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폐한 집 동서문화사 월드북 231
찰스 디킨스 지음, 정태륭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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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킨스의 애독자들은 『위대한 유산』을 그의 소설 중 제1로 치지는 않는다. 대중적 인기로 치자면 『올리버 트위스트』보다 뒤진다. 디킨스 본인은 『코퍼필드』를 더 우위에 두었지만, 나를 포함해서 많은 비평가들은 『황량한 집』을 첫 손가락으로 꼽는다. (헤럴드 블룸)

 

 * * *

 

많은 작가들이 많은 작품을 남겼다. 찰스 디킨스도 다작으로 유명한 작가다. 그런데 작가가 남긴 여러 작품 가운데 최고의 작품이 가장 널리 읽히는 경우는 그리 일반적이지는 않은 듯하다. 당장 제임스 조이스와 마르셀 프루스트만 떠올려 보더라도 그런 사정은 금세 알 수 있다. 토마스 만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대표작이 『마의 산』이라고 해서 토마스 만의 독자들이 그 작품을 가장 많이 읽었으리라고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찰스 디킨스의 『황폐한 집』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이 훌륭한 소설이 찰스 디킨스의 다른 많은 작품들에 비해 훨씬 덜 읽힌다고 하더라도 일단은 가볍게 수긍해야 옳지 싶다. 비록 이 작품이 지닌 훌륭한 가치에 비해 독자들의 독서 열정이 지나칠 정도로 반비례 관계에 있는 듯한 느낌을 좀처럼 떨치기 어렵더라도 말이다.

 

찰스 디킨스의 주된 특징은 '유머와 위트와 재치와 긍정'으로 요약할 수 있지 싶다. 문학의 역사에서 이런 특징이 극에 달했던 작가는 누가 뭐래도 셰익스피어였다. 이같은 이유로 찰스 디킨스는 자주 셰익스피어에 비견된다. 시인이자 극작가이자 배우였던 셰익스피어가 넘치는 열정과 문재(文才)를 시로 마음껏 발산했다면, 소설가이면서도 배우에 대한 열정과 기질이 넘쳤던 디킨스는 자신의 머리 속에 끊임없이 샘솟는 이야기를 통해 그런 기분을 풀어냈다.

 

그가 『황폐한 집』에서 은연 중에 발설했던 다음 대화는 바로 작가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으흠! 셰익스피어처럼 말씀을 잘하시는데요!"

 

심지어 그는 소설 속에서조차 시인처럼 '반복되는 후렴'을 리드미컬하게 구사할 정도였다. 그게 등장 인물의 대화 속이든 전경이나 배경 묘사든 가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등 뒤로는 셰익스피어가 슬쩍슬쩍 엿보일 때가 자주 발견되고,  때로는 그 너머에 아스라히 고대 그리스 비극 시인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릴 때도 있다. 가령 『황폐한 집』에서 주인공 격인 에스더 서머슨 양이 마침내 자신의 생모로 밝혀진 데들록 부인을 만났을 때 나눈 대화가 그렇다.

 

"어머니, 이미 결심하셨나요?"

 

"결심했어. 난 지금까지 어리석음에 어리석음을 더하고, 자존심에 자존심을 더하고, 경멸에 경멸을 더하고, 자만에 자만을 더하고, 큰 허영에 더욱 큰 허영을 덧칠하며 살아왔어. 할 수 있다면 이 위기도 잘 극복해 죽을 때까지 무사할지도 몰라. 난 위험에 둘러싸여 있어. 체스니 월드가 이 깊은 숲에 둘러싸여 있듯이. 하지만 난 언제까지나 그 안을 걸을 거야. 내가 걸을 길은 오직 하나, 단 하나밖에 없단다."

 

 

찰스 디킨스는 남달리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은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어릴 때 겪었던 감정인 부모에게 버림받아 비천한 신분으로 떨어졌다는 절망감과 굴욕감은 그에게 평생 동안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이 체험이 그에게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굳은 결심과 향상심과 출세욕을 심어주긴 했지만 말이다.

 

'이런 생각이 가져오는 비통함과 굴욕감이 내 성격 전체에 스며들어 버려서 나는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 칭송받고 행복해진 지금까지도 가끔 꿈을 꾼다. 그 꿈에서 나는 내게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생겼다는 사실, 아니 내가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홀로 외롭게 그 시절을 헤매다가 돌아온다.'

 

바로 이런 작가의 경험 때문에 그가 쓴 작품에는 유독 고아나 가난한 사람들이나 부랑자나 비천한 신분의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올리버 트위스트』의 올리버, 『위대한 유산』의 핍, 『데이비드 코퍼필드』의 데이비드, 『어려운 시절』의 루이자, 『황폐한 집』의 에스더 서머슨, 에이더 클레어, 리처드 카스톤, 부랑아 조 등이 대표적이다.

 

몹시도 아픈 과거를 지닌 작가를 과거로부터 마침내 해방시킨 작품은 『데이비드 코퍼필드』(1849∼1850)였다. 주인공이 세상에 막 태어날 때부터 시작하여 마침내 어엿한 작가로 성공할 때까지의 온갖 삶의 기억들을 '웃음과 눈물과 기쁨과 애환'을 가득 담아 그려낸,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 자전적 소설이야말로 작가에게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나의 사랑하는 자식' 같은 작품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데이비드 코퍼필드』야말로 작가를 끊임없이 붙들고 옭아매던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뚜렷이 결별할 수 있도록 도와준 작품이기도 했다.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끝낸 작가는 곧이어 『황폐한 집』(1852∼1853)을 통해 본격적인 사회 비판에 깊숙하게 발을 들여놓게 된다. 디킨스의 최대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 방대한 장편소설은 이보다 나중에 쓰여진 『어려운 시절』(1854년),  『리틀 도릿』(1855∼1857)과 『우리 서로의 친구』(1864∼1865) 등과 함께 묶여 '사회 비판'을 다룬 작품군을 이루는데, 이 가운데 단연 뛰어난 작품이 바로 『황폐한 집』이다.(사실 디킨스는 알고 보면 초기 작품인 『피크위크 페이퍼스』에서부터 일찌감치 '사회정의'를 일깨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작가였다. 이러한 디킨스의 작품 경향으로부터 자못 강렬한 인상을 받은 버나드 쇼는 『리틀 도릿』에 대해 "『자본론』 보다도 더 폭동을 유발하는 책"이라고 말할 정도였고, 칼 마르크스는 『리틀 도릿』을 최초의 자본주의 공격 소설로 평가했다고 한다. 칼 마르크스는 심지어 "세계의 모든 정치인, 사회운동가들이 한 모든 것보다 디킨스가 세상의 핍박 받는 민중을 위해 한 일이 더 많다"고 말할 정도였다.)

 

『황폐한 집』이 다루는 주제는 얼핏 손에 쉽게 잡히는 빤한 주제들을 다루지는 않는다. 디킨스의 초기 작품들에서는 특정한 사회적 폐해가 개별 현상으로서 언급되고, 사회악의 책임이 특정한 개인의 탓으로 돌려지는 반면, 후기 작품을 대표하는 『황폐한 집』에서는 각종 사회 제도나 조직 자체가 사회악의 근원으로 다뤄진다. 의회 정치에 대한 불신이나 하릴없이 무위도식하면서 무료한 나날을 보내는 상류층에 대한 조롱과 풍자와 비난이 함께 담겨 있지만 그 방식이 대체로 모호하게 그려져 있다. 그건 마치 런던을 가득 덮고 있는 안개와 진창을 바라보는 식이다.

 

 

어디를 둘러봐도 안개다. 템스 강 상류에도 안개가 푸른 섬과 목장 사이를 흘러간다. 강 하류에도 안개가 자욱하다. 이곳에서는 수없이 정박한 배들 사이와 이 커다란(그리고 더러운) 도시의 지저분한 강기슭을 더러운 안개가 소용돌이를 그리며 지나간다. 에섹스 주 늪지 위도 안개요, 켄트 주 구릉 위도 안개다. 안개는 석탄을 운송하는 범선 상갑판 주방으로도 스멀스멀 들어 오고, 커다란 배 돛대 위에도 잠들어 있으며, 식구 안을 돌아다니고, 거룻배도 작은 뱃전에도 웅숭그리고 있다. 그리니치 해군병원 병실 난로 옆에서 콜록거리는 노병의 눈과 목구멍 안으로 기어들어 가고, 공연히 성질난 선장이 비좁은 자기 방에서 피워대는 오후의 담뱃대와 재떨이에 기어들어 가고, 갑판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어린 수습 선원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매몰차게 꼬집는다. 다리 위를 지나가는 난간 너머로 하늘에 낮게 깔린 안개를 바라본다. 그들 사이에도 안개가 자욱해서 이들은 마치 열기구에 올라타 구름 속을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11∼12쪽)

 

 

안개가 가장 자욱하고 거리가 가장 진흙으로 범벅이 된 곳에 링컨 법조원의 대법관 법정이 자리잡고 있다. 거기가 바로 소설의 주무대이다. 해롭기 그지없는 늙은 무뢰한이나 다름없는 이 법정에 대한 묘사는 아주 길게 이어진다.

 

오늘 같은 오후에야말로 대법관은ㅡ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지만ㅡ이 법정에 자리 잡고 앉아 안개처럼 몽롱한 후광에 싸이고 하늘거리는 붉은 천과 커튼에 둘러싸인 채, 요란한 구레나룻을 기른 거구이면서도 목소리는 개미만 한 변호사의 끝없이 장황한 설명을 들으면서, 안개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지붕의 들창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야 한다. 이런 오후에야말로 수십 명에 이르는 대법관 법정 판사들은ㅡ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듯이ㅡ언제 끝날지 모르는 소송 중 수천 단계 째의 일에 막연히 매달리고, 막히기 쉬운 판례에서 서로 꼬투리를 잡고, 소소한 전문적 법률 사항에 무릎까지 파묻혀 허우적거리고, 산양 털이나 말 털로 만든 가발을 뒤집어쓰고는 그것으로 법률 조문의 벽을 깨부수겠다고 무모하게 머리를 갖다 박고, 연극배우 뺨치게 자못 진지한 얼굴로 공명정대한 태도를 꾸며내야 한다. 이런 오후에야말로 사건에 관계된 온갖 사무변호사는ㅡ그중에는 부모님 대부터 담당하던 일을 맡은 사람도 두서넛 있고 모두 그 사건으로 이미 부를 쌓았지만ㅡ서기 책상과 칙선변호사 비단 법복 사이에 놓인 매트 깔린 기다란 변호사석에 앉아(그러나 이 우물 바닥에서 '진리'를 찾는 것은 소용없는 짓이다) 저마다 눈 앞에 소장, 답변서, 재항변서, 제2답변서, 강제명령서, 선서진술서, 소송쟁점서, 법원 주사가 읽을 심사보고서, 법원 주사의 보고서, 그 밖의 온갖 값비싼 잡동사니를 쌓아놓고 있어야 한다. 다 꺼져가는 촛불이 법정을 어두침침하게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안에 낮게 깔린 안개가 영원히 나가지 않겠다는 듯이 버티는 것만 같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색유리가 끼워진 창문들이 색채를 잃고 대낮의 햇빛이 통과시키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도시의 문외한들이 입구의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다가 내부의 올빼미 같은 광경을 보고 또 천이 깔린 윗자리에서 천장까지 우울하게 울리는 멍청한 변설을 듣고는 안으로 들어가기를 포기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윗자리에서는 대법관이 햇빛을 통과시키지 않는 들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고, 그 옆에 앉은 가발 쓴 법관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안개에 파묻혀 있다! 바로 여기가 대법관 법정이다. 이 법정을 위해 나라 곳곳에 다 쓰러져가는 집과 황폐한 땅이 존재한다. …… (12∼13쪽)

 

 

소설 『황폐한 집』의 <제1장_대법관 법정>은 오로지 '런던의 안개'와 그 가운데 자리잡은 '대법관 법정'을 묘사하는 데 온전히 할애하는데, 위에서 인용한 두 단락은 제1장 전체 분량에 비하면 고작 1/8 정도에 불과하다. 그만큼 이 소설의 '서주' 부분이 자못 장대하게 펼쳐져 있는 셈인데, 디킨스의 여느 작품에서는 좀처럼 느끼기 어려운 '무게 와 깊이'를 반증하고 있다.(번역본에는 따로 설명이 없지만, 여기서 약간의 부연 설명이 필요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런 오후에야말로'가 리드미컬하게 반복되는 수법은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5막 1장>에서 로렌초와 제시카가 달밤에 나누는 감미로운 사랑 노래와 너무나 닮았다. 거기서 두 연인은 '이런 밤에'를 '후렴'처럼 무려 일곱 번이나 주고 받는다. 디킨스는 유독 이 작품에서 이같은 '후렴'을 반복하는 수법을 여러 곳에서 자주 구사한다.)

