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동서문화사 월드북 27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지음, 권기철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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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항상, 가끔, 대체로

'모든 오류는 귀결에서 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추리'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또한 그 귀결이 그 해당 근거에서 생긴 것이지 다른 근거에서 생길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경우에는 타당하지만, 그 밖의 경우에는 타당하지 않은 추리다. 오류를 범하는 사람은 하나의 귀결에 그 귀결이 전혀 가질 수 없는 근거를 설정한다. 이 경우 그에게는 오성이 실제로 부족하다. 말하자면 원인과 결과와의 결합을 직접 인식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증거이다.

또한 더 빈번한 경우이긴 하지만, 오류를 범하는 사람이 귀결에 어떤 근거를 규정하는 경우, 물론 그 근거는 가능하지만, 귀결에서 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의 추리 전체에 첨가하여, 그 해당 귀결은 '항상' 그가 진술한 근거에서만 생긴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완전한 귀납을 행한 후에 비로소 가능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오직 전제만 하고 있다. 따라서 그 '항상'이라는 것은 지나치게 광범한 개념이며, 그 대신 '가끔'이라든가 또는 '대체로'라고 말하기만 하면 별 지장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결론은 미결정의 것으로 되며, 그러한 결론으로서는 잘못이 없다. 그런데 오류를 범하는 사람이 상술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추론하는 것은 조급한 탓이 아니면 가능성에 관한 지식이 제한되어 있어서, 그 때문에 행해야 할 귀납의 필연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류는 가상과 유사하다. (5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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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시간 까치글방 138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이기상 옮김 / 까치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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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가까움에 대한 본질적인 경향


거리를 없앰은 거리를, 다시 말해서 어떤 것의 멂을 사라지게 함을, 가까워지게 함을 말한다.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거리를 없애며 존재한다. 그는 그가 무엇인 그 존재로서 그때마다 존재자를 가까이에서 만나도록 해준다. 거리를 없앰은 멂을 발견한다. 이 멂은 거리와 마찬가지로 현존재적이지 않은 존재자에 대한 범주적 규정이다. 그에 반해서 거리를 없앰은 실존범주로서 확고하게 견지되어야 한다. 도대체 존재자가 현존재에게 그것의 멂이 발견되는 한에서만 세계내부적인 존재자 자체에서 다른 것과 관련되어서 "거리"와 간격이 접근 가능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존재자들 가운데 어떤 것도 그것의 존재양식상 거리를 없앨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단지 거리를 없앰에서 발견되는 측정 가능한 간격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거리없앰은 우선 대개 둘러보는 가깝게 함, 조달함으로서의 가까이 가져옴, 예비해놓음, 손안에 가짐이다. 그런데 존재자를 순수하게 인식하며 발견하는 특정한 방식들도 가깝게 함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현존재에는 가까움에 대한 본질적인 경향이 놓여 있다.  우리가 오늘날 다소 강요되듯이 함께 행하고 있는 모든 종류의 속도상승은 멂을 극복하도록 몰아세운다. 예를 들면 "라디오 방송"과 함께 현존재는 오늘날 일상적 주위세계의 확장과 파괴라는 방법으로써 그것의 현존재의 의미를 아직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세계'의 거리를 없애고 있다. (149쪽)



