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드디어 이해했는가? 이해하기를 원하는가······  위대한 싸움은 이제껏 바로 이것밖에 없었다. 르네상스의 문제 제기보다 더 결정적인 문제 제기는 이제껏 없었다.
 - 니체, 『안티 크리스트』중에서

 * * *


어떤 분야에서든 그 분야를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가 한 권쯤 있기 마련인데, 르네상스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인 대작이 바로 야콥 부르크하르트가 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입니다, 이 책의 저자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의 대사제()>라는 영광스러운 칭호가 뒤따를 만큼 르네상스에 관한 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인물인데, 특히 철학자 니체와 각별한 인연을 지닌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개신교 성직자 집안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신학 공부가 자신의 길이 아님을 깨닫고 이내 역사학 분야로 눈길을 돌렸고, 주로 역사학, 예술사, 문헌학, 고전학 연구에 몰두했으며, 마치 '원 클럽 맨'처럼 학자로서의 경력 대부분을 오로지 바젤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는데 바쳤습니다.



1858년에 바젤대학교 역사학 정교수로 부임한 그는 10년 후 그곳에서 니체를 만납니다. 새파란 청년이었던 니체가  고전문헌학 교수로 처음 그 대학에 부임했기 때문이지요. 부르크하르트보다 무려 스물여섯 살이나 어렸던 니체는 까마득한 선배 교수인 저자로부터 크나큰 영향을 받습니다. 아쉽게도 니체는 교수 생활 10년 만에 오로지 철학에 전념하기 위해 바젤 대학을 미련없이 떠나지만, 저자는 니체가 떠난 후로도 무려 36년 동안이나 그 대학에 남아 역사 강의에만 몰두했습니다. 저자는 훗날 니체로부터 '야콥 부르크하르트 때문에 인문학이 발전했다'는 극찬을 받을 정도로 역사에 큰 자취를 남기게 됩니다.


"정말 진귀한 그 예외 중의 한 명이 바로 바젤 대학에 있는 나의 경외하는 지기인 야콥 부르크하르트이다 : 바젤 대학이 인문학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그의 덕택이다."  - 니체, 『우상의 황혼』


(스위스, 바젤대학교)


이 책은 발표 즉시 기념비적 대작이 되었습니다. 이 책에 담긴 내용은 이미 책의 제목에 명백히 규정되어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그렇습니다. 시기는 바로 르네상스 시대이며, 장소는 이탈리아, 다루는 핵심 주제는 문화사입니다. 르네상스가 도대체 무엇이며, 그 문예부흥 운동이 왜 하필이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났는지, 또한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의 문화, 더 나아가 유럽 전체와 근대 세계를 어떻게 광범위하게 변화시켰는지가 이 책이 다루는 핵심 주제입니다.


이 책과 저자에 대한 명성은 굳이 니체의 몇몇 철학책 후미진 구석에서 그의 이름을 찾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널리 인정받아 왔는데, "르네상스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창조물이다."(독일에서 편찬된 『세계사 대계』)라는 문장만 보더라도 금세 이해할 만합니다. 저자가 이 책에서 펼쳐놓은 르네상스 연구는 학계에서 하나의 정설로 통념화된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대한 최초의 생각'을 떠올린 건 1847년에 로마를 방문하였을 때였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폐허의 도시 로마'는 숱한 시인들과 역사가들에게 '특별한 명상'에 잠기게 만든 도시였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 인물인 페트라르카와 단테는 물론, 훗날『로마제국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이나 니부어에 이를 때까지도 '폐허의 도시 로마'를 휘감던 공기와 저녁 노을은 '불현듯' 천재들로 하여금 웅편거작들을 쓸 결심들을 계속 불러일으켰던 셈입니다. 단테의 말대로 로마는 그만큼 특별했으니까요.


"로마 성벽의 돌들은 당연히 경외심을 품고 대해야 하고, 이 도시를 떠받치고 있는 대지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 이상으로 귀중하다."


(로마 유적지)


사실 부르크하르트 이전에도 르네상스라는 용어와 개념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이 개념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들은 마키아벨리, 에라스무스, 클로드 졸리, 볼테르, 괴테 등이 꼽힙니다. 이들 가운데 볼테르와 괴테는 거의 '르네상스의 역사'를 쓸 뻔했을 정도로 '르네상스 개념'에 정통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훗날 『중세의 가을』, 『호모 루덴스』 등의 작품을 쓴 네덜란드의 세계적인 역사가 요한 호위징아는 볼테르가 『르네상스의 시대』또는 그와 유사한 제목의 역사서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시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볼테르는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결정적으로 '이탈리아'에 대해서 거의 모르고 있었다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결국 오늘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견해는 부르크하르트야말로 르네상스 개념을 가장 먼저 학술용어로, 또 일반적인 교양언어로 만든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애초에 부르크하르트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르네상스 시기의 예술사와 문화사를 결합하고자 하는 웅대한 구상을 품고 방대한 연구에 착수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토록 야심찬 연구 작업이 끝내 완결에 이르지 못찬 채 교착 상태에 머물던 중, 그는 결국 예술사 부문(회화,건축,조각)을 따로 떼어내고 문화사를 다룬 책으로 체계를 바꿔 이 책을 출간하는데, 그 과정이 어찌나 지난했던지 저자 스스로 이 작품을 두고 '역경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별칭으로 부를 정도였다고 합니다. 

(비너스의 탄생)


그는 이 작품에 특별히 시론(試論)이라는 부제를 붙였는데, 그 이유는 그가 언제나 스스로 비전문가임을 자처하면서 전체에 대한 조망 능력을 지닌 '딜레탕티즘'을 강조하는 성향을 지녔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그가 이 작품 초판본을 두고 고교 은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표현한 대로, '기존의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은, 마치 거친 들에 피어난 야생화와도 같으며, 저자가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할 기회를 가졌고 사료의 기록을 멋지게 활용하고 있다고 믿을 만큼' 자신의 작품에 대해 남다른 자부심은 지녔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벽한 역사서로 내세우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부르크하르트가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은 자신의 사후 출간된 작품인『세계사적 고찰』에서 제시한 포텐츠론(Potenzenlehre)으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즉 역사는 국가 · 종교 · 문화라는 세 개의 잠재력들(Potenzen) 사이의 규제 · 견제 · 대립 · 포괄 · 보완 등 변증법적 상호작용 속에서 하나의 통일적인 상을 형성해간다는 역사이론입니다. 이 책은 크게 6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당시의 정치 상황은 '제1부 '인공물로서의 국가'에서 다루고, 문화 상황은 제2부에서 제5부에 이르는 '개인의 발전' '고대의 부활' '세계와 인간의 발견' '시교와 축제'에서 다룹니다. 마지막 제6부 '관습과 종교'에서는 당시의 사회 풍습과 종교 상황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의 핵심을 이루는 내용들은 주로 '문화'를 다루는 장들에 담겨 있습니다. 고전과 고대의 부흥을 통한 인간의 자아와 세계의 발견, 그에 따른 개성의 성장, 자유주의와 인문주의의 발전 등은 우리가 흔히 르네상스에 대해 갖고 있는 기본 개념들을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부르크하르트의 서술이 특히 빛나는 대목은 '르네상스의 문화'를 설명하기 위해 당시의 정치 상황과 도덕적 풍조와 윤리 관념을 포함한 '관습과 종교'를 함께 고려하여 입체적으로 세세히 조명한다는 점입니다.

(미켈란젤로, 다비드)



수많은 교황과 황제가 끊임없이 반목과 견제를 주고 받으며 대립하는 당시 이탈리아의 특수한 정치 상황에 대한 저자의 해박한 연구와 묘사는 독자들을 단번에 르네상스 시대의 궁전과 교황청 안으로 바싹 끌어당길 만큼 아주 생생하면서도 자세합니다. 굳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나 단테의 『신곡』가운데 유명한 대목들을 따로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당시 이탈리아의 극도로 혼란스럽고 드라마틱한 정치적 격변 상황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메디치 가문에 대한 숱한 암살 음모, 교황의 사생아였던 체사레 보르자의 상상을 초월하는 잔악무도한 학살극, 온갖 잔혹한 군소국가 폭군들의 횡포와 만행, 용병대장들의 천인공노할 배반과 찬탈 등은 셰익스피어의 역사극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하면서도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체사레 보르자)



르네상스의 문화가 봄을 맞은 자연처럼 사방에서 화려한 꽃을 피우던 시대에 당시 이탈리아 사람들의 정신적인 풍토와 사회적인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도 중요하게 다룹니다. 언어와 관습, 사교와 축제, 가족과 결혼, 음식과 질병 등 아주 디테일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사회상을 그대로 들여다 보는 듯한 저자의 설명은 '관습과 종교'에 더없이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배우자의 부정에 대한 복수극, 수도사와 참회 설교사들의 타락, 점성술과 마법이 만연하던 풍조,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확산, 갈수록 타락하는 종교에 대한 불신과 세속화 등은 숱한 풍속화와 전기(傳記) 또는 문학 작품 속 묘사 등에 대한 설명과 전거 자료를 통해 탄탄하게 뒷받침되어 있습니다.

저자가 이 책에서 핵심으로 내세우는 주제는 '이탈리아인들의 내면 세계에 대한 탐구'로부터 도출됩니다. 왜 하필이면 이탈리아 사람들이 르네상스의 주역으로 등장하여 '유럽의 근대를 탄생시킨 원동력'으로 이어졌느냐 하는 문제를 단순히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몇몇 천재들, 가령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마키아벨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문예활동을 적극 지원한 몇몇 탁월한 교황과 군주들의 존재 덕분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극도로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은 개인이 권력을 얻고 사회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 자신의 능력과 재능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전통적 기준이나 권위로부터의 해방이 곧바로 개인주의가 싹트고 성장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었습니다. 개인의 가치가 중시되면서 수많은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과 개성 넘치는 다양한 인간들이 자신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열심히 찾았는데, 이탈리아 사람들의 내면 깊숙하게 자리잡은 '개성 강한 민족성' 또한 그러한 경향을 더욱 부추겼습니다.

중세 암흑시대에 교회 건축물의 무게에 깔려 땅속에 묻히고 질식했던 수많은 고대 그리스·로마 고전에 대한 재발견 만으로도 이탈리아는 이미 르네상스에 관한 한 다른 나라들에 비해 절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있었습니다. 라틴어가 광범위하게 학습된 점도 크나큰 이점이었습니다. 빛나는 로마 시대를 장식했던 인물들, 가령 베르길리우스, 오비디우스, 키케로, 리비우스 등이 남긴 탁월한 작품들도 '개성의 발견'에 중요했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에겐 '고대 로마'가 그들의 영광스러운 과거였다는 '끈끈한 유대감'부터 남들과 달랐습니다. 제노바 사람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일로 대표되는 지리적 탐험 외에도 갈릴레오로 이어지는 자연 과학의 진보 또한 이탈리아에서 유독 눈부셨습니다.

부르크하르트의 '세계와 인간의 발견'은 일견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가 쓴『총·균·쇠』의 일부 대목들을 연상시킬 때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부르크하르트가 이탈리아 국민들의 '세계와 인간의 발견'에 대한 선구자적 역할을 다이아몬드 교수와 유사한 방식으로 쉽게(?) 결론을 도출하지 않는 점이 도리어 매력적입니다. 주로 '이탈리아의 지리적 이점'에 힘입어 이탈리아인들이 그런 식으로 움직였던 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 가령 베네치아와 나폴리, 피렌체와 제노바 등이 지중해를 가까이 끼고 있는 덕분에 일찍부터 드넓은 세계와 활발히 접촉할 수 있었다는 점을 누가 모를까요. 그러나 부르크하르트는 줄곧 이탈리아 사람들의 내면 세계에 자리잡은 독특한 민족성과 개인의 삶을 중시하는 심리 등을 보다 더 근본적인 '르네상스의 원동력'으로 예민하게 포착합니다.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 에 대한 연구는 너무나 방대하고 세세한 문헌 자료까지 모조리 들춰보는 방식으로 치밀하게 이뤄졌습니다. 그래서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에 대한 예비 지식을 미리 어느 정도 갖추지 못한 일반 독자들에겐 저자가 쓴 평범한 문장들을 읽을 때조차 편안한 호흡으로 따라가기 벅찰 때가 많을 정도로 전문적입니다. 그래서 저자가 경쾌한 속도로 가볍게 서술하는 문장들을 읽을 때조차 우리에게는 몹시 생경한 인물이나 지명 혹은 낯선 용어들 때문에 당황할 때도 많습니다. 또한 문장들과 행간 곳곳에 숨겨진 의도적인 생략과 압축뿐 아니라 다양한 함축과 비약들도 독자들에겐 호흡이 벅찰 정도입니다. 이런 측면들은 아무래도 독자와 저자와의 사이에 존재하는 '지식 수준의 현격한 차이' 때문이므로 누굴 탓할 수도 없는 문제입니다.

로는 저자가 수십 권 혹은 수백 권의 책들을 샅샅히 찾아 읽고 연구한 내용들조차 불과 몇 줄의 문장 속에 뭉뚱그려놓으면서 간략하게 짚고 넘어갈 때도 적지 않은 듯합니다. 숱하게 옆길로 샐 수 있는 '군더더기 설명의 유혹들'을 저자는 매번 단호하게 뿌리치고 잘도 넘어갑니다. 그럴 때마다 저자는 우리에게 친절한 안내를 덧붙이곤 합니다. 그런 부분들까지 세세하게 탐구하고 분석하는 일은 이 책의 과제가 아니라고 말이지요. 그러니 이 책 한 권을 쓰기 위해 저자가 읽은 책이 족히 수백 권을 넘어 수천 권에 이를 정도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생겨날 정도입니다.

가령 다음과 같은 대목을 읽고 저자의 끝모를 탐구심과 놀라운 상상력에 전율을 느끼지 않을 독자가 몇이나 될까요.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만사를 이룰 것이니, 그는 수고도 위험도 손해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나 자신을 통해 시험해본 결과 다음의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이 강렬한 원동력에서 출발하지 않는 인간의 행동은 헛되고 무의미하다고." 물론 구이차르디니의 일생을 기록한 다른 문헌들을 읽어볼 때, 그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명성이 아닌 명예심이라는 점을 덧붙여두어야 하겠다.

그러나 이 문제를 그 어떤 이탈리아인보다 날카롭게 지적한 사람은 라블레이다. 물론 나는 이 이름을 우리의 연구에 끌어대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 이 비상하고 언제나 괴이쩍은 프랑스인이 남긴 글들은 형식과 미가 없는 르네상스가 어떤 모습일지를 대략이나마 알게 한다. 하지만 텔렘 수도원의 이상향을 그려낸 그의 글은 문화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작품이라서, 여기에 들어간 최고의 상상력이 없었다면 16세기의 모습은 불완전했을 것이다.

라블레의 작품에 나오는 자유의지의 수도회 남녀들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들의 규칙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 그것뿐이었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훌륭한 친구와 사귀는 자유로운 사람들은 덕을 행하고 악을 피하는 본능과 충동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리켜 그들은 명예라고 불렀다."

