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풍경'에 대해 많은 생각들을 해볼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책인 것 같군요. 이 책의 저자가 에필로그에서 인용한 '라플라스'는 『천체역학』의 저자로만 대충 기억하는 인물이었는데, 19세기의 어느 철학자도 '천체의 움직임과 물질의 본질'에 대해 고찰하면서 '칸트와 라플라스'를 언급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그 철학자는 당시에 이미 뉴튼의 물리학이 지닌 한계를 포함하여 '과학이 지닌 근본적인 한계'를 분명하게 꿰뚫어 보면서, 먼 미래에 이르러 물리학이 아무리 발전을 거듭하더라도 '물질의 근원'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고 장담했었는데 21세기에 이르러 초끈이론이나 다중우주이론이 발견하는 내용들이 결국 '과학의 한계 너머'를 미리 내다본 그 철학자의 혜안과도 일맥상통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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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크게 보면, 중심 천체와 유성의 관계에도 나타나고 있다. 유성은 유기체에서 화학적인 힘과 마찬가지로 중심 천체에 결정적으로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이에 반항하고 있다. 거기에서 구심력과 원심력의 부단한 긴장이 생기고, 이 긴장이 우주의 운행을 유지시키고 있으며, 그 자신이 이미 우리가 지금 고찰하고 있는 의지의 현상에 고유한 보편적인 투쟁을 나타내는 하나의 표현이다. 왜냐하면 어떤 물체도 의지의 현상이라고 보지 않으면 안 되지만, 의지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노력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구형을 이루게 된 천체의 원상태는 정지가 아니고 휴식도 목표도 없이 앞을 향해 무한한 공간으로 나아가는 운동, 노력이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관성의 법칙도 인과의 법칙도 대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성의 법칙에 의하면, 물질은 정지나 운동에 대해 무관심하며, 물질의 근원적인 상태는 정지이기도 하고 운동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물질이 지금 운동하고 있을 경우, 우리는 그 운동에 선행하여 정지 상태가 있었다고 전제할 권리도 없고, 운동이 시작된 원인을 질문할 권리도 없다. 그와 반대로 그 물질이 정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정지 상태에 선행하는 운동을 전제하거나 운동이 그치고 정지가 시작된 원인을 질문할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원심력을 일으키는 최초의 충격은 찾아도 얻을 수 없다. 이 원심력은 칸트와 라플라스의 가설에 따르면, 유성의 경우 중심 천체 원래의 회전 잔재며, 여러 유성은 이 중심 천체가 수축할 때 거기에서 분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중심 천체는 그 자체는 본질적으로 운동하고 있다. 즉 중심 천체는 언제나 계속 회전하며 동시에 무한한 공간 속을 날고 있으며,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더 큰 중심 천체의 주위를 돌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천문학자들의 중심 태양에 대한 억측과 완전히 일치하며, 또 우리의 전 태양계나 우리의 태양이 속해 있는 모든 별들의 이동이 지각되는 것과도 일치한다.
결국 여기에서 중심 태양을 포함한 모든 항성이 이동한다는 추론도 나오지만, 이러한 이동은 무한한 공간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절대 공간에서 운동은 정지와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바로 그것 때문에 이미 직접적으로 목적 없는 노력이나 비상에 의한 것과 마찬가지로 허무와 궁극적인 목적 없는 표현이 되는 것이지만, 우리는 이 허무와 궁극적인 목적의 결여를 이 제2권의 마지막에서 의지와 노력에 의한 결과로 모든 현상 속에서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또다시 무한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이 의지의 모든 현상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형식이 아니면 안되며, 모든 현상은 의지의 본질을 표현하기 위해 현존하고 이다.
마지막으로 인과성을 물질로 본다면, 이 단순한 물질 속에서도 이미 이때까지 고찰한 것과 같은 모든 의지 현상 상호간의 투쟁이 행해지고 있는 것을 재인식할 수 있다. 즉 물질 현상의 본질을 칸트는 반발력과 견인력으로 표현하고 있고, 물질이 실재하는 것은 상반된 두 개의 힘이 투쟁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상과 같은 재인식이 가능하다. 만약 우리가 물질의 모든 화학적인 차이를 도외시하거나 인과의 연쇄를 거슬러 올라가 아직 아무런 화학적인 차별이 없는 것까지 생각하게 되면, 거기에 남는 것은 단순한 물질이다. 또 구상(球狀)으로 된 세계로서 생활, 즉 의지의 객관화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견인력과 반발력의 투쟁이다. 견인력은 중력으로 사방으로부터 중심을 향해 모든 사물을 밀어붙이고, 반발력은 강성에 의해서든 타성에 의해서든 불가입성으로서 견인력에 대항하는 것이지만, 끊임없는 박진과 대항은 최저 단계에서 의지의 객관성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또 이미 이 단계에서도 의지의 특질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최저 단계에서는 의지가 어떤 맹목적인 충동, 어떤 어둡고 막연한 활동으로 나타나 있어서 직접 인식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의지의 객관화 가운데 가장 단순하고 미약한 방식이다. 그런데 의지는 이러한 맹목적인 충동이나 인식이 없는 노력으로서는 무기적 자연 전체에도, 모든 근원적인 힘에도 나타나 있다. 이들의 힘들은 백만 가지의 동질적이고 규칙적인 현상에 자신을 드러내어 우리들에게 나타나는데, 개별적인 물질은 전혀 나타내지 않고 오직 시간과 공간에 의해, 즉 개별화의 원리에 의해 다양화되어 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상이 유리의 다각면을 통해 다양하게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2권 의지로서의 세계에 대한 제1고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