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독서광의 노트> 연인 관계에서 누가 더 사랑하는 자일까



 

(밑줄긋기)

 

 


 

 

 

 

 

 

 

 

 

 

 



 

<더>와 <덜>의 구별

사람들은 보통 감각, 감정, 열정, 노력과 같은 의식의 상태들이 증가하거나 감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어느 한 감각이 같은 성질을 가진 다른 감각보다 두 배, 세 배, 네 배 더 강하다고 말할 수 있음을 확언한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이것은 정신물리학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정신물리학의 반대자들조차 다른 감각보다 더 강한 감각, 다른 노력보다 더 큰 노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리하여 순전히 내적인 상태들 사이에 양적인 차이를 수립하는 데에 아무런 장애도 느끼지 않는다. 게다가 그 점에 관해 상식이 취하는 태도는 조금의 주저도 없다. 사람들은 더 덥다거나 덜 덥다거나, 더 슬프다거나 덜 슬프다고 말하며, 그러한 <더>와 <덜>의 구별이 주관적인 사실이나 비연장적(非延長的)인 사물의 영역으로 확장될 때조차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 그러나 거기에는 매우 불분명한 점이 있으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대한 문제가 있다.(17∼18쪽)



 

원인의 성격조차 모르면서

압도적 다수의 경우에 우리는 원인의 성격조차 모르면서, 그리고 그 크기는 더더욱 모름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의 강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 심지어 우리는 결과의 강도를 가지고 원인의 수와 성격에 대해 무모한 가설을 내세우기 일쑤이고, 그리하여 처음에는 원인들이 무의미하게 보이던, 감각의 판단을 그 결과의 강도에 의해 수정하기에까지 이르게 된다. 우리는 그때 결과의 경험과 동시에 그 원인이 완전하게 지각되는 이전의 어떤 상태와 자아의 현재 상태를 비교하는 것이라고 둘러대도 소용없다. 아닌게 아니라 상당히 많은 경우 우리는 그와 같은 절차를 따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로부터 나오며 더 이상 외부의 원인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깊은 심리적 사실들 사이에 우리가 세우는 강도의 차이는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21∼22쪽)



 

막연한 욕망이 점점 깊은 열정이 되는 경우

가령 막연한 욕망이 점점 깊은 열정이 되는 경우가 있다. 당신은, 그 욕망의 강도가 약했던 것은 우선 그것이 고립되어 있었고, 당신의 내적 삶의 모든 나머지 부분에 대해 낯선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음을 간파할 것이다. 그러나 그 욕망이 조금씩 더 큰 수의 심리적 요소들에 침투하여 그것들을, 말하자면 자신의 고유한 색깔로 물들였다. 그리하여 지금은 이제 사태 전체에 대한 당신의 관점이 변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가. 사실, 당신이 깊은 열정을 깨닫게 되는 것은 일단 그것이 형성된 후에는 동일한 대상이 당신에게 더 이상 동일한 인상을 주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당신의 모든 감각과 모든 생각이 그로 인해 새롭게 생기를 찾은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마치 어린 시절을 새롭게 맞이한 것과 같다. (25∼26쪽)



 

희망

희망을 그렇게도 강력한 즐거움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미래가 동시에 여러 형태로, 그것도 모두 동일하게 미소지으며 동일하게 가능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가장 원하던 것이 실현된다 하더라도, 다른 것들을 희생해야 할 것이며, 그리하여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무한한 가능성들로 가득차 있기에, 미래에 대한 생각은 결국 미래 자체보다도 더 풍부하기 때문에 우리는 소유보다는 희망에서, 현실보다는 꿈에서 더 많은 매력을 발견한다. (27∼28쪽)

(역주) 여기서 희망을 논하는 것은 다음의 기쁨과 슬픔, 특히 기쁨을 그것으로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미래가 필연적 진행으로 닫혀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될지 모르게 열려 있다는 것이 베르크손의 철학이므로, 그런 무한한 가능성이 현재에 대해 제공하는 그낌 자체가 바로 희망이며, 그것은 무한이 인간에 주는 말하자면 <계시>이다. 빠스깔적 무한의 은총이 베르크손에게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있다.