이것은 18세기 후반기를 고무하여 프랑스 혁명에 길을 터준, 인간 본성의 선함에 대한 바로 그 믿음이었다. 이탈리아인도 저마다 자기 안에 있는 고귀한 본성에 눈을 돌렸다. …… (519∼520쪽)

(라블레)


결국 이 책은 전체적으로 일반화해서 얘기하자면 '무엇에 대해 내막을 잘 아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쓰여진 몹시 전문적인 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책이 다루는 핵심 주제인 '르네상스'가 인류 역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한번쯤 심각하게 고려해 본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실망시키지 않을 만큼 '르네상스'에 대해 충분히 방대한 연구와 예리한 관찰들을 놀라운 필치로 그려낸 작품이 바로 이 책이라는 사실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이 책이 전문적이면서도 방대하고 예리하지만 읽기가 그리 쉽지는 않다는 점은 이 책의 단점이자 또한 장점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류의 '생각의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놀라운 시기였던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대한 숱한 놀라운 이야기가 이 책에 거의 다 담겨 있다고 봐도 좋습니다. 무려 1,167개에 달하는 방대한 주석은 부르크하르트의 연구의 깊이를 방증하고도 남습니다. 이처럼 방대한 주석이 딸린 책으로는 막스 베버의『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도 빼놓기 어려운데, 그 책에 딸린 저자와 역자의 주석을 모두 합하면 1,242개나 됩니다.



막스 베버도 그의 명저에서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이 책을 인용한 적이 있었습니다. 베버는 '이 한 줄이 너의 해석을 천 년 동안 기다려 왔다, 라는 마음가짐이 없다면 학문을 하지 말라'고 말했는데, 물론 그 말은 부르크하르트에게 적용해도 충분히 타당한 말이었습니다. 이것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에 대한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



 * * *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22-02-10 00: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렌 님 오랜만의 유튭 잘 보겠습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을지요.

oren 2022-02-10 11:51   좋아요 2 | URL
영상이라는게 생각보다는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라서 완제품을 출하하는 데 예상외로 많은 시간이 들어가더라고요. 초벌구이식으로 뚝딱뚝딱 대충 만들고 나면 어디 손 볼 데가 한두 곳이어야 말이지요. 때로는 녹음도 다시 하게 되고, 대본도 뜯어고치게 되고, 영상의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더 좋은 그림들을 자꾸 더 뒤져보게 되고요. 그래도 한 번 만들고 나면 오래도록 유튭 시장 한 모퉁이에서라도 자리 잡고 앉아 구경꾼들에게 내보일 물건이니, 먼 훗날까지도 혹시나 찾아올지 모르는 미지의 손님들한테 낯부끄럽지 않을 정도로는 다듬어야겠다 싶고, 다른 한편으로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뒷전으로 떠밀리는 느낌이 드는 텍스트보다는 그래도 지금 만드는 영상물이 그나마 좀 더 쉽게 검색되고 노출될 터이니, 제작 과정 자체를 즐기는 마음으로 영상을 만들고 있답니다. 늘 응원해 주셔서 감사해요.^^

mini74 2022-02-10 1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원동력 등 너무 정리가 잘 되어 있네요. 정말 대단하시기도 하고 책 소개도 좋고. ! 진정 북튜버십니다 !

oren 2022-02-10 11:58   좋아요 1 | URL
별말씀을 다하십니다요!! 야콥 부르크하르트가 쓴 이 책은 관련 업계(?)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책인가 본데, 저도 니체의 책을 읽기 전까지는 이런 책이 있다는 것도 몰랐답니다. 이 책은 한번 읽고 나서도 오래도록 여운이 남았는데, 그만큼 소화하기가 벅찬 책이기 때문이었겠지요. 마침 유튜브나 인터넷 포스팅 중에서도 이 책을 꼼꼼히 정리해 놓은 건 별로 없어 보여서, 이번참에 ‘이탈리아 여행을 가는 기분으로‘ 이것저것 그림들을 뒤져가면서 한번 만들어보았답니다. 관심있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양피지 쪽들에 호메로스가 다 담기다니!

일리아스와 오뒷세우스의 그 많은 모험이

프리아모스 왕국의 적이었던 오뒷세우스 말야!

그 모든 것이 양피 한 조각에 갇혀 버리다니

겨우 자그마한 몇 장으로 접은 양피 조각에!

 - 마르티알리스

 

 * * *

 

오늘은 몹시도 두꺼운 책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저도 언제부턴가 두꺼운 책들을 조금씩 넘보기 시작했더랬습니다. 아마도 제가 태어나서 거의 맨 처음으로 도전했던 두꺼운 책들은 지금 되돌아 보더라도 그저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책이었던 듯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처음으로 무모한 도전에 나섰던 두꺼운 책들은 무려(!)『일리아스』, 『오뒷세이아』, 『몽테뉴 수상록』, 『까라마조프 형제들』 등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둑으로 치자면 겨우 5,6급 정도의 실력밖에 안 되는 초급자가 프로 기사에게 맞바둑을 두자고 덤빈 꼴이었다고나 할까요?

 

어쨌든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의 상당히 기나긴 '특별 무소속 기간' 동안 이런 책들과 거친 씨름을 벌이기로 작정을 했더랬습니다. 비록 자세는 영 볼품없었지만 말이지요. 1970년대의 엄혹한 시절에 고등학교를 다녔던 탓에 제게 두발 자유화는 그저 먼 나라 이웃 나라의 얘기일 뿐이었습니다. 입시가 끝나고 입학이 다가올 때까지 겨울 내내 완전 무방비 상태로 무럭무럭 자라도록 내버려둬도 두발 상태는 별로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까까머리에서 조금 벗어난 듯한 어중간한 모습으로, 대학생으로는 도저히 봐줄 수 없는 그런 어설픈 시골 총각의 머리 모양새로(한 마디로 말하자면 '촌놈'으로) 저는 용감하게도 '트로이아 전쟁' 속으로 뛰어들었던 셈입니다. 군불을 넉넉히 지핀 시골집 온돌방에 배를 깔고 하루 종일 이불 속에서 엎드렸다 누웠다를 반복하면서 말이지요.

 

입시 과목과는 전혀 다른 책들인지라 어쨌든 꽤 여러 날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 책들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 책들은 오랫동안 저에게 잊지 못할 추억들을 남겨 주었습니다. 사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온갖 흥미로운 얘기들이 그 당시에 제게 얼마만큼 재미있게 다가왔었는지는 지금도 자신있게 말할 순 없습니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온갖 고대의 이름 모를 신들과 지명들과 인명들만 하더라도 제겐 얼마나 벅찼는지 모릅니다. '이걸 도대체 언제까지 읽어야 하나' 하는 회의감이 들었던 순간은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나마 한가지 다행스러운 점이 있었다면 그 당시에는 독서 환경이 지금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훌륭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책을 읽는 데 방해될 만한 요소는 일부러 찾을래야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으니까요.



마법상자 같은 TV라고 해봐야 기껏 서너 채널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밤 시간에만 볼 수 있었습니다. 시골에선 신문조차 구독하는 게 없었고, 흔해빠진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은 그 당시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환경 덕분인지는 몰라도 그럭저럭 그 두꺼운 책들을 꽤나 오래도록 붙들고 읽었더랬습니다. 그 책들을 정말로 끝까지 다 읽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아마도 완벽하게 다 읽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나마 『까라마조프 형제들』은 끝까지 다 읽고 나서 독후감까지 끄적거려 놓은 게 지금까지도 남아 있긴 합니다. 그래도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때의 무모한 도전이 내심 흐뭇하기도 하고 가상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 나이에 도대체 뭘 얼마나 안다고 그런 책들을 붙잡고 그토록 낑낑댔을까. 다시 생각해 봐도 제게 '두꺼운 책들'은 그저 호기심이나 의무감의 대상이었지 처음부터 흥미의 대상은 결코 아니었던 게 분명했습니다. 숱한 걸작 소설들 가운데 하필이면 『까라마조프 형제들』을 선택한 이유 또한 별 다른 건 딱히 없었습니다. 그저 우리집에 남자 형제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해서도 '두꺼운 책들'에 대한 괜한 욕심이 다시 발동했습니다. 그래서 찾아 읽은 책들이 (다시) 『몽테뉴 수상록』, 홉스의 『리바이어던』,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 허먼 멜빌의 『모비딕』, 스탕달의 『적과 흑』, D.H.로렌스의 『아들과 연인』, 괴테의 『파우스트』 등이었습니다. 그 무렵에 플라톤의 『국가』, 막스 베버의 『사회경제사』,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입문』, 슘페터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 등도 읽었습니다. 얇은 책들도 더러 읽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보잘 것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왠지 저는 그 나이에 그다지 썩 어울리지 않게(?) 웅편거작들에 꽤나 욕심을 냈던 것 같습니다.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학한 이후로는 아주 오랫동안 이상한 담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책과 나 사이에 쌓인 담은 아무런 노력 없이도 저절로 계속 높아만 갔습니다. 이래저래 '사회생활'로 아주 바빴던 탓도 있었고, 책 없이도 충분히 즐길 만한 일들이 너무 많았는지도 모릅니다. 술을 마시는데 쏟아부은 시간만 하더라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니 말이지요. 그런 시기에 무슨 이름난 대작들을 읽는다는 건 아예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 시기에 제가 읽은 '장편'이라고 해 봐야 이문열의 『 삼국지』나 조정래의 『태백산맥』정도가 고작이었습니다. 한때는 『소설 목민심서』, 『소설 동의보감』까지도 괜스레 대작으로 여길 정도였지요. 이때의 독서 편력은 제겐 이를테면 '중세의 암흑기'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책읽기에 살금살금 빠져든 게 대략 2003년 무렵부터 였습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나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너무나 흥미롭게 읽혔고, 그 여세를 몰아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는 물론이고,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 쓰인 작품들이라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찾아 읽었습니다. 까마득한 옛날에 세계사 책에서나 겨우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쓴 아주 오래된 고전들이 어찌나 재미있던지, 갑자기 '르네상스'를 맞이한 기분마저 느껴졌습니다. 호메로스, 헤로도토스, 투퀴디데스를 만나고 나니 제가 새로이 만나야 될 흥미로운 인물들이 책 속에서 마구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소포클레스, 아이스퀼로스, 에우리피데스, 아리스토파네스를 만나고, 키케로와 세네카와 플루타르코스를 만나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베르길리우스와 오비디우스를 잇따라 만났습니다.




그러고 나니 두꺼운 책들이나 어렵게 느껴지는 책들에 대한 두려움이 차츰 줄어드는 대신에 책 속에 담긴 묘한 비밀들이 차츰 엿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다름아닌 '텍스트와의 연관성' 때문이었는데, 수많은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차츰 '나도 이미 알고 있는 인물이나 이야기'를 예전보다 훨씬 더 자주 마주치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령 단테의 『신곡』속에서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만 만나는 게 아니라, 트로이아 전쟁에서 맹활약하던 아킬레우스와 오뒷세우스를 만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에서 몽테뉴가 했던 이야기를 다시 만나고, 톨스토이의 소설 속에서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속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다시 만나는 식이었습니다. 


그런 경험들은 차츰 철학으로도 번졌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속에서 무수한 고대 철학자들을 만나게 되니 자연스레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그리스 철학자 열전』을 찾아 읽게 되고, 오랫동안 정들었던 쇼펜하우어와 헤어지자 말자 이내 니체를 찾게 되고, 니체의 작품들 속에서 다시 고대 그리스의 비극시인들과 철학자들을 다시 만나는 식이었습니다.

 

이런 경험이 극한까지 치달았던 건 무엇보다도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만났을 때였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아무런 사전 준비작업도 없이 무모하게 제임스 조이스를 만나러 곧장 뛰어든 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을 이미 소개받은 적이 있었고, 그 풍요로운 『월든』 속에서 다시 호메로스, 헤로도토스, 오비디우스, 소포클레스는 물론 몽테뉴, 조너선 스위프트, 다니엘 디포, 허먼 멜빌 등등을 다시 만났고, 그런 교유 덕분에 비로소 저는 어른들이 읽는 『걸리버 여행기』와  『로빈슨 크루소』를 만날 수 있었는데, 그런 얽히고 설킨 만남 덕분에 저는 마침내 제임스 조이스를 만나러 갈 수 있었다고 믿습니다. 어렵사리 그를 만나고 나니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웅편거작에 대한 공포심'이 거의 다 사라진 듯한 느낌이 찾아왔습니다. 그토록 어려운 난관마저 뚫고 나왔는데 내 앞을 가로막을 책들이 더이상 뭐가 더 있단 말인가 싶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와락 다가왔다고나 할까요.



 

 

고귀한 지적 운동으로서의 독서

사람들은 장부를 기입하고 장사에서 속지 않기 위해서 셈을 배운 것처럼 하찮은 목적을 위해서 읽기를 배운다. 고귀한 지적 운동으로서의 독서에 대해서 그들은 거의 또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그것만이 진정한 의미의 독서인 것이다. 자장가를 듣듯이 심심풀이로 하는 독서는 우리의 지적 기능들을 잠재우는 독서이며 따라서 참다운 독서라고 할 수 없다. 발돋움하고 서듯이 하는 독서, 우리가 가장 또렷또렷하게 깨어 있는 시간들을 바치는 독서만이 참다운 독서인 것이다.(P150)


더 현명한 사람들과 사귀기를 갈망한다.

나는 우리 콩코드 땅이 배출한 인물들보다 더 현명한 사람들과 사귀기를 갈망한다. 비록 그들의 이름이 이곳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내가 플라톤의 이름을 듣고도 끝내 그의 저서를 읽지 않을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플라톤이 바로 우리 마을 사람인데도 내가 그를 한 번도 만나본 일이 없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이며, 그가 바로 옆집 사람인데도 그의 말을 들어보지 못하고 그 말의 예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런데 실상은 어떠한가? 플라톤의 《대화편》은 그의 영원불멸한 지혜를 담은 책이며 바로 옆 선반에 놓여 있는데도 나는 그 책을 거의 들추지 않는다.(P154)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고 나서는 '두꺼운 책들에 대한 두려움'이 일순간에 모조리 제거된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마음 속에만 담아 왔던 대작들을 향해 겁없이 뛰어들 수 있었습니다. 그 무렵에 덥석 붙잡은 게 『전쟁과 평화』였습니다. 이미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통해 '무모한 용기'에서 비롯되는 거대한 감동의 쓰나미를 충분히 맛본 터여서 『전쟁과 평화』는 '전쟁 보다는 평화 쪽으로' 아주 순조롭게 풀려나갔습니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트로이아 전쟁에서 뛰어난 장군이자 외교관이자 웅변가로 맹활약했던 오뒷세우스의 이야기를 그린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 대한 오마주이고,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침공에 대한 '러시아 민중들의 저항'에 대한 오마주로 볼 수 있다면, '최후의 그리스인'이라는 영광스런 칭호를 얻은 역사가 플루타르코스가 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이들 두 작품과는 사뭇 결이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야말로 고대의 무수한 전쟁터에서 실제로 벌어진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평화로운 시대를 살다 간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불굴의 용기와 지혜를 발휘한 위대한 인물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플루타르코스의 탁월한 문장력에 대한 명성은 이미 『몽테뉴 수상록』을 통해서도 눈과 귀가 아프도록 익히 들어왔던 터였고, 발췌 번역본인 천병희 선생님의『플루타르코스 영웅전』까지 읽었던 터라 '영웅전 전집'에 대한 심리적인 장벽 같은 건 별로 느끼지 못했더랬습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과연 명불허전이었습니다. 그토록 방대한 책을 단숨에(?) 완독하고 나서 곧바로 다시 집어들고 나서 (두 번째인 만큼) 아주 느긋하게 즐기면서 재독했던 일은 다른 책들에서는 좀처럼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었습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읽고 나서도 왠지 모르게 '두꺼운 책들'에 대해 뭔가가 모자라는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던 건 순전히 셰익스피어 때문이었습니다. 인류 최고의 시인이라고 불러도 조금도 이상할 게 없는 이 위대한 시인의 작품들을 읽지 않고는 어딘가 구멍이 뚫린 듯한 허전함을 도저히 메울 길이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는 동안에 제가 셰익스피어를 미리 만나지 못했던 일을 가슴 깊이 통탄했던 일들까지 생각하면 더더욱 셰익스피어를 미룰 이유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랄프 왈도 에머슨이 쓴 『위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통해서 이미 셰익스피어에 대해 제법 자세히 소개 받은 터였고, 에머슨이 남긴 명언까지도 심심찮게 떠올렸던 터였습니다.

