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킨은 인류를 노동자의 종족과 놀이하는 종족으로 대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자는 땅을 갈고 물건을 만들고 집을 짓는 등 생활 필수품을 제공하는 자들이다. 반면에 후자는 일을 하지 않아 시간적 여유가 많으므로 레크리에이션을 필요로 하는데 노동자의 종족을 자신들의 가축으로 혹은 인형으로 혹은 죽음의 게임에 투입하는 졸(卒)로 여긴다는 것이다.

  - 요한 하위징아, 『호모 루덴스』


 * * *


지금으로부터 대략 30년쯤의 시간이 더 흐른 뒤, 어느 누가 문득 고개를 돌려 2021년을 되돌아 본다면 그 사람은 과연 올해 일어난 별의별 사건들 가운데 무엇을 가장 먼저 떠올릴까요? 코로나19? 비트코인? 테슬라? 대장동? 화천대유? 물론 이런 굵직굵직한 이슈들도 빠질 순 없겠지만, 아무래도 최우선순위는 오징어게임이 차지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이 드라마는 삽시간에 전세계를 점령했으며, 예전에는 감히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온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이 드라마가 이토록 엄청난 인기를 끌어모은 원천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요? 이미 해외의 수많은 미디어들이 이 기괴한 9부작 드라마의 흥행 요인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해 왔지만, 정작 이 드라마 속에 가장 깊숙히  감춰진 핵심들은 아직까지도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왜냐하면 이 드라마의 인기를 로켓처럼 하늘 높이 쏘아올린 거대한 추진 에너지 가운데 하나는 분명 '놀이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놀이하는 인간'은 라틴어로는 호모 루덴스라고 하는데, 네덜란드가 배출한 세계적인 역사학자 요한 호위징아(1872∼1945) 덕분에 널리 확산된 개념이지요. 그는 『호모 루덴스』보다 훨씬 앞서 출간한 책 『중세의 가을』로도 유명세를 떨쳤는데, 그 책의 핵심은 <험난하고 참담한 세상을 부정하는 길> 대신에 <보다 더 아름다운 삶을 꿈꾸기> 위해 중세의 기사도 정신과 궁정 연애가 발달했다는 놀라운 분석을 펼칩니다.


만약 지상의 현실적인 삶이 절망적일 정도로 비참한데도 그 세상을 부정하기 어렵다면 결국 남은 한 가지는 빛나는 환상의 꿈나라에 살면서 그러한 이상의 황홀 속에서 지저분한 현실을 아름답게 채색하는 수밖에 없을 테지요. 요한 하위징아는 중세의 기사도와 궁정 연애가 바로 그런 연유로 탄생했음을 밝혔는데, 이것을 「호모 루덴스」의 관점으로 바꿔 말하면 '진지함의 세계'에서 벗어나 '놀이의 세계'로 들어갈 때 강력한 새로운 문화가 탄생된다는 것입니다.


하위징아는 자신이 쓴 작품이 후일 성공작으로 평가받게 된다면 자신의 기발한 상상력 덕분이라고 말했는데, 어쩌면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만든 황동혁 감독이야말로 역사학자 하위징아가 발견했던 '놀이의 정신'을 자신만의 '기발한 상상력'과 결합시킴으로써 요한 하위징아 못지않은 거대한 성공 스토리를 써낸 게 아닌가 싶습니다.


도대체 「호모 루덴스」라는 책에서 주장하는 바가 무엇이길래 그것이 <오징어 게임>과 결부되는 걸까요? 까마득한 옛날인 1938년에 출판된 「호모 루덴스」는 인류 문화의 발생 단계에서부터 현대 문명에 이르기까지 '놀이'가 얼마만큼 광범위하면서도 뿌리 깊게 인간의 문화 속에 두루 스며들어 있는지를 탁월하게 묘파한 걸작이지요.