침묵함

말함의 다른 본질적 가능성의 하나인 침묵함도 동일한 실존론적 기초를 가지고 있다. 서로 함께 말하는 가운데 침묵하고 있는 사람이 말을 끝없이 하는 사람보다 더 본래적으로 "이해하게끔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해를 형성할 수 있다. 어떤 것에 대하여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이해가 증진된다는 보장은 조금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장황하게 말함은 이해된 것을 은폐하고 거짓 명료성 속으로, 다시 말해서 진부함의 몰이해로 이끈다. 그렇지만 침묵함이 벙어리로 있음은 아니다. 벙어리는 오히려 거꾸로 "말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벙어리는 그가 침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애당초 그런 것을 증명할 가능성조차 없다. 그리고 천성적으로 말수가 적은 사람도, 벙어리와 마찬가지로, 그가 침묵하고 있고 침묵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은 주어진 [결정적] 순간에 침묵할 줄도 모른다. 오직 진정한 말함에서만 본래적으로 침묵함도 가능한 것이다. 현존재는 침묵할 수 있기 위해서 무엇인가 말할 것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풍부하게 열어밝힐 처지에 있어야 한다. 그때에 과묵함[침묵하고 있음]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잡담"을 눌러버린다. 침묵하고 있음은 말함의 양태로서 현존재의 이해가능성을 근원적으로 분류파악하여, 이 이해가능성에서부터 진정한 들을 수 있음과 투명한 서로 함께 있음이 생기게 한다.(227쪽)


호기심

봄의 근본구성틀은 "보는 것"에 대해서 일상성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존재경향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그것을 호기심이라는 용어로 지칭하도록 한다. 그런데 호기심이라는 용어는 그 특징상 보는 것에 제한되어 있지 않고 세계를 독특하게 감지하며 만나게 하는 경향을 표현한다. 우리는 이 현상을 원칙적으로 실존론적-존재론적인 의도를 가지고 해석하지, 좁게 인식함에 방향을 잡지 않는다. 인식이 이미 일찍부터 그리스 철학에서 "보려는 욕망"에서부터 개념파악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존재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글들을 모은 논문집의 첫번째 논문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 모든 인간은 본성상 보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의 존재에는 본질적으로 보는 것에 대한 염려가 있다. 이 문장으로써 존재자와 그 존재에 대한 학문적 탐구의 근원을 앞에서 언급한 현존재의 존재양식에서 발견하려고 시도하는 연구가 소개되었다. 학문의 실존론적 기원에 대한 이러한 그리스적 해석은 우연이 아니다. 거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파르메니데스의 문장에 앞서 윤곽잡혀 있던 그것이 명시적인 이해에 이른 셈이다 : 왜냐하면 사유와 존재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존재는 순수한 직관하는 받아들임에 자신을 내보이고 있는 그것이며, 오직 이러한 봄만이 존재를 발견한다. 근원적이고 진정한 진리는 순수 직관에 놓여 있다. 이 테제는 그뒤부터 서양철학의 기초가 된다. 그 테제 안에 헤겔 변증법도 그 동기를 가지고 있으며, 오직 그 근거 위에서만 헤겔 변증법이 가능하다.

"봄"의 기이한 우위를 누구보다도 아우구스티누스가 욕망에 대한 해석과 관련하여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본디 눈에 딸린 것이 보는 것인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다른 감관으로 무엇을 알려고 할 때에도 "보다"라는 낱말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 '들으라, 얼마나 번쩍이는지', '맡으라, 얼마나 빛나는지', '입을 대라, 얼마나 찬란한지', '만져라, 얼마나 눈부신지.' 그러지 않고 이 모든 것을 보라고 말하고 이 모든 것이 보인다고 말한다. 따라서 눈만이 감각할 수 있는 것을 '보라, 얼마나 빛나는지' 할 뿐 아니라, '소리를 들어보라', '냄새를 맡아보라', '맛을 보라', '얼마나 단단한지 만져보라' 하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일체의 감각적 경험을 '눈의 탐욕'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나머지 감관들도, 비슷한 점에서 인식함이 문제가 될 때면 눈이 윗자리를 차지하는 봄의 기능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235쪽)


무정주성(無定住性)