 

“만일 전 세계의 도서관이 불타고 있다면 나는 뛰어 들어가 『셰익스피어 전집』과 『플라톤 전집』 그리고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구해낼 것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

 

셰익스피어를 읽고 나니 아주 잠깐 동안은 '두꺼운 책들에 대한 갈망'이 일순 가시는 듯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순전히 착각일 뿐이었습니다. 그건 마치 토마스 만의 소설 『마의 산』에 나오는 주인공인 23세의 청년 한스 카스토르프가 스위스의 다보스에 있는 폐결핵 요양원인 베르크호프에서 자주 겪었던 '수은주의 변덕'을 닮은 꼴이었습니다.

 

10월도 여느 달과 마찬가지로 시작되었다. 그 자체로는 완전히 겸손하고 소리 없는 시작이다. 신호도 표시도 없이 슬그머니 들어오는 바람에 눈을 부릅뜨고 주의하지 않으면 이를 쉽사리 놓쳐 버리게 된다. 시간에는 사실 눈금이 없고, 새로운 달이나 해가 시작될 때 천둥이 치는 것도 아니고 나팔 소리가 울리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기가 시작될 때 예포를 쏘거나 종을 치는 것도 인간뿐이다.(434쪽)

 

 - 토마스 만, 『마의 산_상권』, <제5장_수은주의 변덕> 중에서 

 

 

그랬습니다. 셰익스피어를 때론 힘겹게, 때론 너무나 가슴이 벅차 오르는 희열로 신나게 읽을 때도 있었으나, 현실 속의 저는 아직까지도 토마스 만의 『마의 산』도 오르지 못한 터였습니다. 아, 도저히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곧장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과 『마의 산』을 찾아 읽었습니다. 그런 후에는 소설계의 셰익스피어라 불리는 찰스 디킨스의 대표적인 장편소설들인 『위대한 유산』, 『데이비드 코퍼필드』, 『황폐한 집』을 내처 읽었습니다.



 

아... 그런데... 찰스 디킨스의 소설들은 너무나 재미있으면서도 예상 외로(?) 분량 또한 엄청났습니다. 도대체 찰스 디킨스의 소설들은 얼마나 긴 걸까? 이렇게 긴 데도 조금도 지루할 틈이 없어도 좋단 말인가?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찰스 디킨스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서머싯 몸'이 '세계 10대 소설'로 꼽은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생각보다 그리 많이 읽지 않는 걸까? 게다가 대다수의 문학평론가들로부터 찰스 디킨스의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고 평가받는 『황폐한 집』은 또 어떻고? 말 그대로 작품 자체를 '황폐한 집'으로 취급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고 이게 꼭 찰스 디킨스만의 문제일까? 톨스토이는?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니, 그렇다면 마르셀 푸르스트의 그토록 악명 높은 작품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도대체 얼마나 긴 걸까? 여기에 대한 합리적인 공통의 비교 잣대는 없을까?

 

이런 얄궂은 생각들이 마구 스쳐 지나갔더랬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꼭 한 번쯤 시도해 봤으면 싶었던 '나만의 작업'을 슬금슬금 시작했습니다. 굳이 이 작업에 대해 따로 제목을 붙이고자 한다면 '름난 웅편거작들의 작품 길이에 대한 소고'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글쎄, 이런 말은 너무 거창하게 들릴지도 모르니 그냥 대충 넘어가지요. 아무튼 재미삼아 만들어 본 그 결과물을 간단히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어쨌든 이 도표를 만들 때 '나만의 독창적이면서도 자의적인 판단'이 상당히 많이 개입됐음을 부인하긴 어렵습니다.  이런 표는 결국 '나 자신의 과거의 독서 경험과 미래의 독서 계획'을 일정 부분 반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그 점을 미리 충분히 확인한 뒤에 이 표를 살펴야 불필요한 오해를 줄일 수 있을 듯합니다.

 

1. 이 표는 이름난 걸작들을 똑같은 잣대를 써서 '물리적인 작품의 길이'를 서로 비교해 보는 게 주목적이다.

   그래서 똑같은 판형으로 출판된 '동서문화사 월드북 시리즈(총 275권)'를 기준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2. 여러 작품을 '합본'한 경우는 최대한 배제했다.

    예), 쇼펜하우어의 『세상을 보는 지혜』(1,023쪽),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국가/향연』(824쪽),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정략론』(665쪽), 카프카의 『성/심판/변신』(610쪽) 등

 

3. 여러 작품을 모은 '합본'이지만 (너무 중요한 작가여서) 예외적으로 포함시킨 작품은 딱 둘만 넣었다.

   예), 셰익스피어의 다섯 작품을 모은 책(655쪽), 니체의 다섯 작품을 모은 책(1,030쪽)

 

4. 단일 작품으로서의 통일성이 부족하거나, 비평가들로부터 평가가 다소 엇갈리는 작품들은 제외했다.

   예) 『아라비안나이트』(전5권, 5,336쪽), 『솔로몬 탈무드』(810쪽), 『그림동화전집』(1,344쪽) 등

 

5. 분량이 방대한 작품을 중심으로 길이를 비교하는 게 주목적이어서 '인위적인 하한선'을 둘 수밖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널리 알려진 세 작품(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위대한 유산』)이 모두 560쪽이었다.

 

6. 대작이지만 '동서문화사 월드북 시리즈'에 아예 없는 작품들은 제외되었다.

   예)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등

   또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526쪽)는 축약본의 번역본이어서 제외했다.

 

7. 지나치게 어려운 작품이거나 지나치게 대중적이다 싶은 작품은 일부러 제외했다.

   예) 칸트의 『순수이성비판』(770쪽),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686쪽), 밀턴의 『실낙원』(644쪽),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332쪽) 등

 

 

이렇게 어렵사리 비교한 결과를 좀 더 시각적으로 '한 눈에' 살펴볼 수는 없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챠트로 만들면 되니까요.

 

이 얼마나 놀라운 그림인가? 인류의 천재들이 빚어낸 불멸의 걸작들이 이 챠트 하나에 다 담기다니!

 



까마득한 옛날에 제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나 『오뒷세이아』, 혹은 『몽테뉴 수상록』을 붙잡고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 <먼 미래에는 이런 그림까지 그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던 건 결코 아니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그럭저럭 여기까지 왔다는 말이 가장 정확한 표현일 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까마득한 옛날에 어느 책에서 얼핏 스치듯이 보았던 서머싯 몸의 <세계 10대 소설 목록> 가운데 내가 읽은 작품이 단 하나, 『까라마조프 형제들』밖에 없을 때 느꼈던 당혹감이 저를 여기까지 몰래 이끌고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에서야 문득 뒤돌아 보니 <세계 10대 소설> 가운데 두 작품만 빼놓고는 다 읽었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어쩌면 제가 만드는 이런 영상 때문에 어떤 사람들이 실제로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을 덥석 붙잡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을까요? 글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책들이 아직까지도 어떤 독자에게는 너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면 그보다 부담이 훨씬 덜한(?)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으로 살짝 방향을 바꿀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런 시도가 누군가에게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측정 불가능한 미래의 자그마한 가능성들이야말로 이런 영상을 보시는 분들로부터 제가 진정으로 바라마지 않는 가장 진지하면서도 호의적인 반응일 테니까 말이지요. 




프란츠 카프카는 책이 얼음을 깨뜨리는 도끼가 아니라면 왜 그런 책들을 읽어야 하느냐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가 막힌 비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도 어린 시절에 시골에서 자랄 때는 '얼음'과 아주 많은 시간을 보냈더랬습니다. 물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은 얼음 위에서 썰매를 타는 데 시간을 보냈지 얼음을 깨느라고 애를 쓴 건 아니었지만 말이지요. 어릴 땐 얼음 위를 미끄러지는 일만큼 신나고 기분 좋은 일도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가끔씩은 얼음 위에서 꽈당 미끄러질 때도 있었지요. 얼음이 너무 매끄러우면 너무나 쉽게 벌러덩 넘어지는 수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정말로 얼음을 깨트려야 할 때도 가끔씩은 있었습니다! 얼음 아래에서 살고 있는 물고기를 잡을 때였지요!

 

그렇습니다. 물고기를 잡을 때 가장 필요로 하는 무기가 바로 도끼였습니다! 도끼만 있으면 아무리 추운 한겨울에도 얼음을 아주 쉽게 깰 수 있었습니다! 얼음이 너무 단단하다거나 너무 매끄럽다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지요. 얼음은 결국 얼음일 뿐이니까요. 그 얼음을 깨트릴 도끼는 이미 셀 수도 없이 많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얼마만큼 훌륭한 도끼로 얼마만큼 두꺼운 얼음을 깨트릴 것인가는 순전히 독자의 몫입니다. 




저는 몹시도 두꺼운 책들이 두꺼운 얼음을 깨트리는 데 아주 유용한 도구로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 번 느꼈습니다. 이토록 두꺼운 책들이 아니었다면 제가 무슨 수로 '얼음'처럼 매끄럽고 단단한 표면들을 지닌 『마의 산』 같은 데를 오를 생각이나 했겠으며, 저토록 방대한  외관을 자랑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속으로 불쑥 걸어들어갈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이제 다시 두꺼운 책을 붙들 시간입니다. 저는 왜 이런 글을 쓰고 이런 영상을 만들고 있을까요? 이런 책들과 함께 했던 수많은 순간들이 못내 그립고, 이런 두툼한 책들을 볼 때마다 그들이 못내 고맙기 때문입니다. 이  영상에 담긴 책들이 제게 안겨준 즐거움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컸지만, 그들이 제게 고통을 안겨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 그러니 어찌 제가 틈날 때마다 이런 책들을 거듭 보듬고 쓰다듬고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것으로 두꺼운 책들에 대한 소개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





























































































































































































































































































댓글(7) 먼댓글(0) 좋아요(4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넬로페 2022-01-25 2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oren님은 대단하십니다.
저도 올려주신 책에 관심이 많아 계속 읽고자 도전하고 있습니다.
올려주신 목록과 추억이 담긴 페이퍼, 잘 읽었고 유튜브도 시청해볼께요^^

oren 2022-01-26 00:11   좋아요 1 | URL
예전에 이와 비슷한 내용의 글을 여러 번 올렸었는데,
이번에 (단단히 작심하고) 이걸 25분짜리 동영상으로 만들어 보았답니다.

예전에 이런 글을 쓰는 동안,
제 나름대로 상상했던 다양한 이미지들이 있었는데
(고향 시골집, 온돌방, 군불, 까까머리, 교복, 교실, 군대, 얼음, 도끼 등등),
거기에 딱 어울리는 이미지나 동영상들을 찾지 못해 꽤나 많은 시간을 고생했지만,
그래도 오래도록 남을 영상물을 만들고 나니 후련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책에 얽힌 이야기를 그저 텍스트로만 전달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소 식상한 책사진만 늘어놓는 것도 어딘가 답답한 느낌이 들긴 마찬가지다 싶어서,
책사진들을 눕혔다 세웠다 해보기도 하고, 책을 쓴 작가의 이미지와 겹쳐보기도 하고,
제 목소리를 영상에 얹어서 조금 더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 보려 애쓰기도 했답니다.
애정 어린 댓글 남겨주셔서 늘 고맙습니다.^^
유튜브 영상도 즐겁게 봐주세요~

살리에르 2022-01-28 16: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관심있는 주제였는데 정성스런 글 고맙습니다^^

oren 2022-01-28 17:41   좋아요 0 | URL
애정이 담긴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짱만쉐 2022-04-14 2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존경스럽네요 .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올려주신 리스트 책들 용기내서 좇아 읽어보겠습니다 화이팅:)

김요셉 2023-05-11 1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참.. 선생님 독서 여정 앞에서 할 일이 없네요.. 그리고 참 부럽습니다. 그저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입니다. 도전 받은 만큼 매우매우 조금이나마 따라가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oren 2023-05-11 19:58   좋아요 0 | URL
여러모로 부족한 글인데도 이토록 과한 말씀을 남겨주시니 부끄럽습니다. 아무쪼록 제 글을 통해 자그마한 도움이라도 얻으셨다면 그보다 기쁜 일이 없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셰익스피어보다 더 가슴을 찢는 비통한 작가를 알지 못한다 : 어릿광대여야 할 필요가 있었던 그 인간은 어떤 고통을 겪어야만 했단 말인가! ㅡ 햄릿을 이해하겠는가? 미치게 만드는 것은 의심이 아니라, 확실성이다 ······ 하지만 그렇게 느낄 수 있으려면 깊이가 있어야만 하고, 심연이어야만 하며, 철학자여야만 한다.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 * *


셰익스피어의 천재성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초과하기 때문에 범인들이 그의 작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해설을 늘어놓는 일은 언제나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와 비견될 작품을 찾기조차 어려운 셰익스피어의 걸작들을 언제까지나 먼 산 바라보듯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셰익스피어의 수많은 걸작들 가운데서도 그의 천재성이 최고로 발휘된 작품이 바로 『햄릿』입니다. 어떻게 이처럼 뛰어난 걸작이 완성되었을까 하는 것조차 상상하기 어려운, 걸출한 묘사력과 창조력의 극치를 이루는 이 작품을 어떻게 소개할까 걱정부터 앞섭니다만, 어쨌든 이 놀라운 작품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시지요.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는 총 37편의 희곡작품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비극은 10편을 썼습니다. 열 편의 비극 가운데 최고의 작품이 바로 『햄릿』이지요. 셰익스피어가 정말로 뛰어난 부분은 인간 세상의 모든 사건, 특히 감정적 부분인 사랑, 증오, 질투 등의 희로애락 전부를 써냈다는 사실이지요. 사랑만 해도 연인 간의 사랑뿐 아니라, 부부, 부모자식, 형제, 사제, 친구의 사랑을 모두 그려냈습니다.  


괴테의 예술론은 에커만이 지은 <괴테와의 대화>에 나와 있다. 거기에서 괴테가 셰익스피어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을 조금 소개하겠다.

 

"그는 인간생활의 모티브란 모티브를 하나도 남김없이 그려냈고, 또 모두 표현해냈다. 게다가 그 모든 것이 선명함과 자유로움으로 넘쳐난다."

 

"무대는 그의 위대한 정신을 보여주기에는 너무나도 좁다. 그뿐인가, 이 눈에 보이는 모든 세상마저 그에게는 너무나도 좁았다."

 

괴테의 이런 견해, '선명하고 자유로움으로 넘쳐난다'는 것이 중요하다. 셰익스피어는 모든 것을 써냈고,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감정을 표현해냈다.

 

 - 오다시마 유시, 『셰익스피어가 내게 찾아왔다』, <03. 괴테, 톨스토이, 마르크스가 읽은 셰익스피어>

  

이처럼 인간의 온갖 감정을 빠짐없이 그려냈던 셰익스피어가 인간의 복수심을 놓칠 리 없었지요. 사실 따지고 보면 저 유명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조차도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대표되는 '인간의 복수심'이 작품의 전편을 지배하고 있지요. 우선, 트로이아 전쟁이 발발한 근본 원인부터가 스파르타의 왕비였던 헬레네를 불법으로 납치한 사건 때문이었는데 바로 그걸 응징하기 위해 수만의 군대가 대전쟁을 벌인 셈이지요. 