 

총 67장으로 구성된 이 방대한 장편소설은 '여러 층위'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대체로 재미있으면서도 술술 읽힌다는 평가'를 받는 디킨스의 여느 소설과는 궤를 달리하는 소설이다. 음악에 비유하자면 제1주제와 제2주제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의 부차 주제(題)들까지 다양하게 포함하고 있으며, 그런 주제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여러 악장들 속에서 때로는 단조로, 때로는 장조로 아주 다양하게 제시되고 전개되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구성 때문에 처음에는 따로 떨어져 서로 낯설게만 들리는 여러 소소한 이야기들이 차츰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다가 나중에 마침내 하나로 합쳐져 피날레를 향해 숨가쁘게 내달릴 때에는 거대한 감동의 쓰나미에 휩싸이게 된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런던 대법관 법정과 그 주변, 레스터 데들록 경과 데들록 부인이 살고 있는 링컨셔의 대저택, 잔다이스 씨가 살고 있는 '황폐한 집' 등이다. 공간이 생각보다 그리 넓은 편은 아니지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소설의 방대한 규모에 어울릴 정도로 충분히 많다. 제1의 주인공은 에스더 서머슨 양이다. 소설의 절반 정도는 에스더가 '나'로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에스더의 이야기'가 두 장 혹은 세 장쯤 이어지고 나면 다시 전지적 작가 시점의 이야기가 (시간과 공간을 바꿔) 두 장 혹은 세 장 정도 분량으로 다른 이야기를 전개한다.(이런 방식의 독특한 이야기 전개가 극대화한 작품으로는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떠올릴 수 있다. 그 작품에서는 매 장마다 등장 인물의 이름이 장의 제목으로 달려 있는데, 바로 그 인물이 '1인칭 화자'로 나서서 이야기를 이끈다. 윌리엄 포크너는 찰스 디킨스를 모방한 셈이다.) 

 

주인공인 에스더가 '나'로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끄는 부분은 자연스럽게 에스더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진다. 어릴 때부터 고아나 다름없는 처지로 대모의 손에서 자란 에스더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는 철저히 베일에 가려진 채  '복종과 극기와 부지런함'을 강요받으며 자란다. 열네 살 때 대모마저 사망하면서 외톨이 신세가 된 에스더는 예기치 못한 후원자의 손길 덕분에 기숙사가 딸린 학교에 들어가고, 나중에는 잔다이스 씨의 '황폐한 집'으로 이주해서 그 집의 살림살이를 도맡게 되고, 점차 주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믿음과 사랑을 얻게 된다.

 

전지적 작가 시점의 이야기 전개는 에스더 서머슨 양의 주변을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맴돌긴 하지만 직접적으로 맞닿지는 않는다. 벌써 수십 년째 해결될 기미조차 없이 지리하게 이어지고 있는 '잔다이스 대 잔다이스 소송 사건'을 둘러싼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거기에 더해 상류 사회를 대변하는 레스터 데들록 집안의 거대한 저택에 머무는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보태진다. 다채롭고도 흥미로운 인물들은 대법관 법정 주변에 가장 많이 모여 있다. 대서인, 문방구점 주인, 변호사, 하숙인 등등이 저마다 자기 직분에 몰두하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끝없이 전개된다.

 

독자들은 소설을 한참이나 읽어도 계속 '안개에 휩싸인 듯한 기분'을 떨치기 어렵다. 도대체 에스더 서머슨 양의 이야기가 이제 막 흥미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겠구나 싶으면 어김없이 거기서 이야기는 중단되고, 다시 전지적 작가 시점의 이야기로 전환되면서 '다른 공간에서 펼쳐지는 다른 이야기'로 뒤바뀌고 마는데, 그들 두 이야기 사이의 '연결 고리'를 찾기가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읽을 때 끊임없이 '화자'가 뒤바뀌면서 '이게 도대체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하는 당혹감을 맛보는 경우와 아주 흡사하다. 이런 이야기 수법이야말로 작가가 일부러 의도한 '교묘한 이야기 전달 방식'의 핵심 장치이다.

 

자욱한 안개 속에 휩싸인 사람은 자주 길을 잃게 마련이고, 여기 저기 안개 속에서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들 때문에 적이 놀라기 마련이다. 하지만 안개 속에서 마주친 사람들이 과연 어디에서 왔으며 또 앞으로 어디를 향해 발걸음을 옮길 것인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황폐한 집』에 등장하는 여러 배경들이나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매 장마다 다르게 펼쳐지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배경과 인물들이 끝없이 펼쳐지기만 할 뿐 좀처럼 정리되는 듯한 느낌을 갖기 어렵기 때문에 처음부터 긴장감을 갖고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이내 길을 잃기 쉽다. 어떤 인물들이 어떤 장면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어떠한 행동을 했는지를 무심코 지나치다 보면 한참 후에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그 사람이 불쑥 다시 등장했을 때 그 까닭을 금세 이해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교묘한 장치들이 잔뜩 숨겨져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을 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그 사람의 이름과 특징과 해당 쪽수를 함께 적어둘 필요가 있다.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어도 어쩔 수 없다. 이 기나긴 장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아마도 백 명 가까이 될 듯한데, 나중에 이야기 전개가 차츰 '안개가 걷히듯' 보다 뚜렷하게 드러난 때쯤이면,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어떤 식으로든 '잔다이스 대 잔다이스 소송 사건'과 서로 연관을 맺고 있거나, 혹은 이 소설의 주요 인물들인 에스더 서머슨 양과 데들록 부인 혹은 잔다이스 씨와 깊은 연관 관계를 맺고 있음이 뚜렷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에스더의 이야기와 전지적 작가의 이야기가 팽팽하게 평행선을 달리듯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이끌다가 마침내 서로 맞닿는 지점은 언제쯤일까. 그 해답을 찾을 때쯤이면 이 소설은 어느새 클라이맥스에 가까이 다가가 있다. '미모와 자존심과 야심과 교만한 고집'으로 똘똘뭉친 데들록 부인이 아무도 모르게 '편지 한장' 딸랑 남기고 느닷없이 가출한 사실이 발견되고, 그 소식을 들은 잔다이스 씨가 한밤중에 에스더 서머슨 양을 깨우는 장면이 '마침내' 서로 이어지는 것이다. 무려 1,000쪽에 가까운 소설이 바로 여기서부터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긴박하고 빠르게 전개되는데, 이 극적인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로 진입하기 위한 연결 다리는 866쪽에 이르러서야 겨우 발견할 수 있다.

 

『황폐한 집』을 읽고 나면 작가로서의 찰스 디킨스가 얼마만큼 탁월한 이야기꾼인지를 깨닫고 새삼 놀라게 된다. 그가 꾸며내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놀랍고 초정밀 시계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치밀하고도 교묘하다. 또한 찰스 디킨스의 여느 다른 작품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그만의 '심오한 경지'를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찰스 디킨스가 도스토옙스키의 스승으로 불리우고 톨스토이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심지어 프란츠 카프카, 제임스 조이스, 윌리엄 포크너 등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듯한 기분도 든다.

 

디킨스는 오로지 소설만 쓴 작가가 아니었다. 자신의 작품을 연재할 주간지도 20년이나 계속해서 발행했고, 잡지에 게재되는 원고를 일일이 검토했고, 자신의 소설뿐만 아니라 잡지 기사도 직접 작성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선사업과 사회사업, 곳곳에서 열리는 강연과 사교 모임에도 활발히 참석했다고 한다. 그가 남긴 편지만 하더라도 한 권이 700쪽이 넘는 스물두 권짜리로 간행되어 있다고 한다. 작가의 넘치는 에너지와 활력을 보고 랄프 왈도 에머슨이 "그토록 왕성한 창작력과 다채로운 재능을 지닌 한 예술가에 대해서, 또한 한 인간으로서 그가 가진 복합적인 성격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던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찰스 디킨스의 작품들이 국내에 여럿 번역되어 나와 있지만 아직도 그의 방대한 작품 세계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진다. 『올리버 트위스트』를 시작으로, 『위대한 유산』, 『데이비드 코퍼필드』, 『황폐한 집』에 이르는 네 권의 대표작만 하더라도 완독하기 벅찬 게 사실이지만 디킨스를 아주 좋아하는 독자라면 그리 힘든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사족이지만, 아직까지도 국내에 번역조차 되지 않은 디킨스의 다른 많은 작품들이 어서 빨리 출간되었으면 하는 바램도 덧붙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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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5-04 19: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찰스 디킨스의 작품을 많이 접하지 못했지만, 예전에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으면서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어두운 면을 깊이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가난, 불평등, 억압 등 사회 부조리에 대한 수많은 이론을 다룬 책들보다, 현실을 반영한 문학 작품이 더 큰 울림을 준다는 것을 <올리버 트위스트>를 통해 느낄 수 있었습니다... oren님의 글을 통해 디킨스의 다른 저작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oren 2018-05-05 20:17   좋아요 2 | URL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찰스 디킨스에 대한 관심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자주 받습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많은 작품들이 국내에는 번역조차 되지 않은 상태이니까요. TV와 영화가 대세인 시대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을 작가로 당당히 인정받는 사람이 찰스 디킨스인데 말이지요. 좀 더 알아 보니, 그의 작품 가운데 『위대한 유산』, 『리틀 도릿』, 『올리버 트위스트』, 『크리스마스 캐럴』,『황폐한 집』등이 이미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되었고, 심지어 찰스 디킨스를 주인공으로 삼는 영화까지 나와 있더군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저는 『황폐한 집』만이라도 기필코 ‘영화‘로 다시 한번 감상하고 싶습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풍경들과 인물들의 ‘영화 속 모습‘이 너무 너무 궁금해서 말이지요.

