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가 태어난 날인가 보다. 그는 1978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인물인데, 나는 여태 그의 이름을 다른 사람의 책에서 딱 한번 마주칠 기회밖에 가지지 못했다. 그런데 그 책에서 소개된 '첼름이라는 가상의 마을 출신의 어느 한 숙맥'의 이야기는 내게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던지 쉽사리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건 아마도 미국의 쿨리지 대통령 부부가 방문했던 어느 농장의 수탉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얘기를 여러 친구들에게 퍼뜨렸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페이스북 친구인 모 대학 심리학 교수 한테까지 들려줬는데, 아쉽게도 그 분은 '쿨리지 효과'뿐만 아니라 스티븐 핑커의 책조차 낯설어 하던 기억이 난다.

 * * *

 










 


 


 

 쿨리지 효과

새 파트너를 만나면 남성의 성적 욕구가 깨어나는 현상은 유명한 일화 덕분에 쿨리지 효과라고 불린다. 미국의 30대 대통령이었던 캘빈 쿨리지와 그의 아내가 한 농장을 방문하던 중 따로 시찰을 하게 되었다. 닭장을 둘러보던 쿨리지 여사는 수탉이 하루에 몇 번이나 암탉과 관계를 하는지 물었다. "몇 십 번 합니다"라고 안내원이 대답했다. 이번엔 대통령이 닭장을 보고 수탉에 관해 물었다. "매번 같은 암탉과 합니까?" "아닙니다. 각하. 매번 다른 암탉과 합니다." 그러자 대통령은 "영부인에게도 그 말을 해주세요"라고 당부했다. 많은 수컷 포유동물들이 교미를 할 때마다 암컷이 바뀌면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을 과시한다. 실험자가 이전 파트너에게 가면을 씌우거나 냄새를 없애도 속지 않는다. 바꿔 말하자면 이것은 수컷의 욕망이 '무차별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수컷들은 어떤 부류의 암컷과 짝짓기를 하는가에는 신경 쓰지 않지만, 어느 암컷과 짝짓기를 하는가에는 지나칠 정도로 민감하다. 이것은 내가 2장에서 관념연합론을 비판할 때 중요하다고 주장했던, 개인과 범주 간의 논리적 구별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예다.

남자들은 수탉 같은 정력을 갖고 있진 않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그들의 욕망에서도 쿨리지효과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의 문화를 포함하여 많은 문화에서 남자들은 아내에 대한 성적 열망이 결혼 후 몇 년 내에 시든다고 보고한다. 남성의 성욕 감퇴를 촉발하는 것은 아내의 외모나 그 밖의 특징이 아니라 개인으로서의 개념이다. 새 파트너에 구미가 당기는 것은, 딸기에 질리면 초콜릿 케이크에 끌리는 경우처럼 다양성이 인생의 양념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예가 아니다.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의 소설〈불운한 녀석 먼저〉에서, 첼름이라는 가상의 마을 출신인 한 숙맥이 여행을 떠나지만 길을 잘못 들어 뜻하지 않게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는 놀라운 우연의 일치로 고향 마을과 똑같이 생긴 다른 마을을 만났다고 생각한다. 그는 지겹기만 했던 아내와 똑같이 생긴 여자를 만나 매력을 느끼고 황홀해한다.(723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12-11-23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쿨리지 효과에 관한 이야기는 어느 책에서 읽었어요.

고향 마을과 똑같이 생긴 다른 마을을 만났다?
아내와 똑같이 생긴 여자를 만났다?
사람도 변신하면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건가요? ^^

oren 2012-11-23 15:10   좋아요 0 | URL
그저께 점심을 함께 먹었던 어떤 친구한테 이 내용을 얘기해 줬더니,
"그래서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얘기였구나..." 하더군요.. ㅎㅎ
 
칸트, 데카르트, 스피노자, 의지와 표상, 자유의지


최근에 부쩍 관심을 가지게 된 문제 하나는 '시간'에 관한 것이다. 시간이란 시작도 끝도 없이 무한정 한쪽 방향으로 흐르기만 하는 것일까, 아니면 시간은 마치 레코드판이 돌듯이 끊임없이 제자리에서 순환하기만 할 뿐이고 모든 '존재'들은 어쩌면 인식의 한계 때문에 '시간'이 계속 흐르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셀 수도 없을만큼 오래전부터 수많은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사유해 왔던 그 '시간'에 대해 나처럼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이 머리를 싸매고 잠시나마 그것에 대해 탐구해 본들 어디 희끄무레한 윤곽이나마 건질 수는 있는 것일까.

아무튼 내가 최근에 읽었던 몇 권의 철학책들은 '시간'에 대한 놀라운 생각의 일면들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것들이어서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그 책들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베르그송의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등이다. 특히 최근에 읽은 베르그송의 책은 '시간'에 관한 무척이나 놀라운 사유들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런데 베르그송의 저작과 그의 생애를 살펴보니 그가 바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라는 20세기 전반의 가장 위대한 소설을 쓴 마르셀 프루스트와 매우 가까운 친척이었다는 걸 알고 한번 더 놀랐다(그는 1892년에 프루스트의 사촌누이인 루이즈 뇌부르주와 결혼했다). 하기야 나는 아직까지도 프루스트의 그 유명한 소설을 전혀 접해보지도 못했으니 놀랄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다만 프루스트의 소설이 워낙 유명한 작품이다보니 그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과 세간의 평가에 대해서는 어렴풋이라도 전해 들은 게 없지는 않다.

 

이것은 서양 언어로 씌어진 일급의 소설들 중 가장 긴 작품이다. 이 소설을 읽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런 만큼 보람도 크다. 만약 독자가 이 소설에 마음이 끌린다면(마음이 끌리지 않는 독자가 더 많을 것이다), 앞으로 5∼10년 사이에 틈틈이 시간을 내어 이 책을 읽어 그것을 독자의 내면세계에 흡수하면 좋을 것이다.

『율리시스』의 주인공은 더블린이라는 장소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은 시간이다. 예술에다 "시간의 형태"를 집어넣는 것,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답변하는 것이 프루스트의 목표였다.

나는 결론으로 당대의 미국 1급 평론가였던 에드먼드 윌슨의 말을 인용한다. "우리는 프루스트에게서 우리 시대의 탁월한 정신과 상상력을 만난다. 프루스트는 그 위력이나 영향력에 있어서, 니체, 톨스토이, 바그너, 입센 같은 한 세기 전의 예술가들에게 버금가는 우리 시대의 예술가이다. 그는 상대성의 관점에서 소설의 세계를 재창조했다. 그는 문학 분야에서 현대 물리학의 새 이론(양자 이론)에 버금가는 새로운 글쓰기 이론을 제공했다."