이 수천 수만의 무장한 인간들의 가공할 장비, 그 맹위·정열·용기, 이런 것들이 얼마나 쓸데없는 원인으로 일어나서, 가벼운 인연으로 사라지는가를 고찰해 보면 기가 막힐 일이다. 


파리스라는 사람 때문에 저 처참한 전쟁이 

그리스와 외족(外族) 국가 사이에 야기되었다고 전한다. (호라티우스)

아시아 전체가 파리스의 오입질 때문에 전쟁으로 불타 버려 파괴된 것이다. 단 한 남자의 시기심, 울분, 쾌락, 가족 간의 질투 등, 수다스런 마나님 둘이 서로 할퀴며 대들게 할 만큼 성나게 할 것도 못 되는 원인들, 이것이 전쟁의 핵심이며 직접적인 원인이다. 이런 전쟁을 일으킨 주요한 인물이며, 동기가 된 자들의 말이면 바로 믿어 주어야 할 일인가?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그런데 이 유명한 고대의 전쟁은 제대로 불붙기도 전에 그리스 진영에서 생긴 뜻밖의 내분 때문에 이상한 방향으로 꼬이기 시작하지요. 사건의 발단은 연합군 최고의 전사였던 아킬레우스가 총애하던 애인을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아가멤논이 불문곡직하고 빼앗아간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억울한 일을 당한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도대체 얼마나 컸으면 지금으로부터 무려 2800년 전에 쓰여진 저 유명한 호메로스의 서사시조차 이렇게 시작했을까요?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아카이오이족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을 가져다주었으며
숱한 영웅들의 굳센 혼백들을 하데스에게 보내고
그들 자신은 개들과 온갖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한
그 잔혹한 분노를! 

 - 호메로스,『일리아스』


분노 때문에 불화산처럼 달아오른 아킬레우스는 곧장 전쟁 전면 보이콧을 선언하고 칩거에 들어가지요. 오뒷세우스를 비롯한 그리스 연합군 진영의 핵심들이 아무리 설득해도 아킬레우스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리스 전력의 핵심이었던 그가 전쟁에서 빠지자 그리스 군대는 순식간에 패전 직전까지 내몰리게 되고, 아킬레우스의 절친이었던 장수 파트로클로스는 전사하고 말지요. 절친을 잃은 아킬레우스는 또다시 분기탱천하여 전쟁에 뛰어들고, 이내 트로이아 최고의 장수였던 헥토르를 죽입니다. 아킬레우스는 그러고도 분노가 풀리지 않아 틈날 때마다 헥토르의 시신을 전차 뒤에 매달아 끌고다니지요. 사랑하는 아들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한 트로이아의 늙은 왕 프리아모스는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아킬레우스를 찾아가 저 유명한 읍소작전을 펼치지요. 


<아킬레우스에게 간청하는 프리아모스>


마침내 아들의 시신을 되돌려 받은 프리아모스는 헥토르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고 이 장면을 마지막으로 『일리아스』는 끝나지요. 트로이아 전쟁은 그 이후로도 계속 이어져 결국 아킬레우스가  파리스가 쏜 화살에 아킬레스건을 맞아 전사하고 말지요. 이번에는 아킬레우스의 아들이 '아버지의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 또다시 분기탱천하여 피비린내 나는 복수혈전을 펼치게 되고, 그 장면은 호메로스보다 800년 뒤에 등장한 로마 최고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 담기게 되지요. 그리스 연합군에 패해 멸망한 트로이아를 탈출하여 이탈리아의 로마로 향하는 아이네이아스 일행의 기나긴 여정이야말로 『아이네이스』의 줄거리인 셈인데, 로마 건국 신화의 주인공인 아이네이아스가 온갖 간난신고 끝에 만난 여인이 바로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였습니다. 패망한 트로이아의 장수 아이네이아스가 디도를 만나 들려주는 '트로이아 전쟁 이야기'는 베르길리우스보다 무려 1600년 뒤에 등장한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다시 한번 재연됩니다.


<디도에게 트로이아 전쟁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이네이아스>



              햄릿

그 극에서 내가 제일 좋아했던 대목이 있는데 그건 아이네이아스가 디도에게 해 준 얘기로, 특히 그가 프리아모스의 도륙을 말하는 부근이야. 기억할 수 있거든 이 줄에서 시작해 보게 ㅡ 어디 보자, 어디 보자 ㅡ


'험상궂은 퓌로스가 불길한 목마 속에

쭈그리고 앉았을 땐 칠흑 같은 갑옷이

자신의 의도처럼 검은 밤을 닮았더니

지금은 그 무섭고 검은 모습 더욱더

불길한 색깔로 물들었소. 그는 지금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완전히 시뻘겋게

아비, 어미, 딸들과 아들들의 핏물로

끔찍이 채색되어 그들 왕의 살해에

포악과 저주를 더하면서 불타는 거리에서

바짝 말라 구워졌소. 분노와 불길에

딱딱해진 피껍질을 온몸에 덮어쓰고

석류석 붉은 눈빛, 지옥 같은 퓌로스가

프리아모스 노친을 찾는다오.'


이어서 자네가 계속하게

                                                                                 

                                                                                 - 『햄릿』, <2막 2절> 중에서


셰익스피어가 이처럼 『햄릿』에서 '극중극'으로 뜬금없이 퓌로스를 등장시킨 건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선친의 유령을 만난 이후 햄릿 왕이 독살당했을 가능성을 의심하기 시작한 햄릿 왕자는 살해범에게 복수할 궁리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지요. 그때 햄릿 왕자가 의심하는 범인이 바로 형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한 숙부 클라우디우스였습니다. 숙부는 아버지의 목숨과 왕위만 찬탈한 게 아니라 형수인 햄릿의 어머니까지 차지한 악인이었지요. 그 철천지 원수가 정말로 아버지를 독살한 범인이 맞는지 확신을 얻기 위해 햄릿이 유랑극단을 동원하여 '극중극'을 꾸몄고, 왕과 왕비 앞에서 『아이네이스』에 등장하는 '퓌로스의 복수극'을 재연한 것입니다. '친부 살해'에 대한 끔찍한 복수를 다짐하는 햄릿의 롤모델이 바로 퓌로스였기 때문이지요. 퓌로스는 일명 네옵톨레모스라고도 불리는데, 호메로스의 서사시『일리아스』에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웅 아킬레우스의 아들입니다.


<프리아모스 왕을 죽이는 네옵톨레모스>


셰익스피어어의 비극작품 『햄릿』은 이처럼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자유자재로 넘나들 만큼 깊이가 풍부한 데다가 그 표현력이 그 어떤 시인이나 극작가에게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탁월하지요.


대부분의 현자는 아무리 현명하다고 해도 이럭저럭 어림짐작 내에 들 정도인데 셰익스피어의 현명함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초과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플라톤은 인류 최고의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데 열심히 읽으면 그의 사고회로를 뒤쫓는 것은 어떻게든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손을 들게 된다. 어떻게 그와 같은 작품이 완성되었을까 하는 것조차 상상을 뛰어넘고 있는 것이다. 그 걸출한 묘사력, 창조력에서 그와 견줄 수 있는 자는 없다. 셰익스피어처럼 쓴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하는 것이다. 그는 도저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의 문학적인 세련이 극에 달하고 있다. 그것은 작가적 자질로도 최고봉이라고 해도 좋은데 그의 재능은 좁은 뜻에서의 작가라는 틀을 훨씬 뛰어넘고 있는 것이다.

 

 랄프 왈도 에머슨위인이란 무엇인가, <제3, 인류 최고 향연의 사회자, 시인 세익스피어>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라."와 같은 햄릿의 명대사를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설령 『햄릿』을 단 한 줄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그 정도 대사쯤은 누구라도 한두번은 들어봤을 테니까 말이지요.


"사느냐 죽느냐"로 시작되는 그의 독백


200여 년 이상이나 "사느냐 죽느냐"로 시작되는 그의 독백은 끊임없이 인용되어 왔고, 때문에 오히려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다. …  『햄릿』에 담긴 일곱 개의 독백 가운데 세 번째인 '사느냐 죽느냐' 독백은 지식과 행위 사이의 부정적 관계에 대해 다루었다. 이 부분은 햄릿이 극에서 왕 역할을 하는 배우를 위해 쓴 대사의 절정을 이루며, 또한 다음 위대한 시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야기의 매듭을 지으려 하오.

인간의 의지와 운명은 서로 어긋나는 것이므로

계획은 언제나 무너지게 마련이지.

생각은 우리 자신이 하지만 그 결과는 우리도 어쩔 수 없는 것이오.    ㅡ 3막 2장 (386쪽)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읽기』중에서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 대해 셰익스피어만큼 미묘하고 멋진 대안과 비전을 제시한 작가는 없었다. 어떤 면에서 햄릿이나 이아고, 리어 왕, 클레오파트라의 말도 같은 권위를 지닌다. 설득에서는 오히려 셰익스피어의 풍부함이 더욱 커 보인다. (중략)


나는 셰익스피어가 "인간을 발명했다"고 말한 후로 다른 비평가들로부터 비난을 받아 왔다. 존슨 박사는 "시의 본질은 발명"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따라서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셰익스피어의 극시가 그렇듯 실용적으로 인간을 개조하고 재발견했다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367쪽)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읽기』중에서


이처럼 극찬을 받는 『햄릿』은 단지 이야기의 줄거리로만 설명될 수 있는 작품이 아니지요. 그러나 『햄릿』이 아무리 심오한 극작품이라고 하더라도 이 극에 나오는 등장인물과 줄거리를 빼놓고 이 작품을 계속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덴마크의 왕자 햄릿입니다. 그는 두 달 전에 아버지 햄릿 왕을 잃었으며, 지금은 숙부인 클라우디우스가 덴마크를 통치하고 있지요. 햄릿의 어머니인 거트루트 왕비는 왕위에 오른 시동생 클라우디우스와 재혼한 상태입니다. 햄릿은 재상 폴로니우스의 딸 오필리어를 연모하고 있으며, 그녀에게는 레어티스라는 오빠가 있습니다. 햄릿에게는 절친 호레이쇼가 있으며, 옛 학교 동창생들인 로젠크랜츠와 길든스턴도 있습니다. 또한 『햄릿』에는 노르웨이의 왕자 포틴브래스와 묘지기들도 등장합니다. 이 극에서는 여섯 명의 등장인물이 죽는데, 죽는 순서는 폴로니우스, 오필리어, 거트루드, 클라우디우스, 레어티스 그리고 햄릿입니다.


극은 덴마크의 엘시노어 성 위의 망대에서 시작되지요. 바로 여기서 억울하게 죽은 햄릿 왕이 한밤중에 유령으로 등장합니다. 유령은 보초병들이 말을 걸어도 아무런 대답 없이 사라지지요. 절친 호레이쇼로부터 이런 사실을 전해들은 햄릿은 한밤중에 망대에 올라 아버지의 유령을 직접 만납니다. 유령은 자신이 동생에게 독살됐다고 주장하지요. 


간단하게 말하마. 정원에서 잠자는데

오후에는 그게 항상 습관이었으니까,

방심하고 있었던 그 시각에 네 삼촌이

저주받을 독즙 병을 몰래 갖고 들어와

나병을 일으키는 증류액을 내 귀에 

다 쏟아부었고...


그래서 난 자다가 동생 손에 의하여

생명, 왕관, 왕비를 한꺼번에 빼앗겼고

죄업을 한창 쌓고 있을 때 잘렸으니

성체 없이, 준비 없이, 종유의 성사 없이

죄 청산도 못하고 내 모든 결함을

머리에 인 채로 심판대로 보내졌다.

(1막 5장)


햄릿은 이때부터 삼촌에게 복수하기로 다짐하지요. 그러면서도 유령과 나눈 대화는 절친 호레이쇼에게도 비밀로 하고, 보초병들이 유령을 본 사실도 절대 발설하지 말도록 다짐을 받습니다. 햄릿이 조금의 빈틈도 없이 복수를 준비하기 위해서였죠. 햄릿은 연인 오필리어를 만나서도 미친 사람처럼 이상한 행동을 취하지요. 오필리어의 아버지인 폴로니우스는 햄릿이 오필리어에 대한 상사병으로 그만 미쳐버렸다고 여기지요. 폴로니우스는 왕자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왕에게 증명하기 위해 햄릿이 오필리어에게 쓴 편지까지 보여주지요.


한편, 햄릿의 옛 학교 동창생들인 로젠크랜츠와 길든스턴을 만난 햄릿은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중 자신이 요즘 심정이 너무나 울적하여 지구가 온통 불모의 땅덩이로 보인다는 하소연을 늘어놓지요.


인간이란 참으로 걸작이 아닌가.

이성은 얼마나 고귀하고 능력은 얼마나 무한하며,

생김새와 움직임은 얼마나 깔끔하고 놀라우며,

행동은 얼마나 천사 같고 이해력은 얼마나 신 같은가.

이 세상의 꽃이고 동물들의 귀감이지

 - 그렇지만 내겐 이 무슨 흙 중의 흙이란 말인가?

난 인간이 즐겁지 않아 - 여자도 마찬가지야.


이런 대화 끝에 그들은 왕자에게 봉사하러 왕궁을 찾아온 유랑극단을 봤다고 알리지요. 햄릿은 그 유랑극단의 배우들을 두 팔 벌려 환영하지요. 그때 햄릿이 배우들과 나눴던 대화가 바로 이 영상의 초반부에서 미리 소개한 『아이네이스』에 관한 장면이었습니다.


이어지는 3막 1장에는 『햄릿』을 대표하는 유명한 대사가 등장하지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질문을 파고드는 이런 놀라운 대사들 때문에 햄릿은 인류가 창조한 가공의 인물들 가운데 가장 지성적이라는 평판을 얻게 되지요.


존재할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것이 문제다.

어느 게 더 고귀한가?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맘속으로 맞는 건가

아니면 무기 들고 고난의 바다와 맞서다가

끝장을 보는 건가? 죽는 건 자는 것

그뿐인데, 잠 한 번에 육신이 물려받은

마음의 고통과 수천 가지 타고난 갈등이

끝난다 말하면 그건 바로 경건히 바라야 할

결말이다. 죽는 건 자는 것, 자는 건

꿈꾸는 것일지도 ㅡ 아, 그게 걸림돌이다.

……

결국은 양심이 우리를 다 겁쟁이로 만들고

그에 따라 붉은 빛 영롱하던 결심은

창백한 생각으로 병들어 버리며

천하의 거창하고 웅대한 계획들도

이 점을 고려할 때 그 흐름이 바뀌면서

실천될 가망성이 없어진다.

(3막 1장)


이 유명한 독백이 끝나면 배우들이 등장하여 극중극을 공연하지요. 햄릿은 자신의 진정한 친구인 호레이쇼에게 '부친 사망 경위'와 비슷한 연극 장면에서 클라우디우스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는지 자세히 살펴봐 달라고 부탁하지요. 극중극의 이름은 '쥐덫'인데, 왕 역할을 맡은 배우가 귀에 부은 독 때문에 독살을 당하자 이 장면을 본 국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곧바로 연극은 중단되고 말지요.


