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세트 - 전2권 열린책들 세계문학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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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

(지난 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중에서

 

움베르토 에코(1932∼2016)

 

움베르토 에코는 소설가이기 이전에 기호학자이며 철학자, 역사학자, 미학자였다. 이만큼 특이한 이력을 지난 그가 최초로 쓴 소설이 1980년에 출판된 『장미의 이름』이었고, 이 책은 이내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여기에 크게 고무된 에코는 『바우돌리노』, 『전날의 섬』, 『푸코의 진자』, 『프라하의 묘지』 등을 연이어 쏟아냈고, 소설 말고도 『미의 역사』, 『추의 역사』, 『궁극의 리스트』 등 많은 책들을 써냈다. 그는 세계 각국의 여러 언어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21세기 최고의 석학이라는 칭송을 받을 정도로 다양한 분야에 걸쳐 엄청난 지식을 쌓은 인물이었다.

 

『장미의 이름』은 움베르토 에코를 일약 세계적인 소설가의 반열에 불쑥 올려 놓은 작품이다. 도대체 그 책에 무슨 내용이 담겼길래 전세계의 독자들이 그토록 이 작품에 환호했을까. 장미의 이름들로 무슨 마법을 부렸길래? 뜻밖에도 『장미의 이름』에는 장미에 관한 이야기가 아주 짧게 비유적으로 잠깐 등장할 뿐이다. 쉽게 말해서 장미의 이름 속엔 그 어떤 장미의 이름조차 결코 등장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정말 뜻밖에도 이 책 속엔 장미가 아닌 기묘한 책 한 권이 등장한다. '장미의 이름' 속에 아침에 피었다가 이내 시들고 마는 장미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결코 시들지 않는 희귀한 책이 한 권 등장한다는 사실로부터 실로 수많은 상상이 자연스레 뒤따른다.

 

게다가 그 한 권의 책이 참으로 절묘하다. 가령, 그 책이 실제로 존재할 가능성은 있지만 아직까지 그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책이라면? 또한 발견된 적도 없는 그 책이 이미 금서로 지정할 정도로 위험한 책이라면? 더군다나 그 책이 중세의 어느 철옹성처럼 당당한 수도원의 미궁 같은 장서관에 깊숙히 숨겨져 있다면? 더군다나 그 책을 둘러싼 수도원 내부의 갈등 때문에 의문의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면? 더군다나 그 연쇄 살인 사건이 《요한의 묵시록》에 따라 7일 동안 단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착착 진행된다면?

 

어쨌든 이 책은 『장미의 이름』이라는 제목과는 사뭇 동떨어진 이야기를 담은 책일 수밖에 없다. 지난 날의 장미는 얼마나 빨리 시들고 마는가. 지난 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그러나 한 권의 책은 얼마나 끈질기게 오래 살아 남아 수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가. 비록 그 책이 그토록 연약하고 가냘픈 종위 위에 쓰여졌음에도 말이다. 작가는 서문에서 이 작품이 책에 얽힌 이야기임을 새삼 강조한다. 그것도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던 14세기에 실존했던 어느 인물의 입을 빌어서.

 

누항(陋巷)의 일상 잡사가 아닌, 책에 얽힌 이야기여서, 이 책을 읽고 나면 저 모방의 도사 아켐피스의 다음과 같은 명언이 한숨에 섞여 나올지도 모르겠다.

 

In omnibus requiem quaesivi, et nusquam inveni nisi in angulo cum libro(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이쯤되면 이 작품에 담긴 책이 얼마나 흥미로울지는 거의 보장된 셈이나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그 책이 인류가 낳은 가장 위대한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임에랴. 그런데 움베르토 에코는 이 작품의 시공간적 배경을 중세의 요새 같은 수도원에 단단히 고정시켜 놓은 채, 장서관의 희귀한 금서를 둘러싼 갈등 때문에 빚어진 연쇄 살인 사건을 당대의 수도원이 품고 있음직한 온갖 음험한 분위기와 상징들과 함께 절묘하게 버무려 놓음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어느새 까마득한 과거의 그 낯선 시공간 속에서 옴짝달싹 못하도록 옭아맨다.

