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인 그는 너무나 많은 재능을 지닌 것 같다. 그 재능은 그에게 묶여져 있는 무서운 기관차 같아서 그는 거기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도, 그것을 멈추게 할 수도 없다. 그는 나를 압도한다! 그토록 왕성한 창작력과 다채로운 재능을 지닌 한 예술가에 대해서, 또한 한 인간으로서 그가 가진 복합적인 성격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할 방법이 없다."

 - 랄프 왈도 에머슨

 

 * * *

 

아무리 탁월한 작가라고 하더라도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읽기 전까지는 대개 작가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막연한 거리감을 도저히 좁힐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설사 그 사람의 사진만 보더라도 곧장 그를 알아볼 수 있고, 그가 남긴 대표작 이름까지 여럿 알고 있다고 해도 사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내겐 찰스 디킨스라는 작가도 그런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그에 대해 내가 얼마나 무지했던지 심지어 나는 구두쇠 영감 스크루지가 등장하는 그 유명한 『크리스마스 캐럴』조차도 찰스 디킨스와 연결지어 생각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만큼 이 인물에 대해서는 도무지 아는 게 없었다고나 할까.

 

도대체 어떤 연유로 찰스 디킨스를 이토록 새까맣게 모르고 지내왔을까. 가만 생각해 보니 뚜렷하게 내세울 만한 이유도 별로 없다. 굳이 억지로 변명을 하자면 이렇다. 그의 작품 제목이 당최 별로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코퍼필드? 올리버 트위스트? 도무지 무슨 이야기가 거기에 담겨 있다는 거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고리오 영감』이라든가 『보바리 부인』이라면 또 모를까. 그런 책들을 먼저 읽으면 읽었지 아무런 실마리조차 잡히지 않는 낯선 제목의 소설부터 선뜻 집어들 생각은 별로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하찮은 이유 하나만으로도 찰스 디킨스는 내게서 까마득히 밀려나 있었다.

 

나도 언젠가는 찰스 디킨스를 한번쯤 만나 봐야지 하는 마음을 처음으로 품었던 건 아마도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을 때였지 싶다. 조이스는 그 엄청나게 두꺼운 소설 속에서 수많은 작가들과 작품 속 인물들을 단 한 줄로 간단히 처리하는 매우 특출난 솜씨를 유감없이 드러냈지만 유독 몇몇 작가들에 대해서는 그와는 정반대로 아주 융숭한 대접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인물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작가는 단연 셰익스피어였지만 찰스 디킨스에 대한 대우도 그리 나쁘진 않았다. 왜냐하면 제임스 조이스는 그 책에서 세르반테스의『돈키호테』,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등은 물론이고 마크 트웨인이나 빅토르 위고와 같은 숱한 걸출한 작가와 작품들에 대해서조차 예외없이 '단 한 번' 스쳐 지나가듯 다룬 데 비해 찰스 디킨스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거듭 끌어들였고, 그의 작품 또한 『데이비드 코퍼필드』뿐만 아니라, 『두 도시 이야기』, 『올리버 트위스트』, 『픽위크 페이퍼즈』까지 두루 폭넓게 인유할 만큼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 보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다시 한번 찰스 디킨스를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헤럴드 블룸의 『교양인의 책읽기』를 만났을 때였다. 이 해박하고도 노련한 문학 비평가가 찰스 디킨스를 외면할 이유가 어디에 있었겠는가. 하지만 디킨스에 대한 나의 관심이 급속도로 고조된 건 그 작가에 대한 헤럴드 블룸의 도드라진 애정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런 사정까지 알고 나서도 한사코 디킨스를 계속 외면하기란 그리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오래된 작품들을 다시 읽는 일은 가장 높은 수준의 즐거움

 

윌리엄 해즐릿이 말한 것처럼 오래된 작품들을 다시 읽는 일은 가장 높은 수준의 즐거움이면서 독자 자신의 열망 깊은 곳에서 새로운 가르침을 준다. 나는 디킨스의 『픽위크 페이퍼즈』를 일 년에 두 번씩 읽곤 했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권의 책이 닳아 없어지기도 했다. 그게 도피라면 난 기꺼이 그 도피에 참여하리라. 비록 『픽위크 페이퍼즈』에 등장하는 누구도 내게 동일화의 즐거움을 주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읽기』