혜덕화 2018-05-04 20: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위대한 유산>재미있게 읽었어요.아주 오랫만에 몰입해서 읽었습니다. 좋은 고전을 만나는 기쁨을 님 덕분에 누릴수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oren 2018-05-05 20:22   좋아요 1 | URL
혜덕화 님께서 『위대한 유산』을 아주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무척이나 반갑습니다.^^ 저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작품은 커녕 찰스 디킨스에 대해서는 완전 문외한이었는데, 그 작품 덕분에 디킨스의 다른 많은 작품들을 잇따라 읽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더랬지요.^^

* * *

…… 그러나 『두 도시 이야기』처럼 『위대한 유산』은 대단히 대중적이라는 면에서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과 수십 편의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에 비견될 만하다. 왜냐하면 영화나 텔레비전이 아닌 모습으로 이 정보화 시대에 살아남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햄릿』과 『맥베드』를 읽듯이 우리는 『위대한 유산』을 끊임없이 읽을 것이다.(헤럴드 블룸)
 
데이비드 코퍼필드 동서문화사 월드북 138
찰스 디킨스 지음, 신상웅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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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인류가 가지고 있는 가장 훌륭한 친구들 중 하나이다.

 - 조지 산타야나

 

 * * *

 

찰스 디킨스는 영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이다. 영국인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작가가 셰익스피어라면, 찰스 디킨스는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다. 그의 명성은 스물다섯 살 때 갑자기 '불꽃처럼' 하늘 높이 솟아오른 뒤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르고 있다.

 

셰익스피어를 두고 어느 한 작품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디킨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스크루지 영감이 등장하는『크리스마스 캐럴』 하나만으로도 그는 크리스마스를 새롭게 창조한 인물로까지 칭송 받는다. 그러나 그는 얼핏 보면 어린이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 작가로 보이지만 어린이나 유아를 위한 작가는 아니다.

 

그의 작품은 읽기가 쉽기 때문에 대중적인 작가로 보이지만 실상은 아주 진지한 예술가로 대접받아야 마땅한 인물이다. 디킨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때로는 '만화' 속에 나오는 것처럼 특징과 용모가 매우 부풀려지고 '희화화' 되지만, 그런 방식이야말로 디킨스가 아주 즐겨 사용하는 인물 조형 방법이자 인생을 폭로하는 중요한 장치나 방식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대목을 놓치면 그를 오해하기 쉽다.

 

디킨스의 작품 속에는 고아가 중심 인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으며, 부랑자나 죄수들을 비롯한 버림받고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가 소설 못지 않게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때 맛본 고독과 절망, 굴욕과 비참함이 한평생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다. 인생에서의 불행을 아주 심오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그는 때때로 도스토예프스키와 거의 동급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디킨스의 작품이 러시아 작가보다는 훨씬 덜 심각하며, 위트와 유머가 넘치는 등 분위기도 훨씬 밝은 편이다. 무엇보다 디킨스의 작품은 종교, 과학, 정치, 예술 등에 대해서는 아주 초연하다는 점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와는 아주 다르다.

 

디킨스는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태어났지만 어릴 때 잠깐 동안은 해군 경리국에서 일하던 아버지의 안정적인 수입 덕분에 매우 행복한 분위기에서 자랐다. 그러나 아버지가 자꾸만 빚을 져서 심각한 위기에 빠지자 '목가적인 시대'는 갑자기 끝이 났고, 가족들이 런던으로 이사를 떠난 뒤 홀로 '하숙'을 하며 몇 주 더 학교를 다녔던 디킨스도 끝내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작은 짐 하나만 가지고 홀로 승합 마차를 타고.

 

이 우울한 여행을 그는 평생 잊지 못했다. 눅눅한 지푸라기 냄새도 그 기억에 들러붙어 있었다. "나는 사냥당한 짐승처럼 지푸라기에 싸인 채 발송된 것이다." 몇 년이 지나서 그는 괴롭게 술회했다. "승합마차 좌석에는 다른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혼자서 쓸쓸한 기분에 젖어 샌드위치를 씹었다. 가는 길 내내 비가 세차게 내렸다. 인생은 내가 기대하던 것보다 축축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1017쪽)

 

홀로 런던에 도착해 보니 가족은 '누구라도 눈을 돌리고 싶을 만큼' 칙칙하고 누추하고 초라한 동네에서 살고 있었다. 집안 형편은 나날이 비참해졌고 독이 오른 채권자들은 집으로 몰려와 모욕적인 말을 퍼부어댔다. 어린 디킨스가 하는 일이라고는 가재도구를 골라 전당포에 내다파는 일이 고작이었다. 열두 살이 된 디킨스는 결국 강기슭에 위치한 어두침침하고 쥐들이 우글거리는 구두약 공장에 고용된다. 여기서 겪은 경험이 얼마나 비참했던 것인가를 그는 나중에 친구에게 이렇게 털어놨다.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그토록 쉽게 내버려지다니…… 아무도 나를 동정해 주지 않았다. 비범한 재능을 가졌고 머리 회전도 빠르며 의욕이 넘치고 섬세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상처받기 쉬운 아이였는데. 그런 나를 어디 평범한 학교에 들여보내 주려고 조금이라도 노력하든가-실제로 그럴 수 있었을 테니까."

 

이때 그가 경험한 공장 생활은 그의 생애와 작품에 깊고도 영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가 육체노동을 하는 비참한 아이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때 새겨진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심각했던지는 최근에 개봉된 영화에도 아주 생생하게 담겨 있다.(☞ 찰스 디킨스의 비밀 서재(원제는 The Man Who Invented Christmas))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주급 6∼7실링의 수입으로는 하숙비와 끼니를 해결하기 어려운 처지였는데, 그나마 버티던 아버지가 빚 때문에 체포되어 감옥에 투옥된 것이다. 그래도 그는 일요일을 기다리며 버텨냈다. 일요일이 되면 6마일을 걸어 마샬시 감옥에 가서 부모님과 형제자매들과 함께 '온갖 시름을 다 잊고' 하루를 보낼 수 있었으므로.

 

이런 눈물겨운 이야기는 작가와 절친이었던 존 포스터가 지은 방대한 《디킨스 전기》(1872∼1874)를 통해 자세히 살필 수 있지만, 디킨스가 쓴 자전적 전기인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맛볼 수 있다. 그렇다. 내가 여기서 찰스 디킨스의 어린 시절을 다소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데이비드 코퍼필드』에서 구두약 공장을 다닐 때의 역경은 <11장. 힘겨운 홀로서기>에 나오는데, 일부만 소개하면 이렇다.

 

그렇게 살아도 1주일에 6,7실링 가지고는 모자랐다. 그래도 나는 온종일 창고에서 일하고, 그 돈으로 1주일을 살아가야만 했다. 월요일 아침에서 토요일 밤까지, 누구의 충고도 없었고, 어떠한 조언도, 격려도, 위로도, 도움도, 어떠한 종류의 지원도 받지 못한, 거짓도 위선도 없는 곳이었다.

 

나는 너무 어렸고 철이 없었기에 내 생활을 꾸려갈 만한 능력이 없었다. 어린 내가 달리 어떻게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겠는가? 아침에 머드스톤 앤드 그린비 상점에 가는 도중, 빵집 앞에 내놓은, 반값에 파는 오래된 과자를 목고 싶은 욕망을 억누를 수가 없어서 점심 먹을 돈으로 과자를 미리 사먹어버릴 때도 있었다. 그런 때는 점심을 거르거나 롤빵 한 개, 아니면 푸딩 한 조각으로 요기를 했다.(190∼191쪽)

 

 - 찰스 디킨스, 『데이비드 코퍼필드』, <11장. 힘겨운 홀로서기> 중에서

 

 

데이비드 코퍼필드가 어릴 때 겪는 '온갖 고생담'은 눈물 없이는 읽기 어려울 정도로 불쌍하면서도 놀랍도록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작가 자신이 직접 겪었던 체험들이 도대체 얼마나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 있었기에 이토록 실감나는 이야기를 쓸 수 있었까 싶은 생각에 애처로운 생각이 들면서도 감탄을 거듭하며 읽게 된다. 방금도 살펴봤지만 태어나서 고작 12살때까지 겪은 '파란만장한' 이야기만 하더라도 벌써 이 소설은 200쪽을 훌쩍 넘어간다. 그러니 전체 1,010쪽에 이르는 이 방대한 소설이 어린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둘러싸고 얼마나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을지는 쉽게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주인공이 갓 태어난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마침내 고명한 작가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될 때까지 만났던 수많은 인물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이 소설을 읽는 재미가 오로지 '작가 찰스 디킨스의 드라마틱한 실제 삶'에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만큼 크나큰 오해도 없을 것이다. 물론 이 방대한 소설의 상당 부분이 작가의 실제 삶을 깊게 투영한 건 맞지만, 그게 크나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아니다. 특히나 20대 중반부터 갑자기 시작된 작가로서의 놀라운 성공 과정이나 출세한 작가로서의 화려한 모습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 작품을 완성할 때만 하더라도 작가의 나이는 고작 37세였고, 소설에 1인칭으로 등장하는 '나' 데이비드 코퍼필드가 '과거를 회상하면서'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나이 또한 30대 중반쯤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주인공이 비교적 어린 나이인 20대 초반에 사랑하는 도라와 결혼식을 올리고 신접살림을 차릴 때쯤이면 이 소설은 벌써 740쪽을 훌쩍 지나면서 서서히 종반부로 치닫게 된다. 그러나 주인공의 삶을 다루는 시기가 이처럼 아직 한창이나 다름없는 나이인 30대 중반으로 한정된다고 해서 작품 내용마저 철없는 10대와 20대 시절의 이야기에 너무 치우쳐 있으리라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비록 30여 년에 걸친 짧은(?) 기록이라고 하더라도, 이 작품 속에는 결코 적잖은 사람들이 저마다 엄청난 사건들을 겪고, 홀연히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고, 더러는 독자들의 예상보다 훨씬 일찍 갑작스러운 변화와 죽음을 마주하지만, 더러는 오래도록 살아 남아서 뒤늦게나마 주인공인 '나'와 다시 '눈물겨운 상봉'을 갖기 때문이다. 지난 날에 대한 온갖 추억과 회한과 상념들을 골고루 떠올리면서.

 

이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펜을 놓기 전에 다시 한 번 ㅡ 마지막으로 떠올려 본다.

(……)

빠르게 스쳐 가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뚜렷이 보이는 얼굴은 누구일까? 아아, 그렇다, 이 얼굴들! 내가 속으로 그것을 물어보면 모두가 일제히 나를 뒤돌아 본다!(1006쪽)

 

 - 찰스 디킨스, 『데이비드 코퍼필드』, <64장. 마지막 회상> 중에서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여느 이름난 장편소설들과는 사뭇 다르다. 대개 '장편소설'들이 다루는 주제들은 묵직하기 마련이고, 거대한 건축물을 마주 대하듯 '외관'에서부터 압도되는 경우도 많은데 이 소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도 찰스 디킨스를 무척 좋아했다고는 하지만 『전쟁과 평화』와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다만 두 소설이 아주 닮은 점 한 가지는 꼭 밝히고 싶다. 두 작품에 똑같이 등장하는 '주연급 청춘남녀가 철없이 저지르는 무대뽀 야반도주 사건'만큼은 닮아도 너무 닮았다. 그들 두 커플은 용모나 성격까지도 쏙 빼닮았다. 심지어 두 여주인공이 도주할 때 남기는 '급하게 갈겨 쓴 편지'까지 닮았다. 러시아 소설에선 나따샤(오드리 햅번이 맡았던 배역)과 돌로호프가 주인공이고, 영국 소설에선 에밀리와 스티어포스가 그런 역할을 떠맡았는데, 아마도 잘 모르긴 해도 톨스토이가 『데이비드 코퍼필드』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없지 싶다.

