 자기만족을 위한 분류작업이였는데 어느 순간 내 블로그에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지는 걸 느끼고선 블로그를 좀 더 정갈하게 꾸미자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성격상 이만큼 한것도 대단한거라 생각하고 방치한 것이 지금의 내 블로그다.

알라딘 블로그를 통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의 생각과 사상들을 접할 수 있었다. 특히 드팀전 님의 홈피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분이 쓰신 글은 거짓 다 읽어 보았는데 독서를 한다는 느낌 보다는 대화를 한다는 느낌으로 읽었더랬다. 그분이 쓰신 글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나는 좀 더 명료하고 날카로운 지성을 갖게 되었다. 나는 항상 내 주윗 사람들의 모자람을 책망하며 독서를 통해서 세상을 보는 눈을 익혔는데 그분을 통해 그런 일방적인 수용자의 입장을 벗어난 대화라는 형태의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하하.. 그리고 예전에 내가 써놓은 음반 리뷰를 읽어 보았다. 참 이상하게 써놨다. 그때 리뷰 하나당 100원씩 준다길래 마구 써놓은 것들이 지금의 엄청난 리뷰수를 탄생시킨 계기가 된 것 같다. 가끔은 진지하게 쓴 것들이 있지만 대부분 즉흥적인 감상의 결과물들이기에 상당히 낯부끄럽기도 하다. 흔히들 말하는 내공이 모자라거나 필력이 달려서 부끄럽기 보다는 왠지 젠체하는 듯한 글귀들이 마음에 안든다. 지금 쓰면 좀 더 자기 성찰적인 자세로 리뷰를 쓸 것 같다. 전처럼 리뷰 공장장이 아닌 어느정도 조탁을 통한 예쁜 리뷰를 쓰고 싶다. 그래서 가끔 어떤 음반을 듣고 리뷰를 쓰려고 보면 예전에 내가 뭐라 끄적거려 놓은 리뷰를 발견할 때가 있다. 참 못썼다.. 라는 생각은 둘째치고 참 없어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국화 아저씨들이 이야기 했듯이 모든 지나간 과거 또한 사랑해야 하기에 윗단락이 전달하는 만큼 자책감을 느끼지는 않지만 마음에 안들긴 하다. 이런 자아성찰적 페이퍼를 쓰는 것은 아마도 몇몇 음반을 뒤지다가 이건 아니다 싶은 리뷰를 몇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리뷰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예전의 내가 보였던 경미한 사고 수준과 미천한 감상의 폭을 나타내는, 약간의 경박함 같은 것이였다. 클래식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안타깝다느니.. 최소한 이 정도는 들어야 클래식 듣는다고 한다느니.. 이거 딱 보면 젠체할려고 쓴 글이다. 나는 최소한 저렇게는 안썼는데 하는 안도감과 함께 그 리뷰의 저자들이 풍기는 어설픈 선민의식 같은게 거슬렸다. 아침부터 상당히 까칠한 문체다. 조금 편히 살고저 했는데 알라딘에서 뵌 분들의 높은 도덕 수준과 지적 아우라가 아무래도 나의 나른한 일상에 채찍질을 가한 것 같다. 점점 지인들과 대화하면서 스스로를 유리시키는 듯한 나 자신을 발견할 때 마다 블로그를 통한 나의 지적 도움닫기의 폐해를 느낀다. 이게 다 그 이상하게 젠체한 글 쓴 인간들 때문이다. 난 이렇게 남탓을 너무 잘하는 거 같다. 버릇되면 안좋은데 일단 별 악의없이 하는 행동이니까 스스로한테 면죄부를 자주 주곤 한다. 그리고 아침부터 듣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나는 왜 음악을 이렇게 집중해서 듣지 않고 산만한 환경에서 듣는지 모르겠다. 글도 산만해 지고 있다. 그나마 지향점을 향해 달려가던 단어와 문장들이 각자의 갈길을 향해 호기롭게 정진하려고 한다.