 

그런데 헤럴드 블룸의 감동적인 설명을 듣고 나서도 디킨스의 작품들은 여전히 내 마음에 선뜻 와닿지가 않았다. 픽위크 페이퍼즈?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거기에 담겨 있다는 거지? 책의 제목들은 여전히 아리송하기만 하고, 막연한 궁금증만 더할 뿐이었다. 디킨스와의 거리 또한 조금도 좁혀지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많은 비평가들은 『황량한 집』을 첫 손가락으로 꼽는다

 

디킨스의 애독자들은 『위대한 유산』을 그의 소설 중 제1로 치지는 않는다. 대중적 인기로 치자면 『올리버 트위스트』보다 뒤진다. 디킨스 본인은 『코퍼필드』를 더 우위에 두었지만, 나를 포함해서 많은 비평가들은 『황량한 집』을 첫 손가락으로 꼽는다.

 

그러나 『두 도시 이야기』처럼 『위대한 유산』은 대단히 대중적이라는 면에서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과 수십 편의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에 비견될 만하다. 왜냐하면 영화나 텔레비전이 아닌 모습으로 이 정보화 시대에 살아남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햄릿』과 『맥베드』를 읽듯이 우리는 『위대한 유산』을 끊임없이 읽을 것이다.

 

도대체 어느 작품부터 읽어야 좋을지조차 모르는 나같은 디킨스 문외한에게 이런 설명은 그리 유익한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저 황량한 느낌만 더할 뿐이었다. 도대체 어느 작품이 최고라는 거지?『위대한 유산』은 아닌 듯하고, 그럼 『올리버 트위스트』? 디킨스 기준으로는 『코퍼필드』? 많은 비평가들은 『황량한 집』? 계속 헷갈리기만 했다. 그러나 어쨌든 『위대한 유산』은 '여러 면에서' 읽을 만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싶었다.

 

이렇게 해서 내가 처음으로 읽은 찰스 디킨스의 작품은 『위대한 유산』이 되었고, 그 작품 하나만 읽고도 나는 찰스 디킨스에 홀딱 빠져들고 말았다. 어느새 나는 『올리버 트위스트』, 『어려운 시절』, 『데이비드 코퍼필드』까지 한꺼번에 사들이고 나서 『황량한 집』을 마저 사들이지 못한 걸 살짝 후회할 정도가 되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국내엔 『황폐한 집』은 진작에 나와 있었어도 『황량한 집』은 아예 나온 적조차 없었다. 이런 황당함이라니.

 

 

 (『위대한 유산』은 1,2권 합해서 911족,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무려 1,120쪽에 달하지만 '지루해서 읽기 힘든 소설'과는 아주 거리가 먼 작품들이니만큼 '방대한 분량' 때문에 겁을 먹을 필요는 조금도 없을 듯하다.)

 

『위대한 유산』을 읽는 짧은 시간(?) 동안에 참으로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휙휙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어릴 때 책 속으로 마구 빠져들었던 황홀한 느낌까지도 아주 오랜만에 다시 맛봤다. 디킨스의 작품이 이토록 재미있을 줄은 차마 몰랐다. 그가 쓴 문장과 표현들은 막히는 데가 전혀 없었다. 금세 셰익스피어를 떠올릴 만큼 그의 문장이 아주 생기 넘치고 자유분방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어떤 인물이나 광경이나 심리를 묘사하든 재치와 유머와 위트가 가득했다. 『위대한 유산』에 '나'로 등장하는 주인공 핍이 어린 시절에 겪은 아주 단편적인 이야기조차도 어쩌면 이토록 생생하면서도 흥미진진하게 다가오는지 연신 감탄을 거듭하며 읽어 내려갔다.

 

내가 아주 가금씩이나마 책을 읽다 말고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면서 한번쯤 상상했던 일 가운데 하나가 '언젠가 나도 작가가 되어 소설을 쓰게 된다면' 쯤으로 시작되는 몹시 유쾌한 상상이었다고 말한다면 어느 누가 얼마만큼이나 믿어줄까 싶지만, 그럴 때마다 내가 책으로 나올 가망성이 눈꼽만큼도 없는 그 소설 속에 한번쯤 꼭 담아봤으면 하는 심정으로 끄적거렸던 '번개처럼 스치는 아스라한 옛 추억들'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그렇게도 달아날까 두려워 몸을 떨면서 애써 붙잡으려 했던 '너무나 소중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바로 디킨스의『위대한 유산』이라는 작품 곳곳에 잔뜩 스며 있었다. 정말로 놀라웠다. 내가 그런 구절들을 읽을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고 몇몇 대목에서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전율할 수밖에 없었던 건 참으로 놀라운 독서 경험이었다.