대경실색한 왕비는 이 연극이 끝난 뒤 내실에서 왕자와 대화를 나누길 희망하고, 그 대화를 엿듣고 싶은 폴로니우스는 왕에게 이런 사실을 보고하고 내실의 휘장 뒤에 몸을 숨깁니다. 자신이 저지른 끔찍스런 죄악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왕은 무릎을 꿇고 참회의 기도를 올리지요. 바로 이때 햄릿은 칼을 뽑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지요.


아서라 내 칼아, 더 끔찍한 상황을 만나자.

놈이 취해 잠자거나 광란하고 있을 때

침대에서 상피 붙어 쾌락을 즐길 때

경기 도중 욕하거나 구원받을 기미가

전혀 없는 행동을 하고 있을 바로 그때

이놈의 다릴 걸자, 발꿈치는 하늘을 박차고

그 영혼은 목적지인 지옥만큼 저주받아

시커멓게 되도록.

(3막 4장)


이렇게 해서 복수는 연기되고 햄릿과 거트루드 왕비가 연극 때문에 벌어진 소동으로 심각하게 다투는 사이 휘장 뒤에서 엿듣던 폴로니우스가 비명을 지르고, 햄릿은 엉겁결에 휘장을 뚫고 검을 찌릅니다. 이때 폴로니우스는 살해되고, 왕비와 함께 남은 햄릿 앞에 또다시 유령이 등장하여 무뎌진 복수심을 벼리기 위해 왔노라고 말하고 사라지지요. 햄릿은 이 우발적인 살인 사건 때문에 학교 동창 두 사람과 함께 배에 실려 영국으로 보내지는데, 덴마크 왕은 영국에 도착하는 즉시 햄릿을 제거하라는 비밀지령이 담긴 서신을 부하들에게 지참시키지요.


옛 학교 동창생 둘과 함께 영국으로 향하던 햄릿은 도중에 노르웨이의 왕자 포틴브래스가 이끄는 군대와 마주치는데, 아무런 이득도 없는 한 조각의 땅을 빼앗기 위해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는 모습을 보고 햄릿은 다시 한번 멋진 대사를 읊습니다.


모든 일이 사사건건 얼마나 날 꾸짖고

둔한 내 복수심을 찌르는가. 인간은 무엇인가,

일생을 팔아 얻는 주 소득이 먹고 또

자는 것뿐이라면? 짐승 그 이상은 아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넓고도 앞뒤를 내다보는 

사고력을 넣어 주신 그분께서 그 능력과

신과 같은 이성을 쓰지 않고 썩히라고

주신 건 분명코 아니다. 그런데 이 무슨 

짐승 같은 망각인지, 아니면 결과를 너무나

꼼꼼히 따져 보는 소심한 주저인지 ㅡ

……

흙처럼 흔한 예가 나에게 훈계한다,

그 증거로 곱고 여린 왕자가 이끄는

이 대규모 호화판 군대를 보아라.

그의 맘은 하늘 같은 야심으로 부풀어

예측 못 할 결과 따윈 코웃음 치면서

덧없고 불확실한 인간의 목숨을

계란만 한 땅 때문에 온갖 운과 사망과

위험에 내맡긴다. 진정으로 위대함은

큰 명분 없이는 행동을 않는 게 아니라

명예가 걸렸을 땐 지푸라기 하나에도

큰 싸움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럼 난 어떤가?

(4막 4장)


4막 5장에서는 햄릿에게 버림받고 아버지까지 잃은 충격으로 실성한 오필리어가 등장하여 왕과 왕비 앞에서 온갖 이상한 노래를 부르지요. 졸지에 아버지를 잃고 사랑하는 누이동생마저 실성했다는 소문을 들은 레어티스는 유학 중이던 프랑스에서 은밀히 귀국하여 다짜고짜 왕궁으로 들이닥칩니다. 왕으로부터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레어티스는 부친을 죽인 햄릿에게 복수하기를 갈망하지요. 마침 그때 영국으로 보내졌던 햄릿이 (죽지도 않고) 왕궁으로 되돌아오고 있다는 전갈이 도착하고, 왕은 햄릿과 레어티스와의 검술시합을 핑계 삼아 햄릿을 독살할 계략을 꾸미지요. 레어티스는 자신의 칼에 미리 독약을 바르고, 왕은 독이 든 술잔을 준비하기로 하지요. 이런 와중에 오필리어가 익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오필리어>


마지막 5막에서는 묘지기 두 사람이 등장하여 무덤을 파는 동안 해골을 던지며 인생무상을 노래하지요. 지나가던 햄릿과 호레이쇼가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인간 삶의 무상함에 대해 다시 한번 세밀한 고찰을 전개합니다.


호레이쇼, 우린 얼마나 천한 쓰임새로 돌아가나! 흠, 알렉산더 대왕의 고귀한 유골이 술통 아가리를 막을 때까지 상상으로 추적해 보면 안 될까?


알렉산더는 죽었다. 알렉산더는 묻혔다. 알렉산더는 가루로 변한다. 가루는 흙이고 그 흙으로 회반죽을 만든다면 왜 그의 변신인 회반죽으로 맥주 통을 못 막지?


황제 같은 시저 또한 죽은 다음 진흙 되면

병아가리 바람 마개 되는 수도 있으리라.

아, 세상을 떨게 하던 그 흙덩이 몸뚱이가

겨울바람 막으려고 벽 구멍을 때우다니.


곧이어 관을 멘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 무덤엔 오필리어가 묻히게 되죠. 뜻밖에 왕과 왕비, 레어티스와 마주친 햄릿은 오필리어의 무덤 앞에서 그녀의 오빠와 소란스러운 언쟁을 벌이다가 헤어지지요.


5막 2장에서는 호레이쇼와 햄릿이 등장하여 저간의 사정들을 밝힙니다. 햄릿을 제거하라는 국왕의 비밀문서를 햄릿이 어떻게 교묘하게 바꿔치기했는지, 햄릿과 동행했던 길든스턴과 로젠크랜츠가 어떻게 도리어 목숨을 잃게 되었는지가 드러나지요. 곧이어 햄릿과 레어티스의 검술시합을 두고 국왕이 내기를 걸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데, 호레이쇼는 햄릿이 그 시합에 질까 걱정하며 말리고 나서지요.


전혀 그럴 것 없네. 우린 전조를 무시해.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데도 특별한 섭리가 있잖은가. 갈 때가 지금이면 아니 올 것이고 아니 올 것이면 지금이겠지. 또 지금이 아니라도 오기는 할 것이고. 마음의 준비가 최고야. 누구도 자기가 남기는 게 무엇인지 모르는데 일찍 떠나는 게 대수란 말인가?


탁자와 술잔이 준비되고, 햄릿과 레어티스는 검술시합에 돌입하지요. 시합 도중 거트루드 왕비가 아들에게 행운을 빌면서 (왕이 말릴 틈도 없이) 독이 든 술잔을 마시고, 시합 중에 레어티스가 독이 묻은 칼로 햄릿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난투 중에 그들은 칼을 바꿔 쥐게 되고, 햄릿의 칼은 레어티스를 찌릅니다. 왕비가 독살됐다고 소리치며 쓰러지고, 레어티스로부터 왕의 흉계를 들은 햄릿은 왕을 찔러 죽입니다. 레어티스와 햄릿은 죽어가는 중에도 서로 화해하며, 햄릿은 호레이쇼에게 이 끔찍한 사태를 후세에 알려달라고 부탁하지요.


오 이런, 호레이쇼, 이 사태를 이렇게 덮어 두면

내 이름에 얼마나 큰 상처가 남겠는가!

자네가 날 마음속에 품은 적이 있다면

천상의 열락일랑 잠시 동안 미뤄 두고

이 험한 세상에서 고통 속에 숨을 쉬며

내 사연을 말해 주게.

(5막 2장)


이렇게 끝나는 비극 『햄릿』은 연극무대에 올려진지 400년도 더 지났지만 여전히 가장 실험적인 극으로 남아 있습니다. 『햄릿』이 그저 친부살해범에 대한 단순한 복수극으로만 다가오지 않는 까닭은 『햄릿』속에 너무나 많은 생각할 거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지요. 


햄릿에 대한 불쾌함은 그가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게 아니라 너무 잘 생각한다는 점


셰익스피어가 소네트에서 흔히 그러했듯이 햄릿은 의지에 대해서 숙고한다. 우리는 행동할 의지가 있는가? 마지못해 움직이는 것인가? 의지의 한계는 무엇인가? 햄릿의 광대한 의식은 사고의 끝이 무언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종말을 의도한 모든 관련된 불확실성에 대해 어떻게 충분히 인식하는가?


니체가 인식하듯이 햄릿에 대한 불쾌함은 그가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게 아니라 너무 잘 생각한다는 점이다. 햄릿은 예술을 향하지 않으면 진실에 의해 죽을 것이다. 햄릿은 귀족 중에서도 왕족이므로 지성적인 행위에 대해 지극히 회의적이면서도 그것에 대한 향수에 사로잡혀 있다.


양심이 우리를 겁쟁이로 만드는구나.

결단의 선명한 색채가

망설임으로 창백해지고 침울해짐으로 녹슬고 만다.

지극히 중요한 거대한 과업도

이 때문에 그 흐름이 틀어지고

실천의 힘을 잃고 마는구나.                                 ㅡ 3막 1장 (387∼388쪽)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읽기』중에서

 

『햄릿』은 걸작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읽으면 읽을수록 새롭게 느껴져 마치 다른 작품을 보는 듯하다는 평을 듣는 작품이지요. 또한 '우리는 햄릿이 되어야만 햄릿을 엿볼 수 있다.'는 평도 듣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셰익스피어의 모든 희곡 가운데 가장 독창적인 작품에 드러나는 기법이지요.


디오니소스적 인간은 햄릿과 유사하다. 양자는 우선 사물의 본질을 올바로 들여다보았다. 그들은 인식했다. 그리고 행위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구토를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위는 사물의 영원한 본질을 조금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지리멸렬한 세계를 다시 정돈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우스꽝스럽거나 치욕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인식은 행위를 죽인다. 환영에 의해 베일이 드리워진 상태가 행위에 속한다 ㅡ 이것이 햄릿의 가르침이다.


- 니체,『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7장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 * *



 * *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는 인류가 가지고 있는 가장 훌륭한 친구들 중 하나이다.

 - 조지 산타야나

 

 * * *

찰스 디킨스는 영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 중의 한명이지요. 영국인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작가가 셰익스피어라면, 찰스 디킨스는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로 널리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의 명성은 스물다섯 살 때 갑자기 '불꽃처럼' 하늘 높이 솟아오른 뒤 지금까지도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르고 있지요.

 

셰익스피어를 두고 어느 한 작품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디킨스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스크루지 영감이 등장하는 작품 『크리스마스 캐럴』 하나만으로도 그는 이미 크리스마스를 새롭게 창조한 인물로까지 칭송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린이나 유아를 위한 작품을 쓴 작가는 아니지요.

 

그의 작품은 비교적 읽기가 쉽기 때문에 무척 대중적인 작가로 보이지만 실상은 아주 진지한 예술가로 대접받아야 마땅한 인물입니다. 디킨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때로는 '만화' 속에 나오는 것처럼 특징과 용모가 매우 부풀려지고 희화화 되곤 하지만, 그런 방식이야말로 디킨스가 아주 즐겨 사용하는 인물 조형 방법이자 인생을 폭로하는 중요한 장치나 방식들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이런 대목들을 놓치게 되면 그를 자칫 오해하기 쉽지요.


(『위대한 유산』의 주인공, 핍)


디킨스의 작품 속에는 고아가 중심 인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으며, 부랑자나 죄수들을 비롯한 버림받고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이 꽤나 많이 등장합니다. 그건 바로 작가 스스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었기 때문이지요. 그가 맛본 어린 시절의 고독과 절망, 굴욕과 비참함이 한평생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인생에서의 불행을 아주 심오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그는 때때로 도스토예프스키와 거의 동급으로 평가받기도 하지요. 하지만 디킨스의 작품이 러시아 작가보다는 훨씬 덜 심각하며, 위트와 유머가 넘치는 등 분위기도 훨씬 밝은 편입니다. 무엇보다 디킨스의 작품은 종교, 과학, 정치, 예술 등에 대해서 아주 초연하다는 점에서 도스토예프스키와는 뚜렷이 구별됩니다.

 

디킨스는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던 무렵인 1812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릴 때 잠깐 동안은 해군 경리국에서 일하던 아버지의 안정적인 수입 덕분에 매우 행복한 분위기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자꾸만 빚을 져서 심각한 위기에 빠지자 '목가적인 시대'는 갑자기 끝나버렸고, 가족들이 모두 런던으로 이사를 떠난 뒤 홀로 '하숙'을 하며 몇 주 더 학교를 다녔던 디킨스는 이내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작은 짐 하나만 가지고 홀로 승합 마차를 타고 가족을 찾아가는 여정은 작가에게 깊은 상처로 각인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우울한 여행을 그는 평생 잊지 못했다. 눅눅한 지푸라기 냄새도 그 기억에 들러붙어 있었다. "나는 사냥당한 짐승처럼 지푸라기에 싸인 채 발송된 것이다." 몇 년이 지나서 그는 괴롭게 술회했다. "승합마차 좌석에는 다른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혼자서 쓸쓸한 기분에 젖어 샌드위치를 씹었다. 가는 길 내내 비가 세차게 내렸다. 인생은 내가 기대하던 것보다 축축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1017쪽)

 

디킨스가 홀로 런던에 도착해 보니 가족은 '누구라도 눈을 돌리고 싶을 만큼' 칙칙하고 누추하고 초라한 동네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집안 형편은 나날이 비참해졌고 독이 오른 채권자들은 집으로 몰려와 모욕적인 말을 마구 퍼부어댔지요. 어린 디킨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가재도구를 골라 전당포에 내다파는 일이 고작이었습니다. 열두 살이 된 디킨스는 결국 강기슭에 위치한 어두침침하고 쥐들이 우글거리는 구두약 공장에 고용되지요. 여기서 겪은 경험이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그는 나중에 친구에게 이렇게 털어놓습니다.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그토록 쉽게 내버려지다니…… 아무도 나를 동정해 주지 않았다. 비범한 재능을 가졌고 머리 회전도 빠르며 의욕이 넘치고 섬세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상처받기 쉬운 아이였는데. 그런 나를 어디 평범한 학교에 들여보내 주려고 조금이라도 노력하든가-실제로 그럴 수 있었을 테니까."


(12살 때 구두약 공장을 다니던 시절의 데이비드 코퍼필드, 작가의 실제 경험 그대로를 담았다.)

 

이때 그가 경험한 공장 생활은 그의 작품들뿐 아니라 그의 삶에도 오래도록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가 그토록 어린 나이에 육체노동을 하는 비참한 신세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새겨진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심각했던지는 몇 해 전에 개봉된 영화 <찰스 디킨스의 비밀 서재>에서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어린 시절에 겪었던 불행은 구두약 공장 생활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주급 6∼7실링의 수입으로는 하숙비와 끼니조차 해결하기 어려운 처지였는데, 그나마 버티던 아버지가 빚 때문에 체포되어 감옥에 투옥된 것입니다. 그래도 그는 일요일을 손꼽아 기다리며 그런 비참함을 버텨냈습니다. 일요일이 되면 6마일을 걸어 마샬시 감옥에 가서 부모님과 형제자매들과 함께 '온갖 시름을 다 잊고'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토록 눈물겨운 이야기는 존 포스터가 쓴 방대한 분량의 《디킨스 전기》(1872∼1874)를 통해 자세히 살필 수 있지만, 디킨스가 쓴 자전적 전기인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미루어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여기서 찰스 디킨스의 불우한 어린 시절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데이비드 코퍼필드』에서 구두약 공장을 다닐 때의 역경을 그린 대목은 <11장. 힘겨운 홀로서기>에 나오는데, 그 가운데 일부만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그렇게 살아도 1주일에 6,7실링 가지고는 모자랐다. 그래도 나는 온종일 창고에서 일하고, 그 돈으로 1주일을 살아가야만 했다. 월요일 아침에서 토요일 밤까지, 누구의 충고도 없었고, 어떠한 조언도, 격려도, 위로도, 도움도, 어떠한 종류의 지원도 받지 못한, 거짓도 위선도 없는 곳이었다.