그러나 자유롭게 된 호기심은 본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다시 말해서 그것에 대한 존재에 이르기 위하여 보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보기 위해서 보려고 애쓴다. 호기심이 새로운 것을 찾는 이유는 그 새것에서 다시금 새로운 새것으로 뛰어들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봄의 염려에서 중요한 것은, 파악하여 알면서 진리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세계에 맡겨버릴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러기 때문에 호기심은 특이하게 가까운 것에는 머물지 않는 특성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호기심은 또한 고찰하며 머무는 여가도 추구하지 않으며, 언제나 새것과 만나는 것을 계속 바꿈으로써 생기는 동요와 흥분을 찾는다. 호기심은 아무 데도 머무르지 않음으로 해서 부단히 산만함[부산함]의 가능성을 배려한다. 호기심은 존재자를 경탄하면서 고찰하는 것, 즉 타우마체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호기심의 관심사항은 경이에 의해서 이해하지 못함에 인도되는 것이 아니다. 호기심은 앎을 배려하는데, 순전히 안 것으로 간주하기 위해서이다. 호기심을 구성하는 두 계기, 즉 배려된 주위세계에 머물지 않음과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산만함[부산함]은 이 현상의 세번째 본질성격의 기초를 부여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무정주성(無定住性)이라고 이름한다. 호기심은 도처에 있으면서 어디에도 없다. 세계-내-존재의 이러한 양태는 일상적 현존재가 그 안에서 끊임없이 뿌리 뽑히고 있는 그런 새로운 존재양식을 드러낸다.(237쪽)


애매함

누구나 다 무슨 일을 당면하고 있고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고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또한 누구나 다 이제 일어나야 할 일이 무엇이고, 아직 당면하고 있지는 않지만, "본래" 했어야만 했던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할 줄을 이미 알고 있다. 누구나 다 처음부터 이미, 다른 사람이 무엇을 예감하고 느끼는지를 예감하고 감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흔적을 따라다니는 것, 그것도 풍문에 따라서 그렇게 하는 것은 - 진짜로 사실의 "흔적을" 찾은 사람은 거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는 법이다 - 애매함이 현존재의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가장 위험한 방식인데, 그렇게 해서 애매함은 이미 현존재의 가능성을 무력화시켜버리기 때문이다. ······

공공적인 해석되어 있음의 애매함은 앞질러 얘기하는 것과 호기심으로 예감하는 것을 본래적인 사건인 것처럼 내놓고 실행과 행위는 추후의 일이며 하찮은 것으로 낙인찍어버린다. 그러기에 '그들' 속에 머물러 있는 현존재의 이해는 자신의 기획투사에서 끊임없이 진정한 존재가능성을 잘못 보고 있다. 현존재는 언제나 애매하게 "거기에"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서로 함께 있음의 공공의 열어밝혀져 있음 안에, 가장 요란한 잡담과 가장 솜씨 좋은 호기심이 "사업"을 관장하고 있는 곳에, 일상적으로는 모든 것이 일어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아무 것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 곳인 거기에 존재한다.

이러한 애매함이 호기심에게는 언제나 그것이 찾는 것을 건네주고, 잡담에게는 마치 그 속에서 모든 것이 결정되는 듯한 가상을 마련해준다.

이러한 세계-내-존재의 열어밝혀져 있음의 존재양식이 서로 함께 있음 그 자체도 철저히 지배한다. 타인은 우선 사람들이 그에 관해서 들은 것,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말하고 알고 있는 그것을 근거로 "거기에" 존재한다. 잡담은 우선 근원적인 서로 함께 있음 사이로 끼어든다. 누구나 먼저 우선 타인의 눈치를 살펴서, 그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것에 대하여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본다. '그들' 속에 서로 함께 있음은 절대로 폐쇄되어 무관심하게 옆에 나란히 있는 것이 아니고, 긴장 속에 애매하게 서로를 살피며, 몰래 서로 엿들으며 있는 것이다. 서로를 위한다는 가면 아래 서로를 적대하는 연출을 진행하고 있다.