사실 인류는 오랫동안 자기 자신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라고 불러왔지요.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 인류는 그리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게 밝혀졌고,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인류를 "호모 파베르(Homo Faber:도구를 사용하는 인간)"라고 바꿔부르기 시작했지요. 인간의 본질을 도구를 사용하고 만들 줄 아는 관점에서 바라본 인간관은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이 주장했는데, 과학도서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정도로 아름다운 그의 문장은 읽어볼수록 깊은 통찰이 느껴지지요.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한 세기가 흘렀는데 이제서야 우리는 그것이 야기한 심층적인 동요를 느끼기 시작하고 있다. 그것이 산업에 일으킨 혁명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조차 뒤집어 놓았다. 새로운 생각들이 떠오른다. 새로운 감정들이 개화하고 있다. 수천 년 후에 과거를 되돌아보고 그 주요한 선들만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면, 전쟁과 혁명들은 사람들이 그것들을 아직 기억한다고 해도 별 것 아니게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증기기관 그리고 거기에 수반되는 각종 발명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아마도 우리가 청동이나 석기(石器)에 대해 말하듯이 말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한 시대를 정의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우리가 모든 오만에서 벗어나 인간종을 정의하기 위해 역사시대와 선사시대가 우리에게 인간과 지성의 항구적인 특성으로 제시하는 것에 엄밀히 머물기로 한다면, 우리는 인간을 아마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 말하지 않고 호모 파베르Homo faber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을 잠깐만 둘러보더라도 우리는 이미 수많은 도구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습니다. 신체의 일부처럼 꼭 움켜쥐고 다니는 스마트폰 하나만 보더라도 원시인들은 감히 상상도 못했던 '마법의 도구'를 사용하는 셈이지요. 인간은 이미 고성능 컴퓨터를 이용하여 인공지능을 활용하기 시작했으며 디지털 '가상 인간'을 창조하는 지경에 이르렀지요.일찌감치 고대 그리스의 비극시인 소포클레스는 불멸의 비극작품 『안티고네』를 통해 이토록 위험천만한 '인류의 위대성'을 절묘한 싯구절로 노래한 적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무서운 것이 많다 하여도
사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네.

사람은 사나운 겨울 남풍 속에서도
잿빛 바다를 건너며 내리 덮치는
파도 아래로 길을 연다네.
그리고 신들 가운데 가장 신성하고
무진장하며 지칠 줄 모르는 대지를
사람은 말馬의 후손으로
갈아엎으며 해마다, 앞으로 갔다가
뒤로 돌아서는 쟁기로 못살게 군다네.

그리고 마음이 가벼운 새의
부족들과 야수의 종족들과
심해 속의 바다 족속들을
촘촘한 그물코 안으로 유인하여
잡아간다네. 총명한 사람은.
사람은 또 산속을 헤매는 들짐승들을
책략으로 제압하고,
갈기가 텁수룩한 말을 길들여
그 목에 멍에를 얹는가 하면,
지칠 줄 모르는 산山소를 길들인다네.

또한 언어와 바람처럼 날랜 생각과,
도시에 질서를 부여하는 심성을 사람은 독학으로
배웠다네, 그리고 맑은 하늘 아래서 노숙하기가
싫어지자 서리와 폭우의 화살을 피하는 법도.
사람이 대비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아무 대비 없이 사람이 미래사를 맞이하는 일은
결코 없다네. 다만 죽음 앞에서 도망치는
수단을 손에 넣지 못했을 뿐이라네.

하지만 사람은 고통스런 질병에서
도망치는 방법은 이미 궁리해냈다네.

 - 《안티고네》332∼372행


이처럼 호모 사피엔스 또는 호모 파베르로 불리던 인간이 언젠가부터 호모 루덴스로 불리기 시작합니다. 인류에게 이 새로운 호칭을 붙인 인물이 요한 하위징아였습니다.


인간과 동물에게 동시에 적용되면서 생각하기와 만들어내기처럼 중요한 제3의 기능이 있으니, 곧 놀이하기이다. 그리하여 나는 호모 파베르 바로 옆에,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와 같은 수준으로, 호모 루덴스(Homo Ludens:놀이하는 인간)를 인류 지칭 용어의 리스트에 등재시키고자 한다.(21쪽)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인간의 행위를 '놀이'라고 부르는 것이 곧 고대의 지혜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이러한 결론을 천박하다고 여겼지요. 하위징아는 놀이 그 자체가 문화적 현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요한 하위징아가 『호모 루덴스』라는 책에서 놀이에 대해 어떤 주장을 펼쳤고, 바로 그 놀이 정신이 얼마만큼 치밀하게 『오징어 게임』속에 녹아들어 있는지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지요.