피아니스트가 곡을 연주하기전 어느정도 손을 푸는 것과 동시에 연주에 대한 개략적인 그림을 그려 보듯이 나도 글 쓰기 전에 그와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하지만 언제나 내가 그린 개략적인 그림은 묘사의 디테일에 대한 나름의 수고와 세부적 자기검열을 거치다 보면 새로운 형태의 그림을 띄게 된다. 바이런 야니스의 피아노가 질주한다. 헐레벌떡 뛰어가면서 앞으로 고꾸라질듯한 느낌을 주는 그의 연주는 그런 불안정함을 내포한체 계속 달린다. 뮌쉬 아저씨가 반주자 인데 용케 잘 맞춰주고 있다. 호로비츠 할아버지가 보여주었던 '저거 인간 맞어?' 같은 느낌은 주지 않는데 사람냄새 나는 연주다. 굴드가 번스타인과 연주했던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이 떠오른다. 번스타인이 서두에 굴드가 너무 느린 연주를 고집해서 연주가 느린거니까 자기 탓을 하지 말라고 했던 연주인데 이 급한 연주를 들으니까 갑자기 생각난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 앞으로 더더욱 내달릴 수 밖에 없는 듯한 폭발성이 조금 느린 부분에서 숨을 고른다. 숨 넘어가다가 서정적으로 변하는 피아노. 광폭함도 살리고 서정성도 살리고 괜찮다. 아.. 또 숨넘어 간다. 약간 힘이 빠진거 같기도 하고. 5선지에 그려진 음표를 모니터에 글자로 나타내니까 나만 신났다. 클라이막스다. 생각만큼은 폭발적이지 않다. 데이비드 헬프갓은 이 곡을 연주하다가 미쳤다 그런다. 근데 미칠만 하다. 음표가 너무 많다. 쉽게 넘어가는 듯한 부분에서도 끊임없는 타건이 귓가를 스친다. 1악장이 끝나갈 기미가 보인다. 피날레를 향하는 무수한 음표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해 소리친다. 그리고 다시 오케스트라가 울린다. 도입부에 제시 되었던 주제 선율이 흐른다. 도입부에서 줬던 느낌과 사뭇 다르게 처량하게 느껴진다. 슬픈 느낌이다. 곡이 끝날줄을 모른다. 아.. 그 말 쓰니까 끝났다. 2악장이다. 2악장 연주하다가 졸지 않을까 걱정이다. 아니면 흘렸던 땀이 식어서 춥지나 않을까.. 그래서 피아니스트는 체력이 좋아야 하나 보다. 20분을 더들어야 끝나니까 그만 쓰고 한자공부 해야겠다. 그리고 이제 세속적 냄새가 더 나는 공부를 시작해야 겠다. 왜냐면 난 소중하니까^^. -글 쓰고 오타가 많아서 수정했다.. 수정한게 이정도인걸 보면 한글이라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의 폐해를 실감한다. 또 남탓이다. 움하하하.. 그리고 수정하는 동안에 4명이 더 방문했다. 내가 글 쓰는걸 아나 보다. 파놉티콘에 갇혔나 보다. 어쩐지 트루먼쇼가 남일 같지 않더라니.. 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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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낮잠을 너무 많이 잤다. 머리가 지근 거릴 정도로 낮잠을 많이 자다 보니 불면증이 찾아오는건 당연한 현상이다. 오늘의 선택 음반은 비틀즈 앤쏠로지 2집이다. 첫번째 씨디에는 예스터데이가 라이브버젼과 불완젼 레코딩 버젼의 두가지로 실려 있는데 레드 앨범에서 보다 자유 분방한 딱정벌레들을 느낄 수 있다. 요즘 말러니 브루크너니 별로 나와 맞지 않는 것 같은 사람들의 음악을 듣다 보니까 일상이 몽롱해 진 것 같다. 그래서 비틀즈를 듣고 있는데.. 좋다. 아무래도 간만에 방청소를 해서 기분이 더 좋은지 모르겠다.