 

이달은 마침 프루스트가 세상을 떠난 지 정확히 90주년이 되는 때이다(프루스트는 1922년에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했고, 베르그송은 그보다 19년 후인 1941년에 81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두 사람 모두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을 학문 연구와 작품 저술에 몰두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특히 인간 내면의 의식을 쫒아 놀라운 탐구를 이룩한 점이 인상적이다. 사실 프루스트의 그 방대한 소설을 전혀 읽어보지도 않고 이런 글을 쓴다는 게 여간 어색한 일이 아닐 수 없지만, 베르그송의 주저인『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을 감명깊게 읽었고, 특히나 그 책 속에서 마치 프루스트의 소설을 미리 예견이나 한 듯한 대목까지 발견할 수 있어서 더욱 놀라웠고, 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이런 무모한 글을 쓸 용기를 내었는지도 모른다.

프루스트가 자전적 에세이를 소설로 바꾸어 제1부 <스완네 집 쪽으로>를 발표한 건 1913년인데, 베르그송의『시론』이 출간된 건 이보다 무려 24년 전인 1889년이었다. 『시론』의 제2장에서 베르그송은 '자아의 두 측면'을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치 프루스트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이제 어떤 과감한 소설가가 우리의 상투적인 자아의 교묘하게 짜인 직물을 찢고 그러한 외견적 논리 아래에서 근본적인 부조리를 보여주고, 단순한 상태들의 그와 같은 병치 아래에서, 명명하는 순간 이미 존재하기를 멈추어 버렸던 수만의 다양한 인상들의 한없는 침투를 보여주면, 우리는 그에게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라고 칭찬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가 우리의 감정을 동질적 시간 속에 펼쳐 놓고, 그 요소들을 말로 표현한다는 사실 자체에 의해, 그 역시 그의 차례가 되어 우리에게 그 감정의 그림자만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단, 그는 우리로 하여금 그 그림자를 투사한 대상의 특별하면서도 비논리적인 본성을 의심케 하도록 그것을 배치했다. 표현된 요소들의 본질 자체를 이루는 그런 모순, 그런 상호 침투의 뭔가를 외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우리를 반성으로 초대했다. 그에 의해 고무되어 우리는 잠시 우리와 우리 의식 사이에 개입시킨 막을 걷어 제쳤다. 그는 우리를 우리 자신 앞에 다시 세운 것[뿐]이다.(170쪽)



베르그송은 이 대목에 조금 앞서 '질적인 시간과 양적인 시간'을 구분할 필요성을 제기하면서는 마치 '소설의 한 장면을 금방이라도 펼쳐내 보일 듯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령 내가 [앞으로] 살 도시를 처음으로 산책할 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은 나에게, 지속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인상과 끊임없이 수정될 인상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나는 매일 같은 집들을 보며, 또 그것들이 동일한 대상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것들을 끊임없이 동일한 이름으로 부르고, 항상 동일한 방식으로 나에게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당히 긴 시간이 지난 후 처음 몇 해 동안 느낀 인상을 돌이켜 보면, 그 속에서 일어난 독특하며 설명할 수 없고, 특히 표현할 길 없는 변화에 놀란다.122) 내가 계속 지각했고 나의 정신 속에서 끊임없이 그려지던 그 대상들이 결국에는 나로부터 나의 의식적 존재의 무엇인가를 빌린 것처럼 보인다. 나처럼 그것들도 살았고, 나처럼 그것들도 늙었다.(166쪽)

122) 이런 현상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가령 어렸을 때 살던 동네를 커서 가 볼 경우이다. 그 길이, 그 집이 그렇게 좁고 작았던가 하고 놀라게 된다. 이 경우는 그 차이가 너무나 크므로 쉽사리 말로 표현되지만, 그 느낌의 차이는 사실 단지 좁다든지 작다든지 하는 말로는 다 표현되지 않는 무한히 복잡한 감정의 복합체이다. 이것이 가령 20대에(키가 다 자란 다음) 살던 곳을 40대 정도에 가보는 경우라면 훨씬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나 분명히 느낌의 차이는 있다. 어쨌든 이러한 현상은 그 집, 그 동네에 관한 인상이 항상 동일한 것이 아니라 변해왔음을 말해주는 것이 분명하다. 



이쯤에서 다시 '철학자' 베르그송에 대한 '전반적인' 인물 탐구와 그의 다른 저작들에게까지 관심을 더 확대시켜 보자.

"나의 저서들은 이제까지 학설에 대한 나의 불만과 항의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베르그송의 이 말은 그가 살던 시대에 팽배했던 '과학만능시대'의 사상적 조류에 대한 그의 태도를 보여주는 말이다. 그는 과학의 밑바탕이 되는 '이성과 지성의 오류와 한계'를 예리하게 파고 들어갔으며, 수학과 과학에 대한 천재적 재능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그는 파리의 콩도르세 고등학교 재학시 전국 고등학교 경시대회에서도 라틴어, 프랑스어 논문, 수학에서 일등상을 탔을 만큼 문과와 이과에 아울러 특츨하였고, 교교 재학시 그가 수학과 기하학에 관해서 풀었던 해답이 《파스칼과 현대기하학》이라는 수학전문잡지에 실릴 만큼 뛰어났다.  파스칼이 말한 '기하학 정신'과 '섬세정신'을 아울러 갖춘 사람이 그였다.) 그당시 모두가 경시하던 형이상학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였으며, 결국 인류가 오랜 세월 동안 그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해 왔던 '시간'에 대해 전혀 새로운 차원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베르그송이 자기 철학의 실마리를 발견한 것은 젊은 철학교사였던 22세 때, 스펜서를 읽고 과학철학을 하기로 결심하면서 몇 가지 과학적인 기본개념에 대한 검토를 하게 되면서였다고 한다. 그 당시의 '놀라운 생각'에 대해 그는 훗날 절친으로 지내게 된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에게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다고 한다.

'대단히 놀랍게도 나는, 과학적인 시간이란 지속하지 않고, 만약 실재의 총체가 순간적으로 모두 전개된다 하더라고 우리의 과학적 지식에는 조금도 수정할 것이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와 같은 발견 이후로 그의 주요관심사는 '시간보다 지속'으로 향했고, 엘레아 학파의 제논의 궤변에 관한 논리정연한 반박을 포함한 '순수지속'의 개념을 처음으로 주창한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대한 시론』이라는 논문을 집필하기에 이르게 된다.

그가 30세 때 박사학위논문으로 쓴 이 저작은 과학적 엄밀성을 기본 바탕으로 삼아 예리한 직관력과 치밀한 분석 위에 쓰여졌음은 물론이고, 양과 질에 대한 혼동, 운동과 동시성, 과학적 시간과 순수 지속에 관한 독특한 사유를 내보임으로써 사람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했다. 그의 제1주저로 꼽히는 이 저작의 주제는 '자유'에 관한 것이다(그래서 그가 직접 관여한 이 책의 영어 번역본 제목은『시간과 자유의지(Time and Free Will)』이다). 그는 이 책에서 자유의 문제는 결국 시간의 문제이며 시간의 문제는 의식의 문제라고 보아 의식이란 무엇인가를 철저하게 파헤친다. 그리고 의식의 강도(强度)란 무엇인가를 분석함으로써 의식이 결국 양이 아니라 질임을 보여 준다.

