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
시마자키 도손 지음, 노영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시마자키 도손의 <파계(破戒)>는 걸작이다. 1906년 작품이니 1887년 첫 근대소설이라는 후타바테이 시메이의 <뜬 구름(浮雲)>이 발표된 지 20년이 지나서였다. 그 20년 사이에 누가 있었나? 소설엔 모리 오가이와 다야마 가타이가 있었다. 모리 오가이는 나쓰메 소세키와 더불어 근대문학의 문호로 추앙받는 작가이다. 낭만주의 계열의 소설을 주로 썼는데, <무희(舞姬)>와 <청년(靑年)>이 대표작이다. 다야마 가타이는 자연주의 문학을 주창한 작가이다. <이불(蒲團)>이 대표작이다. <이불>이란 소설은 꽤 문제적인데,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에서 이 무렵의 일문학사를 이렇게 정리한다.    

   
  메이지 20년대 초에 씌어진 후타바테이 시메이의 <뜬 구름> 쪽이 훨씬 나중에 씌어진 소설보다 더 서양적인 의미의 소설을 실현했으며, 그 후에 시마자키 도손의 <파계>가 그것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다야마 가타이의 <이불>에 의해 방향이 비틀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대충 이상이 문학사의 상식이다.('고백이라는 제도')  
   

  가라타니가 말하는 '비틀어짐'은 일본근대소설의 주류인 사소설의 효시가 바로 <이불>이라는 작품이라는 뜻이다. <이불> 이후 사소설은 일본 천하를 제패하고, 지금까지 일본 소설의 주류가 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파계>의 존재는 기이하다.  

  소설의 대종은 이렇다. 교사 세가와 우시마쓰는 백정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백정임을 절대 밝히지 말라는 계율을 남긴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우시마쓰가 백정 출신임이 밝혀지고, 그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 소설의 제목은 계율을 깨뜨렸다는 의미에서 '파계'이다.  

  신분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소설이 이 시대에 나올 수 있음은 대단한 것이다. 20년 후에야 계급주의 소설인 <게공선(蟹工船)>(고바야시 다키지)과 <가난한 사람들의 무리>(미야모토 유리코)가 나오니 말이다. 해서 나프문학(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 쪽에선 <파계>를 사회소설의 선구적 작품으로 평가한다.  

  그럼, 이 소설은 완벽한가?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두 가지 정도 흠을 잡겠다. 학교에서 쫓겨나게 된 우시마쓰는 어디로 향할까? 자신의 사상적 은사인 렌타로의 유골을 들고 도쿄로 향하는 우시마쓰인데, 이후 그는 오히나타를 따라 미국 텍사스로 향한다. 신분에 따른 박해가 없는 미국으로 향한다는데, 이 모습은 낯이 익다. 이광수가 <무정(無情)>의 끝을 이형식의 시카고행으로 맺고 있기 때문이다. '선지자도 고향에선 핍박받는다'던데, 계몽적 지식인의 도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또 하나는 이런 대목이다.   

   
  우시마쓰의 아버지는 말한다. "집안의 조상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도 그때였다. 도카이도 연안에 사는 많은 백정 종족처럼, 조선인, 중국인 러시아인 또는 이름도 모르는 섬에 표착하여 귀화한 이방인의 후예와는 달리 ....... 가난하기는 해도 죄악으로 더럽혀진 가족은 아니라고 했다."(16면)  
   

   재일 조선인을 '죄악으로 더렵혀'졌다고 말하는 작가이다. 작가가 백정 신분에게 동정심을 쏟듯 같은 처지의 재일 조선인에게도 관심을 가졌으면 어땠을까 한다. 일본 사회에서 신분의 문제가 이제는 많은 부분 해결되었지만, 재일 조선인 문제는 여전히 무관심 속에 있음을 생각할 때 더욱 그렇다.  

  작가 개인을 놓고 보더라도 아쉬움은 남는다. <파계>에서 가졌던 사회에 대한 문제 의식을 더이상 유지하지 못하는데, 특히 <집(家)>(1911)을 보면 그렇다. 자연주의 문학이 더 이상 사회에 대한 관심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개인에게만 초점을 맞추어 사소설로 귀결되는데 작가 역시 적은 몫이나마 하게 된다.