한자 공부를 계속 하면서 느낀건데 역시 언어는 그 시대 사람들의 의식의 반영이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선 한자어를 자세히 보면 남존여비의 사상이 군데군데 보이고 각 글자에서 조그마한 부수 하나 차이로 뜻이 꽤나 많이 바뀌는 묘한 재미가 있기도 하다. 상상 플러스 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순 우리말을 쓰자는 취지하에 게스트들이 쓰는 한자말을 한글로 고쳐주는 걸 몇번 보았는데.. 그냥 한자로 쓰는게 훨씬 정감있고 바른 표현으로 느껴진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우리말이 주류가 되게 하는 것에는 찬성을 하지만 언중의 언어와 괴리된 몇몇 표현들은 상당히 귀에 거슬린다. 게다가 한글을 쓰자는 프로그램의 제목이 한자어와 영어의 조합어인 상상 플러스인데다가 오늘의 게스트~! 라면서 손님들 소개하는거 보면 지나친 영미국가에 대한 사대주의가 은연 중에 드러나는 것 같다. 한자는 어차피 한글 표기로 바뀌고 있고 한자를 제대로 배우지 않고 자란 세대가 많기 때문에 한자가 예전에 누렸던 지위가 점점 위축되 가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반비례하여 영어 같은 경우는 모두가 기본 교양으로 치부하며 당연히 알아야 하는 듯한 사회적 인식이 강하다. 이러한 시대적 조류에 영합한 듯한 이 프로그램은 뭔가 씁쓸한 뒷맛을 남기게 한다.

  또한 우리말에 남은 일본어 잔재를 제거 하는 작업에도 나는 약간 거부감이 드는 것이 일제시대를 살아온 할아버지 세대나 그 위의 세대들은 말 중간중간에 한국어말 처럼 되어버린 일본어를 많이 쓰신다. 그 세대의 바로 직계라 할 수 있는 우리 부모님 세대 또한 어느정도 그 분들의 영향을 받아서 인지 가끔씩 일본어의 잔재라 할 수 있는 말을 쓰는 것을 많이 보았다. 일본어 잔재를 청산하자는 이 운동은 본의아니게 일제시대를 꿋꿋이 이겨내고 우리세대의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준 윗새대에 대한 미필적 고의로서의 하대하는 시각을 아랫세대에게 줄 수 있다고 본다. 새로운 문물에 적응 하는 것이 당연히 늦을 수 밖에 없는 윗분들에게 그분들의 언어적 사대주의를 지적하며 언어를 순화시켜 준다는 것 자체가 살아온 시간만으로도 보이지 않은 많은 지혜를 쌓으신 그분들에게 결례를 범하는 것이라 본다. 또한 그분들에겐 익숙한 말이 식자라 불리우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일본어의 잔재로 취급받아 그분들의 언어 생활에 강한 자기 검열을 가하게 하는 것은 문화적 진보라는 기치아래 행해지는 구세대에 관한 핍박으로도 비친다. 물론 오버 하는거 인정한다. 오버하든 말든 할말은 하겠다. 내 블로그니까!