 

그러나 톨스토이가 쓴 『전쟁과 평화』에는 숱한 인물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밝히고자 애썼던 '삶의 의미'에 언제나 전쟁과 평화, 역사와 우연, 종교와 정치 등과 같은 묵직한 주제들이 끈덕지게 들러붙었으나, 찰스 디킨스의 작품에서는 그런 요소가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는 점이 서로 다르다. 작가의 자전적인 소설에 그런 요소가 왜 필요하겠는가.

 

이 소설이 지닌 치명적인 매력 가운데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건 '과거에 대한 회상'을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너무나 정확하게 되살려 내는 주인공의 비상한 기억력이고, 그걸 너무나 매혹적으로 기술하는 작가의 솜씨다. 아무리 작가의 전기적인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작가가 이 정도로 적재적소에서 아주 세밀하게 '어린 시절의 온갖 추억'을 비디오처럼 생생하게 되떠올리고, 그런 회상 장면 자체까지도 놀랍도록 매혹적으로 묘사해 놓은 줄은 몰랐다.

 

인생의 매 순간마다 우리의 눈앞을 스치듯 사라져가는 수많은 광경들과 감각들, 다시 말해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통해 우리의 뇌리에 저장되는 기억들을 이처럼 생생하게 되살려 놓은 작품을 일찌기 나는 접해본 적이 없었다. 이 소설 덕분에 내가 '낡은 기억의 저장고'에서 먼지를 푹 뒤집어쓴 채 오랫동안 널브러져 있던 온갖 자질구레한 잡동사니들 틈을 헤집고 다니다가 문득문득 새롭게 꺼내 본 풍경과 기억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는 일일이 셀 수도 없을 정도다. 그것들은 때로는 기적적으로 기억의 심연 속에서 갑자기 불쑥 떠오르기도 했고, 그때마다 나는 그런 기억들을 어떤 식으로든 붙둘어 매어 두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트에 옮겨적었다.

 

어디선가 프로이트가 가장 좋아한 소설이 『데이비드 코퍼필드』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나서는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기도 했다. 주인공 데이비드가 심리적으로 강렬한 충격을 받을 때마다 그는 '현실에서 비롯된 꿈'을 잠자리에 들어서도 내내 이어가는데, 그 이야기가 어찌나 사실적이면서도 생생했던지 '그래, 맞아, 나도 예전에 그런 비슷한 꿈을 자주 꾸었지'라는 말도 자주 되뇌었다. 인간 내면 심리에 대한 탁월한 연구결과를 내놓은 천재 심리학자 프로이트가 이 소설을 두고 얼마나 '자신의 경험'과 일일이 대조하면서 자주 읽었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데이비드 코퍼필드』에 담긴 이야기는 '기억의 본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독자들한테 끊임없이 회상'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몹시 매력적이다. 디킨스는 또한 계급과 성()의 차이에서 오는 '관계의 불안정'도 깊이 연구했는데, 이는 노동자 계급인 에밀리를 유혹하는 스티어포스, 성녀같은 아그네스에게 흑심을 품은 우라이아, 그리고 결혼 이후에도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는 관능적인 도라에서 정숙한 이성 아그네스에게로 차츰 관심이 옮겨가는 데이비드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어느덧 『데이비드 코퍼필드』와도 작별할 시간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꽤나 많은 사람들을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듯하다. 가장 먼저 페거티와 그의 오빠가 떠오른다. 쌀쌀맞던 의붓아버지 머드스톤과 그의 누나도. 학창시절부터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스티어포스와 트레들스도. 페거티 씨네 뱃집에서 의좋게 살았던 에밀리와 햄과 거미지 부인도. 구두약 공장에 다니던 어린 시절부터 오래도록 함께 한 미코버 부부도. 5박 6일 동안의 고난의 행군 끝에 만난 대고모 트롯우드도. 캔터베리의 대성당 근처에 살았던 우라이아 힙과 아그네스까지도 벌써 그립다. 아직도 사전 편찬에 계속 몰두하고 있을 것만 같은 스트롱 박사 부부도 그립고, 도라와 집(애완견 이름)도 다시 만나고 싶다. 스티어포스 부인과 로사 다틀과 하인 리티머는 어떻게 생겼을까. 에밀리의 친구 마사와 미스 모처의 실제 모습도 궁금하다. 트레들스의 아내가 된 소피와 여러 발랄한 처제들까지도...

 

이제는 그들과 헤어져야 할 때가 다가왔다. 언젠가 다시 만날 그때까지 모두들 부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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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 2018-03-31 08: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쟁과평화>와 비교된 작품의 특징부문이 너무 좋았어요. 멋진 글 잘보고 갑니다~

oren 2018-03-31 14:35   좋아요 1 | URL
그 부분을 쓸까 말까 몇 번이나 고민하다가 결국 되살렸는데, 인상깊게 봐 주시니 고맙습니다.^^

남녀 사이의 애정 관계로만 살펴보면 두 작품이 서로 묘하게 닮은 점이 정말 많이 발견되더라구요.

<전쟁과 평화>에서의 여주인공은 나따샤인데, 그녀는 맨 처음엔 (제1의 남주인공 격인) 안드레이 공작을 사랑하지만 끝내 그 사람과 결혼에 이르지는 못하고 ‘가슴 아픈 이별과 안타까운 재회‘를 반복하게 되지요. 전쟁 중에 큰 부상을 입고 후송되는 안드레이 공작과 ‘피난길‘에 오른 나따샤가 극적으로 재회한 이후, 오랫동안 아주 가까이서 그를 극진하게 보살피는 나따샤의 헌신적인 모습만큼 감동적인 장면도 흔치 않지요.

그녀는 처녀때부터 꽃봉오리처럼 아름답고 발랄하면서도 몹시 순종적이고 고결한 심성을 지닌 매력적인 여성인데(어딘가 모르게 오드리 햅번의 성격과도 닮은 듯한), 안드레이가 전쟁터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결국 죽고 난 이후 훨씬 나중에야 (첫 결혼을 ‘파혼‘한 돌싱남이자 매력적인 제2의 남주인공인) 베주호프와 결혼하게 되면서 활짝 소생하게 되지요.

<데이비드 코퍼필드>에서의 에밀리 또한 어릴 때부터 제1의 주인공인 데이비드와 서로 아주 좋아하는 사이였고, 사춘기를 지날 때까지도 서로 부끄럼을 타면서도 내심 좋아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는 점에서 ‘안드레이와 나따샤와의 순애보‘와 아주 닮았더라구요. 나중에 에밀리가 (제2의 남자주인공 격인) 스티어포스와 야반 도주를 하는 모습도 꼭 닮았고, 그에게 버림받은 뒤에도 끝내 고결한 심성을 잃지 않고 새로운 삶을 찾는 과정까지도 왠지 <전쟁과 평화> 속의 나따샤를 아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더군요.

톨스토이는 소외받는 낮은 계급의 사람들인 하인이나 마부나 농노 등에 대해서도 따스한 애정과 관심을 보여주는데, 찰스 디킨스의 여러 작품 속에 등장하는 고아나 마부나 하녀 등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끝없는 관심과 따스한 눈길과도 무척이나 닮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천재인 그는 너무나 많은 재능을 지닌 것 같다. 그 재능은 그에게 묶여져 있는 무서운 기관차 같아서 그는 거기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도, 그것을 멈추게 할 수도 없다. 그는 나를 압도한다! 그토록 왕성한 창작력과 다채로운 재능을 지닌 한 예술가에 대해서, 또한 한 인간으로서 그가 가진 복합적인 성격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할 방법이 없다."

 - 랄프 왈도 에머슨

 

 * * *

 

아무리 탁월한 작가라고 하더라도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읽기 전까지는 대개 작가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막연한 거리감을 도저히 좁힐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설사 그 사람의 사진만 보더라도 곧장 그를 알아볼 수 있고, 그가 남긴 대표작 이름까지 여럿 알고 있다고 해도 사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내겐 찰스 디킨스라는 작가도 그런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그에 대해 내가 얼마나 무지했던지 심지어 나는 구두쇠 영감 스크루지가 등장하는 그 유명한 『크리스마스 캐럴』조차도 찰스 디킨스와 연결지어 생각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만큼 이 인물에 대해서는 도무지 아는 게 없었다고나 할까.

 

도대체 어떤 연유로 찰스 디킨스를 이토록 새까맣게 모르고 지내왔을까. 가만 생각해 보니 뚜렷하게 내세울 만한 이유도 별로 없다. 굳이 억지로 변명을 하자면 이렇다. 그의 작품 제목이 당최 별로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코퍼필드? 올리버 트위스트? 도무지 무슨 이야기가 거기에 담겨 있다는 거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고리오 영감』이라든가 『보바리 부인』이라면 또 모를까. 그런 책들을 먼저 읽으면 읽었지 아무런 실마리조차 잡히지 않는 낯선 제목의 소설부터 선뜻 집어들 생각은 별로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하찮은 이유 하나만으로도 찰스 디킨스는 내게서 까마득히 밀려나 있었다.

 

나도 언젠가는 찰스 디킨스를 한번쯤 만나 봐야지 하는 마음을 처음으로 품었던 건 아마도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을 때였지 싶다. 조이스는 그 엄청나게 두꺼운 소설 속에서 수많은 작가들과 작품 속 인물들을 단 한 줄로 간단히 처리하는 매우 특출난 솜씨를 유감없이 드러냈지만 유독 몇몇 작가들에 대해서는 그와는 정반대로 아주 융숭한 대접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인물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작가는 단연 셰익스피어였지만 찰스 디킨스에 대한 대우도 그리 나쁘진 않았다. 왜냐하면 제임스 조이스는 그 책에서 세르반테스의『돈키호테』,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등은 물론이고 마크 트웨인이나 빅토르 위고와 같은 숱한 걸출한 작가와 작품들에 대해서조차 예외없이 '단 한 번' 스쳐 지나가듯 다룬 데 비해 찰스 디킨스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거듭 끌어들였고, 그의 작품 또한 『데이비드 코퍼필드』뿐만 아니라, 『두 도시 이야기』, 『올리버 트위스트』, 『픽위크 페이퍼즈』까지 두루 폭넓게 인유할 만큼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 보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다시 한번 찰스 디킨스를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헤럴드 블룸의 『교양인의 책읽기』를 만났을 때였다. 이 해박하고도 노련한 문학 비평가가 찰스 디킨스를 외면할 이유가 어디에 있었겠는가. 하지만 디킨스에 대한 나의 관심이 급속도로 고조된 건 그 작가에 대한 헤럴드 블룸의 도드라진 애정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런 사정까지 알고 나서도 한사코 디킨스를 계속 외면하기란 그리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오래된 작품들을 다시 읽는 일은 가장 높은 수준의 즐거움

 

윌리엄 해즐릿이 말한 것처럼 오래된 작품들을 다시 읽는 일은 가장 높은 수준의 즐거움이면서 독자 자신의 열망 깊은 곳에서 새로운 가르침을 준다. 나는 디킨스의 『픽위크 페이퍼즈』를 일 년에 두 번씩 읽곤 했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권의 책이 닳아 없어지기도 했다. 그게 도피라면 난 기꺼이 그 도피에 참여하리라. 비록 『픽위크 페이퍼즈』에 등장하는 누구도 내게 동일화의 즐거움을 주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읽기』

 

그런데 헤럴드 블룸의 감동적인 설명을 듣고 나서도 디킨스의 작품들은 여전히 내 마음에 선뜻 와닿지가 않았다. 픽위크 페이퍼즈?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거기에 담겨 있다는 거지? 책의 제목들은 여전히 아리송하기만 하고, 막연한 궁금증만 더할 뿐이었다. 디킨스와의 거리 또한 조금도 좁혀지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많은 비평가들은 『황량한 집』을 첫 손가락으로 꼽는다

 

디킨스의 애독자들은 『위대한 유산』을 그의 소설 중 제1로 치지는 않는다. 대중적 인기로 치자면 『올리버 트위스트』보다 뒤진다. 디킨스 본인은 『코퍼필드』를 더 우위에 두었지만, 나를 포함해서 많은 비평가들은 『황량한 집』을 첫 손가락으로 꼽는다.

