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꺼풀. 황토빛 체취. 살쾡이 지는 가슴. 들고냥이 우는 손톱. 지루한 독백의 평범한 고백. 아직 말못할 반달곰. 지친 이파리. 모심는 저녁 노을. 가을걷이 다녀간 보릿고개 영감. 살풀이 계속 해도 깊어지는 눈두덩. 다시금 찾는 니 눈썹 한다발........... 모두 그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최근, 교육 과학부는 중.고등학교 교육 자율화 방안을 발표 했다. 0교시 부활, 우열반 설립 허가, 야간 자율학습 부활 등이 주요 내용이다. 경쟁을 강조하는 이명박 정부의 노선과 잘 부합하는 방안이다. 선택. 집중을 강조하는 시장 원리와 공교육의 접목이다. 과연 이러한 방안이 인재를 양성하고 공교육을 강화 하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만약 이러한 목적이 달성 된다면 국가 발전과 국민의 행복 증진이라는 궁극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까?

  교육부 정책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치열한 경쟁이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를 향상 시킨다고 한다. 아침부터 벌어지는 0교시 수업과 밤까지 진행되는 야간 자율 학습을 통한 경쟁 촉진 방안이다. 이렇게 강도 높은 학습이 학생의 능력을 향상 시킬지 의문이다. 지식의 양적 성장은 이룰 수 있겠지만 학생들의 창의력은 . 현재 노동 시장은 창의성 있는 인재를 원하지만 자의반 타의반으로 강행되는 학습은 시장의 수요와 역행하고 있다.

  공교육을 강화하여 사교육 시장의 수요를 줄인다는 목표도 성취되기 힘들다. 사교육에 대한 수요는 어떤 체제에서든 급우들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한 상대적인 측면이 강하다. 어떠한 형태로 교육 과정을 바꾸든지 간에 경쟁을 기반으로 한 현 체제에서는 사교육에 대한 수요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인재를 기르고 공교육을 강화하려는 목표는 이번 개편안으로 성취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번 개편안이 국가 발전과 국민의 행복 증진을 달성할 수 있을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을 내기 위해서는 지금의 학생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이유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 해답은 물론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다. 그러기에 서울대반과 같은 우열반이 생기고 학생들 스스로도 경쟁의 대열에 기꺼이 참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학생이 된 학생들은 더 이상 교육과학부의 소관이 아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대학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정부는 갓20세가 됐을 때부터 일괄 관리해오던 학생들을 방임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실태는 현재 문제되는 고학력 실업과 같은 많은 문제를 낳고 있다. 높아진 대학 진학률이 노동시장의 수요와 공급 불일치(mismatch)를 낳아 대학생의 구직난을 심화시키고 있다. 이에 따라 학력을 높이기 위해 투자되었던 노력과 자본이 구직을 통해 적절한 배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시장에 과다 공급돼 있는 기존의 고학력 실업자를 해결하지 못한 채 꾸준히 신규 대학생을 양산 한다면 정부의 근시안적 정책을 탓할 수밖에 없다. 교육 과학부의 학력 강화 방침이 시장과 역행하는 것이다. 이번 정책이 학생들의 학력 향상을 이뤄 낸다 하더라도 국가 발전과 국민 행복 증진이라는 궁극의 목표를 달성하기에 요원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지금의 교육부 개편안은 학생 개인은 물론 국가 경쟁력 면에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다윈이 말한 적자생존의 이론이 적용 되는 상황에선 승자 독식(winner takes it all)이 나타난다. 학생간의 경쟁을 강화하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시장의 논리에 학생을 맡겨버리는 현 정책은 다윈이 이론이 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루는 말고삐를 잡고 뛰어가는 나그네가 있었다. 곁에 있는 사람이 바쁘면 말을 타고 가지 왜 고삐를 잡고 뛰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벌컥 화를 내며 바쁜데 말 탈 시간이 어디 있냐며 그 행인을 나무랐다. 교육부가 지금 하고자 하는 정책은 이 말고삐를 잡고 뛰는 나그네와 같다. 조금 더 멀리보고 더 생각한다면 우리 교육도 모두가 패배자가 되는 상황을 타개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 행인의 말을 허투루 들어서는 안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청춘에 대한 찬가를 부르는 유명한 수필이 있다. 대부분 고등학교 문학 책에서 한번쯤은 봤을테다. 청춘의 활기와 열정을 찬양하는 내용. 젊음에 경탄하는 글귀는 청춘에 대한 동경과 시샘을 엿보게 한다.  청춘이란 중년층에겐 닿을 수 없는 노스탤지어이고 청년들에겐 생득적인 시간의 축복이다. 공교육 시스템에 억눌려 있는 10대 들의 마음도 이러한 청춘에 대한 찬가를 들은 후엔, 세상을 향한 열정으로 용솟음 칠 것이다. 열정을 표출하지 않고 마음에 담아 두기만 한다면 어느 순간 홧병이 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의 10대에겐 이러한 홧병마저 사치다. 남은 열정마저 학력 증진에 쏟아야 하는 상황 때문이다. 