 비단 일본어 뿐만 아니라 표준어 사용에 있어서도 나는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다. 특히 자장면을 짜장면이라 쓰는게 이상하다는 듯한 몇몇 식자들의 반응.. 나는 그들 중 울학교를 다녔던 정재환 아저씨가 표준어 쓰기 운동에 열렬히 동참하는 것을 보고 저 사람은 주류 이데올로기에 편입한 순수한 우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적 의식이 아닌 일종의 순교자처럼 표준어를 사랑하는 그 분을 보면,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에서 언급하였던 가장 위험한 보수주의자의 한 사례가 아닐까 생각한다. 또한 학교 홈피에서 그 아저씨 얘기가 나오면 찬양하는 글 일색이기에 온라인 상으로나마 그분의 국어 사랑이 가지는 맹점을 지적하기가 쉽지 않았다. 우선 그 표준어라는 것의 정의는 현대 서울사람들 중 교양있는 사람들이 쓰는 말이다. 이것도 일본의 표준어 사정을 따온 것이라 한다. 얼마나 계급적인 말이며 서울공화국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주류적 입장을 대표하는 정의인가. 하지만 표준어를 확립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어느정도 필요한 일이기에 필요악이란 생각으로 넘어가지만 가끔 국어학자나 기득권층이 보이는 비표준어에 대한 유연하지 못한 자세가 나는 상당히 마음에 안든다. 모두가 쓰는 짜장면을 자장면이 맞다고 몇몇 식자들이 정하였다 하여 자장면을 강요하는 사회는 비상식적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아직 수정해야 할 것이 많다는 민주주의 체제라 하지만 이것은 민주주의의 대승적 정의와도 맞지 않는 지적 기득권자들의 언중에 대한 폭력이다.그리고 표준어로 인하여 생기는 지방문화의 위축과 서울로의 편입 가속화 들도 고려해 봐야 할 문제이다.

  지방에서 서울로 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투가 촌스럽다거나 그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우선 소위 말하는 서울말을 쓰는 다수에게 이방인 취급을 받는다. 거기서 능동적이고 빠른 진화를 이뤄 낼 수 있는 사람들은 재빨리 주류의 언어를 자기화 하여 자신이 적을 두었던 지방의 색깔은 일제의 잔재를 대하는 국어학자의 반응 마냥 구석에 쳐박아 둔다. 그런데 남자들보단 여자들이 이러한 빠른 변신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 문화적 환경에 있어서의 적응력은 여자가 강한 것 같다는 나름의 유추가 나오긴 한다. 여튼 이러한 빠른 적응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은 영원히 비주류의 모습으로 서울이라는 대한민국의 수도에 남을 것이고 결국 이들은 사투리도 표준어도 아닌 어색한 말들을 창조한다. 변증법적인 진보를 위한 창조가 아닌 주류문화에 편입하지 못한 패배자들의 가학적 노력이 이루어낸 창조물이기에 이 새로운 서울말은 서글프기 까지도 하다.(근데 말투 들으면 웃긴다.^^) 주류는 문화적 다양성이 21세기의 중요한 화두라 외치는 반면에 다양성과 대척점에 있는 언어인 표준말을 강요하는 사회의 모습은 사뭇 이율배반적이다. 주류는 결국 언어에 있어서는 문화적 다양성 보다 통일성을 더욱 열렬히 원한다는 인상을 준다. 회화나 음악과 함께 인류의 위대한 지성이 담겨 있는 문학이라는 장르에 이러한 문화적 통일성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즈려밟고'와 같은 시어나 태백산맥, 토지와 같은 20세기 문학적 업적들은 표준어 강요가 지닌 한계를 보여준다고 본다. 물론 이것도 좀 오바다.

수도권인구가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작금의 시점에서 이러한 표준어가 가진 묘한 권력적 성향에 대한 논쟁은 기실 남녀 문제처럼 지극히 평행선을 달릴 수 밖에 없는 태고적 한계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표준어를 강요하는 사회가 싫다. 서울이 아니면 시골이라는 몇몇 와정지와의 견해를 가진 자들의 이분법적 사고 또한 지양해야 한다. 언어는 분명히 권력이다. 하지만 노력에 의해 극복 될 수 없는 출생지의 한계에 의해 생기는 이런 계급적 구조는 반드시 타파해야 한다고 본다. 해결책이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의식에 대한 변화만이 최선책이라 할 수 있지만..솔직히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하겠다. 다만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 만으로 일상에 숨겨진 제도권의 암묵적 계층형성에 대항할 수 있는 민중이 길러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 말길다.. 가끔은 내가 너무 예민한가..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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