 

중세 유럽 수도원이 지니고 있는 음험한 상징들은 무엇일까. 그곳은 단지 탈속한 수도사들이 죽어서조차 거기서 뼈를 묻어야만 하는 영구히 속박된 기도원으로만 기능하지는 않았다. 그곳은 대학을 대신해서 인류의 지혜가 보존되고 전승되는 지식의 요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교황으로 대표되는 교권 옹호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는 정신적 · 물질적 토대였고, 수도사들의 온갖 인간적 번민과 고뇌가 교차하는 생생한 삶의 현장이기도 했다. 또한 당시의 수도원은 '감히 하느님 말씀을 지키는 성채의 표징'으로 성별(聖別)될 만한 어마어마한 외관을 자랑하고 있었다.

 

산허리로 감겨드는 가파른 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나는 수도원을 보았다. 그러고는 놀라고 말았다. 기독교 세계에서 흔히 보아 왔던, 수도원을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는 벽 때문에 놀란 것이 아니라 그 벽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엄청나게 큰 건물에 놀란 것이었다. 뒤에 알았지만 그 건물은 바로 수도원의 본관이었다. 이 본관은 8각 기둥 건물이었지만, 멀리서는 4각 기둥 건물(성도의 위엄과 금성철벽을 그대로 나타내 보이는 가장 완벽한 형태)로 보였다. 남쪽은 수도원이 앉은 고원과 닿아 있었고, 북쪽은 산의 가파른 사면에서 솟은 듯이 불겨져 있었다. 아래쪽에서 본 광경도 소개해야겠다. 아래쪽에서 보면 가파른 석벽이 하늘에 닿을 듯이 솟아 있는데, 색깔이나 재질이 한결같은 이 석벽의 정점은 그대로 탑과 관망대(하늘과 땅을 두루 아는 대가의 작품임에 분명한)였다. …… 크기나 형태로 보아 본관은 뒷날 내가 이탈리아 반도 남부에서 보았던 카스텔 우르시노, 카스텔 데 몬테와 흡사했다. 그러나 그 범접하기 어렵게 하는 위용이나, 거기 다가가는 행자에게 불러일으키는 위구심(危懼心)으로 말하면, 후일에 내가 보게 되는 어떤 수도원이나 성채도 이와 같지 못했다.

 

 

소설의 시간적인 배경이 때마침 1327년 11월이라는 사실은 교권과 속권의 권력 갈등이 정점으로 치달았던 저 유명한 <아비뇽의 유수>와 직접 연결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교황인 요한 22세는 당연히(!) 프랑스 남부지방 소도시인 아비뇽에 있는 교황청에 머물고 있었으며, 당시의 황제인 루트비히와는 그리스도의 청빈 논쟁 등을 빌미로 격렬하게 대립했다. 급기야 교황 요한은 루트비히 황제를 파문하기에 이르렀고, 황제는 교황을 배교자(背敎者)로 비방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교황과 황제 사이에서 벌어졌던 극렬한 권력 다툼은 소위 <프란체스코회 청빈 논쟁>으로 번졌고, 수많은 카톨릭의 신학자와 사제들이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 싸움에 휘말려들었다. 작가는 바로 이러한 시대 배경을 소설의 시간적인 배경으로 골라잡은 것이다.