 

              島崎藤村(1872-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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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10-29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의 근대문학 계보가 한눈에 보이는 군요. 소세키를 읽으면서 <청년> <이불>등을 찜해두었는데 아직 근처에도 못가보고 있어요. 차츰 리뷰의 내용이 길어져서 제게는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다시한번 고맙습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10-29 10:52   좋아요 0 | URL
대학 때 아주 오래된 번역으로 봤던 소설인데, 새 번역으로 읽어봤어요. 옛 번역은 세로판이었는데요. 리뷰 적어보며 대학 때 들었던 일본근대문학사 수업도 떠올리며 문학사 책도 좀 찾아보구요. 제게도 도움이 되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청년>과 <이불>은 번역이 되어 있죠. 특히 <이불>은 사소설을 알아가는 데 지침이 되는 소설입니다. 개인적으론 후대 소설가들이 이 소설을 오독하지 않았나 싶어요. 자신들이 원하는 부분만 쏙 가져간 듯도 하구요.
언제고 읽어보시면 얘기 나눴으면 합니다^^

루쉰P 2010-10-29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을 읽으며 사실 파고세운닥나무님께서 언급한 부분은 주의 깊게 읽지를 못 했습니다. 다만 주인공이 자신의 신분에 괴로워 하며 몸부림치는 묘사가 너무나도 신랄하여 거기에 흠뻑 빠져서 읽었습니다. 저는 주로 독서가 감정 몰입적인 경험이 있어 저런 부분들에 대해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기사 <파계>의 결론이 사실은 자신의 은사처럼 사회를 향해 외치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피해서 외국으로 떠난다는 것이 좀 마음에 들지 않더라구요. 나쓰메 소세키 역시 신문 기자로서 조선도 여행을 한 사람 이었지만 일본의 조선 침략에 문제에 대해서는 죽는 날까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죠. 일본 근대 문학가들의 한계는 거기인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지를 못한다는 점 말이죠. 근데 한국의 작가도 비슷하지는 않을까 고민합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10-29 18:03   좋아요 0 | URL
지금에 와서야 현실도피라 쉽게 비판할 수 있지만 당시엔 신분 문제를 언급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용기가 필요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용기만으로도 <파계>는 걸작이라는 말을 붙여도 아깝지 않은 소설입니다.
사람마다 책을 읽는 스타일이 다르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따지기를 좋아해 저렇게 적어 본 거구요.
일전에 <요코 이야기>라는 소설 때문에 꽤 시끄러운 적이 있었죠. 한편으로 부끄러웠던 게 한국 문학도 일본인을 비하하는 데 만만치 않은 노력을 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본인이 가해자는 아닐 뿐더러, 작품을 대하는 한국인들이 필요 이상의 반일 감정을 갖는 것도 경계해야 하니까요.

다이조부 2010-10-30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은 기존의 전집류와는 전적으로 다른 기준으로 책을 선정하나봐요?

주는 거 없이 마음에 들지 않는 출판사이지만 참 이 출판사는 얄미울 정도로 장사를 잘한단

말이죠~

파고세운닥나무 2010-10-30 09:17   좋아요 0 | URL
전집 편집자 가운데 일문학자인 박유하 교수가 있는데, 이 분이 일본 소설을 전집에 많이 넣는듯 해요. 여타의 세계문학전집보단 일본문학이 많죠. 중문학이 전혀 없어 아쉽지만요.
그거 제외하곤 크게 다르지는 않은듯 해요. 늘 번역되는 작품 다시 하고 말이죠. 타 출판사에서 번역된 작품들 다시 살리기도 하고 말이죠. <킴>처럼 안 넣어도 되는 소설을 넣기도 하구요.
개인적으론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내는 대산세계문학총서를 좋아합니다.

소나무 2021-04-09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1년이 지났지만 잘 읽었습니다.
 
울지마, 톤즈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이리 살아간 한 남자가 있다. 48세 되던 해에 선종(善終)했다. 아프리카로 보내진 최초의 한국인 신부였다. 내전으로 몸과 마음이 병든 수단에서 살았다. 의대를 졸업하지만 돌연 사제가 된다. 어머니의 삯바느질로 의과대학을 다닌다. 음악을 좋아해 악기 연주와 작곡을 즐겼다. 열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10남매 가운데 아홉째였다. 