 

나는 너무 어렸고 철이 없었기에 내 생활을 꾸려갈 만한 능력이 없었다. 어린 내가 달리 어떻게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겠는가? 아침에 머드스톤 앤드 그린비 상점에 가는 도중, 빵집 앞에 내놓은, 반값에 파는 오래된 과자를 먹고 싶은 욕망을 억누를 수가 없어서 점심 먹을 돈으로 과자를 미리 사먹어버릴 때도 있었다. 그런 때는 점심을 거르거나 롤빵 한 개, 아니면 푸딩 한 조각으로 요기를 했다.(190∼191쪽)

 

 - 찰스 디킨스, 『데이비드 코퍼필드』, <11장. 힘겨운 홀로서기> 중에서

 

 

데이비드 코퍼필드가 어릴 때 겪는 '온갖 고생담'은 눈물 없이는 읽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 아픈 이야기들로 빼곡하지만, 그 이야기가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서 독자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작가 자신이 직접 겪었던 어린 시절의 체험들이 도대체 얼마만큼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 있기에 이토록 실감나는 이야기를 쓸 수 있었까 싶은 생각에 애처로운 생각이 들면서도 작가에 대해 감탄을 거듭하며 데이비드 코퍼필드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되지요. 태어나서 고작 12살때까지 겪은 '파란만장한' 이야기만 하더라도 벌써 이 소설이 200쪽을 훌쩍 넘어갈 정도이니, 어린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들만 하더라도 얼마나 흥미진진한 이야기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을지는 쉽게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이지요. 주인공이 갓 태어난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마침내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 작가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될 때까지 만났던 수많은 인물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요.


이 소설을 읽는 재미가 오로지 '작가 찰스 디킨스의 드라마틱한 실제 삶'에 거의 대부분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만큼 크나큰 오해도 없을 듯합니다. 물론 이 방대한 소설의 상당 부분이 작가의 실제 삶을 깊게 투영한 건 맞지만, 그런 이야기가 소설에서 크나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지요. 특히나 20대 중반부터 갑작스레 찾아온 작가로서의 놀라운 성공 과정이나 벼락출세한 작가의 화려한 모습들은 소설 속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 작품을 완성할 때만 하더라도 작가의 나이는 고작 37세였고, 소설에 1인칭으로 등장하는 '나' 데이비드 코퍼필드가 '과거를 회상하면서' 글을 쓰고 있는 소설 속 '지금'의 나이 또한 겨우 30대 중반쯤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소설의 주인공이 비교적 어린 나이인 20대 초반에 사랑하는 도라와 결혼식을 올리고 신접살림을 차릴 때쯤이면 이 소설은 벌써 740쪽을 훌쩍 지나면서 서서히 종반부로 치닫게 되지요. 그러나 주인공의 삶을 다루는 시기가 이처럼 아직 한창이나 다름없는 나이인 30대 중반으로 한정된다고 해서 작품 내용마저 철없는 10대와 20대 시절의 이야기에 치우쳐 있으리라고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비록 30여 년에 걸친 짧은(?) 기록이라고 하더라도, 이 작품 속에는 결코 적잖은 사람들이 데이비드 코퍼필드의 주변에 머물면서 저마다 엄청난 사건들과 엮이면서 홀연히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또 더러는 아주 오래도록 살아 남아서 뒤늦게나마 주인공인 '나'와 '눈물겨운 상봉'을 겪기 때문이지요. 지난 날에 대한 온갖 추억과 회한과 상념들을 두루 떠올리면서 말이지요.

 

이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펜을 놓기 전에 다시 한 번 ㅡ 마지막으로 떠올려 본다.

(……)

빠르게 스쳐 가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뚜렷이 보이는 얼굴은 누구일까? 아아, 그렇다, 이 얼굴들! 내가 속으로 그것을 물어보면 모두가 일제히 나를 뒤돌아 본다!(1006쪽)

 

 - 찰스 디킨스, 『데이비드 코퍼필드』, <64장. 마지막 회상> 중에서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여느 이름난 장편소설들과는 사뭇 분위기부터 다릅니다. 대개 걸작으로 평가받는 '장편소설'들이 다루는 주제들부터 묵직하기 마련이고, 거대한 건축물을 마주 대하듯 '외관'에서부터 어떤 압되되는 분위기를 지니기 마련인데 이 소설은 전혀 그렇지 않으니까요.


러시아의 대문호인 톨스토이도 찰스 디킨스를 무척 좋아했다고는 하지만 이 두 작가의 대표작인 『전쟁과 평화』와 『데이비드 코퍼필드』만 비교해 보더라도 그들은 달라도 너무 다르지요. 그러나 이 두 작품 속에서도 몹시 닮은 점 한 가지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두 작품에 똑같이 등장하는 '주연급 청춘남녀가 철없이 저지르는 무대뽀 야반도주 사건'입니다. 사실 그들 두 커플은 자세히 살펴보면 용모나 성격까지도 쏙 빼닮았습니다. 심지어 두 여주인공이 도주할 때 남기는 '급하게 갈겨 쓴 편지'까지도 닮았습니다. 러시아 소설에선 오드리 햅번이 배역을 맡았던 나따샤와 돌로호프가 그 주인공이고, 영국 소설에선 에밀리와 스티어포스가 그런 역할을 떠맡았는데, 자세히 모르긴 해도 톨스토이가 『데이비드 코퍼필드』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없지 싶습니다.

 

그러나 『전쟁과 평화』에는 숱한 인물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작가가 밝히고자 애썼던 '삶의 의미'에 언제나 전쟁과 평화, 역사와 우연, 종교와 정치 등과 같은 묵직한 주제들이 끈덕지게 들러붙었으나, 찰스 디킨스의 작품에서는 그런 무거운 요소들이 조금도 필요하지 않았다는 점이 달랐지요.


(『데이비드 코퍼필드』 삽화, 바닷가 뱃집에 패거티 씨와 에밀리 등이 오손도손 살고 있다.)


 

이 소설이 지닌 치명적인 매력 가운데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건 '과거에 대한 회상'을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너무나 정확하게 되살려 내는 주인공의 비상한 기억력과, 그걸 너무나 매혹적으로 기술하는 작가의 솜씨일 듯합니다. 이 작품이 아무리 전기적인 소설이라고 하더라도 작가가 이 정도로 세밀하게 '어린 시절의 온갖 추억'을 비디오처럼 생생하게 되살려 그려내고, 그런 회상 장면 자체까지도 놀랍도록 매혹적인 문장으로 그려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인생의 매 순간마다 우리의 눈앞을 스치듯 사라져가는 수많은 광경들과 감각들, 다시 말해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통해 우리의 뇌리에 저장되는 기억들을 이처럼 생생하게 되살려 놓은 작품을 일찌기 저는 접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 소설 덕분에 저 역시 오래된 옛 추억들을 셀 수도 없을 만큼 되살려낼 수 있었습니다. 실로 오랫동안 '낡은 기억의 저장고'에서 먼지를 푹 뒤집어쓴 채 무질서하게 널브러져 있던 온갖 자질구레한 기억의 잡동사니들이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얼마나 자주 먼지를 털고 불쑥불쑥 솟아났는지는 일일이 셀 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것들은 때로는 기적적으로 기억의 심연 속에서 한 순간 갑자기 수면 위로 떠올랐으며, 그때마다 저는 그런 기억들을 어떤 식으로든 붙잡아 두기 위해서 한참이나 그걸 노트에 끄적거려야 했습니다.

 

프로이트가 가장 좋아한 소설이 『데이비드 코퍼필드』였다는 사실을 어디선가 발견하고 나서는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 기억도 있습니다. 주인공 데이비드가 심리적으로 강렬한 충격을 받을 때마다 그는 '현실에서 비롯된 꿈'을 잠자리에 들어서도 내내 이어가는 버릇이 있는데, 그 이야기가 어찌나 사실적이면서도 생생했던지 '그래, 맞아, 나도 예전에 그런 비슷한 꿈을 자주 꾸었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인간 내면 심리에 대한 탁월한 연구결과를 내놓은 천재 심리학자 프로이트가 이 소설을 두고 얼마나 '자신의 경험'과 일일이 대조하면서 거듭 이 소설을 감탄하며 읽었을지도 능히 짐작됩니다.


소설 『데이비드 코퍼필드』에 담긴 이야기는 '기억의 본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독자들한테 끊임없이 과거를 회상하게 한다는 점에서 참으로 매력적입니다. 디킨스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계급과 성()의 차이에서 오는 '관계의 불안정'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했는데, 이는 노동자 계급인 여주인공 에밀리를 유혹하는 스티어포스, 성녀 같은 아그네스에게 흑심을 품은 우라이아, 그리고 결혼 이후에도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는 관능적인 도라에서 정숙한 이성 아그네스에게로 차츰 관심이 옮겨가는 데이비드 코퍼필드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요.

 

찰스 디킨스의 대표작인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오래 전부터 그 명성 만큼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좀처럼 쉽게 손에 잡히는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서머싯 몸이 <세계 10대 소설> 중에서도 최고라고 격찬한 작품이었으니 도대체 얼마만큼 대단한 작품인가 하는 궁금증이 늘 뒤따라 다녔지만, <호밀밭의 파수꾼>과 같은 작품에서는 이 소설을 읽고픈 열망을 한 순간에 싹 달아나게 만드는 문장이 소설의 첫머리에서부터 떡하니 등장하니 말이지요.


정말로 이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아마도 가장 먼저 내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끔찍했던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 우리 부모님이 무슨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내가 태어나기 전에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와 같은 데이비드 코퍼필드 식의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이야기들에 대해서 알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난 그런 이야기들을 하고 싶지가 않다.


그러나 어느 유명한 마술사 이름과 똑닮은 제목을 지닌 이 특별한 작품은 가끔씩 마술을 부리듯 독자들을 확 끌어당길 때도 없진 않았습니다. 지난 2008년 느닷없이 들이닥친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전세계가 공포에 휩싸였을 때 미국 의 워싱턴 포스트에서 작금의 경제난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추천받은 적이 있었는데, 온갖 이름난 경제 서적들을 다 제치고 <데이비드 코퍼필드>가 유일하게 복수로 추천을 받았다는 깜짝뉴스가 떴으니 말이지요.


더군다나 그 책을 추천한 인물이 세계적인 대부호 빌 게이츠와 경영 구루로 널리 인정받는 피터 드러커였으니 다들  그 뉴스를 우스개로 치부할 수도 없었을 테지요. 그 두 사람이 이 책을 추천한 까닭은 바로 작품 속 인물인 미코버가  데이비드 코퍼필드에게 건넨 진심어린 충고 때문이었습니다.


"너도 알겠지만, 한 해 수입이 20파운드인데, 지출이 19파운드 19실링 6펜스면 결과는 행복이고, 한 해 수입이 20파운드인데, 지출이 20파운드 6실링이면 결과는 비참하지."


톨스토이는 “디킨스 소설에 나오는 인물은 모두 내 친구”라면서 디킨스를 19세기 최고의 문호라 평하고 디킨스 초상화를 서재에 걸어 놓을 정도로 존경했다고 하지요. 그가 디킨스의 작품을 "영문학의 백미"라고 칭송한 것도 작가 특유의 옹골차면서도 눈물겹도록 놀라운 이야기 솜씨 때문이었습니다.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양적으로 어마어마하게 긴 장편소설이다. 아무리 세계 걸작으로 이름 높은 작품이라도 이 정도로 길면 두세 군데는 이야기가 느슨해지기 때문에, 독자는 지루해도 다음에 올 절정을 기대하며 꾹 참고 책장을 넘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그러한 곳이 전혀 없다. 어느 부분을 골라 읽어도 독특한 재미가 있고, 계속 읽으면 읽을수록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 책을 놓을 수 없게 된다. 이야기에 이끌려가는 게 아니라 뒤쫓아 가는 것이다. 늘어지는 곳 없이 팽팽하게 조여진 소설, 이것이 이 작품이 많은 독자를 사로잡은 까닭이다. 인생의 고뇌와 비통을 날실로 삼고, 오락성과 환희를 씨실로 삼아 작품 전체를 옹골지게 엮어냈기 때문이며, 눈물과 더불어 웃음이 절묘하게 얽혀서 혼연하고 아름다운 예술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1109쪽)

 

 - 찰스 디킨스, 『데이비드 코퍼필드』, <찰스 디킨스 생애와 문학> 중에서


이제 『데이비드 코퍼필드』와도 다시 작별할 시간입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숱한 인물들 가운데 꽤나 많은 사람들을 저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듯합니다. 가장 먼저 페거티와 그의 오빠가 떠오릅니다. 쌀쌀맞던 의붓아버지 머드스톤과 그의 누나도. 학창시절부터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스티어포스와 트레들스도. 페거티 씨네 뱃집에서 의좋게 살았던 에밀리와 햄과 거미지 부인도. 구두약 공장에 다니던 어린 시절부터 오래도록 함께 한 미코버 부부도. 5박 6일 동안의 고난의 행군 끝에 만난 대고모 트롯우드도. 캔터베리의 대성당 근처에 살았던 우라이아 힙과 아그네스까지도 벌써 그립습니다. 아직도 사전 편찬에 계속 몰두하고 있을 것만 같은 스트롱 박사 부부도 그립고, 도라와 집(애완견 이름)도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스티어포스 부인과 로사 다틀과 하인 리티머는 어떻게 생겼을까. 에밀리의 친구 마사와 미스 모처의 실제 모습도 여전히 궁금합니다. 트레들스의 아내가 된 소피와 여러 발랄한 처제들까지도...

 

이제는 그들과 헤어져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언젠가 다시 만날 그때까지 모두들 부디 안녕!!!


 * * *


 * *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LAKSUIT 2022-01-14 19: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보려고 주문했어요.감사합니다

oren 2022-01-14 19:22   좋아요 0 | URL
와우~ 『데이비드 코퍼필드』의 독자가 되신 것을 격하게 환영합니다!!
 

러스킨은 인류를 노동자의 종족과 놀이하는 종족으로 대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자는 땅을 갈고 물건을 만들고 집을 짓는 등 생활 필수품을 제공하는 자들이다. 반면에 후자는 일을 하지 않아 시간적 여유가 많으므로 레크리에이션을 필요로 하는데 노동자의 종족을 자신들의 가축으로 혹은 인형으로 혹은 죽음의 게임에 투입하는 졸(卒)로 여긴다는 것이다.