 

1322년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황제는 정적(政敵)이었던 프리드리히를 거세했다. 황제가 둘일 때보다는 하나 있을 때를 더욱 두려워한 교황 요한은 승리자인 루트비히 황제를 파문했다. 우리 황제는 자신을 파문한 교황을 배교자(背敎者)로 비방했다. 바로 이 해에 프란체스코 참사회가 페루자에서 소집되었고 총회장이었던 체세나의 미켈레(1270∼1342)는 엄격주의파의 절충안을 받아들이고, 신앙과 교리에 관련된 문제로서의 그리스도의 가난에 대해, 그리스도가 사도들과 더불어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usus facti(사용권, 이용권)에 의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교단의 가치와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이 귀중한 헌장은, 교황의 비위를 몹시 상하게 했다. 이는 교회의 우두머리로서, 주교를 임명하는 황제의 권리를 부인하고, 교황이 황제에게 권한을 위임해야 한다고 했던 교황 자신의 주장에 위배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요한 22세는 1323년 회칙(回勅) <쿰 인테르 논눌로스>를 통하여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선언을 묵살해 버렸다.(33∼34쪽)

 

마침 이럴 때 소설의 주무대인 북부 이탈리아의 베네딕트 수도원에서는 교황과 황제의 첨예한 갈등을 조정하기 위한 고위급 실무회담이 열린다. 이 회담에 참석하는 주요 인물들인 카잘레 사람 우베르티노, 체세나의 미켈레, 베르나르 기 등은 모두 당시 카톨릭 세계를 대표하던 실존인물들이다. 이들이 황제와 교황을 대신해서 '그리스도의 청빈'과 '이단 논쟁'을 둘러싸고 벌이는 불꽃 튀는 논쟁은 그 자체만으로도 더없이 흥미롭다. 그런데 이들이 격렬하게 맞붙어 자신들의 논리를 치열하게 전개하는 와중에도 연쇄 살인 사건은 계속 진행되고, 이단 조사관을 지낸 양 진영의 고위급 핵심 멤버들은 이 살인 사건조차도 자신들의 영역 확대를 위한 싸움으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난 배경을 파고들수록 의혹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공간은 뜻밖에도 본관에 있는 장서관으로 모아진다. 연쇄 살인 사건의 희생자들이 한결같이 장서관의 사서나 보조 사서 혹은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황제의 특명을 받고 수도원에서 열리는 실무 회담에 파견된 윌리엄 수도사는 그 수도원에 도착하던 당일부터 비범한 추리력을 발휘하면서 단숨에 수도원장의 신임을 받고 살인 사건의 조사를 떠맡는다.

 

이 작품이 흥미로운 점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유난히 실존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14세기 초반의 교황파와 황제파의 권력 다툼을 조정하기 위한 고위급 실무회담에 어찌 당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불려나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위 '프란체스코회 청빈 논쟁'을 둘러싼 치열한 논리 싸움에서 황제파에 가담한 인물들은 체세나의 미켈레(1270∼1342), 오컴의 윌리엄(1280∼1349), 카잘레의 우베르티노(1259년~1329년) 등이 대표적이었고, 교황파를 대표한 인물들은 중세의 악명 높은 이단 심문관이었던 베르나르 기가 주축이었다.

 

이들이 주고 받는 날선 논쟁들은 중세의 이단 논쟁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양 진영은 '그리스도의 청빈'을 본받아 교회의 재산권 소유 자체를 부정하는 황제파와 그에 반대하는 교황파로 나뉘어 극렬하게 대립했고, 교황파 인물들은 마침내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이단으로 몰고 간다. 그들이 논리 싸움에서 밀리는 순간 상대방에 의해 순식간에 이단으로 내몰리고 결국은 화형장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들 사이의 타협점은 좀체로 찾기 어려웠고, 소설 속에서도 그 회담은 결렬된다. 먹을 게 부족해서 밤마다 수도원을 들락거리며 몸을 팔며 주방의 식재료를 얻어가던 애꿎은 사하촌 처녀 하나만을 희생물로 삼은 채.