우리는 누구나 어린 시절에 아주 다양한 놀이들을 즐기며 놀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가장 단순한 숨바꼭질부터 시작하여 공기놀이, 딱지치기, 땅따먹기, 구슬치기, 비석치기, 자치기를 지칠 줄도 모르며 즐겼고,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오징어 게임뿐 아니라【우리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를 목청것 부르며 놀았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놀이들은 비단 우리 인간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동물들도 인간들처럼 놀이를 즐기기 때문이지요.


강아지들의 즐거운 놀이를 유심히 지켜보면 거기에 인간의 놀이에 깃든 본질적 측면이 모두 갖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강아지들은 어떤 일정한 자세와 동작을 취하면서 상대를 놀이에 끌어들인다. 네 형제의 귀를 물어서는 안 된다. 물더라도 세게 물어서는 안 된다 등의 규칙을 지키면서 즐겁게 논다. 강아지들은 짐짓 화난 체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중요한 사실인데 강아지들은 이렇게 놀면서 엄청난 재미와 즐거움을 느낀다. 강아지들이 이처럼 뛰어노는 것은 동물 놀이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이다.(30쪽)



동물들의 놀이 본능에 대해서는 16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도 날카롭게 통찰한 적이 있었지요. 그는 원숭이, 코끼리, 까치, 개 등의 학습능력이 얼마만큼 놀라운지를 감탄을 거듭하며 자세히 소개한 끝에 특별히 고양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입니다.


내가 고양이와 희롱하고 있자면,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소일하는 것인지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소일하는 것인지 누가 알 일인가?


요한 하위징아는 강아지의 새들의 놀이 본능과 인간에게 내재된 놀이 본능들을 깊이 탐구한 끝에 다음과 같은 놀라운 결론을 이끌어 냅니다.


놀이는 문화보다 더 오래된 것이다.(29쪽)


놀이가 이토록 놀라운 뿌리를 지니고 있었으니, 「오징어 게임」을 시청한 수억 명의 지구인들이 단박에 그 드라마의 매력에 풍덩 빠져든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었지요. 문화권이 아무리 서로 다르더라도 인간이 즐기는 놀이는 보는 즉시 강력한 공감의 마력을 불러일으키니 말이지요. 인류가 창조한 그 어떤 문화보다도 더 뿌리가 깊은 '놀이'를 주된 소재로 드라마를 만든 황감독은 도대체 얼마만큼이나 놀이의 본질을 깊이 꿰뚫어본 걸까요?


놀이를 동물이나 어린아이의 생활에 나타나는 행위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문화의 기능으로 인식할 때, 비로소 생물학과 심리학의 경계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문화를 예의 주시해 보면 놀이가 문화의 정립 이전부터 당당한 크기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고, 이어 선사 시대의 초창기부터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문화를 수반하면서 그 속에 침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세계 어디에서나 놀이가 ‘일상’ 생활과는 구분되는 잘 정의된 특질을 가진 행위로 정립되어 있음을 발견한다.(34쪽)



이처럼 놀이의 요소는 인간 사회의 온갖 중요한 행위들 속에 놀라우리만치 깊숙히 스며들어 있지만, 우리의 주된 관심사는 문화인류학적 탐구가 아닌 만큼 여기서 다시 고개를 돌려 오징어 게임이 펼쳐지는 그 이름모를 섬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전세계인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은 그 마법 같은 드라마 속에 '놀이의 특징들'이 얼마만큼 절묘하게 버무려져 있는지를 자세히 파헤칠 필요가 있으니까요.


요한 하위징아가 놀이의 일반적 특징으로서 가장 먼저 내세운 건 자발성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놀이는 자발적 행위이지요. 명령에 의한 놀이는 더 이상 놀이가 아니며, 기껏해야 놀이를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와 동물은 재미있어서 놀이를 하는 것이며, 바로 거기에 그들의 자유가 깃들어 있지요. 그런데 오징어 게임은 어떤가요? 그 드라마에서는 놀이의 첫 번째 특징들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지요.