그는 의식을 '흐름'에서 고찰하는데, 거기에서 그는 흐르는 시간과 흘러간 시간을 구별하여 흐르는 시간만이 진정한 시간이며 흘러간 시간은 다름아닌 공간임을 보여 준다. 베르그송이 '의식의 흐름과 순수지속'을 다룬 부분은 달리 표현하면 '시간론'으로 불릴 수도 있는데, 하이데거 역시 그의 주저인 『존재와 시간』이라는 책에서 '시간'에 관해 깊이 천착해 들어간 부분에서 많은 철학자와 과학자의 '시간 개념'을 폭넓게 다루고 있으며, 특히 칸트의 시간 개념과 아울러 베르그송의 독특한 시간 개념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아무튼 베르그송이『시론』에서 내린 결론을 다시 강조하자면 결국 '자유란 내적 자아에 철저한 것'을 말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평소 생각하기보다는 이야기하며, 행동하기보다는 행동되고 있다. 자유로이 행동한다는 것은 자아를 되찾는 일이다. 그것은 자아를 순수지속으로 끌어들이는 일이다.'

베르그송에게 있어서 의식이란 결국 기억이다. 그가 시간과 공간, 정신과 물질이라는 완전히 이질적인 두 존재를 어떻게 하여 결합할 수 있을까, 하는 철학의 근본문제를 다룬 제2의 주저는 그래서《물질과 기억》이다. 그에 따르면 이 문제를 만약 공간의 입장에서 논하여 물질을 연장적인 존재, 정신을 비연장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러나 시간의 입장에 서서 논한다면 해답을 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밖에 제3, 제4의 주저를 포함하는 베르그송의 철학적 사유를 간략히 요악한 다음 글이 유용한 참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베르그송은 자신의 방법을 써서 우선 자아의 내부를 비춰 보았고, 그 결과가 그의 첫 저작인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대한 시론》이다. 그 다음에는 육체와 정신과의 관계를 다룬 《물질과 기억》, 그러고는 그 방법을 생명 현상에 확대 적용하여 《창조적 진화》를, 그리고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인간의 도덕에 대한 고찰인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을 발표하였다. 따라서 제1주저는 심리학에 관한 저술이고, 제2주저는 생리학적인 저술이며, 제3주저는 생물학적인 저술이고, 제4주저는 사회학적인 저술이다. 그 나머지 저서는 대개 어떤 주저(主著)를 보충하거나 강연을 모은 형식이다.(742쪽) 




베르그송은 우리의 심적 상태는 공간적이지도 않고 동질적이지도 않게, 이질적인 의식상태들이 한데 융합되어 이루어졌고, 그들은 서로 분명한 구분을 지을 수 없는 의식상태들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심층자아' 또는 '진정한 자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심층자아'는 일련의 의식상태의 질적 변화로 이루어진다. 그 상태들은 뚜렷한 윤곽도 지을 수 없고 수(數)로 표시할 수도 없이 서로 침투되고 융합된 채로 속하는 바, 그것이 바로 순수지속이다. 그와 같은 순수지속은 공간화된 시간과 구별되어야 한다. 후자가 일정한 양적인 구분에 의하여 표시되는 외면적이며 동질적인 시간인 반면, 전자는 진정한 시간, 실재적인 시간으로서 체험적이고 창조적이며 사상적이다. 그 순수지속은 베르그송 자신이 '우리의 자아를 자기 자의의 상태로 둘 경우, 우리 의식 제상태의 연속이 취하는 형태 또는 질적인 변화의 연속으로서, 그 변화는 서로 용해되며 분명한 윤곽이나 어떤 수(數)와의 연관도 갖지 않는다.'

베르그송의 철학은 '엘랑비탈(생의 비약)'으로 대표되는 생명철학이라고 규정하여 철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가 문학에 끼친 영향 또한 그에 못지 않다고 평가받는다.
 

  

내적 자아, 심층자아와 내적 지속에 대한 그의 이론은, 외적 조형미의 부각에 힘쓰던 문학으로 하여금 자기 내부의 무의식 세계로 그 시선을 돌리게 하여 상징주의의 개화와 함께 내면문학의 붐을 촉진시켰고, 그의 직관주의는 방대한 반지성적 경향의 움직임을 태동하게 하였는데, 그 대표가 시인 페리(Charles Peguy)였다. 문학비평에서도 티보데(Thibaudet)를 통하여 그의 형향이 뚜렷이 드러났으나, 가장 중요한 영향은 프루스트(Proust)에 대한 영향이라고 하겠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은 바로 그의 지속을 가리키고 있고, 끊일 줄 모르고 무한히 계속되는 그의 문장은, 끊임없이 생동하는 내면세계의 지속을 포용하는 문장으로서 베르그송적인 문체를 대변하고 있다.(750쪽) 



우리가 베르그송의 철학논문을 읽든 프루스트의 소설을 읽든 혹은 또다른 많은 책들을 끊임없이 찾아 읽든 그것은 결국 '내면의 자아'를 찾아 나서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함으로써 패디먼이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여기 이 순간의 세상에 집착하는 예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 내에서 우리의 위치가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비록 명확하게는 아닐지라도-깨달을 수 있다. 우리가 저 오랜 인류의 역사로부터 어떻게 하여 이 세상에 오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위대한 사상들을 무의식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

이쯤에서 내게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오른다. 내가 한동안 관심을 가졌던 그 '시간'을 정말 제대로 찾을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프루스트의 그 방대한 소설을 읽는 데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어쨌든 나도 '앞으로 5∼10년 사이에 틈틈이 시간을 내어' 프루스트의 그 유명한 소설을 꼭 읽어봐야겠다. 내 나이 환갑을 넘기기 전에. 그리고 프루스트가 세상을 떠난지 100주년이 다 되기 전에..