 

이 작품이 책에 관한 이야기인 만큼 실존하는 많은 책들이 수많은 등장인물만큼이나 자주 등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가운데 주인공 격인 책은 단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다. 『시학』에는 고대 그리스 비극과 서사시에 대해서는 자세하고 충분한 설명이 담겨 있지만 희극에 대해서는 '다음에 논하기로 하자'는 말만 나올 뿐인데, 이를 바탕으로 많은 전문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희극에 대해 쓴 『시학 2편』이 망실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움베르토 에코는 바로 이 점을 파고들어 『장미의 이름』속에 '희극을 다룬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편'을 '책 속의 책'이자 수도원 연쇄 살인 사건의 핵심적인 사물로 재등장시키고 있다. 망실된 줄로만 알았던 바로 그 책이 이탈리아 북부의 베네딕트 수도원의 미궁 같은 장서관에 깊숙히 숨겨져 있었고, 이 책을 둘러싼 모종의 암투가 수도원 연쇄 살인 사건의 궁극적인 원인으로 밝혀진다는 얘기다. 이 얼마나 기발한 착상인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시학』은 완전한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이 망실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 증거로 『시학』1449b 21을 보면 희극에 관해서는 다음에 논하기로 하자는 말이 나오는데 그 후로는 희극에 관한 아무런 언급도 없으며, 『정치학』 1341b 38을 보면 '카타르시스'에 관한 자세한 설명에 관해서는 『시학』을 참조하라는 말이 나오는데, 『시학』에는 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 천병희 옮김, 『시학』, <옮긴이 서문> 중에서

 

 

이 소설의 첫 문장은 더할 나위 없이 간결하다.

 

당연히, 이것은 수기(手記)이다.

 

장장 900쪽에 가까운 방대한 분량의 추리 소설이 이렇게 단촐한 문장으로 시작해도 좋을까 싶을 정도다. 그런데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면 독자들의 예상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이것이 수기(手記)인 이유 자체가 미궁을 헤메는 것처럼 몹시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작가는 중세의 어느 수도원에서 벌어진 믿기 힘든 이야기가 결코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님을 '교묘한 장치'를 통해 장황하게 설명한다.

 

1968년 8월 16일, 작가는 우연히 한 권의 책을 손에 넣었는데, 그 책의 저자는 당연히(!) 실존인물이었던 발레(1754∼1824)라는 프랑스의 수도원장이 펴낸 책이었다. 출판사는 1842년 파리의 라 수르스 수도원 출판부였다. 책의 제목은 『마비용 수도사의 편집본을 바탕으로 불역한 멜크 수도원 출신의 (베네딕트 수도사) 아드송의 수기』였다. 이 책 이름에 등장하는 마비용 수도사 역시 실존 인물이고 멜크 수도원 역시 지금까지도 현존하는 오스트리아의 수도원이다. 더군다나 이 수도원은 900년 넘는 긴 세월 동안 '실제로' 로마 가톨릭의 본거지였으며, 때로는 종교개혁에 대항하는 요새이기도 했다.

 

멜크 수도원(출처:위키백과)

(멜크 수도원은 1089년 최초로 베네딕트 수도회의 수도원으로 건축되어 1297년 대화재로 완전히 불타버렸다고 한다. 에코가 이 수도원을 소설의 배경 가운데 일부로 삼은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닌 셈이다.)

 

그 책에는 18세기의 석학 마비용(1632∼1707)이 멜크 수도원에서 발견한 14세기의 수기를 충실하게 복원한 것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작가는 멜크의 수도사 아드소의 이야기를 순식간에 독파한 뒤 단숨에 대학 노트에다가 이 책을 번역한다. 그러는 동안에 자신이 탄 배는 다뉴브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 멜크에 닿는다. 작가는 멜크 수도원의 도서관을 샅샅이 뒤져 아드소 수기의 사본을 찾지만 결국 실패한다. 그러다가 그만 그 중요한 책을 잃고 만다. 연인과 함께 이동중이던 작가가 몬트제 호반에서 짧게 1박할 때 그들의 관계가 끝장 났는데, 뒤늦게 알고 보니 그 비극적인 밤에 연인과 헤어질 때 그 소중한 책마저 상대방의 짐에 휩쓸려 사라지고 만 것이다.