오징어 게임에 뛰어든 456명의 참가자들은 (유일한 예외인 오일남 할아버지를 제외하면) 모두가 하나같이 막다른 골목에 내몰려 어쩔 수 없이 그 게임에 참가하지요. 물론 그들은 문틈에 낀 초대장을 보고 자발적으로 그 게임에 참가하는 형식을 띠고 있지만 진짜 속사정은 전혀 다르지요. 온사방을 둘러봐도 희망이라고는 더이상 찾을 수 없을 때 그들은 인생의 마지막 탈출구로 그 게임에 참가하게 됩니다. 이토록 자발적이면서도 비자발적인 게임은 상상하기가 어려울 정도이지요. 또한 그들은 그 잔인한 게임을 중도에 그만둘 수도 있었지만 끝끝내 자발적으로(!) 다시 그 게임을 계속 하기 위해 되돌아오지요. 이 얼마나 지독한 아이러니인가요?



사정이 그렇기는 하지만, 어른이나 책임 있는 사람의 경우, 놀이는 언제라도 그만둘 수 있는 기능이다. 놀이는 피상적인 것이다. 놀이의 필요라는 것은 그 놀이를 즐기고자 하는 욕망에 정비례한다. 놀이는 언제라도 연기되거나 정지될 수 있다. 그것은 결코 의무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자유 시간'에 한가롭게 할 수 있는 행위이다.(42쪽)


『호모 루덴스』를 쓴 이 놀라운 역사가의 문장을 읽노라면 마치 그가 2021년에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를 일찌감치 미리 내다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이지요.


놀이의 두 번째 특징은 '일상적인' 혹은 '실제' 생활에서 벗어난 행위라는 점입니다. 놀이는 '실제' 생활에서 벗어나 그 나름의 성향을 가진 일시적 행위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모든 아이는 놀이가 '∼인 체하기'이며 '오로지 재미를 위한 것'임을 알고 있지요. 놀이는 '일상적' 생활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에 필요와 욕구의 충족이라는 명제 바깥에 있으며, 그래서 생활의 욕구 과정을 방해하지요.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도 이러한 특징은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그들은 일상생활과는 너무나 멀리 벗어난 어느 무인도에서 그 잔인한 게임을 수행하지요. 그들이 게임에 참가하기 위해 승합차에 탑승한 직후부터 그들은 철저하리만큼 현실과 분리되며, 그 게임이 벌어지는 무인도 속 공간은 심지어 뚜껑이 덮히면 드론으로도 수색이 불가능할 정도로 이 세상과 완벽히 차단되지요. 이 드라마가 얼마만큼 치밀하게 '놀이의 특징'을 극대화한 작품인지는 이런 대목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놀이는 일단 시작되면 적절한 순간에 종료되며 시간의 제약보다 더 놀라운 것은 공간의 제약입니다. 모든 놀이는 운동성을 갖고 있고, 그 놀이가 벌어지는 공간은 따로 마련되지요. 드라마 오징어 게임 속에서 펼쳐지는 모든 게임들은 거의 대부분 '공간의 제약'을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게임의 참가자들에게는 퇴로조차 철저히 차단되며, 살벌한 줄다리기 게임은 공포스러운 높이 위에 설치된 데다가 벼랑끝처럼 단절된 공간 속에서 펼쳐지며, 징검다리 게임에선 한발짝만 잘못 내디뎌도 나락으로 떨어지는 '공간 제약'의 극치를 보여주지요.



놀이터 내부에는 특정하면서도 절대적인 질서가 지배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놀이의 또 다른 특징을 발견하게 됩니다.


