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채워지지 않을 구별의 욕망

채워지지 않을 구별의 욕망118)에 뒤틀려 의식은 실재를 상징으로 대체시키거나 또는 상징을 통해서만 실재를 본다. 이렇게 굴절되고 또 바로 그 사실 자체에 의해 재분열된 자아가 일반적으로는 사회적 삶의 요구에 그리고 특수하게는 언어의 요구에 무한히 더 잘 부응하기 때문에, 의식은 그러한 자아를 선호하고, 근본적 자아는 점점 시야로부터 잃어버린다.(164쪽)

 

118) 사물을 하나하나 구별해서 보려는 욕망



언어가 그 운동성을 고정하지 않고는

변질되지 않은 의식이라면 볼지도 모를 그러한 근본적 자아를 다시 찾기 위해서는 엄밀한 분석적 노력이 필요하며, 그에 의해 내적이며 살아 있는 심리적 사실들을, 우선 굴절되어 있으며 다음으로 동질적 공간에 응고된 그것들의 이미지로부터 떼낼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지각과 감각, 감정, 관념들은 이중적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명료하고 정확하지만 비인격적이다. 다른 하나는 혼동되고, 한없이 움직이며 표현할 수 없다. 그것은, 언어가 그 운동성을 고정하지 않고는 그것을 파악할 수 없으며, 공통의 영역으로 떨어지게 하지 않고는 그것을 자신의 진부한 형태로 포섭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수성의 두 가지 형태, 즉 지속의 두 가지 형태를 구분하기에 이른다면, 따로따로 취해진 의식의 사실들 각각은 구별되는 다수성 속에서 생각되었느냐 혼동된 다수성 속에서 생각되었느냐에 따라, 즉 그것이 일어나는 시간-질 속에서 생각되었느냐 그것이 투사된 시간-양 속에서 생각되었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을 띠어야 할 것임은 분명하다.(165쪽)



감각에 대한 언어의 영향

자연상태에서 생각하면 우리의 단순 감각들은 좀더 적은 항상성을 나타낼 것이다. 어렸을 때는 좋아했으나 지금은 혐오스럽게 느끼는 냄새나 향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경험된 그 감각에 동일한 이름을 부여하며, 향기와 냄새는 동일하게 남아 있고 내 취향만 바뀐 것처럼 말한다. 따라서 나는 아직도 그 감각을 응고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동이 더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될 정도의 명백성을 획득하게 되면, 그 변동을 추출하여 그것에 별도의 이름을 부여하고, 차례가 오면 그것을 취향이라는 형태로 응고시킨다. 그러나 실제로는 동일한 감각도 다수의 취향도 없다. 왜냐하면 감각과 취향은 내가 그것을 떼내서 명명하자마자 나에게 사물처럼 보이나, 인간의 영혼 속에는 진행 이외의 것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감각은 반복되면서 변하며, 그것이 나에게 조변석개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가 지금 그 감각을 그것의 원인인 대상을 통해서, 그것을 번역하는 단어를 통해서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야 한다. 감각에 대한 언어의 그런 영향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다. 언어는 우리에게 감각의 불변성을 믿게 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경험된 감각의 성격에 대해서도 우리를 속인다. 그리하여 고급스런 맛으로 소문난 요리를 먹을 때, 그것에 부여된 찬사가 가득 실린 그 요리의 이름이 나의 감각과 의식 사이에 개입한다. 조금만 노력하여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 반대임이 드러날 수 있는 데도 나는 그 맛이 마음에 든다고 믿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분명히 확정된 윤곽을 가진 단어, 즉 인류의 인상들에서 안정되고 공통적이며, 따라서 비개성적인 것을 저장해 놓은 난폭한brutal 단어는 개인적 의식의 섬세하고도 사라지기 쉬운 인상들을 말살해 버리거나 또는 적어도 덮어 버린다. 대등한 무기로 싸우기 위해서는 그런 인상들이 정확한 단어들로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단어들은 형성되기가 무섭게 그것들을 낳은 감각에 대항하는 쪽으로 총구를 되돌릴 것이며, 감각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증언하기 위해 발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감각에 그들 자신의 안정성을 강요할 것이다.(167∼168쪽)


한쪽 편을 들 때 가지는 무반성적 열정

우리가 어떤 문제들에 대해 한쪽 편을 들 때 가지는 무반성적 열정은, 우리의 지성도 자신의 본능을 가진다는 것을 족히 증명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관념들에 공통되는 충동, 즉 그들의 상호 침투에 의해서라 아니라면, 어떻게 그러한 본능을 표상할 것인가? 우리가 가장 애착을 갖는 의견은 표현하기가 가장 어려운 의견이며, 우리가 그것들을 정당화하는 이유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그 의견을 취하도록 결정케 한 이유일 경우는 드물다.127)

127) 우리가 어떤 의견을 취하게 된 진정한 이유는, 애착을 가진 것일수록 더욱더 우리 자아의 깊은 곳으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그만큼 더 객관화하기 어렵고, 따라서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우리의 내부로 들어가면 갈수록 사물들은 엉켜서 불가분적으로 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말로 표현하는 이유들은 대부분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간혹 <정곡을 찌를> 수는 있지만, 진정한 이유와 일치할 경우가 드물다.(171쪽)


  

우리에게 가장 적게 속하는 것만이 말에 의해 충분히 표현될 수 있다고 해서 놀라서는 안 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그 의견을 이유도 없이 채택하는데, 왜냐하면 우리 눈에 그것이 가치를 가지게 된 것은 그 의견의 색조nuance가 우리의 모든 관념들의 공통적 색상coloration에 부응하기 때문이며, 처음부터 우리가 거기에서 뭔가 우리의 일부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정신 속에서는 그 의견이,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 위해 거기로부터 나오게 하자마자 다시 취하게 될 진부한 형태를 띠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정신들에게 동일한 이름을 가지더라도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런 의견들 각각은 유기체 속에서의 세포와 같은 방식으로 산다. 자아의 상태 전체에 대해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그 세포 자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세포가 유기체의 어느 정해진 지점을 점하는 반면, 진정으로 우리 것인 관념은 우리의 자아 전체를 채운다. 게다가 우리의 모든 관념들이 그처럼 의식상태들의 덩어리로 합체해 들어가기에는 거리가 있다. 많은 것이 연못 물 위에 뜬 낙엽처럼 표면을 떠다닌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이 그 관념들을 생각할 때, 그 관념들이 마치 자신의 밖에 있는 것처럼 그것들을 항상 일종의 부동성 속에서 다시 대면한다는 것이다. 그 중에는 우리가 완성된 것으로서 받아들이며 우리 속에 머물지만 결코 우리의 실체substanve 속에 동화되지 않는 관념들이나 또는 우리가 소홀히 여겨 버림받아 말라버린 관념들이 있다. 자아의 깊은 층들로부터 멀어짐에 따라, 우리의 의식상태들이 점점 더 수적 다수성의 형태를 취하고 동질적 공간 속에 펼쳐지는 경향을 갖는다면, 그것은 바로 그런 의식상태들이 점점 더 타성적인 본성과 점점 더 비인격적인 형태를 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관념들 중에 우리에게 가장 적게 속하는 것만이 말에 의해 충분히 표현될 수 있다고 해서 놀라서는 안 된다.(172∼173쪽)

- 앙리 베르크손,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中에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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