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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시간 ㅣ 까치글방 138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이기상 옮김 / 까치 / 1998년 2월
평점 :
(밑줄긋기)
가까움에 대한 본질적인 경향
거리를 없앰은 거리를, 다시 말해서 어떤 것의 멂을 사라지게 함을, 가까워지게 함을 말한다.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거리를 없애며 존재한다. 그는 그가 무엇인 그 존재로서 그때마다 존재자를 가까이에서 만나도록 해준다. 거리를 없앰은 멂을 발견한다. 이 멂은 거리와 마찬가지로 현존재적이지 않은 존재자에 대한 범주적 규정이다. 그에 반해서 거리를 없앰은 실존범주로서 확고하게 견지되어야 한다. 도대체 존재자가 현존재에게 그것의 멂이 발견되는 한에서만 세계내부적인 존재자 자체에서 다른 것과 관련되어서 "거리"와 간격이 접근 가능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존재자들 가운데 어떤 것도 그것의 존재양식상 거리를 없앨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단지 거리를 없앰에서 발견되는 측정 가능한 간격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거리없앰은 우선 대개 둘러보는 가깝게 함, 조달함으로서의 가까이 가져옴, 예비해놓음, 손안에 가짐이다. 그런데 존재자를 순수하게 인식하며 발견하는 특정한 방식들도 가깝게 함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현존재에는 가까움에 대한 본질적인 경향이 놓여 있다. 우리가 오늘날 다소 강요되듯이 함께 행하고 있는 모든 종류의 속도상승은 멂을 극복하도록 몰아세운다. 예를 들면 "라디오 방송"과 함께 현존재는 오늘날 일상적 주위세계의 확장과 파괴라는 방법으로써 그것의 현존재의 의미를 아직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세계'의 거리를 없애고 있다. (149쪽)
침묵함
말함의 다른 본질적 가능성의 하나인 침묵함도 동일한 실존론적 기초를 가지고 있다. 서로 함께 말하는 가운데 침묵하고 있는 사람이 말을 끝없이 하는 사람보다 더 본래적으로 "이해하게끔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해를 형성할 수 있다. 어떤 것에 대하여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이해가 증진된다는 보장은 조금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장황하게 말함은 이해된 것을 은폐하고 거짓 명료성 속으로, 다시 말해서 진부함의 몰이해로 이끈다. 그렇지만 침묵함이 벙어리로 있음은 아니다. 벙어리는 오히려 거꾸로 "말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벙어리는 그가 침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애당초 그런 것을 증명할 가능성조차 없다. 그리고 천성적으로 말수가 적은 사람도, 벙어리와 마찬가지로, 그가 침묵하고 있고 침묵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은 주어진 [결정적] 순간에 침묵할 줄도 모른다. 오직 진정한 말함에서만 본래적으로 침묵함도 가능한 것이다. 현존재는 침묵할 수 있기 위해서 무엇인가 말할 것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풍부하게 열어밝힐 처지에 있어야 한다. 그때에 과묵함[침묵하고 있음]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잡담"을 눌러버린다. 침묵하고 있음은 말함의 양태로서 현존재의 이해가능성을 근원적으로 분류파악하여, 이 이해가능성에서부터 진정한 들을 수 있음과 투명한 서로 함께 있음이 생기게 한다.(227쪽)
호기심
봄의 근본구성틀은 "보는 것"에 대해서 일상성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존재경향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그것을 호기심이라는 용어로 지칭하도록 한다. 그런데 호기심이라는 용어는 그 특징상 보는 것에 제한되어 있지 않고 세계를 독특하게 감지하며 만나게 하는 경향을 표현한다. 우리는 이 현상을 원칙적으로 실존론적-존재론적인 의도를 가지고 해석하지, 좁게 인식함에 방향을 잡지 않는다. 인식이 이미 일찍부터 그리스 철학에서 "보려는 욕망"에서부터 개념파악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존재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글들을 모은 논문집의 첫번째 논문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 모든 인간은 본성상 보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의 존재에는 본질적으로 보는 것에 대한 염려가 있다. 이 문장으로써 존재자와 그 존재에 대한 학문적 탐구의 근원을 앞에서 언급한 현존재의 존재양식에서 발견하려고 시도하는 연구가 소개되었다. 학문의 실존론적 기원에 대한 이러한 그리스적 해석은 우연이 아니다. 거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파르메니데스의 문장에 앞서 윤곽잡혀 있던 그것이 명시적인 이해에 이른 셈이다 : 왜냐하면 사유와 존재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존재는 순수한 직관하는 받아들임에 자신을 내보이고 있는 그것이며, 오직 이러한 봄만이 존재를 발견한다. 근원적이고 진정한 진리는 순수 직관에 놓여 있다. 이 테제는 그뒤부터 서양철학의 기초가 된다. 그 테제 안에 헤겔 변증법도 그 동기를 가지고 있으며, 오직 그 근거 위에서만 헤겔 변증법이 가능하다.
