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워에 대한 수많은 논쟁이 사회를 뒤덮고 있다. 덕분에 탈레반에 잡혀간 아해들의 소식이 덜 들려와 내 귀를 편안히 해주고 있지만 디워에 관한 논쟁에 다시금 귀가 동하여 마음이 그리 편치많은 않다. 디워를 지지하는 몇몇 사람들이 쓴 추천글들을 보면 참 못썼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나마 변씨 아저씨가 쓴 디워 지지 글은 좋았다. 하지만 난 기본적으로 진중권씨의 입장을 지지하는 편이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이 탐탁지 않다. 진중권에 대한 많은 비판 중 눈에 띄는 것은 그가 언급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에 관한 논쟁이다. 진중권은 학술적 용어라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끄집어 와 서사구조의 부재를 비판하였는데 참으로 옳다고 볼 수 있다. 디워를 보면 그러려니 넘어가기엔 지나친 시나리오 상의 헛점이 많이 보인다. 등장 인물 하나하나가 긴밀한 이야기 구조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소환되고 또 소멸한다.예를 들어 조선시대에 있었던 부라퀴 군단의 침공은 세계 지배가 가능할 정도의 힘을 보여줬기에 굳이 이무기의 힘이 없어도 그들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고 본다. 혹자들은 여기서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선악의 대결에서도 그런 악의 무리가 반지 하나 때문에 대군단을 일으키는 것은 말이 안된다면 디워를 옹호하고 있는데 디워에서 선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은 누군지 불분명하다. 그리고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선한 종족들은 악의 세력과 비등하게 겨룰 수 있는 힘이 있었지만 디워의 선한쪽은 아무런 힘이 없이 그저 난도질 당할 뿐이다.
그리고 혹자는 비평가들의 자질을 논하며 인상파의 효시인 마네의 올랭피아 사건을 들먹이며 심형래를 옹호하고 있다. 두 사건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올랭피아의 미학적 가치가 폄훼된 이유는 신이 아닌 인간을 그렸기 때문이다. 즉 아름다운 여신이 아닌 일개 창녀를 그림의 주제로 그렸기 때문에 미적 아름다움을 우선시 하던 그당시 보수 논객들에게 비판을 당했던 것이다. 즉 신으로 대표되던 아름다움이 인간이라는 평범한 대상에게 아름다움을 뺏긴것에 대한 당혹과 혼란이 주된 정서였다. 마네의 올랭피아는 당시의 미술과 예술 전반에 걸쳐 있던 예술이 지향해야 하는 미(美)에 대한 반기를 든 것이고 후의 포스트 모더니즘의 씨앗이라고도 볼 수 있다. 비평가들의 자질을 논하며 올랭피아 사건을 예로 들기엔 심형래의 영화에선 그런 문화의 진보적 논쟁을 일으킬 요소가 전무하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비유를 하려면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 불가능 한 형편없는 곡이라 비난했던 안톤 루빈스타인과 같은 피아니스트의 예를 드는 것이 더 적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루빈스타인은 차이코프스키에 대한 약간의 질시와 보드카 냄새 나는 그의 음악에 대한 거부감으로 혹평을 날렸기 때문에 현재 사람들이 비난하는 평론가들과 비슷한 양상을 띄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디워는 서사를 드러내기 위해 씨지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씨지를 사용하기 위해 서사를 끌어다 붙이 조악한 형태를 띄고 있다. 사람들이 여기서 많이 이야기 하는 트랜스 포머나 300과 같이 비교적 서사구조가 빈약하다고 볼 수 있는 영화와의 비교 또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트랜스 포머와 같은 경우는 조금은 억지스럽지만 최대한 인과성을 부여하기 위해 끊임없는 서사의 이음새에 대한 담금질이 일어난다. 또한 외계 생물체의 지구 조난이라는 설정부터 다소 이해심을 유발하는 서사 구조기에 그들이 보이는 눈부신 그래픽의 향연 만으로도 억지스럽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300또한 많은 디테일에 신경을 쓴 영화로서 디워의 다소 쌩뚱맞은 진행과는 비교하기가 어렵다.
예전에 딴지일보에서 읽은 기사에서 몬스터 주식회사에 대하여 극찬한 영화평이 있었다. 그 기자가 놀란것은 그 털하나하나 움직이는 것을 표현한 세밀한 그래픽이 아니라 저런 엉뚱한 소재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헐리우드의 소프트 파워에 관한 것이였다. 심형래 감독 본인도 인터뷰에서 영화는 상품이고 이것이 통하기 위해서 줄거리를 최대한 단순하게 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영화의 미적 가치를 숭상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반발을 살 수 있다. 문화가 고급문화와 저급문화로 나뉘지는 않지만 일반인들의 인식에는 클래식과 대중음악 내지는 순수문학과 무협지 등을 대칭 구조로 보는 시각이 있기에 사람들은 문화의 계층성을 부지부식간에 인정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디워라는 영화는 영화라는 예술이 추구하였던 심미안적 가치를 기술의 진보가 선사하는 시각적 이미지로서 대체하려는 경향을 보였고 이것이 어느정도 반감을 산 것이라 본다.
하지만 이 사태의 본질은 애국마케팅과 결부된 일종의 네티즌의 파시즘적인 경향이다. 파시즘이라는 것이 굳이 우상에 대하여 나타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약자를 옹호하는 면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심형래 감독은 지금 네티즌에게 약자라는 위치에 놓인 비주류로 인식되고 있으며 이것은 주류세력이 다 헤쳐먹고 있는 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민중의 반감과 약자에 대한 동정심이 교묘하게 결합되어 크나큰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 무솔리니나 히틀러 또한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자들의 분노를 촉발시켜 파시즘을 일으켰듯이 지금 네티즌이 보이는 진중권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은 우상의 붕괴에 분노하는 파시즘과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물론 파시즘에 대한 역사적인 교훈을 다들 지니고 있지만 20대 80사회로 진행되고 있는 현재의 사회 구조는 조금더 세련된 형태의 파시즘의 등장의 변수또한 지니고 있다고 본다. 디워에 대한 다양한 비평이 네티즌의 과도한 심형래 옹호로 인해 제기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의 전가의 보도라는 다수결의 원칙이란 미명하에 다양한 문화의 싹을 죽이는 것이다. 물론 네티즌들의 분노의 원천은 충무로라는 기득권이 보이는 심형래 감독에 대한 배타적 행위와 일반 관객의 시각을 무시하는 듯한 비평가들에 대한 비난에 근저가 있다. 하지만 비평가들의 평가를 많이 수용하는 사람들도 많고 충무로의 문화권력에 대한 대항마로 심형래에 대한 무조건적인 옹호는 장기적으로 우리 문화의 토양을 많이 척박하게 할 것이다. 서사가 조약하여도 그래픽과 정성만 있다면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비정상적 영화관을 투자자나 신인 감독에게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은 냉정해 지자. 진중권또한 네티즌이 보이는 마녀사냥의 행태에서 파시즘을 경향을 읽고 저런 공격적인 말투를 보이는 것일 게다. 언중의 힘은 그렇게 강하기에 그렇게 위험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