이때 주목해야 할 것은 애매함이 위장과 왜곡을 명시적으로 의도한 데에서 비로소 생기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 개별 현존재가 애매함을 비로소 야기시켜놓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애매함은 이미 하나의 세계 안내 내던져져 있는 서로 함께 있음인 그런 서로 함께 있음 속에 들어 있다. 그런데 이 애매함이 공공적으로는 은폐되어 있으며, 사람들은 이러한 해석이 '그들[자신들]'의 해석되어 있음의 존재양식에 해당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언제나 저항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의 설명을 '그들'의 동의를 얻어서 확증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대단한] 오해일 것이다.(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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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2-05-24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님께서 밑줄 그어놓으시니 제게 돌올하게 보입니다. 아니 왜 내 책에는 이런 말이 없지? 하고 다시 보니 책이 <존재와 시간>이 아니라 <시간과 존재>네요. 이게 같은 책이 아니라는 걸 이제서야 깨닫는 무지녀입니다.

oren 2012-05-25 13:06   좋아요 0 | URL
'단순한' 밑줄긋기에 소중한 댓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알라딘에서 검색해봐도 찾기 어려운데) 반딧불이님께서 말씀하신 <시간과 존재>라는 책도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과 '같은' 책이겠지요.
 


'우주의 풍경'에 대해 많은 생각들을 해볼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책인 것 같군요. 이 책의 저자가 에필로그에서 인용한 '라플라스'는 『천체역학』의 저자로만 대충 기억하는 인물이었는데, 19세기의 어느 철학자도 '천체의 움직임과 물질의 본질'에 대해 고찰하면서 '칸트와 라플라스'를 언급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그 철학자는 당시에 이미 뉴튼의 물리학이 지닌 한계를 포함하여 '과학이 지닌 근본적인 한계'를 분명하게 꿰뚫어 보면서, 먼 미래에 이르러 물리학이 아무리 발전을 거듭하더라도 '물질의 근원'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고 장담했었는데 21세기에 이르러 초끈이론이나 다중우주이론이 발견하는 내용들이 결국 '과학의 한계 너머'를 미리 내다본 그 철학자의 혜안과도 일맥상통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 * *

이것을 크게 보면, 중심 천체와 유성의 관계에도 나타나고 있다. 유성은 유기체에서 화학적인 힘과 마찬가지로 중심 천체에 결정적으로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이에 반항하고 있다. 거기에서 구심력과 원심력의 부단한 긴장이 생기고, 이 긴장이 우주의 운행을 유지시키고 있으며, 그 자신이 이미 우리가 지금 고찰하고 있는 의지의 현상에 고유한 보편적인 투쟁을 나타내는 하나의 표현이다. 왜냐하면 어떤 물체도 의지의 현상이라고 보지 않으면 안 되지만, 의지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노력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구형을 이루게 된 천체의 원상태는 정지가 아니고 휴식도 목표도 없이 앞을 향해 무한한 공간으로 나아가는 운동, 노력이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관성의 법칙도 인과의 법칙도 대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성의 법칙에 의하면, 물질은 정지나 운동에 대해 무관심하며, 물질의 근원적인 상태는 정지이기도 하고 운동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물질이 지금 운동하고 있을 경우, 우리는 그 운동에 선행하여 정지 상태가 있었다고 전제할 권리도 없고, 운동이 시작된 원인을 질문할 권리도 없다. 그와 반대로 그 물질이 정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정지 상태에 선행하는 운동을 전제하거나 운동이 그치고 정지가 시작된 원인을 질문할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원심력을 일으키는 최초의 충격은 찾아도 얻을 수 없다. 이 원심력은 칸트와 라플라스의 가설에 따르면, 유성의 경우 중심 천체 원래의 회전 잔재며, 여러 유성은 이 중심 천체가 수축할 때 거기에서 분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중심 천체는 그 자체는 본질적으로 운동하고 있다. 즉 중심 천체는 언제나 계속 회전하며 동시에 무한한 공간 속을 날고 있으며,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더 큰 중심 천체의 주위를 돌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천문학자들의 중심 태양에 대한 억측과 완전히 일치하며, 또 우리의 전 태양계나 우리의 태양이 속해 있는 모든 별들의 이동이 지각되는 것과도 일치한다.