 

디킨스가 펼치는 이야기는 너무나 자연스러워 마치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누군가가 우리에게 다시 들려주는 것처럼 아주 생생하게 들린다. 때로는 너무나 놀라운 스토리가 박진감 넘치는 추리소설처럼 펼쳐지기 때문에 마치 어린 시절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던 '끝내주는 만화'를 보는 느낌도 자주 들었다. 이처럼 읽는 재미가 샘솟듯 콸콸 흐르는 소설이 도대체 얼마 만이란 말인가. 이름난 서양 문학 고전들 가운데 과연 이만큼 재미있게 읽히는 소설이 있기나 할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저 딱딱하기만 한 주제들, 가령 '종교'와 '사상'과 '정치'와 '철학'까지 다루는 일부 작가들의 깊이있는 소설들, 단적인 예를 들자면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나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등에 비하면 『위대한 유산』은 얼마나 판이하게 다른가 싶은 생각도 자주 들었다. 왜 진작에 이런 재미있는 소설부터 읽지 못하고 애써 딱딱한 소설들을 읽느라 괜한 생고생을 했던가 싶은 생각 때문에 잠시나마 그런 작품들을 읽은 시간들이 원망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대략 150년쯤 전에 영국에서 쓰여진 소설이 이토록 내 마음속 깊이 숨겨져 있었던 숱한 추억들을 끊임없이 불러 일으킬 줄은 차마 몰랐다. 어린 주인공 핍이 시골에서 겪는 온갖 작은 에피소드들 틈바구니로 내가 실제로 겪었던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끊임없이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에 소설에서 눈을 떼기가 힘들 정도였다. 가난하고 어린 소년이었던 핍이 외딴 교회 묘지에서 우연히 맞닥뜨린 탈옥수를 돕는 과정에서나, 읍내에 사는 소문난 부자인 미스 헤비셤의 집을 방문하면서 겪는 온갖 사소한 장면들까지도 내게는 '또다른 나만의 옛 추억'을 끊임없이 불러내는 교묘한 실마리나 열쇠구멍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만큼 디킨스의 문장들은 어느 하나 강력하지 않은 게 없었다.

 

일자무식이던 시골 소년 핍이 미스 헤비셤의 저택에서 양녀처럼 살고 있는 도도하기 짝이 없는 또래 소녀인 예쁜 에스텔러를 만난 이후에 겪게 되는 '심리적 동요'는 어린 핍을 사정없이 뒤흔든다. 그게 결국은 '촌스럽다는 느낌으로부터 벗어나고픈 강렬한 열망'임을 깨달은 핍은 글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수소문한 끝에 읍내까지 먼 길을 오가면서 알파벳을 열심히 배운다. 이른바 '신사가 되고 싶은 열망'의 아주 작은 출발이었다. 대장간에서 하루 종일 쇳덩어리를 두드리며 연장을 만드는 일에 매달리는 착한 매형은 그런 핍을 얼른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힘껏 돕겠다고 거들지만 정작 자신이 그를 도울 능력이 없어 도리어 자책할 뿐이다.(나도 어릴 때 시골에서 자랄 때 '대장간에서 시뻘겋게 달궈진 쇳덩어리를 힘차게 두드리는 대장장이를 본 적이 있었다! 한적한 시골에선 그만큼 훌륭한 구경거리도 드물었다!)

 

장래의 희망이라고 해봐야 고작 매형으로부터 대장간 일을 부지런히 배워서 하루 빨리 매형을 도와줄 생각뿐일 정도로 소박하기만 한 어린 핍은 읍내 최고의 부자인 미스 헤비셤의 집을 들락거리면서 차츰 '새로운 세상'을 엿보게 되지만, 정작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놀라운 사건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엉뚱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혈육이라고는 생활력이 강하지만 억세고 사납기만 한 누나와 착한 매형이 전부인 어린 핍에게 '막대한 기대'를 품어도 좋을 만한 후원자의 대리인이 갑자기 시골에 찾아온 것이다. 후원자의 신분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고, '유산 상속'이 언제부터 개시될 것인지는 오로지 후원자의 판단에 달린 상태였다. 장차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을 때까지 핍에게 주어진 최우선 과제는 '유산 상속을 앞둔 귀한 신분'에 충분히 어울릴 만한 '신사 교육'부터 받는 일이었다.

