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까지 가는 촉각
돌은 던져져야 하지만, 인간은 시선에 복종한다. 그러나 둘 다 충분한 원인에 의해, 따라서 동일한 필연성과 함께 움직인다.(71쪽)
단순한 감각이란 참으로 얼마나 빈약한 것인가! 가장 고귀한 감각기관에서조차 감각은 국지적이고 특수한 것으로서, 그 자신의 방식으로 약간 변화할 수 있지만 그 자체로는 언제나 주관적인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느낌은 객관적인 어떤 것도, 따라서 직관과 유사한 어떤 것도 함축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종류의 감각은 유기체 자체 안에서의 사건이며, 그것으로 머무르기 때문이다.(76쪽)
시각은 접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실상 시각은 어떤 접근도 요구하지 않는다. 시각의 영역은 측정할 수 없으며, 별에까지 이른다. 또한 시각은 빛, 그림자, 색, 투명함의 가장 세밀한 차이를 감각하므로 세밀히 규정된 많은 자료를 오성에게 제공한다. 이 자료로부터 오성은 획득된 숙련성에 따라 물체의 형태, 크기, 거리, 성질을 구성하고 그것을 즉시 직관적으로 표현한다. 반면에 촉각은 비록 접촉에 속박되어 있지만, 확실하고 다양한 자료를 제공하므로 가장 근본적인 감관이다. 시각의 지각들은 결국 촉각에 관련된다. 사실상 보는 것은 불완전하지만 멀리까지 가는 촉각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여기서는 광선이 긴 촉각막대로 사용되는 것이다. 바로 그래서 시각은 많은 착각에 노출되어 있다.(79쪽)
- 쇼펜하우어,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 <제21절 인과개념의 선천성> 中에서
눈의 탐욕
호기심이라는 용어는 그 특징상 보는 것에 제한되어 있지 않고 세계를 독특하게 감지하며 만나게 하는 경향을 표현한다. 우리는 이 현상을 원칙적으로 실존론적-존재론적인 의도를 가지고 해석하지, 좁게 인식함에 방향을 잡지 않는다. 인식이 이미 일찍부터 그리스 철학에서 "보려는 욕망"에서부터 개념파악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존재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글들을 모은 논문집의 첫번째 논문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 모든 인간은 본성상 보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의 존재에는 본질적으로 보는 것에 대한 염려가 있다.(234쪽)
"봄"의 기이한 우위를 누구보다도 아우구스티누스가 욕망에 대한 해석과 관련하여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본디 눈에 딸린 것이 보는 것인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다른 감관으로 무엇을 알려고 할 때에도 "보다"라는 낱말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 '들으라, 얼마나 번쩍이는지', '맡으라, 얼마나 빛나는지', '입을 대라, 얼마나 찬란한지', '만져라, 얼마나 눈부신지.' 그러지 않고 이 모든 것을 보라고 말하고 이 모든 것이 보인다고 말한다. 따라서 눈만이 감각할 수 있는 것을 '보라, 얼마나 빛나는지' 할 뿐 아니라, '소리를 들어보라', '냄새를 맡아보라', '맛을 보라', '얼마나 단단한지 만져보라' 하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일체의 감각적 경험을 '눈의 탐욕'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나머지 감관들도, 비슷한 점에서 인식함이 문제가 될 때면 눈이 윗자리를 차지하는 봄의 기능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235쪽)
-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제36절 호기심>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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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hooting Date/Time 2012-09-28 오후 6:36:26
f 9.0 / 0.6"sec / 59.0 mm / iso 200 / Canon EOS 5D Mark II / Lens EF24-70mm f/2.8L USM
2. Shooting Date/Time 2012-09-28 오후 6:43:52
3. Shooting Date/Time 2012-09-28 오후 6:5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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