  지금의 10대들은 본인이 20대가 되면 억압 되었던 열정을 마음껏 표출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을 테다. 10대들에겐 안된 일이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다. 지금의 20대는 열정을 표출하기는커녕 또 다른 미래를 위해 열정을 봉인하기 바쁘다. 대학에 들어서자마자 시작되는 취업에 대한 압박은 열정이라는 단어를 우선순위 뒤켠으로 영구히 이월 시킨다. 혹여나, 여분의 열정이 있다면 아직 철이 덜 들었다는 핀잔을 듣기 십상이다. 

  '약육강식'의 경쟁원리가 당연시 되는 요즘, 열정을 사치로 여기는 인식은 정당해 보이기도 하다. 내면의 음성에 귀 기울일 시간 없이 세상이 가리키는 대로 살 수밖에 없는 지금의 20대의 오갈데 없는 상황을 본다면 말이다. 지금의 20대는 결과적으로 ‘열정 상실의 시대’의 주체이며 객체이다. 세상이 가리키는 가치를 충실히 이행 할 수밖에 없는 약자이기에 20대는 객체다. 하지만 다른 길을 모색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열정을 봉인하는 안정지향의 모습을 보이기에 20대는 주체이기도 하다. 

 변변한 일자리 하나 얻기 힘든 20대 앞에서 열정을 운운하는 태도가 건방지다며 나무랄수도 있다. 하지만 모두가 맹목적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는 세상의 흐름에 어느 정도 늘임표(페르마타)를 찍어 줄 필요가 있다는 데에는 동의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늘임표를 찍을 수 있을까.

 

 

 우선, 학업에 인생을 저당 잡힌 10대가 그들의 과업에 대해 사보타주를 한다. 김영하의 소설 ‘퀴즈쇼’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현 젊은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책도 많이 읽고 외국어와 컴퓨터에도 능하다. 악기 하나쯤을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예술적 소양이 높고 해외여행도 많이 다녀와 견식 또한 넓다. 하지만 어느 세대보다 취업문이 좁고 밥벌이하기 힘들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물질적 풍요라는 축복과 함께 찾아 온 경제 주체간의 심화된 경쟁 때문이다. 이 경쟁은 한정된 파이를 놓고 벌이는 제로섬(Zero-sum) 게임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 학업 성취도가 높아졌다고 해서 명문대 입학 정원을 늘리지 않고 토익 점수의 평균이 높아 졌다고 취업문을 늘리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렇게 본다면 타인을 위하기보다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사보타주를 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옳다. 이러한 생각이 20대에게 전파 된다면 프랑스의 ‘68 혁명’과 같은 거대한 물결이 과도한 경쟁의 흐름에 제동을 걸 수도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연대의식이다. 독서실 옆 칸의 친구를 경쟁자가 아닌 동지로 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렇게 한다면 버거워만 보이던 사회의 흐름을 아름답게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봉인된 열정을 표출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테다. 고등학교 문학책에서 청춘을 찬양했던 수필가도 찬탄해 마지않을 그 열정 말이다. 