 

그러나 『두 도시 이야기』처럼 『위대한 유산』은 대단히 대중적이라는 면에서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과 수십 편의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에 비견될 만하다. 왜냐하면 영화나 텔레비전이 아닌 모습으로 이 정보화 시대에 살아남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햄릿』과 『맥베드』를 읽듯이 우리는 『위대한 유산』을 끊임없이 읽을 것이다.

 

도대체 어느 작품부터 읽어야 좋을지조차 모르는 나같은 디킨스 문외한에게 이런 설명은 그리 유익한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저 황량한 느낌만 더할 뿐이었다. 도대체 어느 작품이 최고라는 거지?『위대한 유산』은 아닌 듯하고, 그럼 『올리버 트위스트』? 디킨스 기준으로는 『코퍼필드』? 많은 비평가들은 『황량한 집』? 계속 헷갈리기만 했다. 그러나 어쨌든 『위대한 유산』은 '여러 면에서' 읽을 만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싶었다.

 

이렇게 해서 내가 처음으로 읽은 찰스 디킨스의 작품은 『위대한 유산』이 되었고, 그 작품 하나만 읽고도 나는 찰스 디킨스에 홀딱 빠져들고 말았다. 어느새 나는 『올리버 트위스트』, 『어려운 시절』, 『데이비드 코퍼필드』까지 한꺼번에 사들이고 나서 『황량한 집』을 마저 사들이지 못한 걸 살짝 후회할 정도가 되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국내엔 『황폐한 집』은 진작에 나와 있었어도 『황량한 집』은 아예 나온 적조차 없었다. 이런 황당함이라니.

 

 

 (『위대한 유산』은 1,2권 합해서 911족,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무려 1,120쪽에 달하지만 '지루해서 읽기 힘든 소설'과는 아주 거리가 먼 작품들이니만큼 '방대한 분량' 때문에 겁을 먹을 필요는 조금도 없을 듯하다.)

 

『위대한 유산』을 읽는 짧은 시간(?) 동안에 참으로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휙휙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어릴 때 책 속으로 마구 빠져들었던 황홀한 느낌까지도 아주 오랜만에 다시 맛봤다. 디킨스의 작품이 이토록 재미있을 줄은 차마 몰랐다. 그가 쓴 문장과 표현들은 막히는 데가 전혀 없었다. 금세 셰익스피어를 떠올릴 만큼 그의 문장이 아주 생기 넘치고 자유분방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어떤 인물이나 광경이나 심리를 묘사하든 재치와 유머와 위트가 가득했다. 『위대한 유산』에 '나'로 등장하는 주인공 핍이 어린 시절에 겪은 아주 단편적인 이야기조차도 어쩌면 이토록 생생하면서도 흥미진진하게 다가오는지 연신 감탄을 거듭하며 읽어 내려갔다.

 

내가 아주 가금씩이나마 책을 읽다 말고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면서 한번쯤 상상했던 일 가운데 하나가 '언젠가 나도 작가가 되어 소설을 쓰게 된다면' 쯤으로 시작되는 몹시 유쾌한 상상이었다고 말한다면 어느 누가 얼마만큼이나 믿어줄까 싶지만, 그럴 때마다 내가 책으로 나올 가망성이 눈꼽만큼도 없는 그 소설 속에 한번쯤 꼭 담아봤으면 하는 심정으로 끄적거렸던 '번개처럼 스치는 아스라한 옛 추억들'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그렇게도 달아날까 두려워 몸을 떨면서 애써 붙잡으려 했던 '너무나 소중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바로 디킨스의『위대한 유산』이라는 작품 곳곳에 잔뜩 스며 있었다. 정말로 놀라웠다. 내가 그런 구절들을 읽을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고 몇몇 대목에서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전율할 수밖에 없었던 건 참으로 놀라운 독서 경험이었다.

 

디킨스가 펼치는 이야기는 너무나 자연스러워 마치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누군가가 우리에게 다시 들려주는 것처럼 아주 생생하게 들린다. 때로는 너무나 놀라운 스토리가 박진감 넘치는 추리소설처럼 펼쳐지기 때문에 마치 어린 시절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던 '끝내주는 만화'를 보는 느낌도 자주 들었다. 이처럼 읽는 재미가 샘솟듯 콸콸 흐르는 소설이 도대체 얼마 만이란 말인가. 이름난 서양 문학 고전들 가운데 과연 이만큼 재미있게 읽히는 소설이 있기나 할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저 딱딱하기만 한 주제들, 가령 '종교'와 '사상'과 '정치'와 '철학'까지 다루는 일부 작가들의 깊이있는 소설들, 단적인 예를 들자면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나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등에 비하면 『위대한 유산』은 얼마나 판이하게 다른가 싶은 생각도 자주 들었다. 왜 진작에 이런 재미있는 소설부터 읽지 못하고 애써 딱딱한 소설들을 읽느라 괜한 생고생을 했던가 싶은 생각 때문에 잠시나마 그런 작품들을 읽은 시간들이 원망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대략 150년쯤 전에 영국에서 쓰여진 소설이 이토록 내 마음속 깊이 숨겨져 있었던 숱한 추억들을 끊임없이 불러 일으킬 줄은 차마 몰랐다. 어린 주인공 핍이 시골에서 겪는 온갖 작은 에피소드들 틈바구니로 내가 실제로 겪었던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끊임없이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에 소설에서 눈을 떼기가 힘들 정도였다. 가난하고 어린 소년이었던 핍이 외딴 교회 묘지에서 우연히 맞닥뜨린 탈옥수를 돕는 과정에서나, 읍내에 사는 소문난 부자인 미스 헤비셤의 집을 방문하면서 겪는 온갖 사소한 장면들까지도 내게는 '또다른 나만의 옛 추억'을 끊임없이 불러내는 교묘한 실마리나 열쇠구멍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만큼 디킨스의 문장들은 어느 하나 강력하지 않은 게 없었다.

 

일자무식이던 시골 소년 핍이 미스 헤비셤의 저택에서 양녀처럼 살고 있는 도도하기 짝이 없는 또래 소녀인 예쁜 에스텔러를 만난 이후에 겪게 되는 '심리적 동요'는 어린 핍을 사정없이 뒤흔든다. 그게 결국은 '촌스럽다는 느낌으로부터 벗어나고픈 강렬한 열망'임을 깨달은 핍은 글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수소문한 끝에 읍내까지 먼 길을 오가면서 알파벳을 열심히 배운다. 이른바 '신사가 되고 싶은 열망'의 아주 작은 출발이었다. 대장간에서 하루 종일 쇳덩어리를 두드리며 연장을 만드는 일에 매달리는 착한 매형은 그런 핍을 얼른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힘껏 돕겠다고 거들지만 정작 자신이 그를 도울 능력이 없어 도리어 자책할 뿐이다.(나도 어릴 때 시골에서 자랄 때 '대장간에서 시뻘겋게 달궈진 쇳덩어리를 힘차게 두드리는 대장장이를 본 적이 있었다! 한적한 시골에선 그만큼 훌륭한 구경거리도 드물었다!)

 

장래의 희망이라고 해봐야 고작 매형으로부터 대장간 일을 부지런히 배워서 하루 빨리 매형을 도와줄 생각뿐일 정도로 소박하기만 한 어린 핍은 읍내 최고의 부자인 미스 헤비셤의 집을 들락거리면서 차츰 '새로운 세상'을 엿보게 되지만, 정작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놀라운 사건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엉뚱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혈육이라고는 생활력이 강하지만 억세고 사납기만 한 누나와 착한 매형이 전부인 어린 핍에게 '막대한 기대'를 품어도 좋을 만한 후원자의 대리인이 갑자기 시골에 찾아온 것이다. 후원자의 신분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고, '유산 상속'이 언제부터 개시될 것인지는 오로지 후원자의 판단에 달린 상태였다. 장차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을 때까지 핍에게 주어진 최우선 과제는 '유산 상속을 앞둔 귀한 신분'에 충분히 어울릴 만한 '신사 교육'부터 받는 일이었다.

 

가난한 어린 핍이 하루 아침에 막대한 유산 상속자로 돌변하게 되자 어린 핍을 핀잔 주거나 구박하기 바빴던 온갖 주위 사람들이 태도를 돌변하여 너나없이 칭송하기 바쁘고, 심지어 적잖은 나이 차이가 있는 매형까지도 핍을 '나으리'로 부르는 지경에 이른다. 어린 핍에겐 자신이 살던 마을과 읍내가 어느새 초라하게만 느껴지고, 대도시 런던으로 떠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새 양복까지 맞춰 입는다. '행복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더없이 소중한 존재인 매형 조와의 이별조차 대수롭잖게 여길 정도로 핍의 마음은 변한다. 착하디 착한 매형은 그런 핍에게조차 무한한 애정으로 감싸며 '기약없는 기나긴 이별'에 눈물을 흘리면서 오로지 핍의 성공만을 간절히 빌어준다.

 

고향을 떠나 런던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한 핍은 차츰 새로운 친구들을 여럿 사귀고 사교클럽을 드나들 정도로 변모하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행복한 시절을 보냈던 '어린 시절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과는 점점 멀어지고 만다. 어느덧 핍은 조금씩 분수가 넘을 정도로 사치에 빠져들면서 이내 빚까지 늘어나는 지경에 이른다. 어느덧 성년을 넘긴 나이에 접어든 핍은 '익명의 후원자'가 결국 미스 헤비셤일 거라고 확신하지만 그런 확신에 대해서는 어떤 근거도 찾지 못한 채 막연히 추측할 뿐이다. 후원자의 대리인이자 변호사인 재거스는 미스 헤비셤의 법률 대리인을 겸하지만 정작 '후원자'에 대해서는 어떤 질문도 허용치 않는다.

 

세월이 흘러 몰라보게 아름다운 아가씨로 성장한 에스텔러는 언제나 핍의 마음 한복판을 가득 차지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핍에게 냉랭하기만 하다. 언젠가부터 에스텔러는 런던으로 옮겨와 살지만 핍과 만나더라도 그의 연인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에스텔러를 향한 간절한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결코 그녀의 본심 때문이 아니라 '결혼식 당일 아침에 파혼을 당한 충격으로 평생 독신으로 지내는' 미스 헤비셤의 원한 서린 복수심 때문이라고 여긴 핍은 틈나는 대로 미스 헤비셤의 저택을 방문하고, 혼자서는 결코 풀 수 없는 그 '단단한 매듭'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 헤매지만 매번 헛수고에 그칠 뿐이다.