댓글(6) 먼댓글(1)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지속의 입장에서 '결정론'을 비판하고 '자유의 문제'를 해소한 책
    from Value Investing 2012-12-18 09:37 
    자유에 관한 모든 해명의 요구는 생각지도 않게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 환원된다. 즉, <시간은 공간에 의해 충분히 표상될 수 있는가?> - 거기에 우리는 대답한다. 흘러간 시간에 관한 것이라면 그렇지만, 흐르고 있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렇지 않다고. 그런데 자유로운 행위는 흐르고 있는 시간에서 일어나지, 흘러간 시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자유는 하나의 사실이며, 사람들이 인정하는 사실들 중에 이보다 더 명확한 것은 없다. 문제의
 
 
blanca 2012-11-15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평생독서계획>에서 저 구절이 인상적이었어요. 이번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새로 발간되고 있던데 그래도 좀처럼 엄두는 안 나네요. 언젠가는 꼭 읽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될지요. 마들렌 냄새 관련 대목이 너무 자주 인용되어서 그 대목만이라도 꼭 읽어보고 싶어요.

oren 2012-11-15 11:06   좋아요 0 | URL
프루스트의 소설이 새로 번역되어 나오고 있다는 소식은 저도 들었어요. 특히 내년이 되면 이 소설이 특별히 많이 팔릴 지도 모르겠구요. 저도 아마 내년 쯤이면 이 책을 사서 펼쳐보고 있을 꺼 같아요. 아무튼 책 소개글만 봐도 흥분되고 설레게 만드는 소설임은 분명한 것 같아요.
* * *
(알라딘 책 소개글)
2013년,「스완네 집 쪽으로」출간 백 주년을 맞아 민음사에서는 프루스트의 전 권 완역 출간을 준비 중이다. 국내에서는 최초로 ‘프루스트 전공자’인 김희영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가 “프루스트 전공자로서 사명감과 용기를 가”지고 번역에 모든 정열과 노력을 쏟은 작품이다.

알랭 드 보통 : 한 인간 삶의 가장 완벽한 재현
앙드레 모루아 :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 프루스트를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만이 있다.
T.S.엘리엇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조이스의 『율리시스』와 더불어 20세기 2대 걸작 중 한 편이다. 이들을 읽지 않고 문학을 논할 수 없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 : 한없이 다시 읽고 또 읽고 싶은 작품.

불꽃나무 2012-11-15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또한 시간에 대해 매우 관심이 많습니다. 매우 유익한 글이네요. 잘 읽고갑니다.^^

oren 2012-11-15 19:06   좋아요 0 | URL
불꽃나무님 반갑습니다.
제 허접한 글에 대해 유익하다고 말씀해주시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날씨가 제법 차가워졌지만, 그래도 늘 따뜻하고 좋은 '시간' 가지시길 바랄께요~

페크pek0501 2012-11-16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오래 전에 한 권짜리 단행본으로 읽었는데(300쪽 넘는 책으로 작은 글씨였음),아마 완역본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민음사에선 두 권짜리로 나와 있네요. 저는 그걸 별로 재밌게 읽지 않은 게 기억이 나요.
그런데 어느 책에서 인용된 글을 보고 참 좋은 글이 들어 있었구나, 했던 적도 있어요.
인용을 잘 해 놓은 걸 보면 그 작품을 다시 읽고 싶어지곤 해요. 오렌 님의 글도 그렇군요.
언급하신 것들을 읽고 싶은 생각이 팍팍 듭니다. ^^

oren 2012-11-17 12:48   좋아요 0 | URL
이번에 민음사에서 두 권짜리로 나온 건 1편「스완네 집 쪽으로」인데, 7편「되찾은 시간」까지 완간하기 까지는 몇 년이 더 걸릴 것 같아요. 알랭 드 보통은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이라는 책에서 '어렵고 난해하고 산만하다는 평이 지배적인' 이 책을 우리가 제대로 '음미하지' 못하는 까닭은, '프루스트처럼 세상에 대한 섬세하고도 호기심이 충만한 시각과 시야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따끔하게 지적했답니다. 저도 이번 기회에 민음사에서 나온 두 권의 책과 청미래에서 펴낸 알랭 드 보통의 저 책(2005년에 다른 출판사에서 간행된 책 제목은『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은 구매해 놨는데 언제즘 다 읽을지는......
 


(밑줄긋기)


 

 

 

 

 

 

 

 

 

 

 

 

 

 


 

채워지지 않을 구별의 욕망

채워지지 않을 구별의 욕망118)에 뒤틀려 의식은 실재를 상징으로 대체시키거나 또는 상징을 통해서만 실재를 본다. 이렇게 굴절되고 또 바로 그 사실 자체에 의해 재분열된 자아가 일반적으로는 사회적 삶의 요구에 그리고 특수하게는 언어의 요구에 무한히 더 잘 부응하기 때문에, 의식은 그러한 자아를 선호하고, 근본적 자아는 점점 시야로부터 잃어버린다.(164쪽)

 

118) 사물을 하나하나 구별해서 보려는 욕망



언어가 그 운동성을 고정하지 않고는

변질되지 않은 의식이라면 볼지도 모를 그러한 근본적 자아를 다시 찾기 위해서는 엄밀한 분석적 노력이 필요하며, 그에 의해 내적이며 살아 있는 심리적 사실들을, 우선 굴절되어 있으며 다음으로 동질적 공간에 응고된 그것들의 이미지로부터 떼낼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지각과 감각, 감정, 관념들은 이중적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명료하고 정확하지만 비인격적이다. 다른 하나는 혼동되고, 한없이 움직이며 표현할 수 없다. 그것은, 언어가 그 운동성을 고정하지 않고는 그것을 파악할 수 없으며, 공통의 영역으로 떨어지게 하지 않고는 그것을 자신의 진부한 형태로 포섭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수성의 두 가지 형태, 즉 지속의 두 가지 형태를 구분하기에 이른다면, 따로따로 취해진 의식의 사실들 각각은 구별되는 다수성 속에서 생각되었느냐 혼동된 다수성 속에서 생각되었느냐에 따라, 즉 그것이 일어나는 시간-질 속에서 생각되었느냐 그것이 투사된 시간-양 속에서 생각되었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을 띠어야 할 것임은 분명하다.(165쪽)



감각에 대한 언어의 영향

자연상태에서 생각하면 우리의 단순 감각들은 좀더 적은 항상성을 나타낼 것이다. 어렸을 때는 좋아했으나 지금은 혐오스럽게 느끼는 냄새나 향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경험된 그 감각에 동일한 이름을 부여하며, 향기와 냄새는 동일하게 남아 있고 내 취향만 바뀐 것처럼 말한다. 따라서 나는 아직도 그 감각을 응고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동이 더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될 정도의 명백성을 획득하게 되면, 그 변동을 추출하여 그것에 별도의 이름을 부여하고, 차례가 오면 그것을 취향이라는 형태로 응고시킨다. 그러나 실제로는 동일한 감각도 다수의 취향도 없다. 왜냐하면 감각과 취향은 내가 그것을 떼내서 명명하자마자 나에게 사물처럼 보이나, 인간의 영혼 속에는 진행 이외의 것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감각은 반복되면서 변하며, 그것이 나에게 조변석개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가 지금 그 감각을 그것의 원인인 대상을 통해서, 그것을 번역하는 단어를 통해서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야 한다. 감각에 대한 언어의 그런 영향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다. 언어는 우리에게 감각의 불변성을 믿게 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경험된 감각의 성격에 대해서도 우리를 속인다. 그리하여 고급스런 맛으로 소문난 요리를 먹을 때, 그것에 부여된 찬사가 가득 실린 그 요리의 이름이 나의 감각과 의식 사이에 개입한다. 조금만 노력하여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 반대임이 드러날 수 있는 데도 나는 그 맛이 마음에 든다고 믿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분명히 확정된 윤곽을 가진 단어, 즉 인류의 인상들에서 안정되고 공통적이며, 따라서 비개성적인 것을 저장해 놓은 난폭한brutal 단어는 개인적 의식의 섬세하고도 사라지기 쉬운 인상들을 말살해 버리거나 또는 적어도 덮어 버린다. 대등한 무기로 싸우기 위해서는 그런 인상들이 정확한 단어들로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단어들은 형성되기가 무섭게 그것들을 낳은 감각에 대항하는 쪽으로 총구를 되돌릴 것이며, 감각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증언하기 위해 발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감각에 그들 자신의 안정성을 강요할 것이다.(167∼168쪽)