  무엇이 이 남자로 하여금 성자의 삶을 살게 했을까? 이태석 신부는 말한다. "나로 하여금 소중한 많은 것들을 뒤로 한 채 이 곳까지 오게 한 것도 후회 없이 기쁘게 살 수 있는 것도 주님의 존재를 체험하게 만드는 나환자들의 신비스러운 힘 때문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머리숙여 감사하게 됩니다." 예수는 우화를 빌어 말한다. "여러분이 이들 중 한 사람, 내 형제들 중 가장 작은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나에게 해 준 것이오."(<마태복음> 25장 40절) 이태석 신부는 자신에게 있어 '가장 작은 한 사람'이 수단의 병들고, 헐벗으며, 감정이 메말라 눈물을 흘리지 않는 아이들이었다고 말한다. 이태석 신부 한 사람으로 인해 수단의 톤즈가 이젠 덜 아프고, 덜 배고프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다큐멘터리에서 이태석 신부와 함께 사역했던 일흔 살의 외국인 수사가 질문을 던진다. "주님한테 물어보는 것은, 도대체 젊은 사람이고 그렇게 탈렌트(재능) 많은 사람이었는데 왜 그렇게 일찍 데려가시는지 모르겠어요. 오히려 제가 지금 70살인데 내가 갔으면 기쁘게 갔을 거예요." 노수사의 질문은 작년 이래로 나 역시 던지고 있는 질문이다. 작년 여름, 이태석 신부와 비슷한 연배의 내 인생의 멘토를 세칭 '묻지마 살인'으로 잃은 후 나 역시 왜 그렇게 일찍 데려가셔야만 했는지 아픈 질문을 던지고 있다. 공교롭게 두 분 모두 헌신적인 의사였다. 내가 죽는 날까지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이태석 신부를 보며 그 분을 떠올렸고 다큐의 한 대목처럼 사람이 사람에게 꽃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진실로 깨달았다.

 

                이태석 신부(1962-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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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0-10-27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타깝네요. 저런 분들이 많이 계셔야 하는 것이 지금 한국 교회의 실정인데. 개인적으로는 무교회주의자인 우치무라 간조와 그에게 영향을 받은 함석헌 선생을 존경합니다. 그리고 하버드대의 하비 콕스 박사의 기독교 책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데 요즘 그의 명작 '세속도시'가 출판됐다고 합니다. 제가 꼭 읽고 싶은 책 중 하나입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10-27 11:34   좋아요 0 | URL
<세속도시>는 관심이 가는 책입니다. 소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우찌무라 간조는 책 두어권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근래는 그의 민족주의를 비판적으로 봐야하지 않나 생각도 해보구요. 함석헌은 연구와 고민이 많이 필요한 분이죠.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참 좋았습니다.

루쉰P 2010-10-27 14:09   좋아요 0 | URL
하비 콕스의 '예수, 하버드에 가다'도 읽었는데 하버드대 재임 당시 종교 분야를 맡은 콕스가 젊은 친구들에게 어떻게 종교를 그리고 예수를 알려갈 수 있을까 하고 고심하며 수업을 진행한 수업 결과물입니다. 이 수업의 특징은 기원의 시작때 쓰인 예수의 가르침이 지금 현대를 사는 젊은이와 우리에게 어떤 답을 내려줄 수 있는지에 대한 현대 청년들과 하비 콕스 교수의 연구서라고 할까요. 아주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10-27 14:26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그 책도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갈증이며 샘물인 문학과지성 시인선 226
정현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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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 강연회에서 정현종 시인은 가스똥 바슐라르와 파블로 네루다를 에둘러가 자신의 시론(詩論)을 말하고 있다. 바슐라르와 네루다를 함께 틀거리지을 수 있는 건 뭘까? 개인적인 생각은 '가벼움'이 아닐까 한다. '공기와 꿈'을 말하는 바슐라르다. '내 양말을 기리는 노래'를 부르던 네루다이다. 바슐라르와 네루다에서 보여지는 가벼움은 경박함과는 다르다. 마음은 충만하되, 몸은 날래다.  

  정현종의 시도 가볍고 날래다. 그는 시가 서정일 뿐임을 확신한다. 그래서 정현종의 시는 시답다. 이 시집에 실린 그의 날랜 시 한 편이다.

   
 

 <날아라 버스야> 

  

 내가 타고 다니는 버스에 

 꽃다발을 든 사람이 무려 두 사람이나 있다! 

 하나는 장미-여자 

 하나는 국화-남자. 

 버스야 야무데로나 가거라. 

 꽃다발 든 사람이 둘이나 된다. 