 

그러던 어느날 주인공 핍에게 매그위치라는 혐오스런 인물이 찾아 오는데... 자세히 살펴 보니 그 흉악하게 생긴 인물은 어린 시절 핍이 온갖 위험을 무릎쓰고 부엌에 남아 있는 음식을 누나 몰래 잔뜩 싸들고 늪지대까지 몰래 찾아가 도와줬던 바로 그 '굶주린 탈옥수'가 아닌가. 그 이후로 전개되는 놀라운 이야기들은 정말 숨가쁜 긴장과 짜릿한 흥분과 놀라운 반전의 연속으로 전개된다. 마치 어린 시절에 팔딱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읽었던 '셜록 홈즈 시리즈'를 다시 떠올릴 정도였다. 디킨스의 이야기 솜씨가 이토록 '대중적'이면서도, 각각의 인물들에 대한 성격과 행동 묘사에서 드러나는 '인간성에 대한 놀라운 통찰들'이 두루 함께 어우러질 수 있다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하루 아침에 거대한 유산 상속자로 바뀌어 런던으로 훌쩍 떠난 이후로도 핍은 언제나 '조와 함께 보냈던 마냥 순수하고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들'을 결코 잊지 못하지만 그저 짧은 순간에만 그러할 뿐이다. 정작 자신의 필요에 따라 고향에 들를 기회가 가끔씩 생기더라도 핍은 읍내에서 머물 뿐 결코 매형네 집까지 찾지는 않는다. 이젠 대장장이로 일하는 매형이 그리 자랑스럽게 여겨지지 않을 뿐더러 자신의 신분과도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핍이 줄곧 '은혜를 모르고 배은망덕하게' 런던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조 가저리의 핍을 향한 고결한 우정은 결코 변치 않는다. 결국 먼 훗날 핍이 급격하게 몰락하고 심신마저 피폐해진 끝에 중병을 앓을 때가 되어서야 핍은 다시금 조의 따스한 보살핌을 받고 구제된다. 몹시 휘어지고 부서진 채 마치 먼 여행에서 맨발로 돌아오는 처량한 나그네처럼 딱한 신세에 빠진 핍을 기꺼이 맞아 준 사람도 조밖에 없었다. 핍이 조와 눈물겹게 재회하는 장면은 안타깝기 보다는 차라리 숭고하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핍이 고향을 떠난 이후로 아주 오랫동안 옛시절을 잊고 지내왔다고 하더라도 진정으로 핍이 가슴 깊이 간직했던 '소중한 가치'는 바로 거기서 다시 복원되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 맺어진 끈끈하고 순박하면서도 한없이 따스한 우정은 마크 트웨인의 소설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 나오는 헉과 짐의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우정과도 빼닮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디킨스의 풍요로운 작품 세계를 어찌 한 권의 장편소설로 다 헤아릴 수 있을까마는, 그가 풀어내는 이야기 솜씨가 얼마만큼 놀랍고 흥미로운지, 또한 등장 인물 각각에 대한 묘사가 얼마나 생생하면서도 위트와 재기가 넘치는 것인지는 『위대한 유산』만으로도 별로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 앞에서도 미리 살펴봤지만 이 작품이 찰스 디킨스의 '제1의' 작품이 아니라는 평가도 있는 만큼 어서 빨리 디킨스의 다른 작품들로 달려갈 마음도 굴뚝같다.

 

내가 두 번째로 읽고픈 디킨스의 작품은 아무래도 『데이비드 코퍼필드』가 되지 싶은데(아차, 이 글을 올릴까 말까 주저하는 사이에 벌써 이 책을 110쪽 넘게 읽었다.), 책을 구입하고 보니 이 소설의 분량이 그리 만만치 않다. 작품해설까지 포함하면 무려 1,118쪽에 이르는데, 책의 말미에 딸린 104쪽 분량의 「찰스 디킨스의 생애와 문학」를 먼저 읽어 보니 작가에 대한 기대가 더욱 부풀어 오른다.

 

디킨스는 몹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로도 유명하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큰 빚을 지는 바람에 학교조차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가족들은 점점 더 런던 외곽으로 밀려나 지저분하고 헐벗은 아이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에서 비참한 생활을 이어갔다. 12세부터는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쥐들이 우글거리는 구두약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채무 때문에 수감되는 바람에 다섯 가족들이 다함께 감옥에서 동거하며 지낼 만큼 형편이 어려웠다. 따로 떨어져 나와 공장에서 일하던 디킨스는 일요일만 되면 6마일을 걸어 감옥에 들어가 부모님과 형제자매들과 만나 시름을 달래며 하루를 보냈다.

 

아버지가 감옥에서 풀려나고 잠시 생활이 나아지자 디킨스는 2년 정도 학교를 다녔다. 그 뒤 다시 가족들과 아는 사이였던 어느 변호사 사무실에서 말단 사무원으로 일하게 되고, 18세가 되면서 독학으로 속기를 배운 덕분에 재판소에서 자유계약 속기사로 일하고, 20세에 드디어 국회 신문기자석에 저널리스트로 데뷔하기에 이른다. 이듬해 의회의 휴회 기간에 처음으로 잡지에 자신의 이야기가 실리자 그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린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홀까지 걸어가서 안에 들어가 30분쯤 그곳에 있었다. 넘치는 기쁨과 자랑스러움으로 눈에 눈물이 글썽해져서 길거리에는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23세의 나이로 완전히 자립하여 유능한 기자로 높은 평판을 얻은 그는 잡지에 고정 연재물을 기고하게 되면서 차츰 전문적인 작가의 길로 나서기 시작하는데, 24세에 발표한 『피크윅 페이퍼즈』와 25세에 발표한 『올리버 트위스트』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디킨스는 일찌기 25세의 나이에 '불꽃처럼' 드높은 명성을 향해서 불쑥 솟아오른 끝에 그 인기를 한평생 동안 누리게 된다. 인물을 창조하는 작가의 비범한 재능을 알아본 비평가들은 이내 그를 셰익스피어나 월터 스콧 경과 같은 대작가에 비견하게 되었다.

 

디킨스는 이제는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런던 사교계에서 추앙 받았고, 특권 신사들의 클럽, 즉 개릭 클럽과 애서니엄 클럽 회원이 되어(찰스 다윈과 동시에 애서니엄 회원이 되었다), 공공장소에서 연설을 하는 일도 많아졌다. 1841년 에든버러 시민들이 디킨스에게 경의를 표하고 만찬회를 열어, 그를 에든버러 명예시민으로 추대했다 ㅡ 20대 청년에게 이것은 '더없이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디킨스는 그 일을 돌이키며, '내가 처음으로 받은 공식 표창이어서 아주 감격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는 그 무렵 문단 명사들과 만나 우정을 나누었다. …… 디킨스의 '품위 없는' 큰 웃음소리와 한껏 멋을 부린 차림새에 이맛살을 찌푸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의 날카로운 지성을 높이 평가한 사람은 더 많았다. 역사가 토마스 칼라일은 그를 처음 보고 나서 '섬세하고 몸집이 작은 사내'라고 썼다. '더없이 재주 많은 얼굴을 하고 있다. …… 조용하고, 예민해 보이는 작은 사내로, 자신의 본질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본질도 매우 잘 알고 있는 듯이 보인다.'(1042쪽)

 

 - 『데이비드 코퍼필드』, <찰스 디킨스의 생애와 문학> 중에서

 

이후로 디킨스가 어떤 작품들로 얼마나 더 많은 독자들을 더욱 매료시켰고, 당대를 주름잡던 수많은 작가들로부터 얼마나 훌륭한 평가를 더 얻게 되었는지, 혹은 그의 작품들이 지닌 '문학적 가치'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어떤 변천을 겪었는지를 더 언급하는 건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굳이 여기서 그의 문학과 삶을 평가하는 빼놓지 말아야 할 사실이 더 남아 있다면 그건 바로 그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일 것이다.

 

내가 『위대한 유산』다음으로 읽고 싶은 있는 작품은 『데이비드 코퍼필드』인데, 여러 다른 책들에서 이 소설이 언급될 때마다 나중에 꼭 한번 읽어 보리라 마음먹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작가 스스로도 '가장 사랑하는 내 아이'라고 부를 만큼 사랑했고, 서머싯 몸이 '세계 10대 소설'로 꼽았을 정도로 높은 평판을 얻었지만 '방대한 분량' 때문인지 명성만큼 그리 많이 읽히지는 않는 듯하다.

 

오랫동안 그저 작가의 이름과 작품의 제목만 알았던 책들을 감명깊게 읽고 나면 괜히 뿌듯한 느낌마저 든다. 아직도 많은 작가와 작품들이 내게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지만, 『위대한 유산』을 통해 뒤늦게나마 찰스 디킨스라는 탁월한 작가를 만난 것만 하더라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앞으로 여러 날을 그의 작품과 함께 울고 웃으며 지낼 수 있으리라는 상상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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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3-10 0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위대한 유산」의 영어 원제가 왜 「Great Expectation」인지 oren님 리뷰로 알게 되었습니다^^:)

oren 2018-03-10 13:10   좋아요 1 | URL
작품의 원제인 Great Expectation의 정확한 뜻은 ‘큰 재산을 얻거나 물려받을 가능성이나 기대‘일 테죠. 그래서 ‘위대한 유산‘이라는 번역 제목은 원래의 뜻을 정확히 옮긴 것이라고 할 수 없는데, 이걸 ‘막대한 기대‘ 또는 ‘막대한 유산‘으로 번역하더라도 원작이 지닌 제목의 뜻이나 뉘앙스와는 너무 달라져 곤란한 점이 있겠더라구요. 책을 다 읽어본 뒤라야 저렇게 번역한 역자의 고충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겠더군요.
 
플라톤전집 4 - 국가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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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그리고 누군가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가 누차 언급한 바 있는 원칙29과 방법에 의해서일 것이네."

 

"그야 당연하지요."

 

주석

 

29 각자가 제 할일을 해야 한다는 원칙을 말한다. 433b, 441d 참조

 

"우리는 또한 정의란 제 할 일이나 하고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을 많은 사람들한테서 들었고, 우리 자신도 가끔 그렇게 말했네."

 

"그래요. 우리는 그렇게 말했지요."

 

그래서 내가 말했네. "그러니 여보게, 이처럼 각자가 제 할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정의인 것 같네. 자네는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겠는가?"

 

"아니요. 말씀해주세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래서 내가 말했네. "우리가 절제와 용기와 지혜를 찾아낸 지금 아직도 남아 있는 자질은, 우리나라에 그런 것들이 생기게 할 힘을 갖고 있고 그런 것들이 생겨난 뒤에는 자신이 존재함으로써 그런 것들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그런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일세. 우리는 또한 다른 세 가지를 발견한다면 남은 것은 정의일 것이라고 말했네."(플라톤, 『국가』, 제4권, 433b)

 

"그렇다면 글라우콘, 우리는 또한 개인도 국가와 같은 방법으로 올바르다고 말하게 될 것이네."

 

"그 역시 아주 당연해요."

 

"우리는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겠지만, 나라가 올바른 것은 나라 안의 세 부류가 저마다 제 할 일을 할 때일세."