놀이는 자체적으로 지고하고 절대적인 질서를 요구한다. 이런 질서에서 조금이라도 일탈하면 그것은 "게임을 망쳐 버리고", 그 특징을 박탈해 버리고, 그리하여 무가치한 것이 되어 버린다. 놀이는 이처럼 질서와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미학의 한 부분이 된다. 놀이는 아름다워지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런 미학적 요소는 질서정연한 형태를 창조하려는 충동과 동일한 것인데, 놀이의 모든 측면에 스며들어가 있다.(46쪽)


그렇습니다. 오징어 게임 속 풍경만큼 '질서'가 놀이 속에 극명하게 드러나 있는 경우도 보기 어렵습니다.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표시된 가면을 쓴 '진행요원'들은 게임의 질서를 상징하는 핵심이지요. 세상에 그 어떤 놀이라도 총을 든 진행요원이 게임의 질서를 유지하는 경우는 없는 법이지요. 그런 무시무시한 통제를 보여주는 장면들이야말로 '놀이는 절대적인 질서를 요구한다'는 명제에 더없이 충실한 설정이며, 오징어 게임 속에 숨어있는 놀라운 통찰들을 다시 한번 드러냅니다.


놀이에서 또다른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건 긴장의 요소입니다. 긴장은 불확실성과 우연성을 의미하기도 하지요. 놀이하는 사람은 어떤 것이 진행되고 추진되기를 바라며, 자신의 노력이 성공을 거두기를 바라지요.


오징어 게임에서 긴장의 요소를 가장 잘 드러낸 장면은 단연 설탕뽑기 게임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인공 성기훈이 우산 모양을 완성하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해서 혀로 핥는 모습은 오징어 게임을 대표하는 명장면으로 꼽히지요. "놀이는 긴장이다"라는 요한 하위징아의 표현이 설탕뽑기에서처럼 잘 녹아드는 사례도 찾기 어렵습니다.


놀이의 세계에서 규칙을 위반하거나 무시하는 자는 '놀이 파괴자'가 됩니다. 놀이 파괴자는 놀이를 잘못하거나 놀이를 속이는 자보다 죄질이 더 무겁습니다. 사회는 게임을 망치는 자보다는 게임을 속이는 자에게 훨신 관대합니다. 오징어 게임 속에서도 게임을 속이는 자들은 그다지 큰 비난을 받지는 않지요. 그들은 게임 자체를 파괴하려는 외부의 침입자보다는 훨씬 관대하게 받아들여집니다.


놀이는 예외적이고 특별한 지위를 인정받습니다. 이것은 '우리만'의 놀이이고 '남들'은 끼지 못하게 만들지요. 이렇게 경계를 둘러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들'이 우리의 경계가 아닌 저기 '바깥'에서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은 현재로서 우리의 관심사가 되지 못합니다. 원시사회에서는 어린 소년이 남성 공동체에 입회하는 성인식 대축제 동안에 부족 내의 모든 불화가 일시적으로 중지된다고 합니다. 신성한 놀이-계절을 위하여 이처럼 정상적 사회 생활을 일시적으로 중지하는 것은 발전된 문명 사회에서도 그 흔적을 다수 발견할 수 있지요.


고대 그리스에서는 전쟁 중에도 신성한 축제기간 동안에는 전쟁을 멈출 정도였지요. 기원전 480년에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던 스파르타의 300 전사 이야기 속에도 축제와 전쟁을 구분하고자 노력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뿌리깊은 전통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스파르타인들이 이렇듯 레오니다스와 그의 군대를 먼저 내보낸 것은 동맹군들이 페르시아에 부역하는 측에 가담할 우려가 있어서 이를 막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카르네이아 제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지만 이 축제가 끝나는 대로 그들은 수비대만 남겨두고 전군을 이끌고 신속히 구원하러 갈 참이었다. 그들은 테르모필레 전투가 그렇게 빨리 결판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고, 그래서 선발대만 내보냈던 것이다.(740쪽)


오래 전에 읽었던 헤로도토스의 『역사』속에서 이런 구절을 다시 찾아내느라 적잖은 시간이 걸렸지만, 그래도 2021년에 탄생한 기념비적 드라마 오징어 게임 덕분에 이토록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을 직접 소개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몹시 기쁩니다. 이쯤에서 다시 『호모 루덴스』에 담긴 하위징아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지요.