결국 여기에서 중심 태양을 포함한 모든 항성이 이동한다는 추론도 나오지만, 이러한 이동은 무한한 공간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절대 공간에서 운동은 정지와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바로 그것 때문에 이미 직접적으로 목적 없는 노력이나 비상에 의한 것과 마찬가지로 허무와 궁극적인 목적 없는 표현이 되는 것이지만, 우리는 이 허무와 궁극적인 목적의 결여를 이 제2권의 마지막에서 의지와 노력에 의한 결과로 모든 현상 속에서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또다시 무한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이 의지의 모든 현상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형식이 아니면 안되며, 모든 현상은 의지의 본질을 표현하기 위해 현존하고 이다.

마지막으로 인과성을 물질로 본다면, 이 단순한 물질 속에서도 이미 이때까지 고찰한 것과 같은 모든 의지 현상 상호간의 투쟁이 행해지고 있는 것을 재인식할 수 있다. 즉 물질 현상의 본질을 칸트는 반발력과 견인력으로 표현하고 있고, 물질이 실재하는 것은 상반된 두 개의 힘이 투쟁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상과 같은 재인식이 가능하다. 만약 우리가 물질의 모든 화학적인 차이를 도외시하거나 인과의 연쇄를 거슬러 올라가 아직 아무런 화학적인 차별이 없는 것까지 생각하게 되면, 거기에 남는 것은 단순한 물질이다. 또 구상(球狀)으로 된 세계로서 생활, 즉 의지의 객관화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견인력과 반발력의 투쟁이다. 견인력은 중력으로 사방으로부터 중심을 향해 모든 사물을 밀어붙이고, 반발력은 강성에 의해서든 타성에 의해서든 불가입성으로서 견인력에 대항하는 것이지만, 끊임없는 박진과 대항은 최저 단계에서 의지의 객관성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또 이미 이 단계에서도 의지의 특질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최저 단계에서는 의지가 어떤 맹목적인 충동, 어떤 어둡고 막연한 활동으로 나타나 있어서 직접 인식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의지의 객관화 가운데 가장 단순하고 미약한 방식이다. 그런데 의지는 이러한 맹목적인 충동이나 인식이 없는 노력으로서는 무기적 자연 전체에도, 모든 근원적인 힘에도 나타나 있다. 이들의 힘들은 백만 가지의 동질적이고 규칙적인 현상에 자신을 드러내어 우리들에게 나타나는데, 개별적인 물질은 전혀 나타내지 않고 오직 시간과 공간에 의해, 즉 개별화의 원리에 의해 다양화되어 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상이 유리의 다각면을 통해 다양하게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2권 의지로서의 세계에 대한 제1고찰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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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좋아하는 이유

사람들은 또한 동물과 식물, 특히 꽃이 있으면 좋아한다. 만일 당신이 집을 비롯하여 쾌적하지만 인공적인 환경에서 이 책을 읽고 있다면, 아마도 주변에는 동물이나 식물이나 꽃을 주제로 한 장식물이 있을 것이다. 동물에 매혹되는 현상은 설명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동물을 먹고 동물은 우리를 먹는다. 그러나 꽃은 사치스런 레스토랑에서 내놓는 샐러드가 아니면 먹을 일이 없으므로 꽃을 사랑하는 마음은 설명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직관적인 식물학자인데, 꽃은 풍부한 정보원이다. 식물은 함께 모여 있으면 초록 일색이어서 종종 꽃을 봐야만 식별이 가능하다. 꽃은 성장의 전조로서, 약간의 지능을 가진 생물에게는 미래에 과일, 견과, 덩이줄기 등이 생길 자리로 기억된다.