한쪽 편을 들 때 가지는 무반성적 열정

우리가 어떤 문제들에 대해 한쪽 편을 들 때 가지는 무반성적 열정은, 우리의 지성도 자신의 본능을 가진다는 것을 족히 증명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관념들에 공통되는 충동, 즉 그들의 상호 침투에 의해서라 아니라면, 어떻게 그러한 본능을 표상할 것인가? 우리가 가장 애착을 갖는 의견은 표현하기가 가장 어려운 의견이며, 우리가 그것들을 정당화하는 이유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그 의견을 취하도록 결정케 한 이유일 경우는 드물다.127)

127) 우리가 어떤 의견을 취하게 된 진정한 이유는, 애착을 가진 것일수록 더욱더 우리 자아의 깊은 곳으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그만큼 더 객관화하기 어렵고, 따라서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우리의 내부로 들어가면 갈수록 사물들은 엉켜서 불가분적으로 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말로 표현하는 이유들은 대부분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간혹 <정곡을 찌를> 수는 있지만, 진정한 이유와 일치할 경우가 드물다.(171쪽)


  

우리에게 가장 적게 속하는 것만이 말에 의해 충분히 표현될 수 있다고 해서 놀라서는 안 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그 의견을 이유도 없이 채택하는데, 왜냐하면 우리 눈에 그것이 가치를 가지게 된 것은 그 의견의 색조nuance가 우리의 모든 관념들의 공통적 색상coloration에 부응하기 때문이며, 처음부터 우리가 거기에서 뭔가 우리의 일부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정신 속에서는 그 의견이,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 위해 거기로부터 나오게 하자마자 다시 취하게 될 진부한 형태를 띠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정신들에게 동일한 이름을 가지더라도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런 의견들 각각은 유기체 속에서의 세포와 같은 방식으로 산다. 자아의 상태 전체에 대해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그 세포 자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세포가 유기체의 어느 정해진 지점을 점하는 반면, 진정으로 우리 것인 관념은 우리의 자아 전체를 채운다. 게다가 우리의 모든 관념들이 그처럼 의식상태들의 덩어리로 합체해 들어가기에는 거리가 있다. 많은 것이 연못 물 위에 뜬 낙엽처럼 표면을 떠다닌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이 그 관념들을 생각할 때, 그 관념들이 마치 자신의 밖에 있는 것처럼 그것들을 항상 일종의 부동성 속에서 다시 대면한다는 것이다. 그 중에는 우리가 완성된 것으로서 받아들이며 우리 속에 머물지만 결코 우리의 실체substanve 속에 동화되지 않는 관념들이나 또는 우리가 소홀히 여겨 버림받아 말라버린 관념들이 있다. 자아의 깊은 층들로부터 멀어짐에 따라, 우리의 의식상태들이 점점 더 수적 다수성의 형태를 취하고 동질적 공간 속에 펼쳐지는 경향을 갖는다면, 그것은 바로 그런 의식상태들이 점점 더 타성적인 본성과 점점 더 비인격적인 형태를 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관념들 중에 우리에게 가장 적게 속하는 것만이 말에 의해 충분히 표현될 수 있다고 해서 놀라서는 안 된다.(172∼173쪽)

- 앙리 베르크손,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中에서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싱거운 후기> ㅇ님의 댓글에 답합니다



페크님께서 두번씩이나 인용해주신 부분(‘헌신적인 사랑’이란 있을 수 없다. 모든 사랑은 그 속을 벗겨보면 결국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헌신적 사랑은 이기심의 또다른 가면일 뿐이다)에 대해서는 쉽게 긍정할 수도 있겠지만, 좀 더 진지하게 반박할 수도 있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너무 급작스럽게 범주를 넓히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타적 사랑이나 숭고한 인류애 등을 생각해 보면 '진정한 사랑'이란 결국 '타인을 자기와 동일시'하는 데까지 승화시키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린 문제라고도 여길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러한 중차대하고도 심각한(?) 얘기를 여기서 계속 더 밀고 나가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아무튼 페크님의 이 글을 읽으면서 제 머리속에 떠올랐던 책 속의 여러 구절들이 있어서 두서없이 모아봤습니다. 한편으로는, 찰스 다윈과 리처드 도킨스를 비롯한 숱한 과학자뿐 아니라 수많은 심리학자와 철학자들까지도 끊임없이 숙고했던 문제를 제가 여기서 이렇게 어줍잖게 마구 인용해도 좋을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 * *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미리 장만해 놓는 계산

도덕감에도 동일한 종류의 연구를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연민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우선 생각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자리에 서서 그들의 고통을 겪는 것이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연민이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들을 돕기보다는 그 비참함을 피하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고통은 당연히 우리가 혐오하는 것이니까. 그러한 연민의 원천에 혐오감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돕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려는 새로운 요소가 지체하지 않고 거기에 결합한다.
라 로쉬푸꼬처럼38) 사람들이 주장하는 그런 공감이 하나의 계산, <닥쳐올 불행에 대한 약삭빠른 예견>이라 할 것인가? 다른 사람의 재난이 불러 일으키는 동정(同情) 속에는, 두려움이라는 것이 아마도 어떤 역할을 하기 위해 들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저급한 형태의 연민일 뿐이다.

38) <연민은 자주 타인의 불행에서 보는 우리 스스로의 불행에 대한 감정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닥칠 수 있는 불행에 대한 약삭빠른 예견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비슷한 경우에 그들도 우리를 돕게 하기 위함이며, 우리가 그들에게 행하는 봉사는 고유한 의미에서 말한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미리 장만해 놓는 계산이다>

 - 앙리 베르크손,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중에서


 * * *

 

 


 

단지 그의 모습을 빌려

남을 미워하는 것은 단지 그의 모습을 빌려 자신 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미워하고 있는 것과 같다. 자신안에 들어 있지 않는 것은 결코 당신을 흥분시키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남을 미워하는 일은 결국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다.