 

가난한 어린 핍이 하루 아침에 막대한 유산 상속자로 돌변하게 되자 어린 핍을 핀잔 주거나 구박하기 바빴던 온갖 주위 사람들이 태도를 돌변하여 너나없이 칭송하기 바쁘고, 심지어 적잖은 나이 차이가 있는 매형까지도 핍을 '나으리'로 부르는 지경에 이른다. 어린 핍에겐 자신이 살던 마을과 읍내가 어느새 초라하게만 느껴지고, 대도시 런던으로 떠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새 양복까지 맞춰 입는다. '행복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더없이 소중한 존재인 매형 조와의 이별조차 대수롭잖게 여길 정도로 핍의 마음은 변한다. 착하디 착한 매형은 그런 핍에게조차 무한한 애정으로 감싸며 '기약없는 기나긴 이별'에 눈물을 흘리면서 오로지 핍의 성공만을 간절히 빌어준다.

 

고향을 떠나 런던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한 핍은 차츰 새로운 친구들을 여럿 사귀고 사교클럽을 드나들 정도로 변모하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행복한 시절을 보냈던 '어린 시절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과는 점점 멀어지고 만다. 어느덧 핍은 조금씩 분수가 넘을 정도로 사치에 빠져들면서 이내 빚까지 늘어나는 지경에 이른다. 어느덧 성년을 넘긴 나이에 접어든 핍은 '익명의 후원자'가 결국 미스 헤비셤일 거라고 확신하지만 그런 확신에 대해서는 어떤 근거도 찾지 못한 채 막연히 추측할 뿐이다. 후원자의 대리인이자 변호사인 재거스는 미스 헤비셤의 법률 대리인을 겸하지만 정작 '후원자'에 대해서는 어떤 질문도 허용치 않는다.

 

세월이 흘러 몰라보게 아름다운 아가씨로 성장한 에스텔러는 언제나 핍의 마음 한복판을 가득 차지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핍에게 냉랭하기만 하다. 언젠가부터 에스텔러는 런던으로 옮겨와 살지만 핍과 만나더라도 그의 연인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에스텔러를 향한 간절한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결코 그녀의 본심 때문이 아니라 '결혼식 당일 아침에 파혼을 당한 충격으로 평생 독신으로 지내는' 미스 헤비셤의 원한 서린 복수심 때문이라고 여긴 핍은 틈나는 대로 미스 헤비셤의 저택을 방문하고, 혼자서는 결코 풀 수 없는 그 '단단한 매듭'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 헤매지만 매번 헛수고에 그칠 뿐이다.

 