 

작가는 그 책의 존재를 찾아내기 위해 파리의 생트 주느비에브 도서관을 뒤지는가 하면 유명한 중세학자와도 상의해 보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다. 라 수르스 수도원으로 달려가도 그런 책을 낸 적이 없다는 대답만 듣는다. 그래서 작가는 이런 생각마저 품는다. 어쩌면 그 책이 위조된 유령 도서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던 중에 작가는 197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코리엔테스 거리에서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된다. 어느 작은 고서점의 서가를 뒤지다가 우연히 밀로 테메스바르라는 사람이 쓴 카스틸리아어판 소책자 『장기 놀이에서의 거울 이용법』을 찾아낸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 책에 아드소의 수기로부터 인용된 대목이 상당수 있는데다가, 그 내용 또한 발레 수도사가 불역한 수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해서 까마득한 옛날 '프랑스 접경에 있는 아페니노 산맥 중앙부 기슭쯤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수도원에서 일어난 '7일 동안의 기록'인 아드소의 수기가 전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움베르토 에코가 책에 대한 사실과 허구를 절묘하게 뒤섞어 '아드소의 수기'에 대한 실재성을 강조하는 수법은 곧바로 아르헨티나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떠올리게 만든다. 물론 이처럼 귀가 솔깃해지는 이야기 전달 방식은 일찌감치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 속에서 능청스러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내보인 솜씨이기도 하다.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의 이야기는 결코 자신이 지어낸 황당한 이야기가 아니라 원래 아랍 사람인 시데 아메테 베넹헬리가 쓴 책이며, 자신은 어느 날 톨레도의 알카나 시장에 나갔다가 어느 소년이 팔겠다고 하는 잡기장 한 권 속에서 그 이야기를 우연히 발견했다는 식이다.(☞ 다시 읽는 돈키호테)

 

움베르토 에코는 '아드소의 수기'를 소개하는 방식에서만 보르헤스에게 빚진 게 아니었다. 그는 거기서 한걸음 더 나갔다. 보르헤스의 이미지를 그대로 본 딴 늙은 수도사를 소설 속에 직접 등장시킨 것이다. 『장미의 이름』을 단 한 번이라도 읽은 사람들이라면 그 누구라도 결코 그 이름을 잊을 수 없는 '책에 미친' 늙은 수도사의 이름은 부르고스의 호르헤였다! 그는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두 번째로 나이 많은 수도사인데, 젊어서 한 때 수도원 장서관의 사서를 맡았지만 너무 일찍 '암흑의 세계'로 들어가고 만다. 그러나 그는 눈이 멀었어도 머리 속에 담긴 기억만으로 장서관에 보관된 수많은 책들을 속속들이 꿰고 있다. 그렇지만 그 눈 먼 수도사에 대한 얘기는 이쯤에서 멈추는 게 마땅하다. 『장미의 이름』은 지적 호기심을 만낄할 수 있는 드물게 뛰어난 추리 소설인데, 호르헤의 비밀을 이런 글에서 너무 자세히 드러내는 것은 미지의 독자들에게 결코 유익할 리 없기 때문이다.

 

비록 7일 동안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 벌어진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뜻밖에도 이 소설은 엄청나게 길다. 그래서 독자들은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전에 작가가 미리 세심하게 마련해 놓은 여러 장치들을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프롤로그이다. 거기엔 '늙고 병든 몸으로 멜크 수도원의 독방에 갇힌' 아드소가 젊어서 수련사로 지낼 때 경험했던 '7일간의 기록'을 어떤 심정을 담아 썼는가가 절절히 베어 있다.