 - 쇼펜하우어, 『세상을 보는 지혜』中에서


 

 * * *


 

이기적 유전자 이론

이기적 유전자 이론이란 "동물들은 자기 유전자를 퍼뜨리려고 노력한다"는 뜻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고, 그 이론을 정확히 이해한 것도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을 포함하여 동물들은 유전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신경도 쓰지 않는다. 사람들이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어서다. 그 사랑 때문에 사람들은 자식을 따뜻하고 배부르고 안전하게 키우려고 노력한다. 이기적인 것은 개인의 실제 동기가 아니라 그 개인을 구성한 유전자의 비유적 동기다. 유전자는 동물의 뇌를 배선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퍼뜨리려고 '노력'하고, 그래서 그 동물들은 자신의 친족을 사랑하고, 그들을 따뜻하고 배부르고 안전하게 키우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위와 같은 혼동은 사람들의 유전자를 그들의 진정한 자아로 간주하고, 유전자의 동기를 사람들의 가장 깊고 진실하고 무의식적인 동기로 간주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그렇게 오해하게 되면 모든 사랑은 위선이라는 냉소적이고 잘못된 도덕에 이르기 쉽다. 그것은 개인의 실제적 동기와 유전자의 비유적 동기를 혼동한 결과다. 유전자는 꼭두각시를 부리는 주인이 아니다. 유전자는 뇌와 몸을 만들기 위한 조리법으로 작용한 다음 조용히 물러난다. 유전자는 평행우주에 존재하고, 몸 전체에 흩어져 있으며, 그들만의 의제를 갖고 있다.(616쪽)

 - 스티븐 핑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中에서


 * * *

 

 

궁극 원인과 근인과의 혼동

우리의 모든 동기가 이기적이라는 생각 때문에 우울함을 느끼는 사람은 엘비와 똑같은 혼란에 빠져 있다. 궁극 원인(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의 이유)과 근인('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사는가?')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두 의미는 아주 비슷해 보이기 때문에 혼동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리처드 도킨스가 밝힌 바에 따르면, 자연 선택의 논리를 이해하는 좋은 방법은 유전자가 이기적 동기를 가진 행위자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그의 비유는 완벽하지만 한편으로는 경솔한 사람들을 함정에 빠뜨릴 수 있는 위험성을 품고 있다. 유전자는 비유적 동기-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것-를 가지고 있으며, 유전자에 의해 설계된 유기체는 실제적 동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같은 동기가 아니다. 때로는 유전자의 가장 이기적인 행위가 인간의 뇌에 이타적인 동기-진심에서 우러난, 무조건적인, 뼛속에서 우러나는 헌신성-를 배선한다.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물려줄) 자식에 대한 사랑, (유전적으로 한 배를 탄) 충실한 배우자에 대한 사랑, (신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와 동지에 대한 사랑은 우리 인간의 경우(근인의 차원)에서는 한계와 비난을 초월하지만, 유전자의 경우(궁극적 차원)에서는 이기적 행동에 비유된다.(339쪽)

 - 스티븐 핑커, 『빈서판』中에서

 * * *

자신의 행복 vs 전 세계의 행복

속담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그 자신에게는 전 세계일지 몰라도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전 세계의 지극히 하찮은 부분에 불과하다고 한다. 비록 그 자신의 행복은 그를 제외한 전 세계의 행복보다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그의 행복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 이외의 다른 어떤 사람의 행복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비록 모든 개인이 각자의 마음속에서는 자기 자신을 모든 인류보다 더 선호하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가 다른 사람들을 정면으로 똑바로 쳐다보면서 자신은 이 원칙에 따라서 행동할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해서는 안 된다.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中에서

 * * *


도덕감각

도덕감각에 대해 다윈은 J.S.밀이 말한 '도덕감정이 천성적인 것이 아니라 얻어진 것이라 하여도 그 때문에 본디의 것이 아니라고 하는 말은 아니다'를 주로 인용하면서 동물의 사회적 본능과 결부된 천성의 감각임을 설명하고 있다.

'다음 명제는 고도로 개연적이라고 생각된다. 즉 부모와 자식의 애정을 포함해 현저한 사회적 본능이 풍부한 동물이라면, 어떤 동물도 그 지적인 능력이 인간과 같거나 혹은 그에 가까운 정도까지 발달하면 당장 도덕 감각, 혹은 양심을 획득할 것이다.'

 - 다윈, 『종의 기원』中에서(책의 말미에 실린 '다윈의 생애와 사상' 中에서)


 * * *

피에타(Pieta)

그러므로 선의, 사랑, 의협심이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행하든지 간에, 그것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게 한다. 이것들을 움직여 착한 일과 자선 사업을 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남의 고통에 대한 인식'이며, 이것은 자기의 고통으로 이해되고 자기의 고통과 동일하게 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순수한 사람은 그 본성에 따르면 동정이 있는 것이다.

사랑으로 줄어드는 고통이 크든 작든 간에, 채워지지 않은 소망이 어떠한 것이든 간에, 그것은 상관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칸트와는 정반대다. 칸트는 진실한 선과 덕을 추상적인 반성에서, 또 의무의 개념이나 정언 명령의 개념에서 나온 것인 경우에만 참된 선이나 덕이라고 인정하려 하고, 감정으로서 동정은 약점이며 덕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칸트와는 정반대로 아무런 주저함 없이 단순한 개념은 순수한 덕에서는 순수 예술에서와 마찬가지로 효력이 없고, 모든 참되고 순수한 사랑은 동정이며, 동정이 아닌 사랑은 이기심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기심은 에로스(애욕)이고, 동정은 아가페(순수애)다. 이 둘은 빈번하게 혼합이 된다. 순수한 우정에도 언제나 이기심과 동정의 혼합이 있다. 순수한 우정이란 우리의 개성과 잘 맞는 개성을 가진 친구가 있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거의 우정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동정은 그 친구와 진심으로 기쁨과 슬픔을 같이하거나 그 친구를 위해 이기적이 아닌 희생을 바치는 데에서 나타난다. 스피노자도 "호의란 동정에서 생긴 욕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윤리학》제3부, 정리 27) 우리의 이 역설적인 명제를 확증하는 것으로서 순수한 사랑에서 나온 언어의 음정이나 애무의 언어는, 동정의 음정과 완전히 일치함을 알게 된다. 이탈리아어로 동정과 순수한 사랑이 피에타(Pieta)라는 같은 말로 표시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918쪽)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4권 의지로서의 세계에 대한 제2고찰> 中에서

(끝)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12-11-07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을 미워하는 것은 단지 그의 모습을 빌려 자신 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미워하고 있는 것과 같다. 자신안에 들어 있지 않는 것은 결코 당신을 흥분시키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남을 미워하는 일은 결국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다. - 쇼펜하우어, 『세상을 보는 지혜』中에서

이 글을 읽으니 제가 읽은 다음과 같은 글이 생각났어요. 책을 읽다 보면 중복되는 내용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타인을 향한 비난은, 많은 경우 비난하고 있는 사람 자신의 콤플렉스와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비난하는 사람의 불행한 심리 상태가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비난하는 사람이 오히려 애처롭게 보일 때도 있습니다. - 혜민 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서.