일몰, 천둥, 짙은 구름, 불과 같은 몇몇 자연현상들은 감정을 크게 환기시킨다. 오리언스와 헤르바겐은 그런 현상들은 어둠, 폭풍우, 화재 같은 중요한 변화가 임박했음을 알려준다고 지적한다. 환기된 감정들은 마음을 사로잡고, 일손을 멈추게 하고, 주의하게 하고, 앞으로 닥칠 일에 대비하게 한다.

 - 스티븐 핑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中에서



비가 올 거라는 예보와는 달리 오늘은 날씨가 제법 좋았다.
 
서둘러 퇴근하여 편한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사람이 붐비지 않을) 꽃박람회 장소로 달려갔으나 아쉽게도 관람 마감시간을 불과 1시간여 남겨놓고 있을 뿐이었다(마감시간은 오후 7시). 내가 꽃구경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을 감안해 본다면 1만원에 달하는 입장료가 턱없이 비싸게 느껴졌지만 '그건 내생각일 뿐이고' 서둘러 표를 사서 입장했다.

평일이라 그런지 과연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한적한 느낌도 들고 좋앗지만 정작 사진을 찍기에는 여러모로 불편했다. 일기예보에서 예고한 것처럼 비가 올 날씨는 아니었지만 했지만 그래도 햇빛은 자주 구름 속으로 숨어버리고, 사진 속에 적당히 포함되어도 좋을 '사람들'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오늘의 아쉬운 꽃구경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말았지만 내일은 아예 평일 하루를 통째로 내서 봄꽃을 구경하러 '산'으로 가기로 했다. 막걸리에 부추전까지 준비해 가는 만큼 내일은 온종일 봄꽃에 제대로 흠뻑 취해보고 싶다.



1. 먹구름 가득한 가운데 햇살이 비치는 호수공원

Shooting Date/Time 2012-05-02 오후 5:31:07


2. 꽃터널 속에 숨은 여인
 


Shooting Date/Time 2012-05-02 오후 5:42:36


3. 초록 일색 
 




 

4. 헐크





5. 중계탑과 꽃탑





6. 푸른 하늘, 붉은 꽃





7. 꽃탑 사이로 하늘은 열리고~





8. 꽃들의 시간과 공간





9. 꽃가루를 뿌려놓은 듯





10.꽃으로 뒤덮인 지구





11 
 꽃구경을 나온 가족


Shooting Date/Time 2012-05-02 오후 6:27:45



12. 꽃과 함께~


Shooting Date/Time 2012-05-02 오후 6:32:03


13. 꽃을 담는(혹은 닮은) 여인


Shooting Date/Time 2012-05-02 오후 6:33:20


14. 꽃봉우리
 





15. 한사코 사진 속으로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


Shooting Date/Time 2012-05-02 오후 6:38:59


16. 넝쿨장미
 


Shooting Date/Time 2012-05-02 오후 6:41:30


17. 저녁햇살에 더욱 붉게 빛나는 튤립
 


Shooting Date/Time 2012-05-02 오후 6:52:10



18. 눈부신 배경
이 되어준 백색 튤립


Shooting Date/Time 2012-05-02 오후 6:53:19


19. 밝게 빛나는 호수와 꽃 
 


Shooting Date/Time 2012-05-02 오후 6:53:45



20. 저무는 태양이 아쉬운 꽃들

Shooting Date/Time 2012-05-02 오후 7:11:27


21. 태양은 가득히~
 


Shooting Date/Time 2012-05-02 오후 7:14:04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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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2-05-03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산인가요? 꽃이 넘 아름답습니당^^

oren 2012-05-04 15:17   좋아요 0 | URL
네.. 갑자기 무더워진 날씨 때문에 저 꽃들도 헉헉거릴 듯싶어 안쓰럽기도 해요. ㅎㅎ

류연 2012-05-31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살짝 걸린 태양이 참 멋지네요 ㅎㅎ

oren 2012-06-01 16:08   좋아요 0 | URL
네.. ㅎㅎ
 




어젯밤에는 난생 처음으로 풋치니의 오페라 '토스카'를 관람했다.