 

가련한 죄인의 삶이 이윽고 막바지에 이르고 보니 이제 내 머리는 백발…… . 바야흐로 바닥 모를 심연, 고요와 적막의 신성(神性)이 가득한 그 심연을 헤맬 날을 기다리는 한편 천사의 은혜인 지성의 광명에 의지하고 세상과 더불어 나이를 먹는다. 늙고 병든 육신을 여기 안온한 멜크 수도원의 욕망에 가둔 나는 지금 소싯적에 우연히 체험하게 된 저 놀랍고도 엄청난 사건의 기록을 이 양피지에다 남겨 놓을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나는 보고 들은 바를 한 순간 산 순간, 한마디 한마디를 그대로 옮기되 굳이 어떤 구상의 형식을 세우지 않으려 한다. 뒤에 오는 이들(가짜 그리스도가 먼저 오지 않는다면)에게 표적을 표적으로만 남기는 뜻은 글을 아는 교우로하여금 이를 음미하게 하기 위함이다.

 

원컨데 주님께서, 이름이야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않는 편이 온당하고 크신 뜻에 합당할 터인 저 대수도원 일을 투명하게 그려 낼 권능을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할 뿐이다.

 

때는 주후(主後) 1327년 말, 루트비히 황제가 전능하신 분의 뜻에 따라, 아비뇽에 진치고 앉아 사악한 왕위 찬탈과 성직 매매를 일삼으며 사도를 욕되게 한 저 사교(邪敎)의 우두머리를 척결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이탈리아로 온 해이다(죄 많은 사교의 우두머리가 누구던가? 믿음이 없는 자들이 교황 요한 22세라고 부른 카오르의 자크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작품을 읽는 동안에 수많은 다른 책들을 마주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책들이 거의 대부분 까마득한 옛날에 쓰여진 너무 희귀한 책들이어서 일반 독자들에게는 그다지 독서욕을 자극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대 배경이 14세기 초이니 당연할 수밖에 없다. 그 대신에, 정말 뜻밖에도(!) 이 책을 읽는 동안에 이미 읽은 책들 가운데 '다시 한번' 펼쳐 읽고 싶은 책들을 재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런 책들은 주로 희극과 웃음과 책과 도서관과 수도원에 얽힌 이야기를 담은 책들이다. 그 가운데 첫 번째로 꼽을 만한 책은 당연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다. 그 다음으로는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작품들』이다. 도대체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눈 먼 수도사인 호르헤는 왜 그토록 '웃음'을 죄악시했던가를 그 책을 통해서나마 다시 한번 음미해 보고 싶기 때문이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플라톤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그의 임종의 베개 밑에서 발견한 것은 《성서》도, 이집트의 책도, 피타고라스의 책도, 플라톤의 책도 아닌, ㅡ 아리스토파네스의 책이다. 플라톤 또한 삶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겠는가, ㅡ 아리스토파네스가 없었다면 말이다!" 웃음을 사랑한 니체의 보다 결정적인 말은 이랬다. "신들도 위버멘쉬적이고 새로운 방식으로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 그들은 신성한 행위를 할 때조차 웃음을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다음으로 떠오른 책은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이 쓴 『웃음』이라는 책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어느 누구도 그 본질을 제대로 건드려보지 못했다던 '웃음의 비밀'을 그 철학자가 무려 2,000여 년 만에 다시금 들춰봤으니 말이다. 그 책에서 베르그송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웃음 연구'를 어떻게 다뤘는지를 다시금 찾아 읽어보고 싶다.(베르그송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전공한 철학자다.) 그 다음으로는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이다. 미궁처럼 끝없이 펼쳐진 바벨의 도서관 이미지야말로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수도원의 장서관 모습을 가장 닮았을 테니. 마지막으로 꼽고 싶은 책은 뜻밖에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였다. 이 책을 꼽은 이유가 그저 『장미의 이름』을 번역한 인물과 같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소설 속의 주인공인 조르바도 젊어서 한 때 그리스의 아토스 산자락에 위치한 수도원에 머문 적이 있었고, 케이블 고가 선로 계약서에 서명을 받으러 찾아간 수도원에서는 마치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것처럼 '기묘한 살인 사건'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그려낸 수도원 살인사건이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속 '살인 사건'과 얼마나 닮았을지 괜스레 궁금해진다.(☞ 아토스에 대하여...)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이 책의 두께 때문에라도 끝까지 읽지 못한 독자들을 앞으로도 오랫동안 괴롭힐(?) 가능성이 다분하다. 왜냐하면 이 책이 앞으로도 끊임없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에 전해진 놀라운 소식 하나도 그런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덴마크의 어느 대학 지하실에 보관된 수백년 전 고서 가운데 희귀서적 3권에 맹독이 묻어 있었다는 뉴스였다. 중세시대 양피지에 적힌 라틴어 글자 판독을 위해 분석한 결과 고농도의 비소 성분이 거기서 검출됐다는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가 몇 년만 더 살았더라면 이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뻐했을까. 아니다, 어쩌면 움베르토 에코는 이 정도의 뉴스로는 크게 동요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그로서는 아무래도 궁극의 빅뉴스를 기다릴 테니. 아리스토텔레스가 '다음에 논하기로 하자'고 약속했던 시학 제2권이 정말로 유럽의 어느 수도원의 장서관에서 발견되는 대사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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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9-03-12 15: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고전을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읽은 중에서는 가장 지루하지 않고 흥미있게 읽었던 것이 <장미의 이름>이 아닐까 해요. 물론 앞부분은 읽으면서 어디까지가 사실 기록이고 어느 것이 소설로서의 내용인지 혼동되어서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 읽어야했지만 그러면서까지 읽기를 포기하고 싶지 않게 한 매력이 있던 작품이었어요.
덴마크 고서의 맹독 소식은 오싹하네요. 그리고 곧 드는 생각은 그 희귀서적 세권안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요! ^^