 

"우리는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어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렇다면 우리 각자가 올바르고 제 할 일을 하는 것은 각자 안의 각 부분이 제 할 일을 할 때라는 것도 우리는 기억하고 있어야 하네."

 

"물론 기억하고 있어야지요." 하고 그가 말했네.(플라톤, 『국가』, 제4권, 441d)

 

 - 플라톤, 『국가』, <제4권>

 

 

 * * *

 

 

"어떤가?" 하고 내가 말했네. "그렇다면 우리가 그린 정의는 윤곽이 희미해서, 개인 안의 정의는 우리가 국가 안에 있는 것으로 발견한 정의와 달라 보이는가?"

 

"나에게는 달라 보이지 않는데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래서 내가 말했네. "만약 우리 마음속에 아직도 미심쩍은 점이 있다면 비근한 예를 들어 최종적으로 확인할 수도 있네."

 

"비근한 예라니, 어떤 건가요?"

 

"우리가 예컨대 본성적으로 그리고 훈련을 통해 우리나라와 닮은 사람이 자기가 맡은 금이나 은을 착복했는지 질문을 받았다고 가정해보게. 자네 생각은 어떤가?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그럴 가능성이 더 높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게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런 사람은 신전을 털거나 남의 것을 훔치거나, 사적으로는 친구를, 공적으로는 국가를 배신하는 행위와는 거리가 멀겠지?"

 

"네, 멀어요."

 

"그는 또한 맹세나 그 밖의 다른 합의도 충실히 지킬 것이네."

 

"어찌 안 그러겠어요?"

 

"그 밖에도 그는 간통이라든가 불효라든가 신들에 대한 불경과는 어느 누구보다 거리가 멀 것이네."

 

"어느 누구보다도 거리가 멀어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원인은, 지배 또는 피지배와 관련해서 그 안의 부분들이 저마다 제구실을 다하기 때문이 아닐까?"

 

"바로 그게 유일한 원인이에요" 하고 그가 말했네.

 

"이제야 자네는 정의가 바로 그런 사람들과 국가들을 만드는 그런 힘이라고 확신하는가?"

 

"제우스에 맹세코, 확신해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렇다면 우리의 꿈은 완전히 이루어졌네. 그리하여 우리가 짐작한 대로, 우리는 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하자마자 운 좋게도 신의 도움으로 정의의 기원과 윤곽을 만나게 되었네그려."

 

"네, 그래요."

 

"그렇다면 글라우콘, 타고난 제화공은 다른 일은 하지 말고 제화공 일을 해야 하고, 목수는 목수 일을 해야 하며, 그 밖의 다른 사람들도 그래야 한다는 원칙이야말고 사실은 정의의 영상이었던 셈이네그려. 그래서 쓸모가 있었던 것이고."

 

"그런 것 같아요."

 

"정의가 분명 그런 원칙이라 해도, 정의의 진정한 관심사는 누군가의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그의 내적인 행위, 그의 진정한 자아, 그의 진정한 기능일세. 올바른 사람은 자신 안의 세 부분이 각각 남들이 할 일을 제가 하거나 서로 참견하지 못하게 하고, 음계에서의 세 음정, 즉 최고음, 최저음, 중간음처럼 세 부분을 조율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살림을 잘 꾸려나가고 자주독립과 질서를 유지하며 자신과 사이좋게 살게 될 걸세. 그리고 그가 이런 부분들과 그 사이에 있는 다른 부분들을 잘 훈련되고 조화로운 하나의 전체로 결합하여 여럿 대신 완전한 하나가 되면, 그때는 돈 버는 일이 됐든 몸을 돌보는 일이 됐든 정치가 됐든 개인 간의 계약 체결이 됐든 행동에 나서게 될 걸세. 그리고 이런 행위들 가운데 이런 심적 상태를 유지하거나 이런 심적 상태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행위는 올바르고 훌륭한 행위라고 부르고, 이런 행위를 통제하는 지식을 지혜라고 믿고는 지혜라고 부를 것이네. 반면 이런 심적 상태를 언제나 깨뜨리는 행위를 불의한 행위라고, 그런 행위를 통제하는 의견을 무지라고 부를 것이네."

 

"소크라테스 선생님, 전적으로 옳은 말씀이에요" 하고 그가 말했네.

 

"좋았어" 하고 내가 말했네. "그렇다면 올바른 사람과 올바른 국가와 이들 안의 정의가 무엇인지 찾아냈다고 주장하더라도 우리가 전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닌 듯하네."

 

"제우스에 맹세코, 아니지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렇다면 우리는 그렇다고 주장할까?"

 

"네, 주장해요."

 

"그 문제는 이쯤 해두세" 하고 내가 말했네. "다음에는 불의를 고찰해야 할 것이네."

 

"분명 그래야겠지요."

 

"정의가 그런 것이라면 불의는 틀림없이 이들 세 부분 사이의 일종의 내전이요 참견이요 간섭이며, 혼의 한 부분이 전체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네. 그런데 혼의 그 부분이 혼 전체를 지배한다는 것은 부적절하네. 그 부분은 정당하게 지배하는 부분에게 종노릇하는 것이 제격이기 때문일세. 그 밖에도 우리는 세 부분의 혼란과 방황이 불의뿐만 아니라 무절제, 비겁함, 무지, 한마디로 모든 악의 원인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네."

 

"그렇고말고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래서 내가 물었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불의와 정의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는 만큼, 불의한 짓을 하는 것 또는 불의를 행하는 것과 올바른 행위를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겠지?"

 

"설명해주세요."

 

그래서 내가 말했네. "올바른 행위와 불의한 행위가 혼에 끼치는 영향은, 건강에 좋은 행위와 건강에 좋지 않은 행위가 몸에 끼치는 영향과 다를 바 없네."

 

"어째서 그렇지요?"

 

"건강에 좋은 것들은 건강을 낳고, 병적인 것들은 병을 낳네."

 

"네, 그래요."

 

"그리고 올바른 행위른 하는 것은 정의를 낳고, 불의한 짓을 하는 것은 불의를 낳겠지?"

 

"당연하지요."

 

"건강은 몸의 구성 성분들 사이의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자연의 의도에 맞게 정립함으로써 생기고, 병은 그런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자연의 의도에 맞지 않게 정립합으로써 생기는 것일세."

 

"네, 그래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렇다면" 하고 내가 물었네. "정의는 혼의 구성 성분들 사이의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자연의 의도에 맞게 정립함으로써 생기고, 불의는 그런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자연의 의도에 맞지 않게 정립함으로써 생기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마다요" 하고 그가 대답했네.

 

"그렇다면 미덕은 일종의 정신적인 건강 또는 아름다움 또는 좋은 상태이지만, 악덕은 일종의 병 또는 수치스러운 상태 또는 허약함인 것 같네."

 

"그건 그래요."

 

"그렇다면 좋은 생활방식은 미덕으로 이끌지만, 수치스러운 생활방식은 악덕으로 이끌지 않을까?"

 

"당연하지요."(255∼260쪽)

 

 - 플라톤, 『국가』,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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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8-01-02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님 2017 서재의 달인 축하드리며 무술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oren 2018-01-05 00:22   좋아요 0 | URL
카스피 님도 2018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루크레티우스가 대략 어느 시대의 인물이었는지를 아주 쉽게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가 한 사람의 시인을 더 필요로 한다면 그는 바로 베르길리우스(BC70∼19)다. 왜냐하면 루크레티우스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게 없지만 후세의 기록 가운데 <베르길리우스의 생애>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루크레티우스가 죽던 바로 그 해에 베르길리우스가 때마침 '성인식'을 치렀다는 사실이. 말하자면 그 두 시인은 로마 최고의 시인이라는 명예로운 자리를 두고 서로 '바톤 터치'를 주고 받은 사이였던 셈이다.

 

물론 루크레티우스가 (나중에 위대한 시인으로 추앙받게 된) 베르길리우스에 비견될 만한 인물이 될 가능성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베르길리우스는 누가 뭐래도 호메로스의 전통을 직접적으로 물려받은 '로마 최고의 국민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인은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본받아 『아이네이스』라는 '로마 건국 신화'를 빚어 냄으로써 무려 이천 년 동안이나 '로마 최고의 시인'이라는 드높은 영예를 굳건히 지켜 왔다. '지상 최고의 국가 탄생'을 장엄한 가락으로 노래하고 '로마의 영광스러운 미래'를 빛나는 문장으로 빚은 웅혼한 예술 작품을 창조했다는 점에서 그를 뛰어넘은 로마의 시인은 여태까지 없었다.

 

그에 반해 루크레티우스는 '민족주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철학'을 시로 노래했다. 그것도 단순한 곁가지 철학이 아니라 '우주 만물의 기원과 사물의 본성'을 근원적으로 파고드는 심오한 철학을 담은 시였다. 그러니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시가 베르길리우스의 애국시와는 얼마나 서로 '차원'이 다른 작품이었는지는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다. '로마의 영광'이 극치에 다다른 시기에 쓰여진 베르길리우스의 빛나는 예술작품이 결국 '로마인'들을 향한 '애국의 노래'였다면, 루크레티우스의 시는 바로 인류 전체를 향해 '사물의 근본 원인'을 긍구하도록 깨우치는 '진리의 노래'였던 셈이다. 그러니 루크레티우스의 시는 극소수의 독자들에게나 겨우 읽힐 정도로 몹시 어렵고도 희귀한 작품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고, '시인의 명성'과 직결되는 '대중성'과는 오래도록 담을 쌓고 지낼 운명이었다.

 

그런데 루크레티우스의 표현대로 '긴 세월을 통해 어떤 것도 손실 없이 유지될 수 없는 이치' 가운데서도 그의 시는 꿋꿋이 살아 남아 어느새 베르길리우스의 걸작을 도리어 하찮은 것쯤으로 여기게 만들 정도가 되었다. 그가 죽으면서 베르길리우스에게 넘겨줬던 그 바톤이야말로 앞선 주자에게나 뒤따르는 주자에게나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끝끝내 서로의 '우열'을 다툴 여지가 많았던 탁월한 주자에게 어울릴 만한 것이었다. 오직 붓끝을 통해서 오래도록 종이 위를 내달렸을 뿐인 재주이긴 하지만.

 

루크레티우스의 시가 오로지 독창적이기만 했다면 그의 위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데까지 다다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대부분 그보다 몇백 년 앞서 살았던 위대한 철학자인 에피쿠로스로부터 흘러나온 것들이었다. 여기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였던 에피쿠로스의 철학으로까지 거술러 올라가는 건 너무 샛길로 깊숙히 빠져드는 일이기에 피하고 싶다. 다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쾌락주의의 창시자' 에피쿠로스의 철학이 흔히 통념적으로 말하는 '쾌락의 추구'와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는 사실만은 알고 넘어갔으면 좋겠다.

 

에피쿠로스는 '우주 만물의 근본 원인'에 대하여 깊이 천착한 '신과 같은' 철학자였고, 엄청난 저작을 저술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게 하나도 없는 형편이다. 오늘날에는 기껏해야 그가 쓴 '세 통의 편지'가 『그리스 철학자 열전』(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저술)이라는 작품을 통해 전해질 뿐인데, 그 책이 집필된 시기가 2세기말이나 3세기 초엽이어서 도리어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보다 250년쯤 뒤처지는 형편이다.