  (이미지 출처 : 예술의 전당 홈페이지)




이번 공연은 세계적인 아티스트 뿐만 아니라 오페라의 본고장인 이태리에서 제작한 의상과 웅장한 무대가 특징이라고 하여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실재(實在)하는 이탈리아 로마의 명소들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듯 '과연' 웅장했다.


  (이미지 출처 : 예술의 전당 홈페이지)




이번『TOSCA』의 내한공연을 맡은 CAST를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세계적인 지휘자 장파올로 비잔티가 이끄는 프라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하다는 느낌을 받았으며, 특히 토스카의 3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정열적인 여가수 토스카(아디나 니테스쿠)와 그녀의 연인인 화가 카바라도시(삐에로 줄리아치), 권력 지향적인 경시총감 스카르피아(이반 인베라르디)의 노래는 그 파워풀한 표현력과 풍부한 성량뿐만 아니라 풋치니 음악 특유의 드라마틱한 장면들의 연속과 그에 따른 극적인 감정들을 표현하는 능력들이 정말 놀라웠다.

 

  (이미지 출처 : 예술의 전당 홈페이지)




  (이미지 출처 : 네이버 뉴스)




이번에 토스카 역을 맡은 니테스쿠는 15개 프로덕션에서 100회 이상 '토스카'로 무대에 섰다고 한다. 예술과 사랑에 이어 죽음까지 이르는 과정에서의 강인함과 열정 및 용기를 지닌 여주인공을 표현해 내는 능력이 정말 놀라웠다.

카바라도시의 연인 토스카를 빼앗으려는 경시총감 스카르피아 역을 맡은 바리톤 이반 인베라르디는 매우 건장한 체격에 어울리듯 정말 시원시원하고 우렁찬 목소리를 지녔는데, 토스카를 협박하고 어르고 유혹하는 '탐욕스런 권력자' 역할에 너무 잘 어울렸다. 마치 무대의 배경인 1800년의 로마 궁정 속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실제로 구경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였다.

이 두 주인공의 제2막에서의 활약이 너무 뛰어난 탓인지는 몰라도 토스카의 연인인 카바라도시의 연주는 아주 조금 아쉬웠다. 특히나 '토스카'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리아인 '별은 빛나건만'은 충분히 감동적이긴 했지만, 소름이 끼칠 정도는 아니어서 못내 애석했다.

자유의 투사이자 탈옥한 정치범인 친구의 도주를 도운 죄목 때문에 사형에 처해질 운명에 빠진 그는 총살 직전에 마지막으로 간수에게 부탁하여 '사랑하는 여인' 토스카에게 전해줄 '편지'를 쓸 시간을 가까스로 얻는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여인을 이 세상에 홀로 두고 죽어야 하는 기막힌 처지를 생각하며, 북받쳐 오르는 울음을 참으며 '연인과의 달콤했던 사랑의 추억'을 떠올리며 부르는 노래는 '너무나 절절해서' 가슴을 후벼파는 느낌이 들고, 우리가 비극을 통해 얼마나 더 깊고도 진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지를 새삼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별은 빛나고, 대지는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채소밭의 문이 삐걱거리며
모래에 스치는 발자국 소리.
향긋한 냄새를 풍기며 그녀가 들어와
내 품속에 몸을 맡겼다.
오! 달콤한 입맞춤, 수 없는 나른한 애무(愛撫),
나는 떨면서 베일을 벗기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는 틈도 아쉬워하며....
이 사랑의 꿈은 영원히 사라졌다.
시간은 흘러갔다.
절망 속에 나는 죽는다. (반복)
이제 와서 이토록 아쉬운 것일까 목숨이란!
(목숨이란!)