“얘야, 너도 어른이 되어 보면 세상에 화가 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이해하게 될 거야. 하지만 다른 사람한테 화를 내게 되는 일이 있어도 그건 결국 자신한테 화를 내는 거란다. 자신이 밉기 때문이지. 바로 그렇게 때문에 사람은 자신이 미워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 위기철 저, <아홉살 인생>에서.

꼼꼼하게 정리하신 덕분에 좋은 글을 읽고 갑니다. ^^
좋은 가을 보내세요.

oren 2012-11-07 19:45   좋아요 0 | URL
저도 혜민스님의 저 책 속 구절을 (나중에) 읽으면서 쇼펜하우어의 말과 똑같다는 생각을 했었답니다. 한편으로는, 까마득히 오래전부터 불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에서 이미 '네 안에 나 있다'는 관념이 깊숙하게 자리잡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쇼펜하우어 역시 불교와 고대 인도의 여러 경전에 두루 심취했던 철학자였기 때문에 "탓 트왐 아시(Tat twam asi)", 즉 '그것이 너다'라는 '위대한 말'에 그토록 매혹되었던 것 같구요.
 
<어느 독서광의 노트> 연인 관계에서 누가 더 사랑하는 자일까



 

(밑줄긋기)

 

 


 

 

 

 

 

 

 

 

 

 

 



 

<더>와 <덜>의 구별

사람들은 보통 감각, 감정, 열정, 노력과 같은 의식의 상태들이 증가하거나 감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어느 한 감각이 같은 성질을 가진 다른 감각보다 두 배, 세 배, 네 배 더 강하다고 말할 수 있음을 확언한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이것은 정신물리학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정신물리학의 반대자들조차 다른 감각보다 더 강한 감각, 다른 노력보다 더 큰 노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리하여 순전히 내적인 상태들 사이에 양적인 차이를 수립하는 데에 아무런 장애도 느끼지 않는다. 게다가 그 점에 관해 상식이 취하는 태도는 조금의 주저도 없다. 사람들은 더 덥다거나 덜 덥다거나, 더 슬프다거나 덜 슬프다고 말하며, 그러한 <더>와 <덜>의 구별이 주관적인 사실이나 비연장적(非延長的)인 사물의 영역으로 확장될 때조차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 그러나 거기에는 매우 불분명한 점이 있으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대한 문제가 있다.(17∼18쪽)



 

원인의 성격조차 모르면서

압도적 다수의 경우에 우리는 원인의 성격조차 모르면서, 그리고 그 크기는 더더욱 모름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의 강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 심지어 우리는 결과의 강도를 가지고 원인의 수와 성격에 대해 무모한 가설을 내세우기 일쑤이고, 그리하여 처음에는 원인들이 무의미하게 보이던, 감각의 판단을 그 결과의 강도에 의해 수정하기에까지 이르게 된다. 우리는 그때 결과의 경험과 동시에 그 원인이 완전하게 지각되는 이전의 어떤 상태와 자아의 현재 상태를 비교하는 것이라고 둘러대도 소용없다. 아닌게 아니라 상당히 많은 경우 우리는 그와 같은 절차를 따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로부터 나오며 더 이상 외부의 원인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깊은 심리적 사실들 사이에 우리가 세우는 강도의 차이는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21∼22쪽)



 

막연한 욕망이 점점 깊은 열정이 되는 경우

가령 막연한 욕망이 점점 깊은 열정이 되는 경우가 있다. 당신은, 그 욕망의 강도가 약했던 것은 우선 그것이 고립되어 있었고, 당신의 내적 삶의 모든 나머지 부분에 대해 낯선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음을 간파할 것이다. 그러나 그 욕망이 조금씩 더 큰 수의 심리적 요소들에 침투하여 그것들을, 말하자면 자신의 고유한 색깔로 물들였다. 그리하여 지금은 이제 사태 전체에 대한 당신의 관점이 변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가. 사실, 당신이 깊은 열정을 깨닫게 되는 것은 일단 그것이 형성된 후에는 동일한 대상이 당신에게 더 이상 동일한 인상을 주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당신의 모든 감각과 모든 생각이 그로 인해 새롭게 생기를 찾은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마치 어린 시절을 새롭게 맞이한 것과 같다. (25∼26쪽)



 

희망

희망을 그렇게도 강력한 즐거움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미래가 동시에 여러 형태로, 그것도 모두 동일하게 미소지으며 동일하게 가능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가장 원하던 것이 실현된다 하더라도, 다른 것들을 희생해야 할 것이며, 그리하여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무한한 가능성들로 가득차 있기에, 미래에 대한 생각은 결국 미래 자체보다도 더 풍부하기 때문에 우리는 소유보다는 희망에서, 현실보다는 꿈에서 더 많은 매력을 발견한다. (27∼28쪽)

(역주) 여기서 희망을 논하는 것은 다음의 기쁨과 슬픔, 특히 기쁨을 그것으로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미래가 필연적 진행으로 닫혀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될지 모르게 열려 있다는 것이 베르크손의 철학이므로, 그런 무한한 가능성이 현재에 대해 제공하는 그낌 자체가 바로 희망이며, 그것은 무한이 인간에 주는 말하자면 <계시>이다. 빠스깔적 무한의 은총이 베르크손에게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있다.



 

기쁨

열정과 마찬가지로 내적인 기쁨은 우선 마음의 한 구석을 차지했다가 점차적으로 그 자리를 넓혀 가는 고립된 심리적 사실이 아니다. 가장 낮은 단계에서 그것은 우리 의식의 상태들이 미래로 방향을 잡는 것과 상당히 비슷하다. 다음에는 마치 그러한 인력(引力)이 심리상태들의 무게를 감소시킨 것처럼, 생각과 감각들이 더 빨리 이어지며, 우리의 동작들은 더 이상 동일한 노력을 지불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극도의 기쁨에서는 우리의 지각과 기억들이 정의할 수 없는 어떤 성질을 띠게 되는데, 그것은 어떤 열기나 빛과도 비교될 수 있는 그리고 너무도 새로워서 몇몇 순간에는 우리 자신으로 되돌아봐 존재의 경이로움 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 그러한 성질이다.(28쪽)



 

슬픔

슬픔은 과거로의 정향(定向,orientation)에 불과한 것에서 시작된다. 즉, 마치 각각의 감각이나 생각이 이제는 완전히 슬픔이 주는 그 보잘것 없음에 갇혀 버린 것처럼, 이를테면 미래가 우리에게 닫혀 버린 것처럼, 우리의 감각과 생각이 빈약해진다. 그리하여 무를 갈망하게 하고, 매번의 새로운 불행이 투쟁의 불필요성을 더 잘 이해하게 함으로써, 쓰디쓴 쾌락을 일으키는, 어떤 으깨지는 듯한 느낌에서 슬픔은 끝을 맺는다.(29쪽)