그러던 어느날 주인공 핍에게 매그위치라는 혐오스런 인물이 찾아 오는데... 자세히 살펴 보니 그 흉악하게 생긴 인물은 어린 시절 핍이 온갖 위험을 무릎쓰고 부엌에 남아 있는 음식을 누나 몰래 잔뜩 싸들고 늪지대까지 몰래 찾아가 도와줬던 바로 그 '굶주린 탈옥수'가 아닌가. 그 이후로 전개되는 놀라운 이야기들은 정말 숨가쁜 긴장과 짜릿한 흥분과 놀라운 반전의 연속으로 전개된다. 마치 어린 시절에 팔딱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읽었던 '셜록 홈즈 시리즈'를 다시 떠올릴 정도였다. 디킨스의 이야기 솜씨가 이토록 '대중적'이면서도, 각각의 인물들에 대한 성격과 행동 묘사에서 드러나는 '인간성에 대한 놀라운 통찰들'이 두루 함께 어우러질 수 있다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하루 아침에 거대한 유산 상속자로 바뀌어 런던으로 훌쩍 떠난 이후로도 핍은 언제나 '조와 함께 보냈던 마냥 순수하고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들'을 결코 잊지 못하지만 그저 짧은 순간에만 그러할 뿐이다. 정작 자신의 필요에 따라 고향에 들를 기회가 가끔씩 생기더라도 핍은 읍내에서 머물 뿐 결코 매형네 집까지 찾지는 않는다. 이젠 대장장이로 일하는 매형이 그리 자랑스럽게 여겨지지 않을 뿐더러 자신의 신분과도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핍이 줄곧 '은혜를 모르고 배은망덕하게' 런던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조 가저리의 핍을 향한 고결한 우정은 결코 변치 않는다. 결국 먼 훗날 핍이 급격하게 몰락하고 심신마저 피폐해진 끝에 중병을 앓을 때가 되어서야 핍은 다시금 조의 따스한 보살핌을 받고 구제된다. 몹시 휘어지고 부서진 채 마치 먼 여행에서 맨발로 돌아오는 처량한 나그네처럼 딱한 신세에 빠진 핍을 기꺼이 맞아 준 사람도 조밖에 없었다. 핍이 조와 눈물겹게 재회하는 장면은 안타깝기 보다는 차라리 숭고하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핍이 고향을 떠난 이후로 아주 오랫동안 옛시절을 잊고 지내왔다고 하더라도 진정으로 핍이 가슴 깊이 간직했던 '소중한 가치'는 바로 거기서 다시 복원되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 맺어진 끈끈하고 순박하면서도 한없이 따스한 우정은 마크 트웨인의 소설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 나오는 헉과 짐의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우정과도 빼닮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디킨스의 풍요로운 작품 세계를 어찌 한 권의 장편소설로 다 헤아릴 수 있을까마는, 그가 풀어내는 이야기 솜씨가 얼마만큼 놀랍고 흥미로운지, 또한 등장 인물 각각에 대한 묘사가 얼마나 생생하면서도 위트와 재기가 넘치는 것인지는 『위대한 유산』만으로도 별로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 앞에서도 미리 살펴봤지만 이 작품이 찰스 디킨스의 '제1의' 작품이 아니라는 평가도 있는 만큼 어서 빨리 디킨스의 다른 작품들로 달려갈 마음도 굴뚝같다.

 

내가 두 번째로 읽고픈 디킨스의 작품은 아무래도 『데이비드 코퍼필드』가 되지 싶은데(아차, 이 글을 올릴까 말까 주저하는 사이에 벌써 이 책을 110쪽 넘게 읽었다.), 책을 구입하고 보니 이 소설의 분량이 그리 만만치 않다. 작품해설까지 포함하면 무려 1,118쪽에 이르는데, 책의 말미에 딸린 104쪽 분량의 「찰스 디킨스의 생애와 문학」를 먼저 읽어 보니 작가에 대한 기대가 더욱 부풀어 오른다.

 

디킨스는 몹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로도 유명하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큰 빚을 지는 바람에 학교조차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가족들은 점점 더 런던 외곽으로 밀려나 지저분하고 헐벗은 아이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에서 비참한 생활을 이어갔다. 12세부터는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쥐들이 우글거리는 구두약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채무 때문에 수감되는 바람에 다섯 가족들이 다함께 감옥에서 동거하며 지낼 만큼 형편이 어려웠다. 따로 떨어져 나와 공장에서 일하던 디킨스는 일요일만 되면 6마일을 걸어 감옥에 들어가 부모님과 형제자매들과 만나 시름을 달래며 하루를 보냈다.

 

아버지가 감옥에서 풀려나고 잠시 생활이 나아지자 디킨스는 2년 정도 학교를 다녔다. 그 뒤 다시 가족들과 아는 사이였던 어느 변호사 사무실에서 말단 사무원으로 일하게 되고, 18세가 되면서 독학으로 속기를 배운 덕분에 재판소에서 자유계약 속기사로 일하고, 20세에 드디어 국회 신문기자석에 저널리스트로 데뷔하기에 이른다. 이듬해 의회의 휴회 기간에 처음으로 잡지에 자신의 이야기가 실리자 그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린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홀까지 걸어가서 안에 들어가 30분쯤 그곳에 있었다. 넘치는 기쁨과 자랑스러움으로 눈에 눈물이 글썽해져서 길거리에는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23세의 나이로 완전히 자립하여 유능한 기자로 높은 평판을 얻은 그는 잡지에 고정 연재물을 기고하게 되면서 차츰 전문적인 작가의 길로 나서기 시작하는데, 24세에 발표한 『피크윅 페이퍼즈』와 25세에 발표한 『올리버 트위스트』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디킨스는 일찌기 25세의 나이에 '불꽃처럼' 드높은 명성을 향해서 불쑥 솟아오른 끝에 그 인기를 한평생 동안 누리게 된다. 인물을 창조하는 작가의 비범한 재능을 알아본 비평가들은 이내 그를 셰익스피어나 월터 스콧 경과 같은 대작가에 비견하게 되었다.