어제의 공연을 보면서 (가늠할 길이 없는) '연인과의 사별의 고통'이 얼마나 뼈아픈 비탄에 빠지게 하는 것일까에 대해 '막연히' 생각해 보면서 슬픈 아리아의 감동에 젖어 눈물을 조금은 글썽거렸고, 그 노래가 끝나자말자 뜨거운 박수를 쳤지만 (내심 기대하고 준비했던) '목이 꽉 메어오는 감동과 함께 터져나오는 환호성'을 내지르지는 못했다.

며칠전 밤늦게 우연히 1FM을 통해 흘러나오던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별은 빛나건만'을 듣고 깊은 감동에 젖어든 적이 있었는데, 오늘 다시 유트브를 뒤적여 동영상을 찾아보니 그의 목소리와 연기야말로 '죽음을 앞둔 연인의 고통'을 절절히 토해내는 바로 그것이었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



······
아 사랑의 꿈은 영원히 사라졌다.
시간은 흘러갔다.
절망 속에 나는 죽는다.
이제 와서 이토록 아쉬운 것일까 목숨이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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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4-29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좋으셨겠습니다.
근데 이탈리아 언어로 부르던가요?
알아 들을을 수 있을까요?
알아 듣지는 못해도 감흥은 있는 거죠?
사실 저는 아는 단체가 7월달에 러시아에서 조그만 뮤지컬을 할 모양인데
언어 문제 때문에 좀 걱정이예요.ㅠ

oren 2012-04-30 12:12   좋아요 0 | URL
이탈리아 가수는 물론 한국 가수들도 '이탈리아어'로 노래를 부르는데, 극장 한가운데 '초대형 전광판'을 통해 자막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해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답니다. ㅎㅎ

페크pek0501 2012-04-29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멋진 감상 하셨네요. 저는 이런 거 보면 너무 몰입해서인지 눈물이 잘 나오더라고요.
책에서 보는 평범한 대사도 이런 작품을 통해 보면 감흥이 다른 것 같아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만 해도 언젠가 영화로 보게 되었는데 책에서 볼 때와 너무 달라 놀랐어요.
가슴이 철렁 하게 되는 대사를 하나하나 느끼면서 이래서 명작인가, 싶더라고요. 아주 감동적이었어요.
책과 영화의 차이를 비교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죠.
책이 더 나은 경우가 많았는데, 그건 그렇지가 않더군요. 희곡이라서인지...^^

oren 2012-04-30 12:15   좋아요 0 | URL
책을 읽을 땐 '상상력'이 많이 작동하지만, 무대 공연이나 영화를 볼 땐 무대장치와 음악 등을 통해 '현실감'을 최대한으로 고조시키기 때문에 감동을 많이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음악영화를 보게 되면 라디오를 통해 들을 때보다 몇배나 더 큰 감동이 밀려오는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이진 2012-04-29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정말정말 부럽습니다.
장파올로 비잔티의 토스카라니요.
레이디가가 콘서트도 무지 가고싶었는데,
시골에서는 문화생활을 즐길만한 공간이 없어요...

oren 2012-04-30 12:19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이 사시는 곳이 시골인가요? 도시 생활이 '자연'과 너무 동떨어져 있고 삭막할 때도 많지만 가끔씩 좋은 공연을 '쉽게'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위안을 느낄 때도 있긴 합니다. ㅎㅎ

노이에자이트 2012-04-29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은 빛나건만을 멋지게 부를 줄 아는 남자라면...번안한 가사라도 좋죠.듣는 여자들이 꺄! 하고 울부짖을 겁니다.

oren 2012-04-30 12:22   좋아요 0 | URL
사랑하는 연인인 멋진 남자가 저토록 비통한 노래를 자신을 위해 불러주는 걸 듣게 된다면, 그 노래를 듣는 여자는 극심한 슬픔 속에서도 정말 특별한 기쁜 감정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싶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