 

기쁨

열정과 마찬가지로 내적인 기쁨은 우선 마음의 한 구석을 차지했다가 점차적으로 그 자리를 넓혀 가는 고립된 심리적 사실이 아니다. 가장 낮은 단계에서 그것은 우리 의식의 상태들이 미래로 방향을 잡는 것과 상당히 비슷하다. 다음에는 마치 그러한 인력(引力)이 심리상태들의 무게를 감소시킨 것처럼, 생각과 감각들이 더 빨리 이어지며, 우리의 동작들은 더 이상 동일한 노력을 지불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극도의 기쁨에서는 우리의 지각과 기억들이 정의할 수 없는 어떤 성질을 띠게 되는데, 그것은 어떤 열기나 빛과도 비교될 수 있는 그리고 너무도 새로워서 몇몇 순간에는 우리 자신으로 되돌아봐 존재의 경이로움 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 그러한 성질이다.(28쪽)



 

슬픔

슬픔은 과거로의 정향(定向,orientation)에 불과한 것에서 시작된다. 즉, 마치 각각의 감각이나 생각이 이제는 완전히 슬픔이 주는 그 보잘것 없음에 갇혀 버린 것처럼, 이를테면 미래가 우리에게 닫혀 버린 것처럼, 우리의 감각과 생각이 빈약해진다. 그리하여 무를 갈망하게 하고, 매번의 새로운 불행이 투쟁의 불필요성을 더 잘 이해하게 함으로써, 쓰디쓴 쾌락을 일으키는, 어떤 으깨지는 듯한 느낌에서 슬픔은 끝을 맺는다.(29쪽)

(역주) 열정, 희망, 기쁨, 슬픔 등의 깊은 감정에 관한 지금까지의 논의 주제는 앞으로의 다른 심리상태들에 대한 논의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떻게 질적인 변화를 양적인 변화로 생각하게 되었는가를 분석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양적 크기의 변화로 생각하는 심리상태의 각 단계들은 사실은 모두 질적으로 다른 것들이며, 따라서 동질적인 것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양적 계산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기쁨과 슬픔을 의식의 정향이 미래와 존재로 향하느냐 과거와 무로 향하느냐에 따라 설명하는 분석은 너무도 탁월하여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연민

도덕감에도 동일한 종류의 연구를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연민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우선 생각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자리에 서서 그들의 고통을 겪는 것이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연민이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들을 돕기보다는 그 비참함을 피하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고통은 당연히 우리가 혐오하는 것이나까. 그러한 연민의 원천에 혐오감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돕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려는 새로운 요소가 지체하지 않고 거기에 결합한다. ······ 진정한 연민은 고통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욕망하는 데에서 성립한다. 그 고통이 실현되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자연이 마치 어떤 큰 부정을 저지르기나 한 것처럼, 그래서 그것과의 모든 공범의 혐의를 벗어야 하기나 할 것처럼,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는 어떤 가벼운 욕망 말이다. 연민의 본질은 따라서 겸손해야 할 필요성이며, 낮아지려는 열망이다. 그런 고통스러운 열망은 게다가 매력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스스로의 자기 평가에서 우리를 높여 주고, 우리의 사유가 거기서부터 순간적으로 멀어지는 [바로] 그 감각적 이득보다 우리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연민의 증가하는 강도는 따라서 질적인 진전, 즉 혐오에서 두려움으로, 두려움에서 공감으로 그리고 공감 자체에서 겸손함으로의 이행에서 성립한다.(39∼40쪽)



 

쾌락의 세기

지성이 생각하는 여러 쾌락들 앞에서, 우리의 신체는 마치 반사작용처럼 그들 중 어느 하나로 자발적으로 향한다. 그것을 멈추는 것은 우리에게 달렸지만, 그 쾌락의 매력은 그렇게 시작된 운동과 다른 것이 아니며, 그것을 맛보는 동안의 쾌락의 세기 자체는 모든 다른 감각을 거부하고 거기에 빠져 버리는 신체의 무기력에 불과하다. 우리의 정신을 흐트러뜨릴 수 있는 것에 대하여 저항하려 할 때 그러한 무기력을 의식하게 되는데, 그러한 무기력이 없다면 쾌락은 여전히 어떤 상태이나 더 이상 크기는 아닐 것이다. 물리적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신의 세기에서도 매력(attraction, 인력)은 운동을 일으키기보다는 설명하는 데에 쓰인다.(58∼59쪽)