 

루크레티우스 철학시가 탁월한 건 그의 이론이 놀랍도록 '현대적'이라는 점 때문이다. 우주 만물은 '원자'와 '공간'으로 이뤄져 있고, 사물의 씨앗이나 마찬가지인 원자의 크기는 극히 작지만 그 수는 무한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핵심이다. 공간 또한 무한하다. 우주 만물의 생성과 소멸은 원자들의 만남과 연결이 빚어낸 결과일 뿐이며, 거기에 '신이 개입할 여지'는 조금도 없다. 우주는 '펼연'으로만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우연'도 개입하는데 그것은 바로 '원자들이 일탈하여' 생기는 결과이다. 인간의 영혼 또한 '원자들의 결합'에 따라 생성되었다가 육신이 흩어지면서 함께 소멸한다. 따라서 영혼은 신체와 함께 죽는다. 그의 사상을 현대적으로 요약하자면 '유물론적 무신론'이라고 할 수 있다.

 

루크레티우스의 시가 지닌 또다른 놀라운 점은 '지극히 현대적'이면서도 또한 '몹시 체계적'이라는 점이다.

 

'원자론의 기본 원리'에서 시작하여 우주의 무한함까지 설명하는 부분은 고작 제1권의 내용일 뿐이다. 원자의 운동으로부터 '자유의지'를 찾아 내고, '물질의 근원'과 '신의 부존재 증명'까지 나아가는 내용까지도 제2권으로 족하다. 제3권에서 다루는 '영혼과 육체의 분리불가능 증명'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증명하는 데로 나아간다. 제4권에서 다루는 '감각과 사고'는 '현대 과학'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영상들과 시지각(視知覺)에 대한 통찰들'은 프랑스의 철학자인 앙리 베르그송이 『물질과 기억』에서 주장하는 논리와 너무나 닮아 있다. 그밖에 '수면과 꿈에 대한 내용'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직접 맞닿아 있고, 성욕(性慾)과 성애(性愛)에 대한 놀라운 통찰은 쇼펜하우어가 '연애의 형이상학'에서 주장한 논리의 원형을 보는 듯 생생하다. 

 

제5권에서 설명하는 '천문 현상들'은 '첨단 우주물리학'과 사뭇 현격한 격차를 느끼게 하는 설명들이 많지만 결코 허황된 주장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죽하면 갈릴레이와 아인슈타인이 이 책으로부터 영감을 얻었겠는가. 이어지는 '생명체의 발생'에 대한 설명은 다윈의 『종의 기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문명의 발전'을 다룬 온갖 시적 표현들은 마치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쓴 『총,균,쇠』나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빼닮았다. 문명의 시작, 언어의 기원, 불의 기원과 사용, 금속의 발견과 사용, 농업의 기원과 발달, 기술의 발달 등이야말로 루크레티우스가 제5권에 다루는 소주제들이기 때문이다. 제6권에서 다루는 '대기의 현상들'과 '지상의 현상들'은 오늘날 기상학과 지질학이 다루는 문제들을 포괄하고 있다. 천둥, 번개, 벼락, 구름의 형성을 다루고, 화산과 지진 현상까지도 빼놓지 않았다.

 

(루크레티우스가 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와 서로 깊은 교감을 주고 받은 책들. 책이 최초로 쓰여진 순서대로 쌓았다_나중에 보니 마키아벨리의 책이 너무 높이 올라갔다. 그 책은 무려 『그리스철학자열전』 바로 위에 놓여야 옳다. 비록 그 두 책 사이에 놓인 세월의 간극이 '천 년'도 넘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마키아벨리는 몽테뉴보다 앞선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셰익스피어도 이 책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은 모양이다. 『맥베스』의 2막 2장에는 셰익스피어가 이 책에서 그대로 인용한 싯구 일부가 등장한다. 맥베스의 '명대사' 가운데 하나가 바로 루크레티우스의 시에서 옮겨졌던 셈이다.)

 

이토록 방대한 내용들을 한 권의 시로 다 담아내다니, 루크레티우스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 책이 지닌 '엄청난 위험성'을 직감한 쪽이 '종교계'였음을 추정하기란 조금도 어렵지 않다. 결국 이 책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금서'로 지정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고, 언제부터인가 이 지구상에서 아예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어느 순간부터 이 책은 말 그대로 구전을 통해서나 희미하게 그 존재가 전해지는 '전설적인 신비의 책'이 되고 말았다. 어느 고서 수집광이 그 책을 먼지 속에서 다시 찾아낼 때까지는.

 

이 책이 얼마나 드라마틱한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세상의 빛을 다시 보게 되었는지 나는 자세히 모른다. 이 책의 재발견을 둘러싼 흥미로운 이야기가 책으로 나왔다는 사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여태까지도 스티븐 그린블랫이 쓴 『1417년, 근대의 탄생』이라는 책을 직접 사서 읽은 적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크레티우스의 책이 오늘날에 와서야 엄청난 재조명을 새로이 받게 된 건 결코 아니다. 켜켜이 쌓인 먼지 속에서 기나긴 세월 동안 은둔을 계속하던 이 책을 독일의 수도원에서 마침내 구출해 낸 포조의 노력 덕분에 1417년 이후로 수많은 사람들이 곧장 이 책에 매료되었으니 말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중세의 프랑스 철학자인 몽테뉴였다. 르네상스를 활짝 열어젖혔던 숱한 천재들, 가령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마키아벨리 또한 그런 인물들이었다. 고대 철학에 정통했던 쇼펜하우어와 니체가 이 책을 탐독했음은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루크레티우스가 남긴 장시는 현대인들이 읽기에는 자칫 딱딱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도 적지 않다. 또한 오늘날의 엄청나게 축적된 온갖 과학적 지식들에 비춰보면 어이없는 실소를 자아낼 만한 대목들도 아예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그의 시는 '사물의 본성을 탐구하려는 끈질긴 열정'과 더불어 여느 문학작품도 쉽사리 흉내내기 어려울 정도로 힘찬 문장들과 아름다운 표현들이 가득하다. 그토록 오래 전에 살았던 인물이 오로지 물질과 공간만으로 '우주의 근본 원리'를 구축하고 그걸 빼어난 시로 노래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로마 최고의 시인이었던 베르길리우스는 자신의 예술작품 속에 알게 모르게 스며든 '인생에 대해서 느끼는 기이한 우울감'을 좀처럼 숨기지 못했는데, 비극적이라기보다는 멜랑코리에 가까운 그 느낌으로부터 'lacrimae rerum(사물에 대한 눈물)'이라는 유명한 용어가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 시인이 남겼던 유명한 문장인 "사물의 원인을 아는 자는 행복하여라(felix qui potuit rerum cognoscere causas)"는 후세 사람들의 짐작으로는 아마도 루크레티우스를 향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고 한다. 루크레티우스를 읽는 매력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오로지 사물의 근본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끝없이 탐색에 몰두하는 놀라운 열정, 아무런 근거도 되지 못하는 신화에 대한 철저한 거부, 때로는 난해하고 투박하지만 오롯이 진실만을 전달하고자 하는 진정성 넘치는 시적 표현 등은 고대의 여느 다른 시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물질의 근원과 우주의 비밀'을 밝히기 위한 숱한 도구들을 구경조차 하기 어려웠던 까마득한 그 옛날에, 오로지 '관찰'과 '상식'과 '추론'에만 의지한 채 이토록 '지극히 현대적인 자연과학적 철학'을 예술작품으로 빚어냈다는 사실이 참으로 경이롭다.

 

오늘날 우상 숭배나 다름없을 만큼 맹목적인 종교로 변질된 기독교에 대해 격한 반감을 지니고 있었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월든』에서 '한 권의 책과 새로운 기원'에 대해 아주 함축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한 말을 남겨 놓았다. 아주 가끔씩 만나게 되는 '고대의 진귀한 책들'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게 되면 나는 어김없이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던 그 옛날의 현자(賢者)를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혹시나 이 책이 바로 그 책이 아닐까, 하면서.

 

 

 한 권의 책과 새로운 기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 권의 책을 읽고 자기 인생의 새로운 기원을 마련했던가! 우리의 기적들을 설명해주고 새로운 기적들을 계시해줄 책이 어쩌면 우리를 위하여 존재할 가능성은 크다. 지금 내가 말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어느 책에 표현되어 있을지 모른다. 우리를 당혹하게 하고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며 우리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문제와 똑같은 문제들이 일찍이 모든 현명한 사람들에게도 제기되었다. 한 문제도 빠짐없이 말이다. 그리고 이들 현인들은 저마다 이 질문들에 대해 해답을 제시했다. 자기 능력에 따라, 또 자기 고유의 언어와 생활 방식으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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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12-11 04: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책이 쌓인 순서가 시대순이었군요. oren님의 섬세한 자리 배치에 깊은 뜻이 있었다는걸 뒤늦게 알게 됩니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와 관련해서 「1417년 근대의 탄생」은 책을 구입해 놓고 아직 읽지 못했는데, oren님 덕분에 꺼내 놓게 됩니다^^:

oren 2017-12-11 09:42   좋아요 1 | URL
제가 루크레티우스라는 시인을 처음 알게 된 건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을 때였답니다. 몽테뉴가 얼마나 자주 그 시인의 이름과 싯귀를 인용하는지를 셀 수도 없을 정도였지요. 도대체 ‘루크레티우스‘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견딜수가 없었지만 그에 관해 자세히 알 도리가 없더군요. 제가 수상록을 처음 읽은 때가 1983년이었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그 흔한 인터넷조차 아예 없었으니까요. 34년 만에 루크레티우스가 쓴 책을 직접 읽고, 책탑까지 시대순으로 쌓고 나서 곰곰 생각해 보니 루크레티우스가 새삼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1417년, 근대의 탄생』은 저도 꼭 읽어보고 싶은 책입니다. 루크레티우스의 책을 찾아낸 인문학자 ‘포조 브라치올리니‘는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라는 책에서도 상세히 기술되어 있을 정도로 ‘고문서 수집가로서의 활약‘이 참으로 대단했던 인물이더군요. 이미 네이버 지식백과에도 등재되어 있을 정도고요.

nodiggety 2017-12-11 09: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스티븐 그린블랫의 책을 읽은 후 관심이 생겨 루크레티우스를 읽고 그 후 Epictetus의 철학에 관한 Penguin에서 나온 The Art of Happiness을 읽었어요. 개인적으로 Swerve (1417년 근대의 탄생)도 The Art of Happiness도 루크레티우스의 작품에 비해 좀 미흡한 점이 많아서 관심 있으면 읽어볼만하지만 퓰리처상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oren 2017-12-11 09:54   좋아요 0 | URL
스티븐 그린블랫의 책이 나온 덕분에 루크레티우스가 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가 예전보다 훨씬 더 높은 관심을 끌게 된 분위기도 있는 듯합니다. 저도 이번에 루크레티우스의 책을 읽고 나서 『그리스철학자열전』에 담긴 「에피쿠로스 편」을 다시 읽어 봤지만, 루크레티우스의 탁월한 시적 표현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더군요.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그 책에서 ‘에피쿠로스‘가 수많은 ‘그리스 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많은 분량으로 다뤄지고 있다는 점이더군요. 『그리스철학자열전』에 담긴 인물들이 무려 73명인데 말이지요. 플라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제논,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디오게네스, 데모크리토스 등등 그 숱한 걸출한 철학자들을 다 제쳐두고 에피쿠로스에게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한 점이 고맙기까지 하더군요.

2017-12-11 17: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12 14:4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