 뜨거운 열정이 훌륭한 일꾼이 되는데에만 투입 되는 것은 자본가의 배만 불릴 뿐이다. 열정이 조금 더 다양하게 사용된다면 본인뿐만 아니라 주윗 사람들의 배와 정신 또한 살찌울 것이다. 조디 포스터가 주연한 영화 ‘콘택트’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우주라는 넓은 공간에 지구에만 생명체가 존재 하는 것은 공간의 낭비다’라고. 취업과 성공을 위해서만 표출되는 열정 또한 우주의 여백만큼 낭비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열정을 되찾기 위해 열정을 사용하는 일종의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청춘에 관한 수필을 읽고서도 뜨거운 혈기를 느끼지 못한다면 지금 하는 일을 잠시 접고 촛불 시위에라도 나가보자. 시간의 신인 크로노스 앞에서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기 전에 청춘이 부여한 열정을 즐기자. 세월도 열정이 만들어 낸 추억만은 침범하지 못하기에 청춘의 신인 헤베에게 감사 드리는 마음으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늘의 활기찬 발걸음. 당신을 만나기 때문이다. 불을 지피기 위해 장작을 때우듯, 그댈 향한 간절함을 지피기 위해 나는 시간을 때웠다. ‘너를 4시에 보기로 했다면, 난 3시 30분부터 행복할거야’라는 어린왕자 이야기 속 여우의 말이 오늘처럼 절실하긴 처음이다. ‘흘러간 시간만큼 그대 얼굴에도 시간의 흔적이 가득 하겠죠.’ 나는 속말로 혹여나 세월에 지쳐버린 그대 얼굴을 못 알아볼까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대를 기다리는 시간은 유쾌한 지루함이다. 어떤 말이 이 터질듯 한 설렘을 정확하게 나타낼까? 국어사전을 다 해매여도 나만의 지극히 이기적인 이 감상을 설명할 단어는 없을 테다. 이럴 땐 모국어가 원망스럽다. 새로운 언어로 이 벅찬 마음을 표현하고 싶지만 본인은 숫제 언중의 하나란 것을 자각하며 잠시나마 못마땅한 얼굴이 된다. 수많은 감상 속에 어느덧 그댈 보기로 한 장소에 다다른다. 간만에 보는 그대를 스스로 어색하게 여길까봐 친구 몇 명을 데려올까도 생각했지만 ‘애서라’다. 그대에게 만큼은 열렬한 마니아 이고픈 이 간절한 소유욕이 제아무리 절친한 지인도 거리를 두게 한다. 어제 밤, 당신이 남기고 간 흔적들을 여덟 시간에 걸쳐 돌이켜 보았다. 조마조마 하면서 웃음 가득한 행복을 선사해준 그대이기에 짧고도 짧은 여덟 시간 이였다. 이제 새로운 추억으로 그대를 보지 못했던 시간의 여백을 채울 때다. 새신을 신은 아이 마냥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이 귀여워 보인다. 오늘 만큼은 그대를 처음 보았던 그때의 아이다. 네버랜드로 돌아간 피터팬이다. 김동률의 ‘아이처럼’은 내 노래다. 다시금 마음을 추스르고 약속 장소의 문을 연다. 그리고 말한다.

  “인디애나 존스, 1장이요!”

  혼자 영화 보러 온 사람이 낯설어 보여서 일까?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 보인다. 무슨 잘못한 것 마냥 내 어깨가 움츠러든다. 아니다. 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객으로 이 직원 앞에 서있다. 손님은 왕이다. 고로 이 직원에게 나는 왕인 것이다. 다시금 왕의 위엄을 갖추고 그녀를 쳐다본다. 그러자 그녀는 왠지 미안해하는 얼굴이다. 왕의 위엄에 짓눌린 듯 하다. 이 모든 것은 찰나에 일어났다. 하지만 시간이 수직으로 상승한 듯한 느낌이 내겐 영겁이다. 그 무거운 영겁의 질량이 그녀의 한마디로 공중에 산화한다.

  “죄송합니다, 손님. 인디애나 존스 매진입니다.”