 그러니 아무데로나 가거라. 

 옳지 이륙을 하는구나! 

 날아라 버스야, 

 이륙을 하여 고도를 높여가는  

 차체의 이 가벼움을 보아라. 

 날아라 버스야! 

 
   

  버스 차체도 가볍게 날려 버리는 정현종이다. 날랜 우리 시인은 인간이 갖는 가장 무거운 질문인 죽음에 대해선 어찌 생각할까? 강연회에서 사회자가 정현종에게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느냐고 물었다.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던 시인이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날랜 우리 시인이 죽음이라는 무거운 질문 앞에선 멈칫하고 있다. '잘 모르겠'다니 좀 더 알게되면 그의 시를 다시 읽고 싶다. 언제쯤 정현종의 전언을 무거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정현종(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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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10-26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딩이었던 제 아들이 엄마 생일 선물로 사다준 첫 시집이 정현종의 <고통의 축제>였어요. 왜 이 시집을 샀느냐고 물었더니 제목이 멋있어서 샀다고 하더라구요. 10여년이 지난것 같은데 저는 아직도 이분과 친해지지를 못햇어요. 좀 노력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10-26 10:33   좋아요 0 | URL
아드님도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하네요^^. 시집을 주고 받는 모자의 모습이 아름답게 그려지네요.
저도 집에 정현종의 시집이 몇 권 더 있는데, 잘 안 읽어요. 실은 그리 좋아하는 시인도 아니구요. 요번에 강연회에서 강연을 들은 기회로 뽑아들어 봤어요. 좋은 시간이 되었구요.
 
창작과 비평 149호 - 2010.가을
창작과비평 편집부 엮음 / 창비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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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준필의 <백낙청 리얼리즘론의 현재성과 문제성>을 읽었다. '리얼리즘론'에 대해 말한다지만 내겐 '백낙청 소론'으로 읽혔다. "문학엔 서사도 없어지고 비평도 사라졌다."는 한 언론인-김선주-의 말처럼 비평의 의미를 묻기 힘든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서 40년 가까이 문학자와 비평가로 살아가는 한 문학인에 대한 후배 문학자의 경모가 글 사이에 숨어 있는 듯 하다.  

  백낙청의 리얼리즘론이 '변혁적 중도주의'라는 방법론으로 확장되고 '지혜의 시대'를 열어가는 데 밑절미가 된다는 게 소론의 요지일 듯 하다. 그런데 확장과 밑절미가 되는 과정을 바라보며 류준필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선 백낙청의 원불교 수련과 로런스에 대한 공부를 언급해 주었으면 했는데 없어 아쉬웠다. 백낙청은 90년대 중반부터 원불교에 관련한 글들을 써온 걸로 아는데 류준필의 눈이 거기까진 미치지 못했나 보다. 또 리얼리스트 로런스가 <묵시록(Apocalypse and the Writings on Revelation)>을 썼던 걸 생각하면 평생 로런스를 공부했다는 백낙청의 지금 모습이 그리 기이해 보이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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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지 2010-10-22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언론인에게 진중함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것인지 모르겠지만, 지금도 문학의 가능성에 자기 삶을 바치는 작가와 비평의 재생을 꿈꾸는 이론가들이 매진중인데... 그런 소중하고 묵묵한 노력들을 귀하게 여기고 의미화하는 글들이 오히려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백낙청 선생이 그런 종교적 이력을 갖고 계신 줄은 닥나무님 덕에 알게 되었네요.. 과연 그럴 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 보면 닥나무님께선 남다른 고증가적 안목이 분명 있으신 듯^^!

파고세운닥나무 2010-10-23 00:43   좋아요 0 | URL
김선주 기자 칼럼은 경박한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을 말하는 거였어요. 문학도 그리 변하는 걸 아쉬워하며 쓴 대목인데,저 부분만 따오니 그리 읽힐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제가 종교가 있어서인지 어떤 종교든 종교에 관심이 있는 문학인을 보면 반가워요. 백낙청 선생은 원불교 경전을 영역하기도 했다고 해요. 본인은 겸사로 부인만 따라 다닌다지만 그 공부와 수련이 만만찮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면이 좌파 비평가들의 눈엔 거슬릴테구요.
강성좌파 비평가인 테리 이글턴이 근래 신학과 관련한 책을 많이 내던데요. 한 비평가는 그 현상을 두고 '신학의 귀환'이라고 말하더군요. 동양의 종교든,서양의 종교든 문학과 종교에 대해선 고민해볼 가치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2010-10-25 0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5 0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휴전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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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쟁은 끝났잖아요." 나는 반박했다. 그 몇 개월간의 휴전 기간을 살았던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는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보편적인 의미에서 전쟁은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쟁은 늘 있는거야." 모르도 나훔의 잊을 수 없는 대답이었다.(77-78면)