사실 축제와 놀이의 관계는 아주 밀접하다. 둘 다 일상 생활의 정지를 요구한다. 둘 다 환희와 즐거움이 지배하지만, 축제 또한 진지한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환희와 즐거움만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둘 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며, 진정한 자유에다 엄격한 규칙을 가미한다. 간단히 말해서, 축제와 놀이는 주된 특징들을 공유한다.(66쪽)


원시 사회의 남자들은 축제 기간 동안 아무 데나 돌아다니고 축제의 피크 동안에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유령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남자들이 유령의 의례를 연출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들은 유령의 가면들을 조각 · 장식했고, 직접 사용했으며, 사용한 후에는 여자들로부터 감추어 놓았다. … 그 예식에 처음 참여하는 사람들은 황홀, 가짜 광기, 전율, 청년다운 자부심 따위를 교대로 느꼈다. 또한 여자들도 완전히 속아 넘어간 건 아니었다. 그들은 이런 저런 가면 뒤에 누가 숨어 있는지 잘 알았다.(68쪽)


이런 이야기를 읽노라면 한국만의 고유하고도 독창적인 놀이를 주된 드라마 장치로 엮어낸 오징어 게임이 단번에 서양 최대의 축제 가운데 하나인 할로윈 축제와 그토록 긴밀하게 찰떡궁합을 이룬다고 해도 그다지 놀랍지 않습니다.


"원시 부족의 사람들은 놀이 중의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역할에 몰두하는 훌륭한 배우이다. 또 어린이처럼 훌륭한 구경꾼이다. 진짜 사자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사자로 분장한 인물이 포효하면 금방 죽을 것처럼 겁을 집어 먹는다."(69쪽)






현대인들은 멀리 떨어진 것과 낯선 것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한다. 가면과 위장에 대한 이해만큼 현대인으로 하여금 원시 문화를 이해하게 해주는 것도 없다. 오늘날의 교양인들에게도 가면은 그 무서운 힘을 전달한다. 그 가면에 종교적 감정이 전혀 부여되어 있지 않은데도 말이다. 가면 쓴 인물의 광경은 우리로 하여금 '일상 생활'에서 벗어나 더 이상 햇빛이 지배하지 않는 달빛의 세계로 들어가게 한다. 그것은 우리를 원시인, 어린아이, 시인의 세계, 즉 놀이의 세계로 안내한다.(74쪽)


대체로 놀이라는 행위는 그 자체로 시작하여 그 자체로 끝이 나지요. '중요한 건 승부가 아니라 게임이다'라는 속담은 놀이의 무목적성을 잘 보여주지요. 객관적으로 말해서 놀이의 결과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사소한 문제이지요. 그러나 오징어 게임에서는 이런 놀이의 특징이 완전히 전복되지요. 그들이 벌이는 게임의 결과는 매번 '사느냐, 죽느냐'로 결판이 났으니 말이지요. 사실 최종상금 456억원이라는 엄청난 돈은 목숨을 건 사투 끝에 얻어지는 일종의 덤일 뿐이라는 느낌마저 들지요. 승리로부터 얻는 보상이 제아무리 크더라도 그런 승리를 얻기까지 치른 댓가가 너무나 가혹하다면 승리의 달콤함조차 참을 수 없이 가볍게 여겨지는 법이지요.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하여' 놀이하고 경쟁한다. 놀이하고 경쟁하는 목표는 첫째도 둘째도 승리이다. 하지만 승리를 누리는 방식은 아주 다양하다. 가령 집단적으로 축하하는 승리는 장엄, 칭송, 기립박수가 뒤따른다. 승리의 열매는 명예, 존경, 위신 등이다. 그러나 승리에는 명예 이상의 것이 걸려 있다. 모든 게임에는 부상이 걸려 있다. 그것은 물질적 · 상징적 가치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이상적 가치일 수도 있다. 그 부상은 황금 잔, 보석, 왕의 딸, 실링 화 한 잎, 나아가 놀이하는 사람의 목숨, 전 부족의 안녕일 수도 있다.(115쪽)


놀이에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행위 중 하나는 부정행위 즉 속임수이지요.그러나 원시 문화는 현대인의 도덕적 판단을 무시하는 듯합니다. 신화 속의 많은 영웅들도 기만술이나 외부의 도움으로 승리를 거두지요.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뒷세우스는 목마를 만들어 트로이를 함락했고, 펠롭스는 오이노마우스의 수레꾼에게 뇌물을 먹여 바퀴 축에다 왁스를 바르도록 한 뒤 전차경주에서 승리하고, 이아손과 테세우스는 메데아와 아리아드네의 도움으로 그들에게 부과된 과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지요.