oren 2019-03-12 16:37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책을 오래 전에 사 놓고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답니다. 언젠가 읽을 기회가 오겠지, 하고 때를 기다렸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며칠 전에 우연히 다른 분의 서재에서 <소설의 도입부, 최고의 첫 문장 Best 10>이라는 글을 봤어요(☞ http://blog.aladin.co.kr/caspi/10693048) 그 열 권의 책 가운데 제가 여태껏 안 읽은 책이 딱 두 권 있었는데, 그 중의 한 권이 바로 <장미의 이름>이었지요. 그래서, 올커니, 이제야 마침내 읽을 때가 찾아왔군, 하고 마음 먹은 후로 틈을 엿보기 시작했더랬지요. 사실, 이 책이 너무 유명한 데다가, 나름대로 기대가 컸던 탓인지 엄청 재미있지는 않더라구요.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엉뚱하게도 찰스 디킨스의 <황폐한 집>을 자주 떠올렸는데, 똑같은 추리소설의 형식을 빌린 그 소설이 저는 훨씬 재미있더라구요. 클라이막스 부분에서는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에 땀이 날 정도였으니까요.(그 책도 몹시 방대하고 복잡한 데다가, 소설의 초반과 중반과 후반에 나오는 인물들이 후반부로 갈수록 안개가 걷히듯이 마침내 하나 하나 촘촘히 연결되어 드러날 때의 희열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감동적이더군요.) 그에 비하면 <장미의 이름>은 ‘결말 부분이 너무 많이 노출된 탓인지‘ 뻔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추리소설의 결말을 미리 안다는 게 얼마나 치명적인 약점인지를 그 때 절절히 느끼겠더군요.

그리고, 이 소설의 도입 부분에 사용된 트릭은 보르헤스의 소설들, 가령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나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등에서 이미 봐왔던 터라 ‘작가가 일부러 이러는구나‘ 하고 재빨리 눈치를 챘었지요. 미처 보르헤스의 소설들을 읽지 않은 상태로 이 책을 먼저 붙잡았더라면 저도 엄청 헤맬 뻔 했지요. 그런데, 일반 독자들이 의외로 이런 데서 많이 당하면서(?) 중도에 너무 일찍 책 읽기를 포기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긴 하더군요. 그게 다 작가가 일부러 독자들과 함께 잠시 장난을 즐기자고 하는 수법인데 말이죠. 실컷 뺑뺑이를 돌리고 나서, 나 잡아 봐라~, 어디 있게? 하는 거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