 
   

 <휴전(La tregua)>은 아우슈비츠에서 구조된 프리모 레비가 이탈리아 집으로까지 돌아오는 과정을 그린 수기이다. 서경식은 이 책의 말미에 있는 해설에서 <휴전>을 '자전적 소설'이라 말하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휴전>과 비슷한 시기에 번역된 <지금이 아니면 언제?(Se non ora quando?)>를 함께 읽었는데 뒤의 책은 소설이 맞겠다. 소설이 워낙 잡식성이긴 하지만 <휴전>은 기록에 대한 작가의 의지가 더 강한 듯 하고, 아우슈비츠 기록인 <이것이 인간인가(Se Questo e' un Uomo)>의 속편이라는 점을 보더라도 산문으로 보는 게 맞다는 생각이다.   

  위에 인용한 대목은 작가가 책의 제목을 가져온 부분이기도 하고 이 책의 주제가 담긴 부분이기도 하다. 레비와 대화를 나누는 모르도 나훔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그리스인이다. 이 리뷰를 쓰기 전 읽었던 블로거 'bari_che'님의 서평은 나훔이라는 이름이 갖는 의미에 대해 탁견을 보여주고 있다. 그 의견에 몇 마디를 보태본다. 나훔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로 <나훔서>의 저자이다. 그는 당대의 강대국인 아시리아와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괴롭힌 대가로 멸망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의 신에게, 그는 이스라엘에겐 구원을 적국엔 벌을 내려줄 것을 기도하고 있기도 하다. 나훔이란 이름은 '위로하는 자'란 뜻이다.  

  레비는 왜 이 그리스인에게 나훔이란 이름을 붙였을까? 내 생각에 <휴전>의 나훔 역시 선지자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났"다는 레비의 말에 "전쟁은 늘 있는거야."라고 말하는 그는 분명 선지자이다. 미래를 먼저 보고 아는(先知) 이가 선지자라면 분명 그의 예언은 정확하다. 전쟁은 진정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지자 역할보다 중요한 것은 레비의 비극적 세계관이 나훔에게 덧씌워지는 걸 확인하는 대목이다. <구약성경>의 나훔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야훼의 말씀이시다. "유다야, 적의 병력이 아무리 많고 강하여도 내가 낫질하듯 없애버리리라. 이제까지 나는 너를 너무 괴롭혔다. 이제 다시는 너희를 괴롭히지 아니하리라. ... 야곱의 포도덩굴. 그 이스라엘의 자랑을 적들은 짓밟고 털어갔었다. 그러나 야훼께서 그 포도원을 다시 일으키시리라."(<나훔서> 1장 12절, 2장 3절) 악의 화신인 아시리아에 대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는 야훼인데 <휴전>의 나훔은 전혀 그렇질 않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라거-강제 수용소-를 세계의 역사와 나의 역사의 어떤 추악한 변형으로, 괴물스러운 뒤틀림으로 인식한 반면, 그-모르도 나훔-는 이미 알려진 사실들의 슬픈 확인으로 인식했다. '전쟁은 늘 있다', '인간을 잡아먹는 늑대는 바로 인간이다'라는 오래된 이야기였다.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보낸 2년에 대해서는 나에게 결코 말하지 않았다.(78-79면)

 
   

  전쟁은 늘 있다. 악의 화신 역시 심판받지 않고 늘 있을 뿐이다. 괴물도 늘 있다.  레비는 다른 자리에서 이런 말도 남긴다. “괴물이 있긴 하다. 그러나 그 수가 많지 않아 그리 위험하지 않다. 실제로 위험한 것은 의문을 품지 않고 무조건 믿고 행동하는 평범한 기계적 인간들이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 늑대인 한 전쟁은 늘 있다. 나훔이 레비에게 아우슈비츠의 2년에 대해 말하지 않는 이유는 무얼까? 아우슈비츠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종전이 아니다. 휴전일 뿐이다.   