(역주) 열정, 희망, 기쁨, 슬픔 등의 깊은 감정에 관한 지금까지의 논의 주제는 앞으로의 다른 심리상태들에 대한 논의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떻게 질적인 변화를 양적인 변화로 생각하게 되었는가를 분석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양적 크기의 변화로 생각하는 심리상태의 각 단계들은 사실은 모두 질적으로 다른 것들이며, 따라서 동질적인 것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양적 계산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기쁨과 슬픔을 의식의 정향이 미래와 존재로 향하느냐 과거와 무로 향하느냐에 따라 설명하는 분석은 너무도 탁월하여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연민

도덕감에도 동일한 종류의 연구를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연민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우선 생각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자리에 서서 그들의 고통을 겪는 것이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연민이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들을 돕기보다는 그 비참함을 피하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고통은 당연히 우리가 혐오하는 것이나까. 그러한 연민의 원천에 혐오감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돕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려는 새로운 요소가 지체하지 않고 거기에 결합한다. ······ 진정한 연민은 고통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욕망하는 데에서 성립한다. 그 고통이 실현되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자연이 마치 어떤 큰 부정을 저지르기나 한 것처럼, 그래서 그것과의 모든 공범의 혐의를 벗어야 하기나 할 것처럼,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는 어떤 가벼운 욕망 말이다. 연민의 본질은 따라서 겸손해야 할 필요성이며, 낮아지려는 열망이다. 그런 고통스러운 열망은 게다가 매력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스스로의 자기 평가에서 우리를 높여 주고, 우리의 사유가 거기서부터 순간적으로 멀어지는 [바로] 그 감각적 이득보다 우리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연민의 증가하는 강도는 따라서 질적인 진전, 즉 혐오에서 두려움으로, 두려움에서 공감으로 그리고 공감 자체에서 겸손함으로의 이행에서 성립한다.(39∼40쪽)



 

쾌락의 세기

지성이 생각하는 여러 쾌락들 앞에서, 우리의 신체는 마치 반사작용처럼 그들 중 어느 하나로 자발적으로 향한다. 그것을 멈추는 것은 우리에게 달렸지만, 그 쾌락의 매력은 그렇게 시작된 운동과 다른 것이 아니며, 그것을 맛보는 동안의 쾌락의 세기 자체는 모든 다른 감각을 거부하고 거기에 빠져 버리는 신체의 무기력에 불과하다. 우리의 정신을 흐트러뜨릴 수 있는 것에 대하여 저항하려 할 때 그러한 무기력을 의식하게 되는데, 그러한 무기력이 없다면 쾌락은 여전히 어떤 상태이나 더 이상 크기는 아닐 것이다. 물리적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신의 세기에서도 매력(attraction, 인력)은 운동을 일으키기보다는 설명하는 데에 쓰인다.(58∼59쪽)

(역주) 어떤 매력에 이끌려 쾌락을 맛본다는 것 자체는 운동을 일으킨 것이지만, 그 쾌락은 바로 다른 운동을 하지 않게 하는 <무기력>이기 때문에, <매력에 이끌렸다>는 것은 실제로 어떤 행동을 하게 한 것이 아니라, 행동을 하지 않게 된 핑계로 쓰인다. 어떤 <매력에 사로잡힌> 상태는 거기서 헤쳐 나오려 해도 나올 수 없는, 즉 몸을 뺄 수 없는 그 <옴쭉달싹할 수 없음>, 즉 무기력의 상태이다. 물리적 세계에서의 매력은 인력인데, 그것은 물질이 나름대로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움쭉달싹 못 하게 자기에게로 끌어들이는 힘이며, 물질이 왜 그렇게 나름대로의 운동을 <일으키지> 않고 옴쭉달싹 못 하는지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사실 만유인력의 법칙 자체가 하나의 설명적 가설이다.

고통이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운동하라는 명령이며, 쾌락을 운동하지 못하게 사로잡힌 무기력이라고 설명하는 베르크손의 분석은 명쾌하면서도 눈부시다.



 

감각을 크기로 취급하려는 경향

사실을 말하자면, 정신물리학은 상식에 친숙한 개념을 정확히 공식화하여 그 극단적 귀결로까지 밀고 나간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사유하기보다는 말하기 때문에118), 또한 공통의 영역에 속하는 외부 대상들이 우리가 지나가는 주관적 상태들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 상태들에 외부 원인의 표상을 가능한 한 많이 도입함으로써 그것들을 객관화하는 것이 우리에게 매우 이롭다. 우리의 인식이 증가할수록 더욱더 우리는 강도의 성격을 띤 것 뒤에서 외연적인 것을, 질 뒤에서 양을 보며, 또한 전항(前項)에 후항(後項)을 집어넣고 감각을 크기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다. 바로 우리의 내적 상태들의 외적 원인을 계산해 내는 것이 그 역할인 물리학은, 그 상태들 자체에는 가능한 한 상관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그리고 [아예] 방침을 정하고 물리학은 그 상태들을 그 원인과 혼동한다. 따라서 물리학은 그 점에서 상식의 환상을 북돋우며, 심지어 과장하기까지 한다. 과학이 그러한 질과 양 그리고 감각과 자극의 혼동과 친숙해짐으로써 한쪽을 측정하듯이 다른 쪽도 측정하려고 시도할 날이 숙명적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정신물리학의 목적이었다. ······ 두 종류의 양, 즉 오직 더와 덜만을 포함하는 강도의 성격을 띤 양과 측정에 적합한 외연적인 양을 구별한다면, 페히너와 정신물리학자들을 옳다고 인정하는 데에 매우 가까이 가 있다. 왜냐하면, 한 사물이 커지거나 작아질 수 있는 것으로 인정되자마자, 얼마만큼 작아졌고 얼마만큼 커지는지를 찾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측정이 직접적으로 가능하다고는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거기서부터 과학이 어떤 간접적인 방식으로 거기에 성공할 수 없으리라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따라서 감각은 순수한 질이거나, 그렇지 않고 크기라면 측정할 방도를 찾아야 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91∼93쪽)

118) 말을 구성하는 단어 자체가 사물을 하나하나 끊어서 거기에 대응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외부 사물과 같이 공간화하는 성격을 지닌다.

 


(끝)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12-11-07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새로 소개 받는 느낌이에요. 작가의 이름은 들어봤지만...
책의 제목은 처음 보는 듯해요.
꼼꼼히 읽겠습니다. ^^

oren 2012-11-07 19:33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철학자로서 온갖 명예를 거의 다 누렸던(1928년에는 노벨문학상까지 받았어요) 저자의 주저 가운데 한 권이자 박사학위논문이랍니다(1889년 출판).

[우리의 의식에 직접 주어지는 것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진정한 시간으로서의 지속이며, 지속의 상하에서 자유의 문제를 풀려는 것이 이 책의 내용]이어서 저자 자신이 직접 관여한 영어 번역의 제목은 『시간과 자유의지 Time and Free Will』였고요. 20세기의 철학서 가운데 기념비적 저서로 손꼽히는 책인데 그런만큼 내용이 쉽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