  - 요한 하위징아, 『호모 루덴스』


 * * *


지금으로부터 대략 30년쯤의 시간이 더 흐른 뒤, 어느 누가 문득 고개를 돌려 2021년을 되돌아 본다면 그 사람은 과연 올해 일어난 별의별 사건들 가운데 무엇을 가장 먼저 떠올릴까요? 코로나19? 비트코인? 테슬라? 대장동? 화천대유? 물론 이런 굵직굵직한 이슈들도 빠질 순 없겠지만, 아무래도 최우선순위는 오징어게임이 차지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이 드라마는 삽시간에 전세계를 점령했으며, 예전에는 감히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온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이 드라마가 이토록 엄청난 인기를 끌어모은 원천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요? 이미 해외의 수많은 미디어들이 이 기괴한 9부작 드라마의 흥행 요인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해 왔지만, 정작 이 드라마 속에 가장 깊숙히  감춰진 핵심들은 아직까지도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왜냐하면 이 드라마의 인기를 로켓처럼 하늘 높이 쏘아올린 거대한 추진 에너지 가운데 하나는 분명 '놀이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놀이하는 인간'은 라틴어로는 호모 루덴스라고 하는데, 네덜란드가 배출한 세계적인 역사학자 요한 호위징아(1872∼1945) 덕분에 널리 확산된 개념이지요. 그는 『호모 루덴스』보다 훨씬 앞서 출간한 책 『중세의 가을』로도 유명세를 떨쳤는데, 그 책의 핵심은 <험난하고 참담한 세상을 부정하는 길> 대신에 <보다 더 아름다운 삶을 꿈꾸기> 위해 중세의 기사도 정신과 궁정 연애가 발달했다는 놀라운 분석을 펼칩니다.


만약 지상의 현실적인 삶이 절망적일 정도로 비참한데도 그 세상을 부정하기 어렵다면 결국 남은 한 가지는 빛나는 환상의 꿈나라에 살면서 그러한 이상의 황홀 속에서 지저분한 현실을 아름답게 채색하는 수밖에 없을 테지요. 요한 하위징아는 중세의 기사도와 궁정 연애가 바로 그런 연유로 탄생했음을 밝혔는데, 이것을 「호모 루덴스」의 관점으로 바꿔 말하면 '진지함의 세계'에서 벗어나 '놀이의 세계'로 들어갈 때 강력한 새로운 문화가 탄생된다는 것입니다.


하위징아는 자신이 쓴 작품이 후일 성공작으로 평가받게 된다면 자신의 기발한 상상력 덕분이라고 말했는데, 어쩌면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만든 황동혁 감독이야말로 역사학자 하위징아가 발견했던 '놀이의 정신'을 자신만의 '기발한 상상력'과 결합시킴으로써 요한 하위징아 못지않은 거대한 성공 스토리를 써낸 게 아닌가 싶습니다.


도대체 「호모 루덴스」라는 책에서 주장하는 바가 무엇이길래 그것이 <오징어 게임>과 결부되는 걸까요? 까마득한 옛날인 1938년에 출판된 「호모 루덴스」는 인류 문화의 발생 단계에서부터 현대 문명에 이르기까지 '놀이'가 얼마만큼 광범위하면서도 뿌리 깊게 인간의 문화 속에 두루 스며들어 있는지를 탁월하게 묘파한 걸작이지요.


사실 인류는 오랫동안 자기 자신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라고 불러왔지요.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 인류는 그리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게 밝혀졌고,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인류를 "호모 파베르(Homo Faber:도구를 사용하는 인간)"라고 바꿔부르기 시작했지요. 인간의 본질을 도구를 사용하고 만들 줄 아는 관점에서 바라본 인간관은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이 주장했는데, 과학도서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정도로 아름다운 그의 문장은 읽어볼수록 깊은 통찰이 느껴지지요.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한 세기가 흘렀는데 이제서야 우리는 그것이 야기한 심층적인 동요를 느끼기 시작하고 있다. 그것이 산업에 일으킨 혁명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조차 뒤집어 놓았다. 새로운 생각들이 떠오른다. 새로운 감정들이 개화하고 있다. 수천 년 후에 과거를 되돌아보고 그 주요한 선들만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면, 전쟁과 혁명들은 사람들이 그것들을 아직 기억한다고 해도 별 것 아니게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증기기관 그리고 거기에 수반되는 각종 발명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아마도 우리가 청동이나 석기(石器)에 대해 말하듯이 말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한 시대를 정의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우리가 모든 오만에서 벗어나 인간종을 정의하기 위해 역사시대와 선사시대가 우리에게 인간과 지성의 항구적인 특성으로 제시하는 것에 엄밀히 머물기로 한다면, 우리는 인간을 아마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 말하지 않고 호모 파베르Homo faber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을 잠깐만 둘러보더라도 우리는 이미 수많은 도구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습니다. 신체의 일부처럼 꼭 움켜쥐고 다니는 스마트폰 하나만 보더라도 원시인들은 감히 상상도 못했던 '마법의 도구'를 사용하는 셈이지요. 인간은 이미 고성능 컴퓨터를 이용하여 인공지능을 활용하기 시작했으며 디지털 '가상 인간'을 창조하는 지경에 이르렀지요.일찌감치 고대 그리스의 비극시인 소포클레스는 불멸의 비극작품 『안티고네』를 통해 이토록 위험천만한 '인류의 위대성'을 절묘한 싯구절로 노래한 적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무서운 것이 많다 하여도
사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네.

사람은 사나운 겨울 남풍 속에서도
잿빛 바다를 건너며 내리 덮치는
파도 아래로 길을 연다네.
그리고 신들 가운데 가장 신성하고
무진장하며 지칠 줄 모르는 대지를
사람은 말馬의 후손으로
갈아엎으며 해마다, 앞으로 갔다가
뒤로 돌아서는 쟁기로 못살게 군다네.

그리고 마음이 가벼운 새의
부족들과 야수의 종족들과
심해 속의 바다 족속들을
촘촘한 그물코 안으로 유인하여
잡아간다네. 총명한 사람은.
사람은 또 산속을 헤매는 들짐승들을
책략으로 제압하고,
갈기가 텁수룩한 말을 길들여
그 목에 멍에를 얹는가 하면,
지칠 줄 모르는 산山소를 길들인다네.

또한 언어와 바람처럼 날랜 생각과,
도시에 질서를 부여하는 심성을 사람은 독학으로
배웠다네, 그리고 맑은 하늘 아래서 노숙하기가
싫어지자 서리와 폭우의 화살을 피하는 법도.
사람이 대비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아무 대비 없이 사람이 미래사를 맞이하는 일은
결코 없다네. 다만 죽음 앞에서 도망치는
수단을 손에 넣지 못했을 뿐이라네.

하지만 사람은 고통스런 질병에서
도망치는 방법은 이미 궁리해냈다네.

 - 《안티고네》332∼372행


이처럼 호모 사피엔스 또는 호모 파베르로 불리던 인간이 언젠가부터 호모 루덴스로 불리기 시작합니다. 인류에게 이 새로운 호칭을 붙인 인물이 요한 하위징아였습니다.


인간과 동물에게 동시에 적용되면서 생각하기와 만들어내기처럼 중요한 제3의 기능이 있으니, 곧 놀이하기이다. 그리하여 나는 호모 파베르 바로 옆에,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와 같은 수준으로, 호모 루덴스(Homo Ludens:놀이하는 인간)를 인류 지칭 용어의 리스트에 등재시키고자 한다.(21쪽)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인간의 행위를 '놀이'라고 부르는 것이 곧 고대의 지혜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이러한 결론을 천박하다고 여겼지요. 하위징아는 놀이 그 자체가 문화적 현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요한 하위징아가 『호모 루덴스』라는 책에서 놀이에 대해 어떤 주장을 펼쳤고, 바로 그 놀이 정신이 얼마만큼 치밀하게 『오징어 게임』속에 녹아들어 있는지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지요.


우리는 누구나 어린 시절에 아주 다양한 놀이들을 즐기며 놀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가장 단순한 숨바꼭질부터 시작하여 공기놀이, 딱지치기, 땅따먹기, 구슬치기, 비석치기, 자치기를 지칠 줄도 모르며 즐겼고,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오징어 게임뿐 아니라【우리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를 목청것 부르며 놀았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놀이들은 비단 우리 인간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동물들도 인간들처럼 놀이를 즐기기 때문이지요.


강아지들의 즐거운 놀이를 유심히 지켜보면 거기에 인간의 놀이에 깃든 본질적 측면이 모두 갖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강아지들은 어떤 일정한 자세와 동작을 취하면서 상대를 놀이에 끌어들인다. 네 형제의 귀를 물어서는 안 된다. 물더라도 세게 물어서는 안 된다 등의 규칙을 지키면서 즐겁게 논다. 강아지들은 짐짓 화난 체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중요한 사실인데 강아지들은 이렇게 놀면서 엄청난 재미와 즐거움을 느낀다. 강아지들이 이처럼 뛰어노는 것은 동물 놀이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이다.(30쪽)



동물들의 놀이 본능에 대해서는 16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도 날카롭게 통찰한 적이 있었지요. 그는 원숭이, 코끼리, 까치, 개 등의 학습능력이 얼마만큼 놀라운지를 감탄을 거듭하며 자세히 소개한 끝에 특별히 고양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입니다.


내가 고양이와 희롱하고 있자면,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소일하는 것인지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소일하는 것인지 누가 알 일인가?


요한 하위징아는 강아지의 새들의 놀이 본능과 인간에게 내재된 놀이 본능들을 깊이 탐구한 끝에 다음과 같은 놀라운 결론을 이끌어 냅니다.


놀이는 문화보다 더 오래된 것이다.(29쪽)


놀이가 이토록 놀라운 뿌리를 지니고 있었으니, 「오징어 게임」을 시청한 수억 명의 지구인들이 단박에 그 드라마의 매력에 풍덩 빠져든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었지요. 문화권이 아무리 서로 다르더라도 인간이 즐기는 놀이는 보는 즉시 강력한 공감의 마력을 불러일으키니 말이지요. 인류가 창조한 그 어떤 문화보다도 더 뿌리가 깊은 '놀이'를 주된 소재로 드라마를 만든 황감독은 도대체 얼마만큼이나 놀이의 본질을 깊이 꿰뚫어본 걸까요?


놀이를 동물이나 어린아이의 생활에 나타나는 행위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문화의 기능으로 인식할 때, 비로소 생물학과 심리학의 경계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문화를 예의 주시해 보면 놀이가 문화의 정립 이전부터 당당한 크기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고, 이어 선사 시대의 초창기부터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문화를 수반하면서 그 속에 침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세계 어디에서나 놀이가 ‘일상’ 생활과는 구분되는 잘 정의된 특질을 가진 행위로 정립되어 있음을 발견한다.(34쪽)



이처럼 놀이의 요소는 인간 사회의 온갖 중요한 행위들 속에 놀라우리만치 깊숙히 스며들어 있지만, 우리의 주된 관심사는 문화인류학적 탐구가 아닌 만큼 여기서 다시 고개를 돌려 오징어 게임이 펼쳐지는 그 이름모를 섬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전세계인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은 그 마법 같은 드라마 속에 '놀이의 특징들'이 얼마만큼 절묘하게 버무려져 있는지를 자세히 파헤칠 필요가 있으니까요.


요한 하위징아가 놀이의 일반적 특징으로서 가장 먼저 내세운 건 자발성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놀이는 자발적 행위이지요. 명령에 의한 놀이는 더 이상 놀이가 아니며, 기껏해야 놀이를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와 동물은 재미있어서 놀이를 하는 것이며, 바로 거기에 그들의 자유가 깃들어 있지요. 그런데 오징어 게임은 어떤가요? 그 드라마에서는 놀이의 첫 번째 특징들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지요.


오징어 게임에 뛰어든 456명의 참가자들은 (유일한 예외인 오일남 할아버지를 제외하면) 모두가 하나같이 막다른 골목에 내몰려 어쩔 수 없이 그 게임에 참가하지요. 물론 그들은 문틈에 낀 초대장을 보고 자발적으로 그 게임에 참가하는 형식을 띠고 있지만 진짜 속사정은 전혀 다르지요. 온사방을 둘러봐도 희망이라고는 더이상 찾을 수 없을 때 그들은 인생의 마지막 탈출구로 그 게임에 참가하게 됩니다. 이토록 자발적이면서도 비자발적인 게임은 상상하기가 어려울 정도이지요. 또한 그들은 그 잔인한 게임을 중도에 그만둘 수도 있었지만 끝끝내 자발적으로(!) 다시 그 게임을 계속 하기 위해 되돌아오지요. 이 얼마나 지독한 아이러니인가요?



사정이 그렇기는 하지만, 어른이나 책임 있는 사람의 경우, 놀이는 언제라도 그만둘 수 있는 기능이다. 놀이는 피상적인 것이다. 놀이의 필요라는 것은 그 놀이를 즐기고자 하는 욕망에 정비례한다. 놀이는 언제라도 연기되거나 정지될 수 있다. 그것은 결코 의무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자유 시간'에 한가롭게 할 수 있는 행위이다.(42쪽)


『호모 루덴스』를 쓴 이 놀라운 역사가의 문장을 읽노라면 마치 그가 2021년에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를 일찌감치 미리 내다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이지요.


놀이의 두 번째 특징은 '일상적인' 혹은 '실제' 생활에서 벗어난 행위라는 점입니다. 놀이는 '실제' 생활에서 벗어나 그 나름의 성향을 가진 일시적 행위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모든 아이는 놀이가 '∼인 체하기'이며 '오로지 재미를 위한 것'임을 알고 있지요. 놀이는 '일상적' 생활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에 필요와 욕구의 충족이라는 명제 바깥에 있으며, 그래서 생활의 욕구 과정을 방해하지요.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도 이러한 특징은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그들은 일상생활과는 너무나 멀리 벗어난 어느 무인도에서 그 잔인한 게임을 수행하지요. 그들이 게임에 참가하기 위해 승합차에 탑승한 직후부터 그들은 철저하리만큼 현실과 분리되며, 그 게임이 벌어지는 무인도 속 공간은 심지어 뚜껑이 덮히면 드론으로도 수색이 불가능할 정도로 이 세상과 완벽히 차단되지요. 이 드라마가 얼마만큼 치밀하게 '놀이의 특징'을 극대화한 작품인지는 이런 대목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놀이는 일단 시작되면 적절한 순간에 종료되며 시간의 제약보다 더 놀라운 것은 공간의 제약입니다. 모든 놀이는 운동성을 갖고 있고, 그 놀이가 벌어지는 공간은 따로 마련되지요. 드라마 오징어 게임 속에서 펼쳐지는 모든 게임들은 거의 대부분 '공간의 제약'을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게임의 참가자들에게는 퇴로조차 철저히 차단되며, 살벌한 줄다리기 게임은 공포스러운 높이 위에 설치된 데다가 벼랑끝처럼 단절된 공간 속에서 펼쳐지며, 징검다리 게임에선 한발짝만 잘못 내디뎌도 나락으로 떨어지는 '공간 제약'의 극치를 보여주지요.



놀이터 내부에는 특정하면서도 절대적인 질서가 지배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놀이의 또 다른 특징을 발견하게 됩니다.


놀이는 자체적으로 지고하고 절대적인 질서를 요구한다. 이런 질서에서 조금이라도 일탈하면 그것은 "게임을 망쳐 버리고", 그 특징을 박탈해 버리고, 그리하여 무가치한 것이 되어 버린다. 놀이는 이처럼 질서와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미학의 한 부분이 된다. 놀이는 아름다워지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런 미학적 요소는 질서정연한 형태를 창조하려는 충동과 동일한 것인데, 놀이의 모든 측면에 스며들어가 있다.(46쪽)


그렇습니다. 오징어 게임 속 풍경만큼 '질서'가 놀이 속에 극명하게 드러나 있는 경우도 보기 어렵습니다.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표시된 가면을 쓴 '진행요원'들은 게임의 질서를 상징하는 핵심이지요. 세상에 그 어떤 놀이라도 총을 든 진행요원이 게임의 질서를 유지하는 경우는 없는 법이지요. 그런 무시무시한 통제를 보여주는 장면들이야말로 '놀이는 절대적인 질서를 요구한다'는 명제에 더없이 충실한 설정이며, 오징어 게임 속에 숨어있는 놀라운 통찰들을 다시 한번 드러냅니다.