  악의 도시 니느웨를 향해 선지자 나훔은 저주한다. "피로 절은 이 저주받을 도시야. 협잡이나 해먹고 약탈을 일삼고 노략질을 그치지 않더니. ... '나 이제 너를 치리라' 만군의 야훼께서 하시는 말씀이시다. ... 네 상처는 나을 길이 없고 얻어터진 자리는 아물 길이 없다. 내내 너의 행패를 당하던 사람들이 네가 망했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 손뼉을 치며 고소해하리라." (<나훔서> 3장 1절, 5절, 19절) 레비는 자신에게 지옥을 보여준 독일이란 나라의 한 도시 뮌헨-그에겐 현대판 니느웨가 아니었을까?-를 보고 무어라 말할까?  

   
 

독일의 한 자락을 느낀다는 사실은 피곤함에 더하여, 견딜 수 없는 초조함과 좌절과 긴장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심정을 가중시켰다. 우리는 독일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을 것 같았다. 엄청난 것들을 말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독일인 각각은 우리에게 할 말이 있을 것 같았다. ... 아우슈비츠에 대해, 자기 집 문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일상적으로 자행된 조용한 대학살에 대해 '그들'은 알고 있었던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길을 가고 집으로 돌아와 자기 자식들을 바라보고 교회의 문턱을 넘어 들어갈 수 있었단 말인가? 만약 아니라면 그들은 경건하게 우리에게서, 나에게서 모든 것을 당장 들어야 하고 배워야 한다. 그래야 한다. 나는 내 팔에 문신으로 새겨진 숫자가 쓰라린 상처처럼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을 들었다.(322-323면)

 
   

  니느웨를 향하여 심판을 말하며 저주를 퍼붓던 나훔은 행복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처럼 진정 위로하는 자였다. 우리의 모르도 나훔과 프리모 레비는 위로하는 자일 수 없다. 위로의 내용은 거짓이고, 하여 그 위로는 기만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레비는 그저 수인번호 174517의 비명을 듣고만 있다. 비명은 독일인이 질러야 하는데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과묵하고 깔끔한 독일인들은 침묵을 지키고 레비의 팔에 새겨진 지옥의 번호는 비명을 지르고 있다. "나는 지옥을 보았고,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지옥과 괴물은 없고, 전쟁은 끝났다는 저들의 완고한 침묵 앞에 레비는 자살로 몸소 외쳤다. 지옥에서 돌아온 지 40년이 지난 후였다. 

 

                        Primo Michele Levi(1919-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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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10-19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경미씨의 책을 구입해서 읽기 시작했어요. 도입부의 글은 기독교사상 인가 하는

잡지에 기고한 글이어서인지 읽기 조금은 버거운 감이 있는데 책의 모든 글이 난해하지는

않겠죠.

좋은 책 추천 고맙습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10-19 18:12   좋아요 0 | URL
별 말씀을요^^; 좋은 책을 공유하게 돼 매우 기쁩니다^^

