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문화적 습속)에 대하여 이야기 한적이 있다. 문화적으로 세습되는 권력으로 이해해도 될 법 한데, 예를 들면 이런식이다. 부자집 아이일수록 미술에 대한 심미안이나 클래식 음악에 대한 감식안이 높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어릴적 부터 그들의 부모는 아이들이 이러한 고급문화에 자주 노출되게 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구별짓기'를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문화적 습속을 통한 사회적 지위의 세습은 가진자들에게 필요한 법이다.
클래식 음악이야말로 이러한 아비투스를 통한 계층적 소외 현상을 가장 잘 드러내는 사례가 아닐까 한다.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선 작곡가의 성향이나 작곡 배경 등을 알 필요가 있고, 특히 어릴때 부터 듣지 않는다면 이런 지루한 음악이 귀에 친숙해질리 없기 때문이다. 바흐의 음악도 예외일 순 없다. 음악의 아버지라는 별칭을 지닌 이 엄격한 작곡가의 음악 또한 진입장벽이 높아 접근성이 떨어진다. 수학적 엄밀성을 바탕으로 한 바흐의 정교한 음악적 구성은 수식의 나열로 보아도 좋을만큼 견고함을 지닌다.
하지만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은 귓가에 쉽게 안착하는 친숙한 매력이 있다. 트레버 피녹이 연주한 이 원전음악의 향연은 딱히 아비투스가 부여한 진입장벽에 질식하지 않을 만큼의 대중성을 지닌다. 함께 수록된 관현악 모음곡 또한 가슴을 안정시켜주는 따스함을 지닌다. 부르크가 독일어로 도시란 뜻이니 브란덴시 협주곡이라 부르면 어감에서도 조금 더 친밀해 질지 모른다. 자주 가는 클래식 동호회 사이트에선 이 음악을 듣고 감정이 정화되고 귀가 황송할 지경이란 표현을 본 적이 있는데 다 과도한 레토릭(수사학)일 뿐이다. 다만 속도를 좇으며 사람을 내모는 광포한 자본의 시대에 삶의 여백같은 여유를 주는 음악 정도로 보면 될 터이다. 표지의 그림 또한 잠시 쉬어가라는 손짓을 하는 듯하다. 사회적으로 공고히 형성된 문화적 장벽을 반드시 넘을 필요는 없지만, 혹여나 넘고 싶다면 이 음반으로 시작해도 좋을 듯. 바흐는 서양 음악의 태양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