놀이에서 또다른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건 긴장의 요소입니다. 긴장은 불확실성과 우연성을 의미하기도 하지요. 놀이하는 사람은 어떤 것이 진행되고 추진되기를 바라며, 자신의 노력이 성공을 거두기를 바라지요.


오징어 게임에서 긴장의 요소를 가장 잘 드러낸 장면은 단연 설탕뽑기 게임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인공 성기훈이 우산 모양을 완성하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해서 혀로 핥는 모습은 오징어 게임을 대표하는 명장면으로 꼽히지요. "놀이는 긴장이다"라는 요한 하위징아의 표현이 설탕뽑기에서처럼 잘 녹아드는 사례도 찾기 어렵습니다.


놀이의 세계에서 규칙을 위반하거나 무시하는 자는 '놀이 파괴자'가 됩니다. 놀이 파괴자는 놀이를 잘못하거나 놀이를 속이는 자보다 죄질이 더 무겁습니다. 사회는 게임을 망치는 자보다는 게임을 속이는 자에게 훨신 관대합니다. 오징어 게임 속에서도 게임을 속이는 자들은 그다지 큰 비난을 받지는 않지요. 그들은 게임 자체를 파괴하려는 외부의 침입자보다는 훨씬 관대하게 받아들여집니다.


놀이는 예외적이고 특별한 지위를 인정받습니다. 이것은 '우리만'의 놀이이고 '남들'은 끼지 못하게 만들지요. 이렇게 경계를 둘러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들'이 우리의 경계가 아닌 저기 '바깥'에서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은 현재로서 우리의 관심사가 되지 못합니다. 원시사회에서는 어린 소년이 남성 공동체에 입회하는 성인식 대축제 동안에 부족 내의 모든 불화가 일시적으로 중지된다고 합니다. 신성한 놀이-계절을 위하여 이처럼 정상적 사회 생활을 일시적으로 중지하는 것은 발전된 문명 사회에서도 그 흔적을 다수 발견할 수 있지요.


고대 그리스에서는 전쟁 중에도 신성한 축제기간 동안에는 전쟁을 멈출 정도였지요. 기원전 480년에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던 스파르타의 300 전사 이야기 속에도 축제와 전쟁을 구분하고자 노력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뿌리깊은 전통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스파르타인들이 이렇듯 레오니다스와 그의 군대를 먼저 내보낸 것은 동맹군들이 페르시아에 부역하는 측에 가담할 우려가 있어서 이를 막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카르네이아 제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지만 이 축제가 끝나는 대로 그들은 수비대만 남겨두고 전군을 이끌고 신속히 구원하러 갈 참이었다. 그들은 테르모필레 전투가 그렇게 빨리 결판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고, 그래서 선발대만 내보냈던 것이다.(740쪽)


오래 전에 읽었던 헤로도토스의 『역사』속에서 이런 구절을 다시 찾아내느라 적잖은 시간이 걸렸지만, 그래도 2021년에 탄생한 기념비적 드라마 오징어 게임 덕분에 이토록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을 직접 소개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몹시 기쁩니다. 이쯤에서 다시 『호모 루덴스』에 담긴 하위징아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지요.


사실 축제와 놀이의 관계는 아주 밀접하다. 둘 다 일상 생활의 정지를 요구한다. 둘 다 환희와 즐거움이 지배하지만, 축제 또한 진지한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환희와 즐거움만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둘 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며, 진정한 자유에다 엄격한 규칙을 가미한다. 간단히 말해서, 축제와 놀이는 주된 특징들을 공유한다.(66쪽)


원시 사회의 남자들은 축제 기간 동안 아무 데나 돌아다니고 축제의 피크 동안에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유령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남자들이 유령의 의례를 연출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들은 유령의 가면들을 조각 · 장식했고, 직접 사용했으며, 사용한 후에는 여자들로부터 감추어 놓았다. … 그 예식에 처음 참여하는 사람들은 황홀, 가짜 광기, 전율, 청년다운 자부심 따위를 교대로 느꼈다. 또한 여자들도 완전히 속아 넘어간 건 아니었다. 그들은 이런 저런 가면 뒤에 누가 숨어 있는지 잘 알았다.(68쪽)


이런 이야기를 읽노라면 한국만의 고유하고도 독창적인 놀이를 주된 드라마 장치로 엮어낸 오징어 게임이 단번에 서양 최대의 축제 가운데 하나인 할로윈 축제와 그토록 긴밀하게 찰떡궁합을 이룬다고 해도 그다지 놀랍지 않습니다.


"원시 부족의 사람들은 놀이 중의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역할에 몰두하는 훌륭한 배우이다. 또 어린이처럼 훌륭한 구경꾼이다. 진짜 사자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사자로 분장한 인물이 포효하면 금방 죽을 것처럼 겁을 집어 먹는다."(69쪽)






현대인들은 멀리 떨어진 것과 낯선 것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한다. 가면과 위장에 대한 이해만큼 현대인으로 하여금 원시 문화를 이해하게 해주는 것도 없다. 오늘날의 교양인들에게도 가면은 그 무서운 힘을 전달한다. 그 가면에 종교적 감정이 전혀 부여되어 있지 않은데도 말이다. 가면 쓴 인물의 광경은 우리로 하여금 '일상 생활'에서 벗어나 더 이상 햇빛이 지배하지 않는 달빛의 세계로 들어가게 한다. 그것은 우리를 원시인, 어린아이, 시인의 세계, 즉 놀이의 세계로 안내한다.(74쪽)


대체로 놀이라는 행위는 그 자체로 시작하여 그 자체로 끝이 나지요. '중요한 건 승부가 아니라 게임이다'라는 속담은 놀이의 무목적성을 잘 보여주지요. 객관적으로 말해서 놀이의 결과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사소한 문제이지요. 그러나 오징어 게임에서는 이런 놀이의 특징이 완전히 전복되지요. 그들이 벌이는 게임의 결과는 매번 '사느냐, 죽느냐'로 결판이 났으니 말이지요. 사실 최종상금 456억원이라는 엄청난 돈은 목숨을 건 사투 끝에 얻어지는 일종의 덤일 뿐이라는 느낌마저 들지요. 승리로부터 얻는 보상이 제아무리 크더라도 그런 승리를 얻기까지 치른 댓가가 너무나 가혹하다면 승리의 달콤함조차 참을 수 없이 가볍게 여겨지는 법이지요.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하여' 놀이하고 경쟁한다. 놀이하고 경쟁하는 목표는 첫째도 둘째도 승리이다. 하지만 승리를 누리는 방식은 아주 다양하다. 가령 집단적으로 축하하는 승리는 장엄, 칭송, 기립박수가 뒤따른다. 승리의 열매는 명예, 존경, 위신 등이다. 그러나 승리에는 명예 이상의 것이 걸려 있다. 모든 게임에는 부상이 걸려 있다. 그것은 물질적 · 상징적 가치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이상적 가치일 수도 있다. 그 부상은 황금 잔, 보석, 왕의 딸, 실링 화 한 잎, 나아가 놀이하는 사람의 목숨, 전 부족의 안녕일 수도 있다.(115쪽)


놀이에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행위 중 하나는 부정행위 즉 속임수이지요.그러나 원시 문화는 현대인의 도덕적 판단을 무시하는 듯합니다. 신화 속의 많은 영웅들도 기만술이나 외부의 도움으로 승리를 거두지요.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뒷세우스는 목마를 만들어 트로이를 함락했고, 펠롭스는 오이노마우스의 수레꾼에게 뇌물을 먹여 바퀴 축에다 왁스를 바르도록 한 뒤 전차경주에서 승리하고, 이아손과 테세우스는 메데아와 아리아드네의 도움으로 그들에게 부과된 과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지요.


『마하바라타』의 카우라바스는 주사위 놀이에서 속임수를 써서 승리한다. 프레야는 보탄을 속여서 랑고바르드족에게 승리를 안겨 준다. 에다 신화의 아제 신족은 거인들에게 한 맹세를 깨뜨린다. 이 모든 경우에서, 상대방을 속여 이기는 사기 행위는 그 자체로 경쟁의 주제 혹은 새로운 놀이 주제가 되었다.(118쪽)




『마하바라타』에서 세상은 시바 신이 왕비와 함께 노는 주사위 게임으로 상징되어 있다고 합니다. 게르만 신화도 신들이 놀이판 위에서 노는 게임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신들이 주사위를 가지고 놀이를 하고 그 결과에 따라 세계의 질서가 고정된다고 합니다. 기원전 8세기에 쓰여진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를 읽어보면 인간들의 전쟁 또한 신들의 전쟁 놀이를 대신해 주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지요.


『일리아스』를 맹렬히 비판한 덕분에 독일 철학자 니체로부터 '유럽이 낳은 예술의 가장 강력한 적'이라고 불렸던 플라톤 역시 인간 세계를 신들의 놀이를 놀아주는 자로 비유한 적이 있었지요. 그는 『법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만이 최고의 진지함을 행사할 수 있다. 인간은 하느님의 놀이를 놀아 주는 자이고 그것이 그의 가장 좋은 역할이다. 따라서 모든 남녀는 이에 따라 생활하면서 가장 고상한 게임을 놀이해야 하고 지금과는 다른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인생은 놀이처럼 영위되어야 한다. 일정한 게임들을 놀이하고, 희생을 비치고, 노래하고 춤춰야 한다. 이렇게 하면 인간은 신들을 기쁘게 할 것이고, 적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것이며, 경기에서 승리하게 될 것이다."(62쪽)

오징어 게임에 참가한 사람들 역시 자신이 장기판 위의 말인지 아닌지에 관해 의미심장한 대화를 나누지요. 그들 스스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실상 그들은 VIP들의 놀이 본능을 만족시켜주기 위한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존재들이었지요. 영국의 사회비평가 존 러스킨이 말한 '가진 자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은 오징어 게임에서 너무 정곡을 찔렀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러스킨은 인류를 노동자의 종족과 놀이하는 종족으로 대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자는 땅을 갈고 물건을 만들고 집을 짓는 등 생활 필수품을 제공하는 자들이다. 반면에 후자는 일을 하지 않아 시간적 여유가 많으므로 레크리에이션을 필요로 하는데 노동자의 종족을 자신들의 가축으로 혹은 인형으로 혹은 죽음의 게임에 투입하는 졸로 여긴다는 것이다.(205쪽)


천진난만하던 어린 시절에 그저 아무런 생각없이 신나게 즐겼던 좁은 동네 골목길에서의 온갖 사소한 놀이들이 2021년에 공개된 드라마 한 편 때문에 전세계 사람들이 난리법석을 피울 만큼 세계적인 유행이 되어버린 이 기묘한 상황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움과 충격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미 많은 분석가들이 <오징어 게임>을 두고 한류문화의 세계적 확산을 상징하는 대사건으로 규정하기도 하고요.


그러나 6,70년대 몹시 가난하고 못 살던 시대에 동네 꼬마녀석들이라면 누구라도 즐겼던 그 천진난만한 게임들이 넷플릭스 드라마에서 재연되는 모습은 처절하리만치 잔인한 생존 게임으로 더 도드라져 보이게 만든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오징어 게임의 이런 스토리 라인이야말로 코로나 펜데믹 사태 등으로 점점 더 삶의 벼랑끝으로 내몰린 우리네 이웃들의 고달픈 삶에 대한 거대한 메타포임을 깨닫게 만들지요.


황동혁 감독은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 사회의 승자가 패자들의 시체 위에 서 있는 것이고, 우리는 그 패자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이지요. 그가 오랜 세월 각고의 노력끝에 완성한 9부작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희비가 교차하는 호모 루덴스의 오래된 운명적 비극을 21세기에 또다시 명징하게 부각시킨 작품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이 놀라운 드라마는 어쩌면 우리들의 천진난만한 예상보다 훨씬 더 질긴 생명력을 지닌 드라마로 살아남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측해 봅니다. 이토록 멋진 작품을 만든 제작진과 배우들께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감사합니다.


 * * *



 * * *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21-11-25 00: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렌 님, 오징어 게임의 잔인한 서바이벌 게임이 싫어서 조금 보다가 멈추고 다신 안 보지만
놀이하는 인간에 대한 통찰은 맞장구치고 싶네요.
고전적인 우리 옛놀이가 등장하여 추억을 불러주기에 오징어게임이 재밌다고들 하더군요.
달고나가 나오는 편을 보면서 저도 추억이 소환되었더랬어요. 침을 발라 바늘을 대는 게 신의 한 수^^
집에서 쪽짜 해먹다가 태워먹고 그랬는데요 ㅎㅎ
얼마전에 청정바지락에 가서 들깨수제비 먹었어요. 진짜 맛났어요. 김치도 완전 맛났고요.^^
유튜브로 다시 보겠습니다. 알찬 자료 꾸준히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oren 2021-11-29 22:38   좋아요 1 | URL
<오징어 게임>은 장르상 호불호가 제법 나뉘는 드라마 같아요. 뜻밖에도 이런 종류의 드라마가 싫다면서 보다 말았다는 분들이 꽤나 많더라구요.^^ 저는 어릴 때 초등학교 4학년까지는 우리 마을에 있는 <감천분교>엘 다녔는데, 우리 동네에서 그 드넓은(!) 분교 운동장만큼 신나게 뛰어놀 만한 장소가 없었더랬지요. 물론 마을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던, 조상님들이 잠들어 계신 ‘뭉미‘(오래 묵은 묘의 오리지널 경상북도 사투리)에서도 레슬링 비슷한 놀이를 즐기며 엄청 뒹굴고 놀았지만, 학교 운동장만큼 훌륭한 놀이터는 없었지요. 거기서 축구, 야구, 땅따먹기, 닭다리싸움, 씨름(철봉 앞에 모래사장이 있었지요.), 기마전, 말타기 등등 안 해본 게임이 없을 정도인데, 그 가운데서도 단연 최고의 게임이 <오징어 게임>이었어요. 그 당시 우리들은 그 게임을 ‘익가 다리‘라고 불렀지요. 오징어의 일본 발음이 익가(いか [烏賊])였기 때문이었죠. 익가 다리 한 판 하자고 하면 누구 하나 마다하는 아이들이 없었고, 지금 생각해도 서로 이기기 위해 참 격렬하게 싸우며 놀았던 기억이 생생해요. 1970년 전후에 허구헌 날 즐겼던 그 게임을 새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그걸 무려 50년 만에 넷플릭스 드라마로 다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그 드라마가 더욱 묘한 흥분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아요... 오징어 게임 이야기는 이만 하고요.. <청정 바지락 칼국수> 가보셨군요!! 들깨수제비, 열무김치, 배추김치가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돌 정도로 맛깔나긴 하지요? 언제 들르더라도 실망하는 법이 없는, 참 변치 않는 맛집이에요.^^

프레이야 2021-11-29 23:20   좋아요 1 | URL
네. 진짜 맛났어요. 건강하고 깔끔한 맛요 ㅎㅎ 오징어 게임은 저는 해 본 적도 하는 걸 본 적도 없어요. 격렬한 몸싸움이 발어지니 주로 남자아이들 놀이였나 봐요. 아무튼 참 엄청난 트랜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