 

디킨스는 이제는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런던 사교계에서 추앙 받았고, 특권 신사들의 클럽, 즉 개릭 클럽과 애서니엄 클럽 회원이 되어(찰스 다윈과 동시에 애서니엄 회원이 되었다), 공공장소에서 연설을 하는 일도 많아졌다. 1841년 에든버러 시민들이 디킨스에게 경의를 표하고 만찬회를 열어, 그를 에든버러 명예시민으로 추대했다 ㅡ 20대 청년에게 이것은 '더없이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디킨스는 그 일을 돌이키며, '내가 처음으로 받은 공식 표창이어서 아주 감격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는 그 무렵 문단 명사들과 만나 우정을 나누었다. …… 디킨스의 '품위 없는' 큰 웃음소리와 한껏 멋을 부린 차림새에 이맛살을 찌푸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의 날카로운 지성을 높이 평가한 사람은 더 많았다. 역사가 토마스 칼라일은 그를 처음 보고 나서 '섬세하고 몸집이 작은 사내'라고 썼다. '더없이 재주 많은 얼굴을 하고 있다. …… 조용하고, 예민해 보이는 작은 사내로, 자신의 본질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본질도 매우 잘 알고 있는 듯이 보인다.'(1042쪽)

 

 - 『데이비드 코퍼필드』, <찰스 디킨스의 생애와 문학> 중에서

 

이후로 디킨스가 어떤 작품들로 얼마나 더 많은 독자들을 더욱 매료시켰고, 당대를 주름잡던 수많은 작가들로부터 얼마나 훌륭한 평가를 더 얻게 되었는지, 혹은 그의 작품들이 지닌 '문학적 가치'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어떤 변천을 겪었는지를 더 언급하는 건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굳이 여기서 그의 문학과 삶을 평가하는 빼놓지 말아야 할 사실이 더 남아 있다면 그건 바로 그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일 것이다.

 

내가 『위대한 유산』다음으로 읽고 싶은 있는 작품은 『데이비드 코퍼필드』인데, 여러 다른 책들에서 이 소설이 언급될 때마다 나중에 꼭 한번 읽어 보리라 마음먹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작가 스스로도 '가장 사랑하는 내 아이'라고 부를 만큼 사랑했고, 서머싯 몸이 '세계 10대 소설'로 꼽았을 정도로 높은 평판을 얻었지만 '방대한 분량' 때문인지 명성만큼 그리 많이 읽히지는 않는 듯하다.

 

오랫동안 그저 작가의 이름과 작품의 제목만 알았던 책들을 감명깊게 읽고 나면 괜히 뿌듯한 느낌마저 든다. 아직도 많은 작가와 작품들이 내게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지만, 『위대한 유산』을 통해 뒤늦게나마 찰스 디킨스라는 탁월한 작가를 만난 것만 하더라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앞으로 여러 날을 그의 작품과 함께 울고 웃으며 지낼 수 있으리라는 상상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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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3-10 0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위대한 유산」의 영어 원제가 왜 「Great Expectation」인지 oren님 리뷰로 알게 되었습니다^^:)

oren 2018-03-10 13:10   좋아요 1 | URL
작품의 원제인 Great Expectation의 정확한 뜻은 ‘큰 재산을 얻거나 물려받을 가능성이나 기대‘일 테죠. 그래서 ‘위대한 유산‘이라는 번역 제목은 원래의 뜻을 정확히 옮긴 것이라고 할 수 없는데, 이걸 ‘막대한 기대‘ 또는 ‘막대한 유산‘으로 번역하더라도 원작이 지닌 제목의 뜻이나 뉘앙스와는 너무 달라져 곤란한 점이 있겠더라구요. 책을 다 읽어본 뒤라야 저렇게 번역한 역자의 고충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겠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