"봄"의 기이한 우위를 누구보다도 아우구스티누스가 욕망에 대한 해석과 관련하여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본디 눈에 딸린 것이 보는 것인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다른 감관으로 무엇을 알려고 할 때에도 "보다"라는 낱말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 '들으라, 얼마나 번쩍이는지', '맡으라, 얼마나 빛나는지', '입을 대라, 얼마나 찬란한지', '만져라, 얼마나 눈부신지.' 그러지 않고 이 모든 것을 보라고 말하고 이 모든 것이 보인다고 말한다. 따라서 눈만이 감각할 수 있는 것을 '보라, 얼마나 빛나는지' 할 뿐 아니라, '소리를 들어보라', '냄새를 맡아보라', '맛을 보라', '얼마나 단단한지 만져보라' 하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일체의 감각적 경험을 '눈의 탐욕'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나머지 감관들도, 비슷한 점에서 인식함이 문제가 될 때면 눈이 윗자리를 차지하는 봄의 기능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235쪽)
무정주성(無定住性)
그러나 자유롭게 된 호기심은 본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다시 말해서 그것에 대한 존재에 이르기 위하여 보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보기 위해서 보려고 애쓴다. 호기심이 새로운 것을 찾는 이유는 그 새것에서 다시금 새로운 새것으로 뛰어들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봄의 염려에서 중요한 것은, 파악하여 알면서 진리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세계에 맡겨버릴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러기 때문에 호기심은 특이하게 가까운 것에는 머물지 않는 특성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호기심은 또한 고찰하며 머무는 여가도 추구하지 않으며, 언제나 새것과 만나는 것을 계속 바꿈으로써 생기는 동요와 흥분을 찾는다. 호기심은 아무 데도 머무르지 않음으로 해서 부단히 산만함[부산함]의 가능성을 배려한다. 호기심은 존재자를 경탄하면서 고찰하는 것, 즉 타우마체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호기심의 관심사항은 경이에 의해서 이해하지 못함에 인도되는 것이 아니다. 호기심은 앎을 배려하는데, 순전히 안 것으로 간주하기 위해서이다. 호기심을 구성하는 두 계기, 즉 배려된 주위세계에 머물지 않음과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산만함[부산함]은 이 현상의 세번째 본질성격의 기초를 부여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무정주성(無定住性)이라고 이름한다. 호기심은 도처에 있으면서 어디에도 없다. 세계-내-존재의 이러한 양태는 일상적 현존재가 그 안에서 끊임없이 뿌리 뽑히고 있는 그런 새로운 존재양식을 드러낸다.(237쪽)
애매함
누구나 다 무슨 일을 당면하고 있고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고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또한 누구나 다 이제 일어나야 할 일이 무엇이고, 아직 당면하고 있지는 않지만, "본래" 했어야만 했던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할 줄을 이미 알고 있다. 누구나 다 처음부터 이미, 다른 사람이 무엇을 예감하고 느끼는지를 예감하고 감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흔적을 따라다니는 것, 그것도 풍문에 따라서 그렇게 하는 것은 - 진짜로 사실의 "흔적을" 찾은 사람은 거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는 법이다 - 애매함이 현존재의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가장 위험한 방식인데, 그렇게 해서 애매함은 이미 현존재의 가능성을 무력화시켜버리기 때문이다. ······
공공적인 해석되어 있음의 애매함은 앞질러 얘기하는 것과 호기심으로 예감하는 것을 본래적인 사건인 것처럼 내놓고 실행과 행위는 추후의 일이며 하찮은 것으로 낙인찍어버린다. 그러기에 '그들' 속에 머물러 있는 현존재의 이해는 자신의 기획투사에서 끊임없이 진정한 존재가능성을 잘못 보고 있다. 현존재는 언제나 애매하게 "거기에"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서로 함께 있음의 공공의 열어밝혀져 있음 안에, 가장 요란한 잡담과 가장 솜씨 좋은 호기심이 "사업"을 관장하고 있는 곳에, 일상적으로는 모든 것이 일어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아무 것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 곳인 거기에 존재한다.
이러한 애매함이 호기심에게는 언제나 그것이 찾는 것을 건네주고, 잡담에게는 마치 그 속에서 모든 것이 결정되는 듯한 가상을 마련해준다.
이러한 세계-내-존재의 열어밝혀져 있음의 존재양식이 서로 함께 있음 그 자체도 철저히 지배한다. 타인은 우선 사람들이 그에 관해서 들은 것,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말하고 알고 있는 그것을 근거로 "거기에" 존재한다. 잡담은 우선 근원적인 서로 함께 있음 사이로 끼어든다. 누구나 먼저 우선 타인의 눈치를 살펴서, 그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것에 대하여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본다. '그들' 속에 서로 함께 있음은 절대로 폐쇄되어 무관심하게 옆에 나란히 있는 것이 아니고, 긴장 속에 애매하게 서로를 살피며, 몰래 서로 엿들으며 있는 것이다. 서로를 위한다는 가면 아래 서로를 적대하는 연출을 진행하고 있다.
이때 주목해야 할 것은 애매함이 위장과 왜곡을 명시적으로 의도한 데에서 비로소 생기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 개별 현존재가 애매함을 비로소 야기시켜놓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애매함은 이미 하나의 세계 안내 내던져져 있는 서로 함께 있음인 그런 서로 함께 있음 속에 들어 있다. 그런데 이 애매함이 공공적으로는 은폐되어 있으며, 사람들은 이러한 해석이 '그들[자신들]'의 해석되어 있음의 존재양식에 해당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언제나 저항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의 설명을 '그들'의 동의를 얻어서 확증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대단한] 오해일 것이다.(2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