『마하바라타』의 카우라바스는 주사위 놀이에서 속임수를 써서 승리한다. 프레야는 보탄을 속여서 랑고바르드족에게 승리를 안겨 준다. 에다 신화의 아제 신족은 거인들에게 한 맹세를 깨뜨린다. 이 모든 경우에서, 상대방을 속여 이기는 사기 행위는 그 자체로 경쟁의 주제 혹은 새로운 놀이 주제가 되었다.(118쪽)




『마하바라타』에서 세상은 시바 신이 왕비와 함께 노는 주사위 게임으로 상징되어 있다고 합니다. 게르만 신화도 신들이 놀이판 위에서 노는 게임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신들이 주사위를 가지고 놀이를 하고 그 결과에 따라 세계의 질서가 고정된다고 합니다. 기원전 8세기에 쓰여진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를 읽어보면 인간들의 전쟁 또한 신들의 전쟁 놀이를 대신해 주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지요.


『일리아스』를 맹렬히 비판한 덕분에 독일 철학자 니체로부터 '유럽이 낳은 예술의 가장 강력한 적'이라고 불렸던 플라톤 역시 인간 세계를 신들의 놀이를 놀아주는 자로 비유한 적이 있었지요. 그는 『법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만이 최고의 진지함을 행사할 수 있다. 인간은 하느님의 놀이를 놀아 주는 자이고 그것이 그의 가장 좋은 역할이다. 따라서 모든 남녀는 이에 따라 생활하면서 가장 고상한 게임을 놀이해야 하고 지금과는 다른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인생은 놀이처럼 영위되어야 한다. 일정한 게임들을 놀이하고, 희생을 비치고, 노래하고 춤춰야 한다. 이렇게 하면 인간은 신들을 기쁘게 할 것이고, 적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것이며, 경기에서 승리하게 될 것이다."(62쪽)

오징어 게임에 참가한 사람들 역시 자신이 장기판 위의 말인지 아닌지에 관해 의미심장한 대화를 나누지요. 그들 스스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실상 그들은 VIP들의 놀이 본능을 만족시켜주기 위한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존재들이었지요. 영국의 사회비평가 존 러스킨이 말한 '가진 자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은 오징어 게임에서 너무 정곡을 찔렀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러스킨은 인류를 노동자의 종족과 놀이하는 종족으로 대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자는 땅을 갈고 물건을 만들고 집을 짓는 등 생활 필수품을 제공하는 자들이다. 반면에 후자는 일을 하지 않아 시간적 여유가 많으므로 레크리에이션을 필요로 하는데 노동자의 종족을 자신들의 가축으로 혹은 인형으로 혹은 죽음의 게임에 투입하는 졸로 여긴다는 것이다.(205쪽)


천진난만하던 어린 시절에 그저 아무런 생각없이 신나게 즐겼던 좁은 동네 골목길에서의 온갖 사소한 놀이들이 2021년에 공개된 드라마 한 편 때문에 전세계 사람들이 난리법석을 피울 만큼 세계적인 유행이 되어버린 이 기묘한 상황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움과 충격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미 많은 분석가들이 <오징어 게임>을 두고 한류문화의 세계적 확산을 상징하는 대사건으로 규정하기도 하고요.


그러나 6,70년대 몹시 가난하고 못 살던 시대에 동네 꼬마녀석들이라면 누구라도 즐겼던 그 천진난만한 게임들이 넷플릭스 드라마에서 재연되는 모습은 처절하리만치 잔인한 생존 게임으로 더 도드라져 보이게 만든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오징어 게임의 이런 스토리 라인이야말로 코로나 펜데믹 사태 등으로 점점 더 삶의 벼랑끝으로 내몰린 우리네 이웃들의 고달픈 삶에 대한 거대한 메타포임을 깨닫게 만들지요.