(역주) 어떤 매력에 이끌려 쾌락을 맛본다는 것 자체는 운동을 일으킨 것이지만, 그 쾌락은 바로 다른 운동을 하지 않게 하는 <무기력>이기 때문에, <매력에 이끌렸다>는 것은 실제로 어떤 행동을 하게 한 것이 아니라, 행동을 하지 않게 된 핑계로 쓰인다. 어떤 <매력에 사로잡힌> 상태는 거기서 헤쳐 나오려 해도 나올 수 없는, 즉 몸을 뺄 수 없는 그 <옴쭉달싹할 수 없음>, 즉 무기력의 상태이다. 물리적 세계에서의 매력은 인력인데, 그것은 물질이 나름대로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움쭉달싹 못 하게 자기에게로 끌어들이는 힘이며, 물질이 왜 그렇게 나름대로의 운동을 <일으키지> 않고 옴쭉달싹 못 하는지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사실 만유인력의 법칙 자체가 하나의 설명적 가설이다.

고통이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운동하라는 명령이며, 쾌락을 운동하지 못하게 사로잡힌 무기력이라고 설명하는 베르크손의 분석은 명쾌하면서도 눈부시다.



 

감각을 크기로 취급하려는 경향

사실을 말하자면, 정신물리학은 상식에 친숙한 개념을 정확히 공식화하여 그 극단적 귀결로까지 밀고 나간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사유하기보다는 말하기 때문에118), 또한 공통의 영역에 속하는 외부 대상들이 우리가 지나가는 주관적 상태들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 상태들에 외부 원인의 표상을 가능한 한 많이 도입함으로써 그것들을 객관화하는 것이 우리에게 매우 이롭다. 우리의 인식이 증가할수록 더욱더 우리는 강도의 성격을 띤 것 뒤에서 외연적인 것을, 질 뒤에서 양을 보며, 또한 전항(前項)에 후항(後項)을 집어넣고 감각을 크기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다. 바로 우리의 내적 상태들의 외적 원인을 계산해 내는 것이 그 역할인 물리학은, 그 상태들 자체에는 가능한 한 상관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그리고 [아예] 방침을 정하고 물리학은 그 상태들을 그 원인과 혼동한다. 따라서 물리학은 그 점에서 상식의 환상을 북돋우며, 심지어 과장하기까지 한다. 과학이 그러한 질과 양 그리고 감각과 자극의 혼동과 친숙해짐으로써 한쪽을 측정하듯이 다른 쪽도 측정하려고 시도할 날이 숙명적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정신물리학의 목적이었다. ······ 두 종류의 양, 즉 오직 더와 덜만을 포함하는 강도의 성격을 띤 양과 측정에 적합한 외연적인 양을 구별한다면, 페히너와 정신물리학자들을 옳다고 인정하는 데에 매우 가까이 가 있다. 왜냐하면, 한 사물이 커지거나 작아질 수 있는 것으로 인정되자마자, 얼마만큼 작아졌고 얼마만큼 커지는지를 찾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측정이 직접적으로 가능하다고는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거기서부터 과학이 어떤 간접적인 방식으로 거기에 성공할 수 없으리라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따라서 감각은 순수한 질이거나, 그렇지 않고 크기라면 측정할 방도를 찾아야 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91∼93쪽)

118) 말을 구성하는 단어 자체가 사물을 하나하나 끊어서 거기에 대응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외부 사물과 같이 공간화하는 성격을 지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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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11-07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새로 소개 받는 느낌이에요. 작가의 이름은 들어봤지만...
책의 제목은 처음 보는 듯해요.
꼼꼼히 읽겠습니다. ^^

oren 2012-11-07 19:33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철학자로서 온갖 명예를 거의 다 누렸던(1928년에는 노벨문학상까지 받았어요) 저자의 주저 가운데 한 권이자 박사학위논문이랍니다(1889년 출판).

[우리의 의식에 직접 주어지는 것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진정한 시간으로서의 지속이며, 지속의 상하에서 자유의 문제를 풀려는 것이 이 책의 내용]이어서 저자 자신이 직접 관여한 영어 번역의 제목은 『시간과 자유의지 Time and Free Will』였고요. 20세기의 철학서 가운데 기념비적 저서로 손꼽히는 책인데 그런만큼 내용이 쉽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