루쉰P 2010-10-24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파고세운닥나무님이 프리모 레비를 좋아하실 줄이야! 저도 저 책을 지금 사려고 벼르고 있는 중입니다. 프리모 레비의 팬이거든요. 저도 그의 책은 번역되는 족족 사서 읽었는데 '지금 아니면 언제'는 프리모 레비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좀 읽기가 어렵더군요. 뭐랄까 레비의 말하고 싶은 바가 소설로 표현돼 있어서 그런지 그의 강렬한 기억이 많이 안 읽힌다고 할까요? 암튼 레비는 제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가 왜 자살을 택했는지 그것이 서경식의 책을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가장 안타깝기도 하구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10-25 00:42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지금이 아니면 언제?> 읽으며 비슷한 생각 했어요. 아무래도 수기 형태의 글이 제겐 더 다가오는 듯해요.
프리모 레비의 죽음에 대해선 서경식 선생이 언뜻 짐작을 하며 얘기를 꺼내긴 하죠. 저도 위에서도 말했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가졌던 의사소통의 불능이 아니었을까해요. 서경식 선생의 표현을 빌자면 교양이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인데 더이상 사람들이 자신이 겪은 고통에 대해 상상하며,공감해주지 않고 마치 없던일인양 잊어버리라고 말하는게 고통스러웠을듯 해요.
짐작만 해봅니다. 자살 한해전에 펴낸 책이 아직 번역되지 않았는데 그 책을 접하면 실마리를 찾을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루쉰P 2010-10-25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보고 싶군요. 레비가 자살한 것이 어찌보면 현대인의 이기주의에 지쳐 버린 것은 아닐까 하고 님의 글을 보고 생각합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 참 말은 쉬운데 그러기 위해서는 얼마나 자신을 단련해야 할까요? 게다가 자신이 고통을 겪지 못하고는 타인을 이해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레비가 자살하기 한 해 전에 책이라.. 참 읽고 싶네요. 서경식 교수의 책도 남김 없이 사 읽었는데 뭐랄까 초창기에 쏟아 지는 책들에 비해 요즘 나오는 책은 좀 어렵고 난해하다고 할까요? 서경식 교수의 글도 레비의 글과 흡사한 면이 많이 있는 것 같아요. 논리적인 글과 수필적인 글이 옷이라면 아무래도 서경식 교수나 레비는 후자의 옷이 어울리고 더 글이 매력적으로 다가 옵니다. ㅋㅋㅋ 그냥 개인적 소견입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10-25 18:12   좋아요 0 | URL
그 책의 제목이 아마 <구조된 자와 가라앉은 자>인데, 돌베개출판사에서 계약해 출간을 준비하고 있답니다. 무척이나 기다리고 있습니다.
맞아요. 서경식 선생과 프리모 레비가 닮은듯도 해요. 사랑하고 좋아하면 닮아간다는데 레비의 문체를 서경식 선생이 닮아가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레비가 특히 상처받은 건 독일인들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아직 자신은 그들을 용서하지 못했는데, 이젠 용서를 강요하는 사람들에게 자살로 소리를 쳤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창동의 영화 <밀양>과도 비슷하죠. 피해자는 용서하지 않았는데, 가해자가 용서받았다며 해방감을 느끼니 말이죠.

루쉰P 2010-10-27 19:40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돌베게에서 계약을 맺고 출간 준비를 하고 있군요. 정말 좋은 소식만 주시니 감사하네요. 레비는 독일인 뿐만 아니라 인간 자체에 대한 회의를 느꼈을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레비 생존 당시 유태인 나라 건설이라는 목적으로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을 침략해 나치가 했던 일을 그대로 반복하는 모습을 레비는 지켜 봤으니까요. 말을 해도 글을 써서 알려도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는 인간에게 염증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하고 생각힙니다. 가해자가 용서받았다며 해방감을 느끼는 것도 그런 종류겠죠.

파고세운닥나무 2010-10-28 01:04   좋아요 0 | URL
레비의 또다른 책인 <멍키 스패너>도 계약해 번역을 준비중이랍니다. 제목을 보니 레비의 전공을 살린 작품이 아닐까 해요. 기계화된 인간을 다루지 않을까 싶구요.
레비가 인간 모두에게 실망했으리란 말씀에 동의합니다. 레비의 표현처럼 괴물 밑에서 얌전히 일만 해대는 기계적 인간이 많아짐을 그는 두려워 했을 거예요. 그의 메시지가 어느 순간부터 전해지지 않자 극단적인 행동을 감행했으리란 생각을 해 봅니다.

루쉰P 2010-10-29 17:38   좋아요 0 | URL
아 정말 빠른 시간 안에 레비의 책들이 빨리 출판 됐으면 좋겠네요. 너무 기다려 지네요. 어찌보면 홀로코스트라는 상징이 이 세상 어디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읽혀지는 것 같기도 하구요. 고등학교 때 실업계를 나았습니다. 거기 급훈이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 였죠. 나치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반어적 표현을 쓴 것과 흡사하다고 할까요? 레비의 책은 읽을 수록 더 반복해서 읽게 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더 좋아하는 작가구요. 파고세운닥나무님 덕분에 왕창 좋은 소식 많이 얻어 갑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10-29 18:09   좋아요 0 | URL
근래 일과 노동의 의미에 대해 고민할 때가 많습니다. 수용소에 걸린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노동의 끝은 죽음이죠. 그 수용소에서 노동을 열심히 하다보면 다치거나 아파 노동을 할 수 없게 되고, 결국 죽음을 맞게 되죠. 노동의 끝은 자유가 아닌 죽음이죠.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저 구호를 믿고 사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자유를 얻기 위해 노동을 하지만 결국 우리를 기다리는 건 자유가 아닌 죽음이 아닐까 해요.
참 어려운 문제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