황동혁 감독은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 사회의 승자가 패자들의 시체 위에 서 있는 것이고, 우리는 그 패자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이지요. 그가 오랜 세월 각고의 노력끝에 완성한 9부작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희비가 교차하는 호모 루덴스의 오래된 운명적 비극을 21세기에 또다시 명징하게 부각시킨 작품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이 놀라운 드라마는 어쩌면 우리들의 천진난만한 예상보다 훨씬 더 질긴 생명력을 지닌 드라마로 살아남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측해 봅니다. 이토록 멋진 작품을 만든 제작진과 배우들께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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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1-25 00: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렌 님, 오징어 게임의 잔인한 서바이벌 게임이 싫어서 조금 보다가 멈추고 다신 안 보지만
놀이하는 인간에 대한 통찰은 맞장구치고 싶네요.
고전적인 우리 옛놀이가 등장하여 추억을 불러주기에 오징어게임이 재밌다고들 하더군요.
달고나가 나오는 편을 보면서 저도 추억이 소환되었더랬어요. 침을 발라 바늘을 대는 게 신의 한 수^^
집에서 쪽짜 해먹다가 태워먹고 그랬는데요 ㅎㅎ
얼마전에 청정바지락에 가서 들깨수제비 먹었어요. 진짜 맛났어요. 김치도 완전 맛났고요.^^
유튜브로 다시 보겠습니다. 알찬 자료 꾸준히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oren 2021-11-29 22:38   좋아요 1 | URL
<오징어 게임>은 장르상 호불호가 제법 나뉘는 드라마 같아요. 뜻밖에도 이런 종류의 드라마가 싫다면서 보다 말았다는 분들이 꽤나 많더라구요.^^ 저는 어릴 때 초등학교 4학년까지는 우리 마을에 있는 <감천분교>엘 다녔는데, 우리 동네에서 그 드넓은(!) 분교 운동장만큼 신나게 뛰어놀 만한 장소가 없었더랬지요. 물론 마을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던, 조상님들이 잠들어 계신 ‘뭉미‘(오래 묵은 묘의 오리지널 경상북도 사투리)에서도 레슬링 비슷한 놀이를 즐기며 엄청 뒹굴고 놀았지만, 학교 운동장만큼 훌륭한 놀이터는 없었지요. 거기서 축구, 야구, 땅따먹기, 닭다리싸움, 씨름(철봉 앞에 모래사장이 있었지요.), 기마전, 말타기 등등 안 해본 게임이 없을 정도인데, 그 가운데서도 단연 최고의 게임이 <오징어 게임>이었어요. 그 당시 우리들은 그 게임을 ‘익가 다리‘라고 불렀지요. 오징어의 일본 발음이 익가(いか [烏賊])였기 때문이었죠. 익가 다리 한 판 하자고 하면 누구 하나 마다하는 아이들이 없었고, 지금 생각해도 서로 이기기 위해 참 격렬하게 싸우며 놀았던 기억이 생생해요. 1970년 전후에 허구헌 날 즐겼던 그 게임을 새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그걸 무려 50년 만에 넷플릭스 드라마로 다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그 드라마가 더욱 묘한 흥분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아요... 오징어 게임 이야기는 이만 하고요.. <청정 바지락 칼국수> 가보셨군요!! 들깨수제비, 열무김치, 배추김치가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돌 정도로 맛깔나긴 하지요? 언제 들르더라도 실망하는 법이 없는, 참 변치 않는 맛집이에요.^^

프레이야 2021-11-29 23:20   좋아요 1 | URL
네. 진짜 맛났어요. 건강하고 깔끔한 맛요 ㅎㅎ 오징어 게임은 저는 해 본 적도 하는 걸 본 적도 없어요. 격렬한 몸싸움이 발어지니 주로 남자아이들 놀이였나 봐요. 아무튼 참 엄청난 트랜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