  순간 가슴이 저려온다. 옛 여자 친구의 이별 통보 보단 조금 덜하지만 꾸준한 망치질이 심장에 가해진다. 20 여 년간 기다려온 시간이 20 여 년에 하루를 더하여 기다려야 하다니. 원래 조급한 사람이 아니지만 오늘 만큼은 누구보다 성급하고 재촉하며 그댈 만나려 했거늘. 남은 하루는 또 어떻게 기다리냐며 누구에게라도 타박을 가하고 싶지만 풀 길 없는 답답함은 울분으로 가슴에 여울진다. 20 여 년 하고도 하루라. 20 여 년을 기다린 사람이 하루를 못 기다리겠냐 만은 왠지 20년 보다 더 긴 하루를 보낼 듯하다. 아인슈타인이 이야기 하지 않았나. ‘시간은 상대적이다’ 라고. 내일 그대를 다시 만날 때 까지 내 시간의 주인은 내가 아닐 테다. 잠의 신이라는 모르페우스에게 이 기다리다 지친 육신을 의탁하고픈 시간이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모두가 환호하는 가운데 한국인들은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독일 통일로 인해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한국인에게 ‘심정적 동지’ 하나를 잃어버린 것 보다 더 큰 함의가 있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로 양분됐던 냉전의 시대는 가고 새로운 세계가 도래한 것이다. 이데올로기로 나뉘었던 많은 나라들은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되었고 이념이나 정치적 동기보다 자본으로 상징되는 이익이 세계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었다. 20세기 후반에 불어 닥친 IT 열풍은 이러한 추세를 가속화 하였다. 재화와 자본의 이동이 국가 간에 활발해지고 인류가 당면한 문제에 대하여 다양한 목소리가 나타났다. 다윈이 이야기한 적자생존의 원리가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며 경쟁이 장려된다.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을 세계화라 부른다. 한국인은 베를린 장벽 붕괴 때의 심정과 마찬가지로 세계화가 가져다 줄 미래를 마냥 환영할 수 없다. 현재 한국의 상황은 세계화의 파도를 넘기에 버거워 보이기 때문이다.

  우선 한국은 교육에 대한 투자가 비효율 적이고 노동생산성이 낮다. 천연자원이 부족한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인재양성에 힘써왔지만 힘에 부친다. 중앙일보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학생의 대학 진학률은 80%에 달하여 OECD 가입국 중 3위다. 그렇지만 교육의 질 부분에서는 꼴찌를 면치 못하고 있다. 과도한 사교육 투자로 인하여 상급학교 진학률은 높지만 시장이 원하는 인재를 만들어 내기 위한 교육 투자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은 OECD 가입국 중 노동 시간이 제일 많다. 이에 반해 노동 생산성은 최하위다. 적자생존의 원리에 입각해 보면 한국의 세계 시장의 열패자다.

  취약한 내수 시장과 수출에 과다 의존 하는 구조도 문제다.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여 많은 나라들은 경제적 블록을 형성 하거나 갖가지 조약을 통해 서로의 이득을 극대화 하려 노력한다. 한국 또한 특정 블록이나 조약에 가입함으로써 살길을 모색하려 한다. 그 방안중 하나가 현재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FTA 조약이다. 국민과 충분한 소통 없이 강행 되는 측면이 많은 이 조약은 찬·반 양론에 휩싸여있다. FTA 비준을 찬성하는 입장은 수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경제 구조를 말하며 FTA만이 살 길이라 외친다. FTA 비준을 반대하는 입장은 미국 보다 취약한 특정 산업들의 몰락을 이야기 하며 손익이 분명치 않은 조약을 체결할 수 없다고 한다. 선진국 보다 산업 기술이 떨어지지만 자유무역을 통해 국부를 증대할 수밖에 없는 산업 구조는 사회적 논쟁이 FTA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경제주체 간의 경쟁이 강화됨에 따라 심화되는 빈부 격차 또한 한국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IMF 시대로 일컬어지는 경제 불황기는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명목 하에 고용시장 유연성을 강제하였다. 결국 수많은 실직자가 양산 되었고 구조조정을 통한 대량 해고는 지금의 청년 실업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불경기로 인한 높은 물가 상승과 이자율은 서민들의 삶을 더 피폐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부동산이나 현금이 많은 부자들에겐 오히려 자본을 증식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현재 이명박 정부가 시행하는 감세 정책이나 친기업정책은 이러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더 강화시킬 것이다. 빈부격차의 심화는 사회의 역동성을 떨어뜨리고 안정성을 저해하기에 바람직하지 않다. ‘88만원 세대’의 저자인 좌파 경제학자 우석훈은 연소득 4만불이 되지 않는 가계는 한국을 떠나는 것이 좋다는 극단적 발언을 한다. 빈부 격차의 심화가 그려낼 부정적인 한국의 자화상에 대한 한 학자의 지나친 우려라기에는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세계화가 가져다줄 이해득실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세계화가 주는 많은 기회가 유독 한국에만 부정적이지 않을 것이다. 노동 생산성을 높이고 내수 시장을 키우면서 빈부격차를 해소하는 것이 세계화를 기회로 만들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